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州路 斷想 ( 3) - 별방진에서 십릿길 개마소는 어디에? -

[늙은山나그네]

(3)

별방진과 석다원

어느 새, 김녕원에서 35리 별방진(別防鎭) 앞에 도착했다.
제주의 9진중 하나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축조한 구좌읍 하도리
방호소성(防護所城)이다.
이조11대 중종(中宗) 5년(1510년), 목사 장림(牧使張琳)은 왜선이
인근 우도(牛島)에 정박하기 때문에  김녕방호소를 이곳으로 이축
하고 별방(하도리의 옛 이름이 별방)이라 하였단다.
축성때 흉년이 들어 부역하는 장정들이 인분(人糞)을 먹어가며 쌓
았다고 안내판은 전한다.

별방진성(1. 2), 해녀상(3), 석다원(4. 5) 

별방진에서 조금 더 가면 해안에 석다원 이름표의 돌탑군이 있다.
그런데, 제주 관광지도들에는 하나같이 양 지명이 바뀌어 있다.
해안도로 외길에 있는 두 곳이므로 어차피 다 들르게 되어 있지만
생소한 여행자를 안내하는 지도라면 정확을 기해야 하지 않을까.
어찌 제주의 지도에 국한된 문제인가.
지명, 산명, 인명, 시대 등 오식들이 주는 피해가 여간 아니다.

제주가 성(城)을 비롯해 집담, 밭담 등에 이르기 까지 온통 돌담인
것은 제주 3다(多)중 하나가 석다(石多)임을 의미한다.
이 돌 대부분은 화산폭발로 생긴 다공질(多孔質) 현무암이다.
석다원(石多園) 역시 그러한데, 주인은 왜 돌쌓는 고생을 했을까.
마이산(全北 鎭安)의 석탑들은 이갑룡(1860-1957) 처사가 30년에
걸쳐 전국 각지의 돌을 모아 쌓았단다.
그러나, 그가 탑들을 쌓은 동기에 대해서는 추측만 무성한 것처럼
석다원 역시 그러한가.

제주에서는 지천인 돌이 옛부터 구복과 기원의 대상이었다.
만선과 어부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마을의 사기(邪氣)를 몰아내는
영험이 있다는 방사탑 신앙의 연장일까.
돌 많은 제주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석탑은 헤일 수 없이 많다.
백두대간 두문동재의 마고할매탑을 비롯해 산야에도 널려 있다.
기원이 불교에 있다하나 소박한 소망을 담은 원시적인 석탑까지도
이제는 그럴싸한 이름표를 달고 관광상품으로 거듭나고 있다.

석다원휴게소의 해물칼국수가 인기 메뉴란다. 
옆 테이블에서 단란한 분위기의 한 가족이 주문했다.
나도 덩달아 그랬지만 옆에서 즐기고 있는데 반해  내 안에서는 좀
체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꽤 많이 걷는 동안 별 이상이 없었는데 왜 음식을 거부할까.
탈이 난 건 분명하지만 몸이 사보타주(sabotage)하려는 것이라면
오산인데.

별방진에서 십릿길 개마소는 어디에?

다시 채찍을 들었으나 난감하게 되었다.
돌팔매 거리도 못되는 문주란자생지(토끼섬), 하도해수욕장, 철새
도래지 한하고 묻고 물었으나 개마소(改馬所)가 없으니 말이다.
개마소는 별방진에서 10릿길이라고 대동지지는 말한다.
별방진에서 10리라면 하도리와 종달리 어간이다.
대동여지도에도 別防 ~ 水山간에 분명히 있는데 연만한 이들마저
모르쇠 일관이다.

아침에 평대리 의원에서 대기하는 동안에 내게 관심을 가진  어느
초로(初老)도 별방진 지나 얼마 가지 않아 있다고 확인해 주었다.
그런데도, 정작 그 지점이라고 짐작되는 지역민들은 모르다니.
약간 언덕진 너른 밭을 가리키며 예전에 말 키웠던 곳이라고 구전
돼 온다는 정도일 뿐.
글자대로 라면 말을 개량하고 길들이는 곳이었을 테니까 맞을 듯.

아침의 병원 해프닝, 식사비토 등 악조건인데도 화창한 봄 날씨와
바다 위에서 시원스레 펼쳐지는 갖은 정경의 힘인가.
특정 전망대뿐 아니라 해안길 전체가 전망대라 그런가.
제주해안도로의 백미라는 12㎞세화 ~ 종달구간 이후에도 성산읍
일출봉 앞까지 엄청 우회하는데도 계속해서 그 길을 가고 있으니.

장대위에서 팔랑거리는 풍차들(행원리풍력발전소)이 뒤로 희미해
질 때 앞에서는 우도 일대의 평화로운 풍광이 눈을 현혹했다.
해녀들이 옥빛 바다 위에 쌍돛대를 세울 때 머리 위에서는 패러글
라이더(paraglider)들이 한가로히 봄나들이 유희를 펼쳤다.
부표처럼 잠시 얼굴을 내미는  잠녀들의 휘파람소리(거친 호흡)가
봄바람 타고 들려오는 듯도 했다.
바닷새들도 식사 삼매경인지 사람들의 심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꼬불꾸불 돌고 도는 것이 개의되지 않게 하는 정경들이다.

 

우도(1. 2), 일출봉(3), 패러글라이더(4)

해안따라 곳곳에서 봄을 감상하는 상춘객들에게 늙은이가 지대한
관심의 대상인가.
마주치는 이들 대부분이 말을 나누려 했다.
그러는 사이에 제주시를 벗어나 서귀포시권(圈)에 들어섰다.

해안에서 중중간으로

그러나, 아쉽지만 오조리(성산읍)에서 바다를 떠나야 했다.
중산간지대 수산으로 방향을 틀어야 하므로.
물과 산을 동시에 아우른다 해서 물뫼(水山)일까.
이후의 제주로는 수산진(水山鎭)을 거쳐 정의(旌義)~의귀촌(衣貴
村)의 중산간을 통과해 다시 서귀포해안으로 진출한다.
다른 진성(鎭城)들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해안에 축조한 것과
달리 수산리의 수산진성은 중산간에 쌓은 독특한 성이다.
또한 세종 21년(1439년)에 축성되었다니까  중종때(1510년) 세웠
다는 다른 성들보다 70여년이나 전이다. 

 

수산진성

제주도는 섬전체가 백록담을 정점으로 하여 한라산자락에 분포된
타원형 지형이다.
그래서, 어제 아침에 백록담 정북에서 출발하였는데 어느 새 가장
멀리 우회하는 정동을 지나 동남지점을 통과하는 중이다.
곳곳에 남아있는 돌과 돌의 환해장성과 진성과 연대들, 물과 물의
바다만을 짝하고 걸었는데 '오름'들의 연속인 산간길이 시작된 것.

'오름'은 동사 '오르다'의 명사형으로 봉(峰) 또는 악(岳)을 뜻하는 
제주의 말(濟州語)이며, 백록담을 제외한 제주 일원의 독립(獨立)
혹은 기생화산체(寄生火山體) 일체를 말한단다.
그러므로, 아무라도 쉬이 오를 수 있는 동산 또는 구릉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바닷가의 해맑은 봄파노라마를 즐기던 눈에 초원이 펼쳐짐으로서
순간적인 컬쳐쇽크(culture-shock)가 왔다.
그러나 멀어지던,  아직 눈(雪)을 입고 있는 한라산이 한결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에 새삼 환희를 느끼며 걷게 되었다.
갖은 이름의 오름길이 분기되는 서성로(1119번)에 들어선 것이다.
수산리 이어도승마장이  얼핏 서부극의 한 신(scene)처럼 보이나
말들이 초보자들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겠다.
호쾌하게 초원을 달리지 못해 절대적 운동부족 상태가 되겠으니.

이도승마장

성읍 민속마을

수산리에서 성산읍이 끝나고 경계인 성읍리는 표선면이다.
수산진발(發) 30리길 정의땅에 들어선 것이다.
표선면 성읍리(表善城邑)는 5백여년간 정의현(旌義縣)도읍지였다.
'원축성(怨築城)'이라는 일명도 가지고 있는 정의현성은  제주도의
삼성(三城: 濟州, 大靜, 旌義)중 하나다.

정의현성뿐 아니라 제주의 성들은 하나같이 원축성이다.
원축성은 중앙정부에서 멀리 격리된 섬의 운명과 결부된 일명이다.
당시, 제주를 지키기 위해서는 제주인들 스스로 축성을 해야 했다.
이 때, 허기를 채울 수 없어 인분을 먹으면서 쌓았기 때문이란다.
심지어, 자꾸만 무너져 내리는 성을 완성하기 위해서 어린 소녀를
재물로 바치기까지 했다는 성이다.

오죽 했으면 원축성이라는 이름까지 붙게 되었을까.

그런데, 성읍민속마을 내에 자리잡고 있는 옛 정의현 관아의 대표
건물인 '일관헌'(日觀軒)의 복원이 잘못됐다는 지적이 나왔단다.
편액 '日觀軒'의 뜻은 '일출을 보는 집' 이므로 동향이라야 하는데
남향으로 돼 있기 때문이라나.
'종일 해를 볼 수 있는 집'으로 해석하면 남향이 맞지 않을까.
거기 앉아서 정사를 보고 백성을 보살필 것도 아닌데 동향과 남향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길래 저리 구설이 심할까.
저 호사가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오늘의 중국이 있게 한 등소평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다.

정의현 일관헌(1), 정의현성 서문(2), 정의형교(3. 4), 민속마을(5)

당초에는 성산읍 고성리에 설치했으나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는데
애로가 있고, 동쪽에 치우쳐 서쪽 주민들이 불편이 많았더란다.
그래서 세종5년(1423년)에 진사리(現城邑里)로 옮겼으며 그 새에
증.개축도 여러 번 했다는데 언뜻 수긍이 되지 않는다.
적의 침입을 해안에서 저지하지 않고 상륙시켜 산간에서 막는다?
또, 500년 조선왕조가 백성의 삶을 얼마만큼 중히 여겼던가?
그들에게 적을 막는 일과 백성의 편의중 어느 쪽이 더 중했던가?
정의현성뿐 아니라 이미 거쳐온 수산진성 역시 그러하다.

아무튼, 성읍민속마을은 제주 문화유산의 보고란다.
그래서,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 제188호로 지정되었다는 것.
포장은 그리 하지만 실은 관광상품성의 문제 아닌가.
전국규모라는 용인 민속촌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보존 가치가 있는 제주의 문화유산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국보 1점 없고 보물이 6점 있을 뿐이다.
그 보다는 UNESCO자연유산 등재의 의미가 강조돼야 할 것이다.
 1970년대초에 들렀을 때 민속자료의 으뜸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제주 특유의 사투리(方言)라는 생각이었는데 아직도 유효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