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는 일 년에 서너 번씩 껍질을 벗고 말랑말랑해진다고 합니다. 과분한 소식을 듣고 처음엔 기뻤지만 곧 책이 되어 서점에 나앉을 것을 생각하니 탈피한 게처럼 무방비 상태가 된 것 같아요. 그러나 고통과 떨림 속에서도 껍질을 벗을 줄 아는 것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강한 존재라고 믿습니다.”
(전경린의 평범한 물방울 무늬 원피스 속에는 무엇이 숨어 있을까) ------------------------by 고두현
전경린만큼 행복한 작가도 드물다.
그는 마음이 약하다. 그래서 더 행복하다. 전경린이 약하다고?
그는 맵짜고 강렬하다. 한번 본 사람은 쉽게 그 눈빛을 잊지 못한다. 그런데 사실 그의 표정은 차갑기도 하고 또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다정하기도 하다. 도무지 끝간 데를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정말이지 그는 몇 가지 불가사의한 기운을 갖고 있다.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무늬를 동시에 지닌 나비 같기도 하다. 그 점이 전경린을 진짜 행복하게 하는 요소일지도 모른다.
햇살 맑은 날 그에게서 들꽃 냄새가 난다고 폴폴거리며 누군가 말할 때, 그는 들풀을 한 묶음 껴안고 나무 울타리 옆에 쪼그리고 앉아 반지꽃으로 손가락 크기를 잰다. 마루 끝에서 한가로이 머리를 말리며 멀리 군청 테니스장의 정구공 튀는 소리를 듣던 소녀. 뒷마당 굴뚝 곁에서 혼자 ‘숨어 있기 좋은 방’을 꿈꾸던 시절들.
서른일곱번째 가을을 맞는 지금도 감나무 잎이 물드는 것만 봐도 가슴 메는 그는 참 행복하다. 열일곱 살 이후 십이 년 동안 간직했던 원피스를 어느 날 조밭 허수아비가 입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쑥스럽게 웃는 모습이라니.
그 ‘평범한 물방울 무늬 원피스’ 속에는 무엇이 숨어 있을까.
그를 만나는 목요일. 일 주일 중에 하루라도 ‘마음 가는 대로’ 살고 싶은 날. 그의 첫 작품집 『염소를 모는 여자』를 다시 뒤적이다 하마터면 우리집 베란다에 새끼 염소를 들이자고 말할 뻔한 그날도 목요일이었지. 그래 오늘은 염소를 만나러 들로 나가자.
벌써 여섯시가 넘었군. 약속시간은 일곱시 삼십분. 서둘러 출발하지 않으면 일산 가는 ‘자유로’가 ‘억지로’로 변할 수도 있다. 역시 들판으로 가는 길은 푸르고 탁 트여야 제격. 당인리 발전소를 지나자 거짓말처럼 자유로운 길이 펼쳐졌다. 너무 빨리 왔나. 일곱시 반까지는 아직도 십오 분이나 남았다.
전경린의 집을 보고 싶었다. 지난 여름 일산에 들렀다가 ‘방’이 아닌 ‘호수 가는 길’로 방향을 잡는 바람에 너무 많은 사람들과 맞닥뜨렸던 일이 생각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오붓하게 보자고 미리 침을 놓아두었던 터다.
그의 아파트는 일산 마두역 부근 강촌 한양 단지에 있다. 그러고 보니 이사한 지 열 달 만에 집들이를 가는구나. 오기 전에 열 가지나 선물 품목을 생각해놨는데 막상 그가 좋아할 만한 것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마침내 나는 어처구니없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인절미에 팥범벅이 섞인 떡을 사들고 오래 망설이다가 코르덴 상의 왼쪽 주머니에 넣었다. 떡이라…….
“한양 601동 입구 쪽으로 들어오세요.”
흠, 그러면 그렇지. 숨어 있기 좋은 방.
그런데 웬걸. 청바지에 카디건을 걸치고 앙증맞은 핸드백까지 든 채 염소는 이미 울타리 밖으로 나와 있었다. 어쩌자고…… 핼쓱한 염소. 남들은 추석 뒤끝이면 ‘한 끼 폭식’에 ‘평생 탄식’을 걱정하며 때깔도 좋더니만. 내가 모르는 사이 그는 몹시 앓아누웠던가. 내가 꼭 한번 구경하고 싶었던 그 방 안에서 혼자 고삐도 여미지 못하고 기진해 있었나보다.
“어디 아파요? 수척해졌네요.”
“그냥 앓았어요. 가끔 그래요. 한 끼밖에 못 먹었는데 어디 가서 저녁부터 먹어요.”
짧은 순간 나는 ‘집’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힘닿는 데까지 그를 위로하려고 애쓴다.
“웬 떡?”
그는 뜨악하게 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까르륵거렸다. 꽤 낯익은 표정이군. 낯설기도 하고.
인적이 드문 백마. 팥밤 인절미떡을 떠억하니 한 입씩 베어물고는 느긋하게 도착해서 소풍 자리 물색하듯 풀밭을 눈대중해보는데, 아뿔싸 이런 곳에 ‘리틀 시티’가 있다니. 맺고 끊는 게 분명하다 못해 야박하다 싶을 정도라고 오해받기도 하는 그가 뜻밖에 밥집을 고르는 사소한 일에는 되레 젬병이다. 하긴 그는 늘 여러 명의 전경린이었던 것 같았지. 어디까지가 진짜 전경린일까.
짧은 가을 긴 겨울. 제법 쌀쌀한 바람이 두 줄기 썰매 가닥처럼 그의 귀밑을 스쳐 지나간다. 차가운 밤공기가 염소에게 해로울까봐, 시간이 지나면서 근심이 깊어졌다. 빨리 신선하고 살진 풀을 먹어야 힘을 내지. 저녁을 먹는 동안 나는 구차한 질문을 일절 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야채 안주가 싱그럽군. 그가 백포도주 잔술을 천천히 마시며 창 밖을 나직하게 바라보는 모습을 간간이 마주 보면서 나는 우리들의 염소가 맛있는 풀 향기에 힘을 얻어 빨리 컨디션을 회복하기를 기다렸다. 나중에는 어떻게 하면 그의 마음이 더 편안해질까 궁리하는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최근 개봉된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나 모네의 그림 <풀밭 위의 식사>, 혹은 <음식남녀> 등 식사와 관련이 조금이라도 있는 말들을 하나씩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상대방이 배려해주고 싶도록 만드는 묘한 힘을 지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세상에. 질문은 염소가 먼저 시작했다.
“뭘 좋아해요?”
됐다, 이제. 말문이 열린 풀밭은 서러운 봄빛이 짙어오듯 빠른 속도로 푸르러졌다.
“아무 곳에도 없는 요리.”
말을 해놓고 보니 전경린, 아니 안애금이 비로소 보인다. 안애금은 그의 본명이다. 나는 그 이름이 참 좋았다. 비단 같기도 하고 가야금 같기도 하고 때론 아기 돌반지 같기도 한 그 ‘금’자의 어감이 괜찮은 데다 성씨 ‘안’이 두음으로 혀 밑동을 밀고 나오는 그 둥그스름한 느낌까지 어우러진 것이 여간 맛나지 않았다. 그런데 등단하면서 전경린으로 바뀌었다.
“왜 그랬죠?”
“음, 어떤 사람이 ‘린’자를 화두로 줬어요. 앞뒤로 멋있는 이름을 갖다 붙여봤는데 그중에서 ‘경’자가 간택이 됐고 우여곡절 끝에 ‘전’을 문패로 앉혀보니 꽤 마음에 들더라구요.”
“무슨 뜻인가요?”
“특별한 의미는 없어요. 뭐든지 다 설명하고 규정짓고 그런 게 싫어서…….”
그는 늘상 이런 식이다. 꿰맞추는 걸 싫어한다.
“모두들 그 소릴 하던데. 불꽃 같은 여자 전혜린. 닮았다는 소릴 제법 듣지 않으셨남요? 혹시 자매간이냐…… 등등.”
“아니에요, 전혀. 그땐 아무렇지 않았는데 그런 말을 자꾸 들으니까 괜히 나까지 헷갈리기만 하…….”
“사람들이 정념과 불꽃의 작가 전경린…… 하고 표현하니까 이미지가 유추되는 것도 그럴 만한 걸 거예요. 그죠?”
“이름하고 이미지하고…… 그래서 괜히 강한 인상을 주는 건가…….”
그는 딱 부러지는 말을 싫어하는가보다. 어쨌든 말문은 트였고, 커피잔 바닥이 보이자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졌다.
작은 개울을 가로질러 논밭 사이로 난 길을 걸었다. 별빛은 무늬만 예쁜 게 아니어서 밤인 줄도 모르고 손 차양을 만들게 한다. 위로받아야 마땅한 염소와 위로받지 못한 목동(?)이 천천히 걷는 모습은 기괴하다. 「염소를 모는 여자」의 주인공 윤미소와 검은 우산을 쓰고 다니는 미친 청년도 그림자가 되어 함께 걷는다.
전경린은 원피스를 잘 입지 않는다. 대부분 바지 차림이다.
그러나 ‘뭉크의 <사춘기>에 그려진, 발가벗기운 채 어딘가에 갇혀 두려워하는 듯한 인물처럼, 비정상적으로 길고 선병질적이었던 소녀기’에 대한 기억은 단편 「평범한 물방울 무늬 원피스에 관한 이야기」 속에서 오랫동안 그를 감싸고 있다.
그것은 그의 작품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일종의 암묵적 지배자이기도 하다. 그가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로 왔고 그의 것이 되어 급기야는 그를 가두고 있는 외피. 그는 여성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억압을 가장 충격적인 방식으로 깨뜨리고 당당하게 껍질 밖으로 걸어나오는 작가로 불리지만, 그런 그에게 원피스 속의 세계는 얼마나 연약하고 상처받기 쉬운가.
언젠가 그에게 들은 껍질 벗는 게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문학동네소설상을 받았을 때였지 아마.
“게는 일 년에 서너 번씩 껍질을 벗고 말랑말랑해진다고 합니다. 과분한 소식을 듣고 처음엔 기뻤지만 곧 책이 되어 서점에 나앉을 것을 생각하니 탈피한 게처럼 무방비 상태가 된 것 같아요. 그러나 고통과 떨림 속에서도 껍질을 벗을 줄 아는 것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강한 존재라고 믿습니다.”
이럴 땐 얼마나 똑부러지는 어법인가.
“원래 말을 그렇게 잘 해요?”
“아니, 그냥…… 나오는 대로 놔둬요. 글을 쓸 때도 풀리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집도 되고 새도 되고 그래요.”
참 타고난 재주다.
들길은 어둠 속에서 흰 옆구리를 드러낸 채 멀리 신축 아파트 단지 쪽으로 구부러져갔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나 나에게 이런 길은 오래 입은 옷처럼 편안하고 낯익은 것이다. 사 년 전 그가 창원에서 마산 부근 시골로 삶터를 옮겼을 때도 이같은 풍경은 저녁마다 볼 수 있었을 것이다.
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평범한 아줌마였다. 그랬을까.
등단하기 일 년 전, 훤히 트인 시골로 이사를 가니까 묶여 있던 이야기 보따리가 막 터져나왔단다. 남편이 출근하면 아이들을 돌보고 텃밭을 가꾸면서 소설을 썼다. 그해 여섯 편의 중단편을 완성했다. 어떤 때는 소설이 속에서 쏟아져나오고 쓸 시간은 없고 해서 소형 녹음기를 들고 녹음을 할 정도였으니까 어지간하기도 하다.
“장편을 쓰면서 녹음을 틀어보니까 아이는 계속 우는데 저는 아이를 어르며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더라구요.”
아줌마가 그렇게 써야만 했던 이유가 궁금하다.
“결혼하고 아이 낳아 키우다 보니 커다란 압박감이 들기 시작했어요.글을 써보겠다는 것은 오랜 갈망이었기 때문에 시골로 이사하자마자 덤벼들었지요. 소설을 쓰면 나의 존재가 어떤 것과 일치하게 되는 걸 느낄 수도 있고…… 그걸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려운데 「염소를 모는 여자」에서는 ‘내가 도달해야 할 숲’이라고 표현했어요.”
그런 그가 지난 겨울 일산 신도시로 ‘나 홀로 외출’을 감행했을 때 많은 이들이 놀라워하고 또 반가워했다. 열한 살 일곱 살 남매를 창원에 남겨두고 북상한 우리들의 염소. 아이들에겐 한 이 년쯤 있다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결연히 보따리를 쌌다. 결혼한 여성의 입장에서는 도발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작가의 삶과 상상력이 별개일 수 없잖아요.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움직이고 그런 변화 속에서 작품이 태어나는 거죠. 십여 년 넘도록 열심히 주부 노릇을 했지만 그 생활만으로는 상상력의 한계에 부닥쳤고 그래서 인생의 흐름을 한번 바꾸어보기로 했던 거예요.”
아이들을 앉혀놓고 학습지 과제도 함께 하고 옷도 손수 지어 입히고 온갖 요리책을 섭렵했던 주부. 그러나 그는 ‘출구 없는 공간에 갇혀 있다’는 황폐감을 달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결혼과 사랑은 오래 지켜가야 할 소중한 것이지만 쉽게 상처받기도 쉬운 잠자리 날개 같은 것.
“남편과 아내라는 존재 자체가 상대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틀지우는 구조에 억압이 있는 것 같아요. 좀더 다양한 모습의 결혼 관계를 인정하는 것이 오래 사랑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아닐는지요.”
우예됐든둥 그는 참으로 화려한 풀밭으로 진격했다. 지난 7월부터 동아일보에 석 달 반 정도 첫 신문 연재소설을 쓰면서 그는 푸르고 긴 초원의 향기를 마음껏 누렸다.
“벌써 열 달이나 됐네요.”
그는 멀리 와서 가까운 곳을 돌아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동안 아이들이 보고 싶거나 명절이 끼어 있거나, 남행으로 종종걸음치던 날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요즘은 거울 앞에 돌아와 서서, 그가 피운 꽃의 무게를 가늠해보는 일이 잦아졌다.
“다시 마산으로 갈 건가요?”
“…….”
어쩌면, 우리들의 염소는 따뜻한 남쪽 나라로 풀밭을 옮길지도 모른다.
“고향은 함안이죠?”
“예. 그곳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마산여고를 다녔어요.”
여고 3학년 때는 또래 여학생들처럼 마음의 열병을 크게 앓기도 했다는데 그쪽 얘기를 재치있게 물어보는 재주가 내겐 따로 없으니…… 경남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에는 마산 KBS에서 음악담당 객원 PD로 근무했으며, 방송 구성작가로도 활동했다. 결혼, 출산 등 보통 여자들처럼 평범하게 살다가 본격적으로 원고지를 싸들고 다닌 건 둘째를 낳고 난 93년부터였고.
미당을 키운 팔 할이 바람이었다면 전경린을 키운 팔 할은 무엇이었을까. 어린 시절의 풍경화는 한낮의 고요함과 숨어 있기 좋은 방의 무채색으로 칠해져 있다. 중학생이 되고 나서 그가 지독하게 반한 작가는 카프카였다.
“열세 살 봄이었어요.”
그해 봄, 머리를 자로 잰 듯 자른 어린 염소는 폐결핵을 앓고 있었다. 할머니와 세 명의 동생들과 같은 방을 쓰고 있었는데 할머니는 지독한 골초셨다. 그는 잠든 가족들이 깰까봐 고양이들이 나다니는 검은 담장 밑에 앉아 숨을 죽여가며 멈추지 않을 것 같은 기침을 했다. 가끔 부모님이 주무시는 방에 불이 켜졌다가 잠시 후 꺼지곤 했지만 그럴 땐 부모님이 마음을 쓸까봐 숨을 멎어버리기도 했다. 어느 때는 불 켜지지 않는 그 방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엄마를 부르며 엎어져 울고 싶었다.
그때 카프카의 『변신』 문고판이 우연히 손에 들어왔다. 그 봄날 저녁의 며칠, 차가운 부엌방 벽에 등을 기대고 카프카를 읽는 모습은 스냅사진을 찍어 앨범에 넣어둔 것처럼 너무나 뚜렷하다. 그는 며칠 동안 첫 페이지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카프카가 왜 그렇게 좋았나요?”
“문학이 무엇인지 알아채는 데는 카프카의 첫 페이지를 열고 놀라는 것만으로 충분했으니까요.”
열세 살에 그는 이미 한 지붕 밑에 잠드는 가족이란 것이 얼마나 머나먼 존재들의 섬인지, 그 사이에 얼마나 절망적인 단절이 걸쳐져 있는지 스스로 체득해버린 뒤였다. 어린 염소는 약봉지를 들고 다락방으로 올라갔고 그곳에서 혼자 자고, 식구들과 따로 밥을 먹었다.
“스무 살에 다시 읽었다고 했던가요?”
“거 왜, 카프카의 이름이 체코 말로 까마귀라는 뜻이잖아요.”
“몰랐는데…….”
나는 약간 부끄러워서 무식을 힘주어 확인시켰다. 그때도 그는 태생적인 것들로부터 완전히 고아가 되기 위해 고립무원의 성을 쌓고 있던 중이었단다. 바깥 세상은 ‘오염된 바다의 표피처럼 번들거리기만 했고 어디에도 바늘귀를 꿰지 못한 채 뜻없이 굶주리며 딱딱한 갑각의 껍질을 생산해내고’ 있었고.
그는 세월이 흐르면서 “베어먹힌 빵처럼 한쪽 가슴에 구멍이 난 엑스레이 필름의 충격이 희미해졌듯 카프카도 많이 부드러워졌다”고 읊조린다. 하지만 안심하고 걷던 봄 들판에서 느닷없이 까마귀가 날아오르는 것을 보게 되는 것처럼 카프카에 빚지고 있는 것 같은 창백한 생각도 든다고 했다.
“이상하게도 충족 속에서는 호흡곤란을 느끼고, 결핍 속에서만 후드득 물방울을 털며 깨어나고, 더구나 해결될 가망이 없는 광대하게 열린 결핍 속에서만 깊은 숨을 내쉴 수가 있어요.”
그는 ‘결핍’이란 말을 자주 하는 편이다. 소설에도 ‘결핍된 사람들을 좋아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결핍된 사람의 무엇이?
“결핍된 사람들은 어딘가에 도달하려고 하는 팽팽한 꿈을 가지고 있지요. 그들을 만나면 사람들의 맨얼굴이 정면으로 보여요. 그래서 신선해지고 감각이 깨어나게 되거든요.”
그의 작품에 나오는 그림과 음악의 쓰임새도 궁금했다. 이 방면에도 그는 엄청난 지식과 감성을 보물창고에 감춰두고 있는 모양이다. 장편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는 비틀즈의 노래 제목과 같고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도 중요한 매개로 등장하지 않던가.
“비틀즈의 을 빌려온 거죠. 한 시대의 포악한 어둠을 걷어내고 떳떳하게 이어준 그 푸르던 청년들은 지금 왜 아무 곳에도 없을까요? 서로의 몸을 묶어 터져버린 역사를 꿰는 질긴 실이 되었던 그들…….”
그림은?
“마그리트의 그림 <인간의 조건>은 이젤이 세워져 있는 창 안에서 창 밖을 본 풍경을 담고 있어요. 창 밖의 풍경과 이젤 속의 그림이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맞물려 이어져 있는데, 그걸 꿈과 현실의 일치라고 느꼈어요. 꿈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아주 다르게 살 수 있다는 것. 글을 써나가던 어떤 순간에 현실과 꿈이 완벽하게 일치해 있다는 것을 알았죠. 세상이 긍정적인 거대한 덩어리로 생각되기 시작했으며 간절하게 원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지요.”
그의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이 ‘불붙은 집에 갇힌 사나이처럼’ 뜨거운 이유는 그의 유년 시절과 관련이 있을까. 아니면 이른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과 맞물린 걸까.
‘운명의 끝에 놓인 것을 보고야 말겠다는 오기, 때론 불온한 독기가 되고 때론 귀기가 되기도 하는 강렬한 눈빛이 그들에겐 있다. 그래서 전경린의 매력은 심지어 마력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황도경)
어떤 이는 전경린을 ‘귀기의 작가’(황현산)라고 한마디로 표현했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귀기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평범한 물방울 무늬 원피스 속에 숨겨두었나. 어찌 보면 범생이(청소년들이 말하는 약간은 얄미운 모범생)처럼 다소 새침한 모습이기도 하고, 살짝 다듬어진 사투리의 억양이 다감스러운 여자. 그렇지만 그의 글은 목에 가시를 삼키듯 아프고 강렬하다. 어떤 때는 매몰차기도 하다.
“몸 안에 짐승같이 꿈틀거리는 무엇인가를 느낄 때가 있어요. 그래서 작품이 조금 기괴하게 비칠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꿈틀거림이 창작의 원동력인 셈이에요.”
첫 작품집 『염소를 모는 여자』는 이런 꿈틀거림 때문에 더욱 강한 인상을 준 것인지도 모른다. 두번째 창작집 『바닷가 마지막 집』을 읽을 때도 그랬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 사랑이, 그 순간순간의 섬광으로, 다가오는 미래를 염탐하는 두 눈을 감기고 두려움까지 지워버리는, 거칠고 열광적이고, 아무것도 바랄 게 없는 허무한 것이라면 말이다. 나는 무엇엔가 부딪쳐 부서지듯이 그를 사랑했다.’
그는 고통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정면으로 맞서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꽃이 꺾인 해바라기 줄기처럼, 줄곧 비어 있었던, 폐허에 불과한 생’의 아궁이에 정념의 장작을 지피고 그곳에서 ‘화염의 꽃’을 피워낸다. 그래서 정념을 풀무질하는 불꽃의 작가로 불리리라. 무엇이 그를 이토록 뜨겁게 달구는 것일까.
“억압 속에서도 사랑이, 고통 속에서도 평화가 있게 마련이어서 묶인 것을 풀 때는 늘 이를 악물어야 합니다. 피와 꿈과 순결한 치정의 궤적이 곧 나의 글쓰기예요.”
그는 ‘거센 바람이 불고 거리는 보자기처럼 휭 날아올랐다가 천천히 내려앉는’ 황량한 풍경 속에서 ‘벌겋게 단 솥뚜껑 같은’ 습작기를 보냈다. 남도 바닷가의 갯내음이 그를 옆에서 추스려줬을 것이다.
등단 전 그는 ‘온몸에 피를 찍어’ 원고지를 한 칸씩 메운 적멸의 시간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넣었다. 그곳으로부터 ‘가시밭길을 맨발로 걷는’ 독한 자기 탐구도 시작됐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의 얼굴은 독하다 싶은 일면을 갖고 있는 것도 같다.
이젠 조금 알 듯하다. 그의 유년은 지금도 진행형이 아닐까. 그가 ‘지금은 바닷가 마지막 집. 빗물에 젖은 미루나무 잎사귀 위로 소라 껍데기를 등에 멘 달팽이 하나 천천히 지나가는 그 시간, 그렇게 작은 한 시절일 뿐’이라고 가만가만 달래던 장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그냥 나를 내버려요. 고통이 나를 짓밟고 가도록 방기하고 있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면 그때서야 체감해요.”
너무 멀리 왔나? 아직 길이 끝나지 않았지만 돌아갈 거리를 생각해서 나는 조금씩 걸음을 늦추었다. 이제 염소는 평정을 되찾은 듯했다. 춥지도 않은 모양이고. 오히려 내가 추위를 탔다.
갔던 길을 되짚어오면서 나는 그의 장편을 거꾸로 읽듯 뒷장부터 떠올렸다. 그때 심사위원들은 ‘생감자처럼 아린 문체로 기술된 감동적 작품’ ‘언어의 날이 진실의 한복판으로 곧장 날아가 꽂히는 듯한 소설’이라고 표현했다.
“문체에 관한 이야기 많이 들으셨지요? 정말 시적인 구절도 곳곳에 박혀 있고…… 혹시 시는 얼마나 쓰셨어요?”
“아뇨. 시 안 썼어요. 사실은 시적인 문체를 넘어서고 구성 쪽에 더 신경을 써야 되는데 아직 모르겠어요.”
그때 수상소감도 참 인상적이었는데, 그는 “80년대는 한 번도 입지 못한 채 커다란 얼룩이 져버린 단 한 벌의 외출복처럼 남아 있습니다.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장롱 속에 간직했던 그 옷 속에서 소설의 인물들이 차례차례 걸어나온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었다. 그날 “시대의 상처와 개인적 고통 때문에 흩어진 유리알 목걸이처럼 되어버린 사람을 한 줄로 꿰는 실은 결국 사랑의 힘”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대학 신입생의 기분이 되어 정신이 아득해졌는데…….
그래, 80년대. 우리들의 파멸적이고 창조적이었던 이십대. 문학적인 기질과 조용하고 절제된 분위기로 교정을 오가던 그는 멋진 한 남학생의 시에 반해 연애를 했지. 최루탄으로 온 캠퍼스가 자욱하게 욱신거려도 그 속에서 가끔 은밀한 일탈을 꿈꾸곤 했던 시절. 그의 소설에 나오는 태인처럼 공장을 무대로 혁명을 꿈꾸고 의식화 학습으로 밤을 새고 낡은 옷자락을 여며주며 서로 사랑하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나 짱돌을 움켜쥐고…….
그랬다. 그때는 생의 이쪽과 저쪽이 혼재했다. 세월은 흘렀고 세상은 몇 번의 옷을 갈아입고 그 멋진 시인은 지금 그의 남편이 돼 있다.
차 한 대가 재재거리는 물살처럼 느리게 흘러간다. 잠시 쉬는 동안 나는 다시 그의 기억을 불러세웠다. 장편을 끝낸 뒤 그는 80년대에 이십대를 보낸 개인적인 운명을 되새기며 “작가에게 태생지가 있다면 나에겐 80년대이다. 이 소설을 끝맺음으로써 나는 태생지에 어느 정도 빚갚음을 한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
자, 이젠 무얼 하지요.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으면서도 모든 이에게 없는 것, 결핍에 관한 것에 생각이 자주 닿습니다. 사랑도 슬픔도 오래 견디는 일도 사실은 무언가를 원하고 찾는 일의 일종이지요. 이미 준비되어 있거나 강요된 것은 그것 자체로 억압이에요.”
그는 낮은 어조로 아주 잘 정리된 문장을 읽어가듯 말한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훨씬 먼저 다음 생을 사는 선험자라고. 우리의 삶이 아무리 큰 위안들로 둘러싸여 있다 하더라도 길 위의 아주 작은 틈새에는 여전히 위안받아야 할 것들이 즐비하게 놓여져 있다고.
밤이 깊어지자 왼쪽으로 보이는 카페촌은 엷은 안개 속에 잠기듯 멀어지고 오른쪽에 길게 누워 있는 다북숲이 뚜렷하게 다가왔다.
그는 하늘로 쭉쭉 뻗은 잘생긴 나무들의 등줄기를 바라보며 감탄하기도 하고 아마존 밀림처럼 빼곡한 잡목들 곁을 조곤조곤 바람 달래듯 지나쳤다. 잠시 후 그가 대학 시절 모꼬지(단합대회, 엠티)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기차삯이 모자라 새벽 내내 먼지 길을 걸어왔던 추억을 얘기했다. 참외 서리나 밤밭 털이는 곧잘 하던 친구들도 돈이 관련된 일에는 널푼수가 없었던 그 푸르렀던 날들. 우리는 갑자기 감상적이 되어서 가난한 그 시절이 그립다고 동시에 말했다.
그가 「평범한 물방울 무늬 원피스에 관한 이야기」에서 ‘강물과 바람이 모래를 실어 나르듯, 모든 것은 인생이 실어 나르는 모래알 같은 것’이라고 얘기한 까닭도 여기 언저리쯤에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말을 해도 어쩔 수 없이 모호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서면 함께 증발되어버리고 말 하나의 느낌에 불과하지만, 최소한 이 순간에는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알 것 같다…… 굳이 말을 하자면, 이런 것이다. 공기 속에 자신을 놓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삶을 신뢰하며 순간의 등을 올라타고 달려야 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