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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나는 뜻밖에 한편의 친구 글을 접하고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내 인생에서 주름졌던 시절의 아픈 추억이 새록 새록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며 감회에 젖어 보는 시간을 가졌다. 기왕 알려진 바에야 좀 더 자세히 기록해서 올려 보기로 한다.
친구들! 심심하고 따분할 때 틈틈이 읽어보며 지난날의 추억에 흠뻑 젖어 보기 바란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제2탄 -초라한 외출-
때는 바야흐로 1975년 2월 초순경.
학교를 졸업하고 사창역전을 무대로 매일같이 죽치고 지내면서 선후배,친구들에게 막걸리를 얻어 마시고 술에 취해 세월을 죽이며 하릴없이 따분한 일상을 보내던 친구 ㅂ군과 나는 어느 날 의기투합하여 화려한 외출을 꿈꾸며 아무런 계획과 대책도 없이 서울행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무작정 상경을 감행한다.
집에는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고 거의 무일푼인 몸으로 겁 대가리 없이 거의 장난하듯이 충동적으로 기차에 올라 탄 우리는 마냥 설레임과 착잡함과 즐거움으로 뒤범벅이 된 기분을 안고 무전여행의 형식을 빌린 거의 걸인생활에 가까운 여행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 얼마 전 학창시절 취직시험을 보기 위해 학생단체로 서울역에 내려 최초로 남대문을 바라보며 네온싸인의 휘황찬란한 서울 풍경을 동경하던 때를 떠올리면서 두번째 서울 나들이를 하는 셈이었다.
그 당시 깊숙한 주머니속에는 한 사람의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 한장을 넣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친구가 서울에서 유일하게 연락이 가능한 "송기인"친구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서울역에 내려 우리는 전화를 안받으면 어쩌나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인이에게 공중전화를 걸었다. 그때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 전에는 한번도 친구한테 연락을 취해 본 적이 없었고 또 올라간다고 사전에 귀뜀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인이는 우리가 올라와서 연락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을 못 했을 것이다. 사실 기인이라는 친구는 어린시절 한 동네에서 규율이 엄격한 조직의 일원으로 동고동락하면서 조직원들에겐 공포의 대상인 골목대장이었던 친구다. 나는 두목의 충실한 2인자로서 행동대장에 임명되어 보스 명령에 충성을 다하여 행동으로 옮겼던 시절이 있었다.
만약에 기인이와 연락이 닿지 않으면 우린 정말 꼼짝없이 거지 신세가 되든지 아니면 한양 구경한번 못해 보고 당장 귀향해야 할 신세가 되어 희망에 찬 기대를 안고 올라온 보람도 없이 내려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는 것이다. 이 놈하고 연락이 되어야 그 다음부터 차례대로 일정이 순순히 풀려 우리가 동경했던 서울생활이 최대한 길어지는데 전화를 안받으면 정말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다이얼을 돌려 상대방 목소리를 기다리는데 아니 이게 기인이 목소리가 아닌가. 그 순간의 감격이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고 천천히 차분히 내 신분을 밝혔으니 순간 그 친구는 얼마나 심난했겠는가. 어젯밤에 꿈자리가 사납더니 재수없이 진드기가 하나 나타났다며 어찌할꼬 했을 테니까.
허나 우리는 이제부터는 체면이고 뭐고 소용없이 안면에 철판을 깔고 달라 붙어야 했다.
서울역에 마중 나온 그 친구는 마지못해 반가운 척하며 우리를 맞아 주었고 허기를 채워 주면서 우리의 동정을 살피는 눈치였다. 기인이는 어린시절 그 사납던 호랑이가 세월에 순응하여 순한 양이 되어 있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 심중에 품고 있던 계획의 일단을 자초지종 얘기하고 당분간 신세를 져야 되겠다며 다짜고짜 어거지를 쓰면서 책임지라고 밀어 붙였다.
그래서 따라 간 곳이 기인이 가게가 있던 돈암동이었는데 그 곳에서 처음으로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기인이는 하루종일 근무해야 할 상황인데 우리는 서울 지리를 알지도 못하고 돈도 없고 해서 가게근처에서만 얼씬거리며 소일하다가 가게 옆에 가서 신호를 하면 잠깐 나와서 동정을 살피면서 먹을 것을 건네주고 다시 근무하며 하루를 보내고 마침내 저녁이 되었다.
기인이도 누구한테 우리를 인계 해야만 본인도 편하고 속 시원할텐데 하며 고민하다가 마치 내 친척이자 동네 선배 한 사람이 인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면서 같이 찾아 보자고 유도해 우리 일행은 삼양동 산동네 높은 곳을 신발이 닳토록 뛰어 다녀 겨우 찾을 수가 있었다.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기인이도 친척 형의 거처를 자세히 모르고 있는 것 같았으나 인계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악착같이 찾았던 것 같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아는 사람을 한명씩 만나면 서울 체류기간이 그 만큼 길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친척 형이니 얼마나 반갑고 안심이 되겠는가. 이렇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는 기인이가 눈물이 나도록 고마울 뿐이었다. 그 형한테 하룻밤 신세를 지면서도 별로 미안한 생각이 들지 않았고 마냥 재밌게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나는데 한편으로는 우리가 한심해 보인다는 눈초리로 천덕꾸러기 취급하는 것 같아 서운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공부했다는 놈들이 취직 할 생각은 안하고 그저 아는 사람 찾아다니며 신세나 지면서 죽치고 있다고 걱정했을 것은 뻔한 이치인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해 볼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고 지냈던 것 같다. 배짱도 좋게.
이후 우리의 일정은 잘 감긴 실타래 풀리듯 술술 진행되어 어떻게 알았는지 먼 집안 친척집에까지 찾아가서 안면 몰수하고 안부인사차 방문했다고 둘러대며 허기진 배를 채우고 용돈까지 얻어 호의호식을 하면서 지내던 중 뜻밖에 생각지도 않은 새로운 고향친구 “임채남”이 소식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 친구는 나와 한 동네에서 개구쟁이 어린시절을 같이 보내다 초등학교 2학년때쯤 동두천으로 이사를 갔던 친구로 벌써 청계천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돈을 벌고 있었다. 어려서 그 친구랑은 자기집에 불을 질러 어른들한테 혼난 적이 있는 잊을 수 없는 친구다. 아뭏튼 구세주를 만난 듯 반갑게 상봉을 해서 또 며칠은 버틸 수가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고무되어 우린 마냥 즐거울 뿐이었다.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서울 북쪽에 위치한 동두천이라는 곳를 따라가서 며칠을 상주하면서 그 당시 낯설었던 양놈들과 양색시들이 흥청거리는 유흥가를 구경하면서 묘한 기분을 느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르며 쓴 웃음을 짓게 된다.
이후 여기서 더 언급하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 시간을 죽이고 다니던 우리는 최대한 서울에 체류했다고 생각하면서 따분하기도 하고 더 이상 우리를 상대해 줄 훌륭한 인격을 갖춘 분들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흥미가 점점 엷어지는 느낌을 받는 순간, 이젠 설날도 얼마 남지 않았고 부모님도 걱정이 태산같을 거라고 짐작되면서 겁도 나고 해서 서서히 귀향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반가웠던 사람들과의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고 드디어 용산역에 도착하게 된다. 10여일의 객지 생활로 호주머니에는 동전 몇개정도 밖에 없는 실정인데 둘이는 이마저도 순대 채우는데 허비하고 열차비는 도둑 열차를 타기로 이미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시기적으로 아주 악조건이었다. 때는 구정 특별 수송기간이라서 용산역은 귀성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개찰구에는 열차시간에 맞추어 승차개표를 하는데 개찰요원들이 득실거릴 정도로 많이 포진해 있어 철통 같은 개찰이 이루어져 무임승차는 엄두도 내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씨발 날씨는 왜 이리 추운거야? 정말 빨리 무슨 대책을 세워 이 수렁을 탈피해야만 했다.
나도 6년동안 기차통학을 하면서 거의 무임승차의 달인이 되었다고 자신하고 있었는데 때가 때인지라 아주 고난도의 방법을 동원해야 개찰구를 무사히 침투하여 승차할 수 있을 것 같아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학창시절 무임승차로 버티면서 통학비를 아껴 그 돈으로 복싱을 배울 정도로 도가 터 있는 수준이었다. 이럴 때 실력 발휘를 해야하는데 도무지 좋은 방도가 떠오르지 않던 우리는 개찰시간 전에 승강장으로 미리 침투하기로 하고 호시탐탐 헛점을 노리며 눈을 부릅뜨고 엿보다가 드디어 감쪽같이 안으로 빨려들어 갈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성공할 수 있었다.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일단 기차시간에 맞추기 위해 전철을 타고 수원을 왕래하면서 소일하다가 잽싸게 목포행 완행열차에 오르기로 하고 수원행 전철에 몸을 실었다. 얼었던 몸을 녹이면서 한숨을 돌리며 둘이서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는 가운데 무사히 고향땅을 밟을 순간만을 그리며 감상에 젖어 있는데 갑자기 나는 용산역이 멀어지는 것에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상행선 전철로 갈아타고 올라갈 요량으로 ㅂ친구에게 재촉을 했는데 그 놈은 수원역까지 내려갔다 오자고 우기는 바람에 둘이서 의견충돌로 옥신각신하던 찰라 마치 전철은 명학역에 도착하고 있었다. 나는 무작정 내렸다. ㅂ친구도 내키지는 않았지만 할 수 없이 따라 내리는 것이었다. 아! 이게 무슨 운명에 장난인가. 여기서부터 우리의 운명은 꼬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땐 내가 무슨수로 전철역의 구조를 알아 차렸겠는가. 반대쪽으로 건너만 가면 무임으로 계속 환승하여 용산역쪽으로 갈 줄만 알았는데 개찰구가 가로막고 있는게 아닌가. 청천벽력 같은 심정을 안고 경황없이 선로를 가로질러 건너 갈려고 내려서는 순간 저쪽에서 역무원이 호루라기를 불며 쫓아오는 것이 아닌가. 놀래서 도망치려는데 상황이 꼭 독안에 든 쥐꼴이 되어 꼼짝없이 생포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ㅂ친구도 어쩔 수 없이 같이 체포되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정말 친구에게 그 순간 미안해서 뭐라 말할 수 없는 심정으로 역무실로 끌려갔다.
사람이 살면서 순간순간 결단을 해야 할 때가 자주 생기는데 나는 내 인생에서 이 한 순간처럼 오판을 해서 난처한 지경에 처해 본 적이 별로 없을 정도로 후회막심한 판단으로 쓰디쓴 체험을 했던 것이다. 이후 나는 그때의 경험을 거울삼아 살아오면서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에는 내 나름대로 냉철한 판단과 정확한 결정을 내릴려고 최선을 다하는 편이다. 그동안 마음속으로만 간직했던 미안함을 ㅂ친구에게 이 자리를 빌어 그때 결과적으로 몽매한 나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고초를 겪었던 사실에 대해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해 본다.
사무실로 끌려간 우리는 역무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돌려 보내줄 것을 사정했지만 그 놈은 막무가내로 우리를 돌아 다니며 도둑질이나 하는 불량배 취급을 하면서 경찰서에 연락을 취하고 우리를 대동하고선 파출소로 가자는 것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사실 그때 우리의 몰골은 말이 아니였고 지저분한 옷차림에 영락없이 그런 오해를 받을 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주제파악을 못하고 그저 순진한 시골 청소년으로만 보일 것으로 착각하고 우리는 절대 불량배가 아니라고 항의해 봤지만 그 놈들은 씨알도 먹히지 않은지 웃기지 말라는 투로 당장 감방에 보낼 기세였다. 그래도 우리는 설마 무슨 큰 죄를 진 것도 아니고 하찮은 무임승차 한걸 가지고 영창에야 보내겠냐고 생각하면서도 경찰서에 잡혀 온 신세가 정말 기가 막혀 환장할 지경이었다. 씨발 재수 더럽게 없다고 마음속으로 씨부리면서 겉으로는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동정심을 유발시켜 풀려 나갈 궁리를 하면서 조서 작성 취조에 순순히 응하였다. 취조를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전도가 밝은 미래가 펼쳐질 젊은이로서 혹시 사실대로 불면 내 인생에 불리한 기록이 남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 주소 및 주민등록번호등 실명을 거짓깔로 내 밷으며 빠져 나갈 궁리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허나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점점 분위기가 우리에게 불리하게만 돌아가는 것을 느끼면서 우리의 진실을 강변하며 안간힘을 써 봤지만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가고 경찰서 유치장에 감금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정말 말로만 듣고 책에서만 읽었던 유치장에 갇히고 보니 기가 막혀 둘이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만 껌벅 껌벅하면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눈에 딱 들어오는 험악하게 생긴 두 놈이 있었으니 호기심반 불안감반으로 한쪽에서 관망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어떤놈이 귓속말로 저 놈들은 특수한 특수강도들로 무시무시한 놈들이라고 귀뜀을 해주는 것이 아닌가. 겁이 벌컥 나 예의주시하며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그런데 왠걸 그 중 한 놈이 심상치않은 눈초리로 나를 째려보더니 “야! 임마 너 이리와 봐”그러질 않는가. 아이고 이거 올 것이 왔구나 어떻게 대응해야지? 복잡해지면서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고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느끼며 전라도 말로“저라우?”하고 응수했더니 불쑥 “너 전과 몇범이야 새끼야” 이러는 것이 아닌가. 그래 나는 “아니어라우 이런데 처음인디요” 하니 “이 새끼 거짓말하고 있어 내 눈은 못 속여 이 새끼야! 니 인상을 보면 다 알아 이 좆 같은 새끼야” 속으로 “이닌디”해보지만 그 놈은 전과자를 확신한다는 듯이 머리빡을 한대 때리며 “저쪽으로 꺼져 새끼야”라고 한다. 정말 내 인상이 그렇게 험악한가. 앞날이 창창한 내가 인상이 이렇게 안좋아서야 어떡하나 속으로 걱정도 많이 해보았다. 그 쌍판을 가지고 오늘날까지 무사히 살고 있으니 나도 정말 인간승리라고나 해야 할까? 다른 수감자들도 그 놈들 앞에서는 쥐죽은듯이 웅크리고 관망만 할 뿐 누구 하나 나서질 못하는 분위기로 그 둘이서 압도하는 형국이었다. 어떤이는 그 놈들한테 잘못 보이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둥 살벌한 분위기에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놈들은 현장검증을 나갈 때는 특수한 놈들이기 때문에 수갑을 채우고 그 위에 밧줄로 재차 묶어서 호송할 정도로 특별히 다루고 있었다. 그 특수강도들은 경상도 놈이었는데 입심이 얼마나 좋던지 무용담을 얘기하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실감나게 묘사하면서 우리들의 시름을 잊게하고 귀를 솔깃하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내용인 즉 이 놈들은 백주에 부잣집을 털어서 못먹고 못배우고 어렵게 생활하는 구두닦이나 신문팔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선행을 배풀며 의로운 일을 했다면서 자신들은 의인이라고 열변을 토하고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또한 부녀자들은 겁탈은 하지않고 자신들을 신고하지 못하도록 발가 벗겨 장롱속에 집어 쳐넣고 도주한다고 자랑하며 양동이에 구멍을 내 물이 똑똑 떨어지게 해서 마치 계단에서 올라오는 구둣소리로 들리도록 해서 신고를 못하게 한다는 둥 별의 별 자랑을 늘어놓으며 이빨을 까는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또한 자기들은 아마 6~7년정도 형을 선고 받을거라며 수수께끼를 맞추듯이 지랄을 떨면서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내 신세를 잠시 잊고 시간을 보내며 하룻밤을 꼬박 지샌 다음날 아무 영문도 모르고 시간을 죽이고 있던 우리는 하룻밤을 잤으니 오늘은 풀어 주겠지하는 희망으로 가슴이 설레이며 만약 나가기만하면 그 역무원놈을 찾아가 강력히 항의를 해서 사과를 받아내고 귀향할 차비를 뜯어내자며 석방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를 석방시켜줄 기미는 전혀 보이질 않아 다시 불안한 마음으로 기둘리고 있는데 어떤 놈이 와서 우리를 호명하길래 이제 살았구나 나가는가 보다며 잠시 안도의 한숨을 쉬는 순간 그 놈 왈 느그들은 오늘 정식 서류재판을 받아 판결형량에 따라 정식으로 감방생활을 해야한다며 유치장을 다른 데로 옮겨가야 한다고 나오라는 것이었다.
정말로 환장하겠다는 심정으로 낙심한 나는 내 자신이 이렇게 무기력한 존재로구나 생각하며 이젠 거의 자포자기 심정으로 끌려가 다른방으로 옮겨졌다. 정말 앞이 캄캄했다. 이러다 이거 명절 전에 집에 못 가는 것은 아닌가 안절부절 못하는 심정이었다. 왜냐면 구정명절 분위기를 이용해서 귀가를 해야 그 엄한 아부지한테 한조각 뼈라도 추릴텐데 이건 구정 지나고 내려가면 맞아 줄을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내 인생이 일찍이 왜 이리 꼬이는지 모르겠구나하고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그 때부터 절망하며 아무런 생각 없이 시간을 죽이며 즉심판결만을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하여 멍하니 앉아 있다가 식사기간이 되면 꽁보리 주먹밥에 국물쪼금 주면서 먹으라는데 정말 입이 껄껄해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어떤 놈들은 형편이 좋은지, 가족이 인근에 거주하고 있는지 몰라도 사식을 주문해서 처먹는 것을 보고 우리와 너무 비교되어 배가 아팠었다. 드디어 결과가 나왔다.
정식으로 구류3일 영창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절망이었다. 어떻게 또 3일을 이 곳에서 보내야 하나 생각하니 앞이 캄캄해서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정말 우리나라 사법제도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막연히 곱씹으며 각오를 새롭게 해서 이 시련을 이겨내야겠다고 다짐하며 ㅂ친구와 서로 의지하며 내 옆을 지켜주는 친구가 얼마나 소중하고 마음든든한 후원자인지 생각하면 고마울 뿐이었다. 너는 천상 영원한 나의 동반자로 태어났구나. 그래 인생 같이 한번 살아보자. 그러다보면 좋은 일도 있겠지하며 보내온 세월이 여기까지 왔는데 실제로 그 친구는 지금도 변함없이 옆에 있다는 사실이 항상 든든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가꾸는데 한 몫한다고 늘 생각하며 살고있다. 이제 정식 감방생활이 시작되어 기결수방으로 옮겨 신고식을 해야 할 형편으로 고참의 교육을 받고 가르쳐준대로 왕고참부터 신고를 하는데 여기까지 온 경위를 육하원칙에 의해서 죄목부터 보고하는 형식으로 진행을 해 나갔다.한 사람씩 차례대로 신고를 마치면 여지없이 군밤이 날라왔는데 이유는 이 새끼들 그까짓 무임승차로 여기까지 왔다며 잡범 취급을 하면서 업신여기는 투로 쥐어박는 것이었다. 신고가 다 끝나고 제일 끄트머리 마루바닦에 양반자세로 자리를 잡은 우리는 생전처음 겪는 감방생활이라 도대체 어떻게 처신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 앉아 있는데 옆에 뺑기통에서는 똥냄새가 코를 찔러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우린 최 말단이라 똥통 바로 옆자리라 더더욱 못 견뎌 자꾸 고참있는 쪽으로 뭐를 하는 척 하면서 옮겨다니는 요령을 부리다 혼이 나기도 했다. 지금도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궁금하지만 그때도 교도행정이 억망이었던지라 가끔 간수한테서 들여온 담배 한대를 가지고 고참부터 열 댓명이 차례로 뺑기통에 가서 피우고 나오면 우리는 마지막 두 모금정도를 피우고 변기통에 흔적없이 버리는 역할을 담당했는데 얼마나 독하든지 담배인지 독약인지 모를 정도로 지독한 맛이었지만 그래도 그 담배맛은 잊을 수가 없다. 그럭 저럭 세월을 죽여서 어느 덧 출감하는 날이 밝았다. 진짜 가슴설레였다. 그때의 심정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뻤다. 세상에 태어나서 생전처음 갇힌 생활을 하다보니 인간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조금은 알 것 같았고 내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온 몸으로 느끼며 이 더러운 곳에서 벗어나면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정직하게 살아야겠다고 새삼 굳게 다짐하면서 석방의 기쁨을 마음껏 만끽하며 둘이는 희희락락 서둘러 명학역으로 달렸다.
마음먹었던대로 역무원놈한테 사과를 받아내고 우리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불량배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 보이고 싶어 찾아 갔건만 그 놈은 콧방귀도 안뀌며 겨우 용산역 전철표로 때우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속으로는 그것도 감지덕지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으며 용산역에 도착해서 정말 목포행 열차가 출발할 때까지 승강장안에서 있다가 오르고 싶은 마음 굴뚝 같았지만 명절대목인 관계로 한 사람도 안에 있지 못하도록 쫓아내는 것이었다. 정말 난감한 노릇이었다.
여기서 ㅂ친구와 나는 또 운명의 갈림길을 가야만 했다. 나는 한번 전철로 인해 혼이 났기 때문에 정나미가 떨어져서 다시는 전철을 이용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어 밖으로 나가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 보자는 의견이었고 친구는 나가면 침투가 힘드니 어떻게든 안에서 버티기 위해서는 전철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 충돌하여 합의도출이 안되어 아쉽지만 갈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둘이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두 의견 다 정답일 수도 있었다. 한 치앞을 내다볼 수 없는 처지로서는 그것 또한 운명의 결단이었다.
여러분도 살면서 경험을 많이 해봤겠지만 단 둘이서도 의견을 일치시켜 합의점을 도출한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는 것을 아는 우리로서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더더군다나 악조건하에서는 민감해진 정신세계까지 더하여 의견일치는 기대할 수가 없었다.
이젠 각자 냉혹한 현실에서 생존방법을 찾아 요령껏 귀향열차에 몸을 실어야만 할 일념을 갖고 ㅂ친구의 향후 의향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가운데 홀로 떨어져 추위를 이기며 용산역 광장에 늘어져 있는 군중들 속에서 명절이라 귀향하는 고향사람을 만나지 않을까하는 실날 같은 희망을 안고 혹시나 아는 얼굴은 없는 지 한 명씩 훌터나가며 오늘은 기필코 성공해서 맞아 죽지 않을려면 명절 분위기에 편승해서 구정전에 집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탐색해 나갔다.
그런데 그 순간 멀리서 낯이 익은 한 구세주가 보이는 것이었다. 긴가민가 하면서 옆으로 가까이 가서 자세히 이리저리 살펴보며 기억력을 최대한 살려 눈치채지 않게 기웃거리는데 아니나 다를까 중학교 동창놈이 틀림없었다.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판국에 이름이 대수인가. 그건 나중에 알면 될 것이고 정말 혼자서 반가웠다. 그 놈은 쥐도 새도 모르는 가운데 혼자서만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입가에 미소를 가볍게 띄우면서 “야 너 제일중21회지? 야! 임마 나 희연이야 희연이 나 모르겠어” 하니 그 친구 어리둥절하여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시큰둥한 표정으로 알 듯 모를 듯 확신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속으로, "맞아! 틀림없이 중학교 동창이야!"하면서 "이 기회를 놓치면 나는 죽는다 정말 구걸을 해서라도 성공해야 혀" 하고 막무가내로 내 처지를 설명해 나갔다. 바지가랭이를 붙잡고 제발 용산역을 빠져 나갈 수 있도록 천안역까지 차비만 좀 달라고, 그 다음에는 내가 자신있으니까 알아서 갈 테니 그때돈으로 천원짜리 하나만 주라고 애걸복걸하는데 그 친구 영 반응이 시원치 않은 눈치였다. 나를 잘 모르겠다는 듯이 난감해 하면서 머뭇거리는 것이었다.
정말 환장하겠드만 이렇게 나를 몰라보나 중학교 졸업한 지 3년여 밖에 안되었는데 내가 이렇게 썩어 버렸나? 나하고 친했다고 기억되는 친구인데 나를 잘 몰라보다니. 하기야 그때 내 꼴이 말이 아니었으니 그 친구가 설마 내가 그런 몰골로 지 앞에 나타날 줄이야 꿈에도 생각못했을 것이라고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요즈음 용산역 노숙자꼴이었을 테니 말이야 아뭏튼 이 놈을 놓치면 나는 끝장이라는 심정으로 매달리며 끝내 억지로 아는 척을 하니까 마지못해 천원짜리 한 장을 동냥하듯이 주면서도 나를 확실히 몰라봤던 것 같다. 그 친구는 일로에 사는 "채장복"이라는 친구인데 요즈음 우리는 중학동창 모임에서 가끔 만나 그때 얘기를 하면서 박장대소를 하고 노는 사이가 되었으며 그때를 생각하면 희연이 너는 요즈음 용되었다고 놀려 댄다.
천신만고 끝에 천안역 기차표를 손에 쥐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귀성객 대열속에 당당히 끼어 개찰시간만을 기다리는데 그동안 차비를 구하느라고 추위를 전혀 느낄 겨를도 없다가 긴장이 풀리면서 몸이 춥다는 한기를 뼈에 사무치도록 느끼며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추위를 달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내 앞에 ㅂ친구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반가움에 뜨겁게 손을 움켜잡고 무사히 다시 만난 상봉의 기쁨을 채 느끼기도 전에 희비가 교차하는 순간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아무 탈 없이 고향열차에 올라탔을 것으로만 믿었던 ㅂ친구가 실패를 하고 밖으로 쫓겨 나왔다는 것이다. 결과론이지만 내가 선택한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하며 친구도 나와 행동을 같이했더라면 그 중학교 친구놈한테 천원짜리 한 장을 더 얻었을텐데 아쉬워하며 반가움반 착찹함반으로 이거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하며 내가 타고 갈 기차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그때까지 최대한 아는사람을 찾아서 한번 사정해보라고 하고선 나는 대열속 잡아놓은 내자리를 뺏길 수가 없어 자리를 지키면서 친구더러 열심히 찾아보라고 재촉을 해보고 서로 눈을 맞추며 가끔 신호도 보내 절실한 마음을 전하면서 그토록 헤매였건만 구세주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시간은 자꾸 흘러 개찰시간이 다가왔는데도 친구는 뾰쪽한 대책이 서질 않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거 또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이 기차표를 포기하고 친구와 행동을 같이 해야 하나 아니면 친구 혼자 놔두고 예정대로 타고 가야 하나 그 순간의 갈등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진퇴양난이 아닐 수가 없었다. 허나 나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후자의 생각을 지울 수가 없지 않은가? 그동안 나는 밖에서 떨면서 표를 찾아 얼마나 혼이 났으며 또 어떻게 얻은 기차표인데 이걸 포기하고 다시 새로 기약없는 미로를 헤매야 한다고 생각하면 당장 승차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절실해 미칠 지경이었다.시간은 흘러 드디어 개찰할 때가 되어 개찰구가 열렸다. 이걸 어쩌나 이대로 친구를 오지에 남기고 나만 비정하게 귀향열차에 올라타야 하나 혼자남은 ㅂ친구는 나를 얼마나 원망하면서 또 얼마를 헤매야 차비를 구해서 내려올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발길이 차마 떨어지질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한 것, 우선 나라도 살아야 나중에 친구를 구할 수가 있지 않겠나 하고 기약도 없이 내 자신을 자위하며 마음속으로 나를 정당화시키면서 친구와 작별을 하고 출구를 빠져나와 기차에 몸을 실었다.
콩나물시루 같은 찻속에서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나이 의리"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는데 내 자신이 비겁하게 느껴지며 친구를 배신한 것 같은 정말 기분이 찝찝한 감정을 안고 천안역 이후에는 도둑열차를 탄 죄로 차장들의 표검열이 있을 때면 앞뒤로 적절히 피해 다니며 실력발휘를 하는 동안 기차는 남으로 남으로 밤새 달려 드디어 새벽녘에 그립고 그리던 고향 사창역에 도착하는 것이다. 그 놈은 어떻게 구세주를 만나 무사히 내려오고 있을까 걱정을 해 보면서. 이젠 객지에서 떠돌던 시간은 끝났다. 지금부턴 집에 들어가 아부지와의 한판 승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소식 한번 없이 무려 보름 동안을 들어오지 않는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의 심정이야 오죽했겠는가. 지금 얘들을 키우는 부모된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나는 지금 얘들이 단 몇시간만 폰연락이 안되어도 마음 졸이며 걱정이 태산 같은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을 비교해 보면 그때의 부모님 심정을 헤아릴 수가 있을 것 같다.
마치 그 날은 구정날 새벽이 되는 시간이다. 그래서 착찹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서면서 새배를 올리며 용서를 빌 요량으로 집에 들어가 모깃소리만하게 엄마를 불러 내가 왔다는 신호를 보내서 엄마와 조용히 상봉을 했다. 엄마는 반가움반 염려반으로 맞아주면서 아부지의 그동안 심리상태를 전하며 무조건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라는 조언을 주신다. 대면하는 순간 아부지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인지 별 말씀을 하지 않고 경과를 물어 보는데 감방생활은 얘기도 꺼내지 못하고 그동안 서울에서 좋은 친척들 한테서 대접 잘 받고 잘 지내다 내려왔다고 거짓말로 둘러대고 무사히 무마가 되는 것이었다. 그 고난의 시간들을 지금까지도 아부지께서는 까마득히 모르고 계실 것이다. 무덤까지 비밀로 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깐. 별 탈없이 귀가를 마친 나는 그 동안의 피곤한 객지생활로 지친 심신을 모처럼 내집에서의 깊은 잠으로 해결하고 난 후, 나는 설날의 들뜬 분위기에 휩싸여 오전을 보내면서 한편으론 ㅂ친구의 무사 귀환이 신경쓰여 그 놈동네로 살금살금 기어가서 집안 동정을 살펴보며 기둘리고 있는데 아니 이 놈 목소리가 집안에서 들리는 것이 아닌가. 반가움에 뛰어들어가 친구 부모님 몰래 친구방으로 스며 들어갔다. 의리없이 친구만 남기고 먼저 내려와 버렸다는 죄책감에 친구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자초지종을 물어본 즉 학산 최득수 얘기를 하면서 구세주가 어쩌고 저쩌고 즐겁게 지껄이며 또 한번 우리는 죽어라고 웃어 제꼈다.
그 당시 정말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별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도 재미있어 하던 시절이었다. ㅂ친구 속으로는 나를 원망했으련만 겉으로는 내색을 않고 무용담만 늘어놓는 넉살에 나는 더 미안한 마음을 갖고 이번에 진 빚은 앞으로 살면서 언제든지 몇배 곱으로 갚아 주리라고 다짐했던 기억이 나는데 아직까지 그런 다짐을 그 친구한테 되갚지 못한 것 같아 항상 면목이 없다.
앞으로 살날이 많으니까 기회는 언제든지 오겠지 혼자 자위하면서 때를 기다려본다.
답답한 마음을 훌훌 털어버리고자 우리는 영산강 뱃나루가 한 눈에 바라보이는 신설포 큰 바윗산에 올라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밝은 미래를 꿈꾸는 시간을 가지면서 많은 얘기를 씨부렸던 추억이 아련하기만 하다. 귀향 며칠 후 사창역전 이발소 옆에서 ㅂ친구와 나는 몇몇 친구들과 어울려 조잘거리고 놀고 있는데 우연히 땅바닥에 펼쳐져 있는 신문지의 사진에서 낯익은 두 놈을 발견하고 깜짝 놀래 자빠질 뻔했다. 자세히 보니 다름 아닌 얼마전 감방에서 같이 지냈던 그 특수 강도놈들의 기사가 실려있는게 아닌가. 자세히 읽어보니 당시 같이 갇혀 있으면서 무용담으로 들었던 내용들로 기사가 채워져 있는 것이었다. 정말 이런 거물 강도들과 내가 감방동기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다른 친구들에게 자랑 아닌 자랑을 하면서 우리는 서로 처다보며 쓴 웃음을 짓고 있었다.
먼훗 날, 나는 그 때 다시는 감방생활을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던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쓰라린 체험을 또 한번 하게 된다. 땡.
첫댓글 오 호!! 두 사람들이 그 때 그 무렵 광주에도 왔었지, 난 학생이고, 자네들 검정고무신 신고 때꼽자구 날리며..ㅎㅎㅎ
안 가본데가 거의 없을 정도로 쏴 다녔지. 그시절에
리얼한 논 픽션 잘 보앗네.. 지난 일이닌까 재밋구만.. 방황하던 시절에 좋은 경험인것 같기도 하고, 얘들 키우는데 도움도 될듯하고,, 무엇보다 추억으로 말 할 수 있는 오늘의 상황이 고맙기도 하고..
잘 읽었다니 고맙네. 시간을 많이 허비했겠구먼. 쓸데없는 글로 미안하네
내 컴이 잘 못 된것인지.. 글씨 크기를 좀 줄였으면 좋겠어 ???
크기를 줄였네
광주.. 자취생 방에 찾아와서 잠은 안자고 갔던가 ???.....
그 기억은 없는데... 그랬을 수도 있었겠네
나는 기억이나네. 참 한심한 시절이었지...
욕망에 솔직하면서도 자유를 위해서 힘 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당당하고 지혜로운 우리 해창 아제 ~~ 스치고 스쳐 지나가고 흐르고 흘러 사라지는 모든 것들에 고이도록 하지않고 아주 천천히 머물러 모든 시간 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해창 아제 늘 건강하시고 좋은 일만 가득하세요.....
하짢은 글을 읽어 주었다니 고맙고 항상 사랑하는 우리친우누나 사색많이 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