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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채미정
명승 제 52호
구미시 남통동 산 249번지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건물. 경상북도 기념물 제55호. 고려 말 학자 길재(吉再)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하여 1768년(영조 44)에 창건되었다.
계류에 걸린 석교를 건너 흥기문을 지나면 우측에 채미정이 있고 좌측에는 구인재(救仁齋)가 있다. 후방에는 길재의 충절에 감격하여 읊은 숙종의 어필 오언구(五言句)가 보존되어 있는 경모각과 비각이 나란히 서 있다.
채미정은 중앙 1칸은 온돌방으로 꾸미고 사방 둘레에 모두 우물마루을 깔아 대청으로 꾸몄다. 온돌방의 사면에는 각각 2분합 들문을 설치하였으며, 대청 사면이 벽체 없이 개방되어 있다. 잘 다듬은 장대석 기단 위에 원통형으로 치석한 화강석 주초를 놓고 원주를 세웠다.
주상의 2익공은 쇠서[牛舌] 위에 연봉(蓮峰)을 조각하였고, 귀포는 귀한대와 함께 2제공 위에 용두를 두었으며, 주간에는 초각 화반(花盤)을 1개씩 배치하였다.
가구는 5량가로서 퇴량을 양봉이 받았고, 중앙 온돌방의 기둥이 고주인 관계로 퇴량 위에 접시대공을 놓아 외기틀을 받고 있다. 구인재는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중앙 2칸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양측면은 2통칸 온돌방으로 꾸며 전퇴를 둔 초익공의 백골집[白骨家 : 칠을 안 하고 목재면을 그대로 둔 집]이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도리사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산403번지에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아도(阿道)가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서라벌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겨울인데도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하여 있음을 보고 그곳에 절을 짓고 도리사라 하였다.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 절이 신라 최초의 사찰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처음의 절터는 태조산 기슭에 있는 옛 절터로 보고 있으며, 지금의 절이 있는 곳은 금당암(金堂庵)이 있었던 곳이다.
창건 이후 조선 후기까지의 역사는 전하지 않으며, 1677년(숙종 3)의 화재로 대웅전을 비롯한 모든 건물이 불타 버린 뒤, 1729년(영조 5)대인(大仁)이 아미타불상을 개금(改金)하여 금당암으로 옮겨 봉안하고 금당암을 도리사로 개칭하였다. 1807년(순조 7) 절을 중창하였고, 1823년 조사전(祖師殿)을 중수하였다. 1876년(고종 13) 극락전을 중건하였으며, 1922년 칠성각을 건립하였다.
1976년 6월 아도의 석상(石像)이 발견되었으며, 1977년 4월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을 해체, 복원하다가 금동육각탑 형태를 띤 사리구(舍利具)와 석가모니 진신사리(眞身舍利) 1과가 발견되었다. 이 사리구는 현재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인 극락전을 중심으로 태조선원(太祖禪院)·삼성각(三聖閣)·조사전·요사채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다포계 건물로 내부에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불상은 조선시대 양식을 띠고 있고 높이 129㎝, 무릎너비 92.5㎝로서 1731·1764·1876년에 개금하였다. 조사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이며 창건주 아도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470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을 비롯하여 아도화상 석상·세존사리탑·아도화상 사적비, 조선 후기의 탱화 등이 있다. 이 중 아도화상 석상은 높이 97㎝의 입상으로서 전면 너비가 좁아 기이한 감을 주나 조각의 윤곽이 뚜렷하다. 아도화상 사적비는 총 높이 296㎝, 비신 높이 197㎝로 그 뒷면에 자운비(慈雲碑)가 음각되어 있으며, 사적비는 1639년(인조 17)에, 자운비는 1655년(효종 6)에 새긴 것이다.
특히 세존사리탑에서 발견된 사리는 무색투명하고 둥근 콩알 크기의 큰 사리로 우리 나라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가치 있는 사리로 평가되고 있다. 또, 1876년에 그린 후불탱화(後佛幀畫)를 비롯하여 1881년에 그린 신중탱화(神衆幀畫)·독성탱화(獨聖幀畫)·칠성탱화(七星幀畫) 등이 있고, 《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 판목(板木) 24매가 보관되어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독동리 반송
천연기념물 제 357호
구미시 선산읍 독동리 539번지에 있다.
반송(盤松)은 소나무의 한 종류로 줄기가 밑둥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 줄기와 가지의 구별이 없고 전체적으로 우산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반송은 나이가 약 400년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13.1m이고 밑줄기 둘레는 4.05m이다. 줄기가 아래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갈라져 전체적으로는 부챗살처럼 퍼진 반송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안강 노씨가 마을에 처음 들어올 때부터 자라던 나무라고 전해진다.
이 반송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반송 중의 하나이므로 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수령(樹齡)은 400여년이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13.1m, 가슴높이 둘레가 7.2m이고, 지면부 둘레가 4.05m이다. 가지의 길이는 동·서쪽이 14.9m, 남·북쪽이 15.65m이다.
인가(人家)가 없는 농로(農路)옆에서 자라는 고립목(孤立木)이며 이웃 마을에 활터가 있었다고 한다. 안강 노씨가 입향(入鄕)할 때부터 자라온 나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자세한 내력(來歷)은 알지 못하고 있다.
출처:에코타임즈
4.지주중류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
구미시 오태동 산 1번지에 있다.
1587년(선조 20)에 인동현감 유운룡(柳雲龍)이 고려말의 충신이며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야은(冶隱)길재(吉再)의 높은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그 묘역을 수리하고 주변에 사당과 서원을 창건하고 그 앞에 세운 비석이다.
비석 표면에는 중국의 명필 양청천(楊晴川)의 글씨인 ‘砥柱中流’ 4자를 새겼고, 뒤편에는 서애(西崖)유성룡(柳成龍)이 ‘지주중류’의 뜻과 그것이 후학들에게 주는 교훈의 글이 새겨져 있다.
‘지주’라 함은 중국의 황하(黃河) 중류에 있는 기둥처럼 생긴 석산(石山)으로, 탁류 가운데 있으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산을 말하는 것으로, 지주산처럼 세욕에 흔들리지 않고 굳게 절개를 지킨 길재선생을 가리킨 것이다.
지금의 비석은 당시의 것이 아니고, 1789년(정조 4)에 다시 세운 것으로 전체적으로 보아 글자에 비하여 비석이 작으나 사람을 위압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죽장리 오층석탑
국보 제130호.
구미시 선산읍 죽장리 505-2번지에 있다.
높이 10m로 전탑형의 5층탑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높은 탑이다. 바닥돌에서 머리장식에 이르기까지 100여 개가 넘는 석재로 짜여져 있다.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리장식을 얹었다. 1층 탑신에는 남쪽면에 불상을 모셨던 것으로 보이는 감실이 있고 문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지붕돌의 아래면과 윗면은 계단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이 남아 있다.
기둥조각을 새기지 않은 탑신의 몸돌이나 지붕돌의 모습은 전탑(벽돌로 쌓아올린 탑)의 양식을 모방하고 있어, 안동과 의성 지역에서 유행했던 모전석탑 계열로 여겨진다. 웅장하고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우수한 조형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출처:브리태니커백과사전
6. 동락서원
구미시 임수동 373번지
1655년(효종 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장현광(張顯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76년(숙종 2)에 ‘동락’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지방유림에 의하여 복원됨과 동시에 장경우(張慶遇)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경덕사(景德祠), 6칸의 중정당(中正堂), 각 3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신문(神門), 3칸의 문루(門樓), 4칸의 고사(庫舍) 등이 있다.
묘우인 경덕사에는 장현광과 장경우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중정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마루는 원내의 행사와 유림의 회합장소로 사용되며, 협실의 동쪽 방은 헌관실, 서쪽 방은 재석실(齋席室)로 사용된다.
신문은 제관의 출입문으로,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의 공부장소로 사용된다. 주소는 서원을 관리하는 고자가 사용하는 곳이다.
이 서원의 강당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물로는 장현광의 유품 및 문집 7권 등이 있다. 매년 2월 중정(中丁 : 두번째 丁日)과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은 4변(籩) 4두(豆)이다. 재산으로는 전답 3,600평, 임야 6정보, 대지 1,000여 평 등이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7.주륵사 폐탑
구미시 도개면 다곡리 산123번지에 있다.
이 폐탑은 도개면 다곡리[다항 마을]의 청화산 중턱 주륵사 절터에 있다. 석탑의 전체 규모는 탑 재료의 망실이 많고, 매몰된 것이 많아서 알 수 없으나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탑의 지붕돌을 통해 그 규모를 추정 할 수 있다.
크기는 초층 지붕돌의 추녀 폭이 236cm, 2층 지붕돌 204cm, 3층 지붕돌 175cm이며, 5단 받침의 최하 폭이 제1 지붕돌의 경우 144cm, 제2 지붕돌 124cm, 제3 지붕돌이 107cm로 큰 탑에 속하며, 큰 규모의 지붕돌임에도 경쾌한 느낌을 준다. 또 탑 아래 부분 기단의 폭은 358cm, 위층 기단 면석의 높이는 117cm이다. 면석에는 모서리 기둥과 안 기둥이 새겨져 있다.
이 석탑은 8세기 후반이나 9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규모의 큰 탑이다.
주륵사지에 대해서는 「동국여지승람」에 ‘재냉산서 유고려안진소찬 승혜각비명’이라 기록되어 있고,「일선지」에 ‘재백마산하 유고려안진소찬 승혜각비명 부사이길배 구남관시 철훼재와회폐 금유유지’라 기록되어 있다. 주륵사는 조선초까지 사세를 유지한 듯 하나, 그 후로는 황폐화 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 구미문화원
8.모원당
문화재자료 제 390호
구미시 인의동 642-2번지에 있다.
이 건물은 여헌 장현광(1554-1637)의 고택으로 경내에는 청천당과 모유가 있다. 『여헌집』의 「모원당기」에 의하면, 여헌 장현광이 원래 살던 집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고 살 곳이 없자, 문인 장경우를 비롯한 문도와 친척들이 협력하여 1606년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청천당은 장현광의 자제인 청천당 장응일(1599-1676)이 건립한 당우로서 학문을 닦고 교유의 장으로 삼았던 곳인데, 1607년에 세워졌으며 1903년에 중건되었다. 여헌 묘우는 그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1650년에 창건되었다.
장현광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본관은 인동, 자는 덕회 호는 여헌이다. 23세가 되던 1576년(선조 9)에 재능과 행실이 조정에 알려지고 천거되어 주어진 관직에 대해 진퇴를 거듭하였다. 그러다가 1602년 공조좌랑과 형조좌랑, 공조참판, 형조참판 등 많은 벼슬이 주어졌으나 나아가지 않았다.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의 궐기를 촉구하는 통문을 돌리고 군량미를 모아 보냈다. 그러나 이듬에 2월 삼천도에서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입암산에 들어가 반년 후에 생을 마쳤다.
그는 관료로서 보다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바쳤으며, 재야의 산림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 후 1657년(효종 8)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강이다.
모원당은 소박하고 간결하며 ‘ㅡ’ 자형으로 정면 6칸·측면 1칸의 홑처마 정자지붕이다.
출처: 구미문화원
9.야은사
구미시 도량동 750번지에 있다.
1403년(태종 3)에 당시 경상도관찰사였던 남재(南在)가 길재(吉再)가 거처하던 곳에 가묘(家廟)로 사당을 건립하였다.
그 뒤에 길재의 유상(遺像)을 봉안하고 향사하다가 건물이 퇴락하여 1583년(선조 16)에 선산부사 유덕수(柳德粹)가 중수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1602년에 선산부사 김용(金涌)이 다시 중건하였으며, 그 뒤 순조 때에 이르러 크게 중수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972년에 후손이 중수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사당 안에는 충절(忠節)이라는 시호교지와 《야은문집 冶隱文集》의 판각본 및 문집 1백여 권이 보존되어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10.박서생 묘
구미시 도량1동 밤실 동쪽 산 중턱에 있다.
본관은 비안(比安). 자는 여상(汝祥), 호는 율정(栗亭). 할아버지는 윤보(允甫)이고, 아버지는 중랑장(中郎將) 점(漸)이다. 길재(吉再)의 문인이다.음보(蔭補)로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되어 1401년(태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407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 우정언에 제수되고 전 20결과 노비 1구(口)를 하사받았다.정언을 거쳐 이듬해 병조좌랑이 되었으나 반차(班次)를 무시한 것이라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419년(세종 1) 사헌부집의가 되었고, 다음 해 4월 장령(掌令) 정연(鄭淵)과 함께 철원에 가려는 상왕(上王 : 태종)을 간하다가 의금부에 하옥되었다.
1426년(세종 8) 대사성이 되고 1428년 정월, 종묘·제향의 대축판사(大祝判事)로 친향(親享 : 임금이 몸소 제사를 지내는 것) 때 축문을 8자나 빼고 읽어 무리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11월 대사성으로 통신사가 되어 일본에 갔다가 다음해 12월에 돌아왔다. 1429년 우군첨총제(右軍僉摠制), 이듬해 집현전부제학, 1431년 공조참의·병조참의에 임명되고 1432년 병조좌참의·판안동대도호부사(判安東大都護府事)를 지냈다.
1433년 4월, 앞서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 수차(水車)의 이점을 건의하여 농사기술의 혁신을 가져왔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으며, 비안의 구천서원(龜川書院)에 제향되었다. 편서로는『야은언행록(冶隱言行錄)』이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11.박서생 기적비
구미시 남통동 채미정 아래에 있다.
비석은 율정공 박서생 기적비 생애 야은 길 재 선생간의 학습하시여 실천 벼슬길 내용을 기록한비석으로 70년대 설치하려하였으나 도립공원측에서 불가입장에서 문래방아 등 농업개혁선구자란 말에 80년초에 세워젔고 터는 길씨 문중에서 제공 하였으며 경상북도 도립공원 안이며 야은 길재 선생 강도하시고 추묘하고 있는 채미정 70M아래 이고 금오산 도립공원우측 입구 저수지 에에서 50M지점이다. 주위는 선비의 기상을 상증하는 대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다.
출처-네이버 블로그 "비안박씨 대종회"
12.도선굴
구미시 남통동 금오산 대혜폭포 오른쪽에 있다.
신라 말 풍수의 대가인 도선이 참선하여 득도한 곳이라 하여 도선굴이라고 하며, 암벽에 뚫려 있는 천연 동굴로 큰 구멍이라는 뜻으로 대혈(大穴)이라 하기도 한다. 최인재의 『일선지(一善誌)』에 근거하면 도선굴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시기는 조선 전기이고, 또 다른 이름인 대혈이라고 불렸던 것은 고려시대로 추측된다. 굴 아래 대혈사지 터, 현재 공원 주차장이나 백운재(白雲齋) 또는 경파정(景坡亭)이 있는 곳을 대혜 또는 다혈이라 부르니 대혈이라는 명칭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일선지』에 따르면 “넓이가 16척, 높이가 15척, 깊이가 24척으로, 그 안에 얽어 만든 집[構屋]이 두 칸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인동(仁同)·개령(開寧)의 수령과 향민 500~600명이 피난하였는데, 당시 바위틈에 쇠못을 박아 칡이나 등 넝쿨로 이동했던 상황이어서 왜군은 범접하지 못했다고 한다. 현재의 통로는 1937년 선산군 구미면에서 개통한 것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13.장현광 묘
구미시 오태동 산23-1번지에 있다.
장현광(張顯光, 1554년 ~ 1637년 9월 7일)은 조선시대 중기의 학자, 문신, 정치인, 철학자, 작가, 시인이다.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이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힘써 이황(李滉)의 문인과 조식의 문인들 사이에 학덕과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수많은 영남의 남인 학자들을 길러냈다. 류성룡(柳成龍) 등의 천거로 여러 차례 내외의 관직을 받았으나, 대부분 사퇴하였고 그 중에서 부임(赴任)한 것은 보은현감(報恩縣監)과 의성현령(義城縣令)의 외직과 내직(內職)으로는 공조좌랑(工曹佐郞),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형조참판(刑曹參判), 의정부우참찬 등이다. 1602년(선조 35) 공조좌랑으로 부임하여 정부의 주역(周易) 교정사업에 참여하고 이듬해 잠깐 의성현령으로 부임했으며 그 외에는 모두 사양하거나 사직, 고사하였다. 그 뒤 형조참판직에 잠시 취임하였으나 이후 계속 관직을 사퇴하였다.
광해군 때 합천군수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고, 인조 반정 이후 조정에서 학문적 권위를 인정한 산림(山林)에 꼽혔다. 인조조에도 사헌부지평·집의 등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학문에 전념했다. 이괄의 난 때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어 취임하였고, 이후 형조참판, 대사헌 등에 제수되어 마지못해 취임했으나 사퇴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우참찬에 임명되고 의병을 일으켜 청나라군과 교전하는 한편 군량과 군자물품의 조달과 지원을 주도했으나, 패전 후 실망하여 동해안의 입암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유교의 입장에서 온 세상의 만물이 생겨나는 근원을 이르는 태극을 내세우되 일체유(一體儒)와 그 근원을 대답을 기다리는 것과 조화의 논리로 융화 종합하는 철학적 근거를 명시하였다. 이황의 문인인 한강 정구의 조카사위였다. 이황의 학맥이자 영남학파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던 처숙인정구를 통해 퇴계와 남명의 학통을 사숙하고, 그의 문인으로는 허목, 유진(柳袗) 정극후(鄭克後) 전식(全湜) 김응조 등이 배출되었다. 또한 허목을 통해 근기남인성리학파와 남인실학파로도 학통이 이어졌다. 노수성, 장순, 의 문인이다. 경상북도 인동 출신.
출처-위키백과
14.최현 유허비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186번지 집 뒤에 있다.
최현의 자는 계승(季昇), 호는 인재(齋)이며 전주 최씨이다. 좌찬성 심의 아들로, 해평면 해평리에서 명종 18년(1563)에 태어났다. 임진왜란으로 우리의 고장이 폐허가 되어 많은 역사적 유물이 전란으로 없어지므로 이를 걱정하여 심혈을 기울여 지리 및 역사, 인물,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영역에 걸쳐 소상하게 나타낸 일선지(一善志)를 지었고,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면서 학문을 좋아하고 후학을 가르치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재질이 뛰어나고 문장과 덕망이 높아 이름을 떨쳤다.한강 정구, 학봉 김성일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생은 나라를 구하는 방책을 글로 써서 선조께 올렸으며 스스로 의병에 가담하여 적과 싸우기도 하였다. 인조(仁祖) 18년(1640) 78세를 일기로 마침내 세상을 하직하니 조정에서는 순국보조공신 예조판서 완성군이란 가자와 정간이란 시호를 내렸다. 숭산서원에 배향되어 있으며, 문집이 있다.해평리 마을 남쪽 나지막한 송산에 올라가면 대나무 숲에 가려져 있다."인제 최선생 유허비"라고 적혀 있다.1968년 음력 3월에 세웠다.
출처-구미시 홈페이지
15.쌍암고택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239번지에 있다.
쌍암고택은 검재(儉齋) 최수지(崔水智)의 후손인 최광익(崔光翊)이 1731년(영조 7)에 아들의 살림집으로 건축했다고 한다. 집 앞의 큰 바위가 2개 있어 쌍암고가(雙岩古家)라고 하였다. 동서로 긴 대지에 앞에서부터 대문채, 사랑채, 중문간채, 안채, 사당을 차례로 배치하였다. 사랑채만 남향이고 나머지는 동향이다.
안채는 비교적 큰 6칸통 대청을 중심으로 하여 그 좌우에 방과 부엌 등이 ㄷ자 형을 이루고 있다. 안방 뒤편에 찬방을 두고 있는데, 이 지역에서 흔히 나타나는 평면구성이다. 사랑채는 좌측에 4칸으로 구분되어 전(田)자를 이룬 온돌방을 두고 3칸 대청과 1칸 제청(祭聽)을 배열한 겹집이다. 사당은 전면에 툇간을 두고 그 뒤편 3칸 모두에 아주 높은 굽널을 들인 장자살문을 달았다. 막돌 초석위에 방주를 세우고 장혀만 수장한 3량가 홑처마 맞배지붕집이다.
출처-다음 블로그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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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알찬 구미 답사가 기대됩니다.
저도 기대됩니다~^^
충성씨! 자료집 복사해 오나요? 아님 제가 해야할까요??
국장님이 인원파악해서 해 오시면 고맙겠습니다~^^
10여 분 안팍이겠지요... 적어도 여덟분에서 많으면 열 다섯분 정도... 정확한 인원은 당일 아침에 가봐야 될꺼예요...
자료집은 어제 부회장과 편집을 했습니다. 부화장님이 자료를 복사해오기로 했는데, 국장님이 하셨다면 부회장에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15부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