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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회 산행일지 : 흙과 숲의 운명
(경기도 가평군 백운산)
일시 : 2009년 2월 20-21일(금-토)
날씨 : 맑은 그리고 가끔 눈
지난 대보름날, 2월 9일의 대참사였다. 화왕산(火旺山), 이름에서부터 화기가 왕성한 산이다. 화왕산은 무엇보다 우리나라 최고수준의 억새로서 유명한 산이다. 시군 축제를 통한 관광객 유치와 지역 산업 활성화를 위해 전국적으로 다양한 축제가 수도 없이 많은데 창녕군은 1995년부터 화왕산의 억새 태우기로 많은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다.
1996년 2회에 이어 억새보호를 이유로 2000년과 그 이후로는 매3년마다 정월 대보름날에 억새태우기를 하였으니 올해는 6회째가 되는 해였다. 난 2003년 억새태우기 현장에 있었는데 줄지어 오르는 고생과 밤 12시가 넘어서 하산하는 거의 대혼동의 고통속에서도 나름의 멋진 광경과 희열을 맛본 기억이 있어 기회가 되면 재차 방문해보려고 마음먹기도 하던 터였다.
마침 올해는 행사가 있는 해여서 참관의 생각이 없진 않았으나 바쁜 일들로 포기하였는데 그 날 대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불길이 바람을 타고 관람석으로 역류하여 관광객 6명이 사망(당일 4명 사명, 부상자 중 17일, 22일 각 1명 추가사망)하고 10여명 이상이 부상을 당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일로 창녕군의 억새태우기 축제는 큰 희생과 아픈 기억만을 남기고 폐지되고 말았다.
그렇게나 가물더니 어저께 낮에는 비가, 그리고 밤엔 눈이 내렸다. 퇴근을 약간 일찍 당겨 每松의 거처로 향하는데 서산 위에 낮게 드리운 해가 맨눈으로 쳐다보아도 눈이 부시질 않는다. 구름인가, 황사인가 했는데 아무래도 황사인가 보다.
올 겨울 유난히 가뭄이 극심하여 태백 등 일부지역에서는 이미 물난리를 심하게 겪고 있고 다가올 봄에 맞을 황사를 생각하면 걱정이 앞선다.
6시 약속에 맞추어 곧 다들 모였다. 오늘도 靑竹의 차에 올랐다. 죽령터널을 지나자 눈발이 날린다. 어두워진 단양휴게소에 들렀는데 날씨가 아주 차다. LPG 가스를 넣고 곧바로 출발, 춘천 IC를 나와 조명의 화원같은 춘천을 내려다보며 다가서는 느낌이 꽤 좋다.
신호에서 옆대어 선 택시기사에게 닭갈비 골목을 물었더니 시청 부근에 있다며 길을 일러준다. 시청 옆, 한 눈으로 보아도 춘천시내 중심가로 보이는 곳에 주차를 하고 명동의 원조 닭갈비 골목 첫 번째 집인 우미닭갈비에 들었다.
저녁이 늦어 배가 고픈 탓인지 우선 4인분을 시켰다. 언젠가 춘천에서 닭갈비를 먹으며 제안했던 주문량을 떠올리는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지난 산행기를 확인해보니 2005년 11월 40회 용화산 산행 후 들른 집에서 3인분과 밥 4개를 먹고 양이 많아 다음번에는 닭갈비 2인분, 사리 1개, 밥 2개가 적당하다고 하였던 기록이 있음).
밥은 3개를 시켜서 부족한 듯 해치웠으나 뭔가 허전하다. 그 허전함이란 맵지 않는 맛에서 오는 것이라고 다들 동의하였으나 이미 닭갈비 그릇은 밥 한톨 남지 않고 비워진 후의 일이다. 주인에게 맛의 밋밋함을 하소연 하였더니 주문 시 ‘맵게 해달라’라고 하여야 한댄다.
춘천댐을 건너자 나타난 봉쥬르 펜션(033-243-9493)에 50,000원으로 협상하고 방에 들었더니 냉골이다. 주인이 ‘보일러를 방금 켜두었으니 차나 한 잔 하시라’하기에 2층의 사무실 겸 거실로 올라서는데 나무 타는 연기냄새가 좋다.
난로가 있는 거실에서 무안 출신의 주인과 얘기를 나누며 내일 아침거리 쌀을 얻어서 돌아오니 이제사 방이 미지근해진다. 청죽은 감기기운이 있다며 먼저 잠을 청하고 곧 함께 소등. 간간이 코고는 소리도 있고 새벽에는 옆방에 들어선 손님들의 얘기소리가 제법 크게 들려오곤 했다.
7시 총무 喬梅가 식사준비로 부스럭 거리자 하나씩 일어난다. 커텐을 젖히자 물안개와 얼음이 내린 북한강의 모습이 아름답다.
산 능선 위로 줄지은 나목들 사이로 아침 해가 오르고 굴뚝으로부터 빠져나온 흰 연기는 옅어지면서 비틀거리듯 상승한다. 밤엔 보지 못한 풍경들이다.
매송이 준비해온 참치김치찌게 하나로 아침과 숭늉까지 마치고 9시, 출발을 위한 준비가 끝났다.
미리 시동이나 걸어두어야겠다고 청죽이 앞서고 뒤따라 가방을 들고 나서는데 차의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쉬었다가 재시도해도 마찬가지다. 밧데리 문제라 여기고 보험사의 출동서비스를 요청하였다.
배드민턴을 치며 20여분 기다려 서비스가 왔으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견인을 해야 한단다. 일이 점점 커진다. 견인차를 가지러 간 사이 방에 앉아 춘천에 사는 후배 최수정의 전화번호를 수소문끝에 연락하여 시내 정비공장에서 만나기로 하고 10시 넘어 도착한 큰 견인차에 차를 어부바했다.
총무는 견인차에 타고 나머지는 우리의 차에 올랐다. 짐차에 실린 채 뒤에서 달려오는 풍경이 새삼 재미있다.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동서울발 춘천행 직행버스에 서 있던 아가씨 둘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들이 먼저 웃는다.
지난 2003년 7월 11회 문경 주흘산에서 짐차를 히치하이킹하던 때가 기억나 웃음을 참기가 어렵다.
춘천기계공고앞 정비공장에 도착하여 12시 40분, 깨진 스타터 모터를 갈고 수리가 완료되기까지는 거의 두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수정이의 가족들이 와 반갑게 만나긴 했지만. 다시 봉쥬르에 들러 라면을 끓여 방안에서 여유있게 먹었다. 이제 백운산으로 출발이다 13:35.
화천군의 광덕고개를 넘어 경기도 포천군 백운계곡으로 들어서자 이동갈비집이 줄지어 있다. 어젯밤 여기서 자면서 이동갈비를 맛보는 것도 한 방법인 듯 했다.
오후 2시 20분, 대구에서 9시에 출발하더라도 점심을 여유있게 먹고 도착할 수 있는 시간에 1박을 하고서도 이제 도착했다.
등고선의 산행시작 시간으로는 가장 늦은 기록이다. 입구엔 물을 뒤집어쓰고 얼음기둥이 된 나무들이 계곡에 섰고 더러는 누워있기도 하다.
주차장에 차를 대었다가 조금이라도 시간을 절약할 요령으로 흥용사 입구까지 차를 가지고 왔다.
눈덮힌 백운교 아래, 돌과 얼음사이로 흐르는 물이 참으로 거울같이 맑고 수량도 많아 소리까지 세차다. 제2백운교를 지나면 백운산은 좌측 3.68km, 향적봉은 직진 2.67km 이정표가 있다.
매송이 차의 네비에서 떼 온 GPS에서는 이곳의 해발고도가 268m임을 알려준다.
처음에 맞는 낙엽송 무리를 지나면 곧바로 급한 경사로를 만난다. 약 500미터 정도는 힘이 부친다. 봉우리와 눈이 흩뿌려진 능선이 잘 보이는 바위에서 휴식, 이곳의 고도는 564m이고 거리로는 정상을 약 2.4km 남긴 지점이다. 이제부터는 능선의 비교적 편안한 길이다.
백운산은 모든 생명의 어머니인 흙의 산이다. 옷에 문질러도 먼지나 흙 때가 묻어나지 않을 것 같은, 얼굴에 비벼도 그렇게나 부드러울 것 같은, 그리고 실제 발로 디디면 편안한 감촉의, 눈이 녹아도 전혀 질척거림이 없는 고운 마사토의 산이다.
큰비라도 오랫동안 내리면 산의 모든 흙들이 떠내려갈 것만 같은 약하고 부드러운 산이지만 참나무를 주종으로 하는 울창한 나무와 풀의 뿌리들이 단단히 붙들고 있다.
흙은 숲에게, 숲은 흙에게 서로에게 없어서는 생존할 수 없는 아름다운 상생으로 보인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단지 어떤 시적 의미가 되기보다는 서로에게 송두리째 운명이 되는 것이다.
이곳 등산로는 매 3-400미터마다 이정표가 있어 훨씬 수월한 느낌이다. 총무는 새로 산 아이젠을 오늘 내내 꺼내보지도 못하였다.
4시 10분, 백운산 정상 903.1m, GPS로는 902m로 표시되고 있다. 3.2km 지점의 광덕고개와 그 너머의 광덕산, 0.93km와 2.1km의 삼각봉과 도마치봉, 남쪽의 희미한 화악산까지 조망에 들어오고 여위고 벗은 숲은 산들의 구석구석을 부끄럼없이 보여준다.
2008년 10월에 세운 화강석 정상석 뒷면에는 ‘거문고를 타는 늙은이에게 바침’ 정도인 贈琴翁의 제목으로 된 양사언의 싯구가 새겨져있다. 포천까지 전철유치를 위한 등산객 서명을 부탁하는 현수막에는 갖가지 사연과 이름들이 가득 차 있다.
곧바로 하산, 고도가 낮아진 태양이 토해내는 붉은 기운을 받아 봉우리와 능선들이 물들어 온다.
신라 효공왕(898년)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는 흥용사, 너른 절마당에 들어서기도 전에 개가 쉬지 않고 짖어댄다. 마당 한 가운데 세워진 7층 석탑과 좌우의 석등, 그리고 윗편의 대웅전과 대웅전 좌측의 입상불상은 비교적 새것의 모습이나 개축 중으로 보이는 종무소 건물의 기둥과 주춧돌은 고색이 느껴진다.
빈 마당은 포르테와 피아노를 반복하는 목탁소리, 대웅전 네 귀퉁이의 풍경들이 간간이 부딪는 맑은 음의 합주가 가득하다. 마당 한쪽, 몇 장의 기와에는 ‘소원성취’ 등 글귀가 적혀진 기와불사의 예시와 그 앞에는 福田函, 그리고 복전함 바로 위엔 젤리가 담긴 바구니가 네 귀를 줄에 묶여 대롱거린다.
경계의 짖음인지, 반가움의 짖음인지 젤리를 한 웅큼 쥐어잡고 절마당을 나선 후에도 그 개는 아직도 목이 아프라 짖어댄다. 설마 젤리도둑을 알아차린 걸까?
오후 6시가 되어간다. 다행히 무리없이 시동이 걸려준 차에 올라 네비가 일러주는대로 좌측의 서울방향 47번 국도를 타고는 춘천의 후배에게 다음기회에 꼭 들르겠다는 전화를 남긴다.
늦은 시간에 4차선 국도의 속도감이 다행스럽다. 일동면을 지나 내촌면 웅현리의 길가에서 옹기손만두국집에 들었다(031-531-8666). 따뜻하고 깨끗한 방, 먼저 나온 물김치와 깍두기의 맛 그리고 옹기그릇들이 모양새도 일품이었지만 뒤이어 나온 만두전골은 다들 너무 맛있어 했다. 이만하면 오늘 저녁선택은 대성공인 셈이다.
구리에서 순환고속도로, 제2중부선, 호법에서 여주를 거쳐 중부내륙선(45번)의 충주휴게소에서 가스를 넣고 문경새재휴게소에서 잠시를 쉬었다가 성서에 도착하니 10시 30분을 넘고 있다. 고장난 차로 인한 마음 고생과 종일 운전으로 몸고생을 아끼지 않은 靑竹의 수고가 너무 큰 하루였다.
登?苦?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