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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김현을 떠올리며
-30주기 김현문학제를 위하여
“모든 질문은 나에게로 온다.”
시대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결국 소진하는 것은 삶이고 근원에 대한 질문은 새로운 잎을 돋는다. 바다를 떠난 사람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다시 김현을 생각한다
10월 31일 오후 2시. 목포문학관에서 김현문학제가 열렸다. 문학과 지성은 일치하면서 레일로드다. 철로가 어그러질 때 세상은 다른 길을 보여준다. 기적소리보다 선명한 시대의 경적소리가 뻘밭을 기어간다. 때로는 바람이다. 꺾어진 갈대의 허리신음이다. 그는 쓰러졌지만 늘 침향처럼 다시 다가온다. ‘나에게로 돌아오는 질문’을 담고.
그에 대해 어느 시인이 ‘바다로 간 거북이’라고 추모했다. 고향의 바다는 매립되었고 바람은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수렁도 메기의 위엄도 사라졌다. 지난 6월 “내 칼로 나를 치리라” 박해현은 김현 평론가의 30주기를 맞아 이렇게 한 마디로 압축하였다. 칼과 창은 네안데르탈들의 동굴 속으로 묻혔다. 지금은 아무나 촌철의 화살을 마구 쏘아댄다. 화려한 조명의 스튜디오에서 광장에서, 더 이상 나부끼지 않는 일간지에서 종교의 메시지로 독을 화장한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삶의 복원력이 중요해졌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일상이 통째로 휘청거리는 충격이 발생했지만, 그래도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는 폴 발레리의 시구처럼 사람은 다시 일어서야 한다.”라며 우리들의 모든 삶이 긴급조치로 소급되던 시대, 70년대를 풍미했던 정현종 시인의 시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생각난다고 다시 상기시켰다.
문학 평론가 김현(1942~1990)은 당대의 준엄한 풍류였다. ‘모던한 시대’는 이미 예감되었지만 더 깊은 성찰과 알을 깨는 아픔을 받아들일 공력이 불일(不一)하였다. 그의 세심한 통찰을 받지 못한 작가들은 인연을 원망하였다고 임동확 시인은 어느 해 김현문학축전에서 ㅂ락힌 적이 있었다. 그의 10주기를 기념한느 심포지엄이 원주 토지문학관에서 열린 것은 또 다른 인연이 깔려 있다. 목포 출신 시인 김지하의 부친이 원주와 인연이 있었다. 박경리 선생은 그 다음 이었다.
나는 그의 삶을 따라가며 답설하고자는 뜻은 없다. 나는 아직도 작은 숲에서 길을 헤매이고 있으나 김현은 금현(琴絃)을 타고 서방정토로 가는 바다의 낙조에 믈들어 흐르고 있을 것이다.
‘거북이’ 배때기를 닮은 김현은 특히 정현종의 시를 놓고 이렇게 풀이했다. "둥근 공, 원은 쓰러지는 법이 없으며 항상 가볍게 떠올라 곧 움직일, 곧 놀 준비가 되어 있다. 원은 놀이의 표상이다. 그 원의 놀이를 시인은 꿈꾼다. 아니, 차라리 그것이 시다.“라고 턱월한 해법과 통찰을 내보였다. 쓰임새는 비움에서 온다는 2천오백년 전 노자의 철학관이 언뜻 스쳐간다. 되돌이표 부드러움과 원형이다.
김현의 비평은 다스림이다. 흙을 터는 일이다. 애써 작품을 제 잣대로 심판하거나, 처참하게 해부하지 않았다. 시인이 사물과 교감하는 놀이판에 비평가가 합류하는 '공감의 비평'을 실천했다. 그의 다독은 이미 정평이 났다.
진도에는 향토문화회관 앞 다리에 여러 진도출신 예인들과 함께 김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문학인으로서는 유일하다. 그의 본명은 김광남이다. 진도초등학교 학적부에 실려 있다. 부친은 진도읍 남동리에서 구세약방을 했다고 현지 지역 인사들은 증언한다.
김현은 1990년 6월 27일 48세에 병환으로 작고했다. 거북이처럼 장수하지는 못했다. 서울대 불문과 교수를 지낸 그는 “외국 문학을 수용하고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 문학에 창의적으로 접목시킨 비평가였다. 문학가에서는 프랑스 현대문학 이론이 '김현'이라는 통관 절차를 거쳐 한국에 진출했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그가 쓴 '프랑스 비평사'는 불문학도뿐 아니라 모든 평론가 지망생들의 필독서였다(박해현)”고 추모했다.
김현은 "시를 쓰기엔 언어를 다루는 능력이 부족하고, 소설을 쓰기엔 현실과 싸울 힘이 없다"고 스스로 낮추면서 평론가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의 비평은 시에 버금가는 말의 울림을 남겼고, 소설 못지않게 현실의 숨은 구조를 들추어냈다.
문단에서는 지금도 뛰어난 비평가들이 몇몇 있지만, 솔직히 김현을 완벽하게 대체할 만한 인물은 없다고 한다. 김현은 글만 잘 쓴 게 아니라 한국 문학사에서 새로운 우리말 문체를 개척한 창조인이었다. 그는 골방에 갇혀 글만 쓴 게 아니라, 동시대 글쟁이들과 숱하게 어울려 술판을 벌이면서 토론을 서슴지 않았고, 젊은 후배들을 뜨겁게 격려한 '인생의 등대'였다. 박해현은 다시 강조한다. “김현보다 더 뛰어난 비평가는 나올 수 있지만,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일상화된 시대 이후 김현처럼 살가운 비평가는 여간해서는 나오기 힘들 것이다.”고 했다.
2020년 10월 31일 목포에 정과리씨가 김현축전에 참여한다.
"김현 선생은 49세에 돌아가셨어요. 저는 나이 50세에 이르러 문학을 바라보는 눈이 이제 섰구나 하는데 선생은 그때 이미 많은 걸 알고 계셨습니다. 되풀이해 이 책을 읽다보면 선생은 참 돌아가셔서도 절 가르치시는구나 싶어져요."(정과리) 정과리씨는 김현이 1970년 창간했지만 신군부가 폐간시킨 `문학과 지성`을 1988년 `문학과 사회`로 복간시킨 편집위원 6인 중 하나도 그였다.
가장 은총을 받은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의 시인 황지우(해남 출신)는 목포문학관 앞 김현 흉상에 ‘바다로 간 거북’이라는 시를 새겼다. 안타깝게도 진도에는 그를 기리는 추모시가 없다. 자운 곽의진 작가도 그렇게 노을 깊이 떠났다.
올해로 김현 30주기를 맞아 그의 삶과 문학이 재조명되고 있다. 계간 '문학과 사회' 여름호는 김현 특집을 꾸몄고, 7월 4일 연세대에서 김현 30주기 학술대회가 열렸다. 아직까지 진도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유일한 진도의 문학단체인 진도문인협회(지부장 오판주)에서 보다 적극적인 지역기념행사를 추진해주길 바랄 뿐이다. 김현이 스스로에게 날을 벼린 그 칼이 오늘 우리시대의 머뭇거리는, 상상력의 촛불을 꺼버린 문인들의 목을 겨눌 수도 있음을 깊이 자성할 필요가 있다. 모든 예술은 치열한 놀이다. 상처가 오히려 안온해지는 영역이 곧 문학의 세계이다.
그는 생전에 70년대 아파트시대 평면 구조에 빗대 사람들이 저마다 삶의 입체감과 두께를 잃고 얇아진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아파트에 살면서 아파트를 비난하는 체하는 자기모순. 나에게 칼이 있다면 그것으로 너를 치리라. 바로 나를!"이라고 서슴없이 자기비판을 했다. 지식인의 허위의식과 후안무치가 판치는 세태를 맞아 위선에 저항하고 자기 망상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쓴 김현 선생을 다시 생각한다.
여수웅은 “전라도 출신 시인 소설가가 왜 그리 많으냐고 묻자 '자연이 좋지'라고 답했고, '에이, 자연이라면 제 고향 강원도가 더 좋은데요'라고 반박하자, 김현은 다시 '거긴 너무 맑지'라고 답했다 한다. 이어 고향은 자연의 서정이 넘치는 곳이지만, 전라도에 비해 '세계의 서사와의 균형은 부족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사랑을 통해 타인과 하나가 되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소중한 경험인지를 간결하게 알려주는 일화다.
목포작가회의(회장 유종)는 한국작가협회와 함께 목포문학관에서 김현 선생을 기리는 30주기 행사를 31일 오후 2시에 갖는다. 진도에는 그의 생가 표지도 진도초등학교 교정에도 그 아버지가 운영했던 구세약방의 흔적도 전혀 없다. 진도군청은 아파트처럼 군림하지만 속은 평면의 욕망(세속적 갈증)에 불과하다. 고답적인 옛 그림타령만 트롯으로 제껴 부르고 있다.
진도에도 분명 문인들이 있다. 올 해는 많은 회원들이 등단하였다. 단체도 있다. 한 시인은 군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군수도 김현 평론가와 같은 서울대 동문이다. 문학은 그 자체가 그 시대의 그 고장의 역사를 담고 있다. 김현은 ‘책읽기의 행복함’을 유작으로 남겼으며 진도에서 소설 ‘칼의 노래’를 구상했던 소설가 김훈은 글쓰기가 밥벌이가 되는 그 괴로움을 수시로 토로하였다. 그걸로 동인문학상을 받았다는 것은 약간 아이러니다.
김현의 유년시절 기억은 갯벌이다. 그러나 그것은 늘 잿빛이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함께 유학했던 진도 출신 조우현(전 조선대 교수)씨는 생전에 김현선생을 만나 “너 진도에서 태어난 것을 기억해”라고 알려주었다고 했다. 조 교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읍 북상리 박명수씨이다. 진도중학교 시절 ‘벗이여 안녕’이라는 글로 당시 조우현 선생에게 뽑혀 문학도가 될 뻔 했다는 후일담을 내보인 적이 있다.
3년 전 쯤에 진도에서 목포작가회의, 서울 ‘문학과 지성사’. 작가회의 등 ‘김현을 찾아서’ 순례단을 맞이하여 행사를 주관하였던 기억이 난다. 박병훈 선생 등과 아리랑을 부르고 퍼포먼스도 펼쳤다. 그러나 진도군 측에서는 아무도 찾지 않았다. 김현은 그렇게 진도를 떠났다. 지금도 조금씩 그렇게 멀어져가고 있다. 인구 감소는 통계연보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역사와 언어와 문화를 잃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했다. 사람과 역사의 물줄기를 잃은 진도는 지금 어디로 흐르는 것일까? 아직도 삼송도와 운림산방 배롱나무 붉은 흔들림일 뿐일까?
“왜 내 작품을 평해주지도 않고 그렇게 빨리 가버렸나”면서 원망과 아쉬움을 내 보인, 한 때 조급하지 않았던 걸출한 후배 문학인들이 지금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거대한 담론, 문학과 사회평론이 사라지고 망나니 칼잽이들이 정치판을 흔들어대는 요지경을 그가 보았다면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다가서면 늪이 되는 언어들이 있다. 그 못견딜 가벼움은 새들과 함께 세상을 뜨기도 한다. 시를 쓰는 것은 독을 가는 일이다. 치유의 길을 찾으면서 제 뼈를 찧는다. 나날들은 깃털이 되지 않고 가을 잎새가 되어 자꾸만 떠나갈 뿐이다.
단원의 그림을 유심히 읽어본다.저 천연하고 치밀한 구도를 가슴에 담는다. 씨름하는 장정들의 모습을 깃끈도 시원하니 풀어놓고 구경하거나 소나무 아래 맹호의 치솟은 꼬리힘을 닮고자 홀로 용을 써보기도 한다. 비파와 서적들 가운데에 여유롭게 붓을 던지고 생황을 부는 낙낙한 선비의 모습도 닮고싶다.(박남인)
*1942년 전남 진도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 되던 해에 부모님을 따라 목포로 이주, 목포 북교국민학교와 목포중학교, 그리고 서울 경복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문리대 및 동 대학원 불문과를 졸업했으며,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 유학했으며 작고하기까지 서울대 인문대 불문과 교수로 재직했다.
1962년 『자유문학自由文學』 3월호에 「나르시스 시론詩論」을 필명 ‘김현’으로 발표하며 공식적인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김승옥, 김치수, 최하림과 함께 소설 동인지 『산문시대』를, 1966년에 황동규, 박이도, 김화영, 김주연, 정현종과 더불어 시 전문지 『사계』를 창간했다. 이 두 잡지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1968년에 창간된 『68문학』은 고스란히 1970년 가을에 창간호를 낸 계간 『문학과지성』의 원형을 이룬다.
그는 불물학자로서 『프랑스 비평사』 2권과 『현대 프랑스 문학을 찾아서』 『바슐라르 연구硏究』 등 많은 연구서와 번역서를 펴냈으며, 문학평론가로서 『상상력과 인간』 『사회와 윤리』 『한국 문학의 위상』 『문학과 유토피아』 『말들의 풍경』 및 『한국문학사』의 비평집과 연구서를 상자했다. 『분석과 해석』으로 제1회 팔봉비평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행복한 책읽기』의 원고를 유고로 남긴 채 1990년 6월 27일 48세로 작고했다.
그의 사후 3년 뒤인 1993년에 『김현 문학전집』(문학과지성사, 전16권)이 간행되어 김현 문학의 거대한 덩어리에 접근하는 가장 충실한 자료가 갖춰졌다. 이어 2000년 4월에 원주 〈토지문학관〉에서 그의 10주기 기념 문학 심포지엄(‘4.19 이후의 한국 문학 비평’)이, 2010년 6월에 서울 동교동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20주기 기념 문학 심포지엄(‘말들의 풍경’과 비평의 심연)이 각각 개최되었다.
2011년에 그의 정신적 뿌리에 해당하는 목포에 문학관(김현관)이 개원했고, 2015년 9월에는 서울 동숭동 〈예술가의 집〉에서 그의 25주기를 기념한 심포지엄(‘김현 비평의 역동성’) 개최와 더불어 문학상 ‘김현문학패’가 제정․시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