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관한 시
ㄱ 가을의 옛집 ㅡ 박주택 감꽃 피는 옛집으로 ㅡ 유하 고가 ㅡ 박영희 고향집 ㅡ 문 창갑 그 노인이 지은 집 ㅡ 길 상호 그리운 옛집 ㅡ 김 영남 그린 듯이 앉아 있는 풍경 ㅡ 박 형준 그 영화 속 집으로 ㅡ 손 한옥 그 집 ㅡ 김 상미 그 집 뜨락에는 ㅡ 박화목 그 집 뒤꼍 ㅡ 황학주 그 집에 누가 사나 ㅡ 이 진명 그 집에 누가 사나 했어 ㅡ 양 전형 그 집이 아름답다 ㅡ 신 경림 기와집2 ㅡ이 윤학 길갓집 ㅡ 장철문 ㄴ 남아 있는 집 ㅡ 이 명주 내 살던 옛집 마당에 ㅡ 안 도현 내 살던 옛집 지붕의 갸륵함에 대해서 ㅡ 장 석남 너와집 한 채 ㅡ 김 명인 농가 ㅡ 유금 누구의 집이라 할까 ㅡ 이 성복 ㄷ 달은 어둠 속에 집을 짓는다 ㅡ 임 영석 두고 온 집 ㅡ 나 희덕 들 가운데 그녀의 집 ㅡ 양성우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ㅡ 정 진규 ㄹ 라일락 피는 그 집 ㅡ 이 승희 ㅁ 마음의 집 한 채 ㅡ 감 태준 머나먼 옛집 ㅡ 정 병근 무늬들은 빈 집에서 ㅡ 이 진명 물 속의 집 ㅡ 이 상국 ㅂ 바람이, 가끔 그 집을 들여다보네 ㅡ 이 영식 빨래궁전 ㅡ 문 인수 봄날 옛집에 가서 ㅡ 이 상국 봄날 지나쳐간 산집 ㅡ 문 태준 불 꺼진 집 ㅡ 장 석남 비로 만든 집 ㅡ 류 시화 ㅅ 산골에 오두막을 짓다 ㅡ 이 기철 산속 깊은 집 ㅡ 정약용 새들은 황혼 속에 집을 짓는다 ㅡ 장석주 시골집 ㅡ 정약용 시골집에 가면서 ㅡ 공광규 ㅇ 옛날의 그집 ㅡ 박 경리 옛집 ㅡ 배경숙 오래된 집 ㅡ 이 승희 오래된 집은 달밤에 알을 품는다 ㅡ 최 종무 오래된 한옥 ㅡ 심 재휘 옹이 속의 집 ㅡ 김 완하 외인촌 ㅡ 김 광균 우리집 ㅡ 권 정생 ㅈ 장독대가 있던 집 ㅡ 권 대웅 저녁의 집 ㅡ 이 상국 저 집 ㅡ 권대웅 집을 지나치다 ㅡ 이영선 집장구 ㅡ 손택수 ㅊ 초가집이 보인다 ㅡ 김 영남 ㅌ 탄광 마을을 지나며 ㅡ 임 길택 ㅍ 폐가 ㅡ 강 연호 피리 ㅡ 박 형준 ㅎ 하늘의 집 ㅡ 이 상국 해바라기집 ㅡ 오 철수 허물어진 집 ㅡ 심 재휘 혼자 가는 먼 집 ㅡ 허수경 흐르는 집 ㅡ 김 명리 힐던새는 집을 짓지 않는다 ㅡ 주 용일
가을의 옛집 박주택 가을의 옛집 저 곳, 구부러진 발톱을 바라보며 스산하게 등을 기대던 가을의 번지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이리저리 불려 다니다 흙 틈에 끼어 쓰린 소리를 내며 부서지던 곳 청춘의 집이 그렇게 구부러져 있었으니 낮이 가고 밤이 가고 가을이 왔다
가을이 왔다, 어쩔 것인가 누가 저 집의 누룩 슬던 방을 기억할 것인가
아직도 숨골에 오목하게 남아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연기로 피어 오르는 상처들의 누옥
나뭇가지가 스산하게 그리움을 부추겨 세우는 또 다른 가을의 땅에 아물지 못한 상처들만 모여 검은 잎사귀로 뒹군다
시집 ㅡ 꿈의 이동건축. 사막의 별 아래에서
감꽃 피는 옛집으로 유하 쑥국새와 나누려 했던 메아리는 내 안에서 캄캄하게 갇히고 적막의 에너지로 흔들리는 들풀과 벼 잎사귀들
참매미들 참으로 온 생애를 다 바쳐 울 때 거대한 피리 구멍처럼 차라리 한 마을이 따라 울었다 살아 있으라 살아 있으라 서로를 아프게 찌르며 무성한 가시를 키우는 탱자나무 숲
끊임없이 목숨들을 지우려는 폐허의 힘과 온 몸으로 폐허를 이겨내려는 목숨들이 팽팽하게 맞서는 그곳에서
오래 붐비는 고통의 모래알 밟으며 세월보다 먼저 세월을 살아버린 할머니 감꽃이 노릉에 번져가듯 걸어 나오셨다
<세상의 모든 저녁> 민음사 .1993년
고가古家 박영희 고가에 갇힌 세월이 질기다 낡은 지붕 위에 하늘을 향해, 유유히 가지를 뻗는 눈 먼 나무 한 대는 희망의 손길로 올려졌을 대들보는, 쌓이는 절망의 무게에 눌려 늙은 안주인의 허리처럼 휘어지고 추녀 아래 포위된 백열등은 어둠을 몰아내려 용을 쓰지만 도처에서 낮은 포복으로 기어드는 음모 이제 더 이상 누군가와 견줄 수 없는 그래서 아직은 수평선을 유지하고 싶은 고가, 그 어깨 위로 기우뚱 얹히는 세월
고향집 문창 나 지금 아우라지 정선에 와서 임종 직전의 폐가 한 채 문병하는 중입니다
억새와 거미줄, 그리고 함부로 살 찢고 다니는 바람에 점령당한 스산하고 가련한 폐가지만 이 집도 예전엔 한 가족이 슬어낸 하나의 추억을 머금고 있었을 심줄 푸른 고향집이었습니다 무조건 받아주고, 무조건 안아주던 고향집, 아버지와 어머니 선산에 누우신 후 사람 냄새 사라지니 빠르게 폐가 되었지요
제몸의 문이란 문 죄다 열고 집은 아직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입이다 저리 숨기 잦아지는 쇠잔한 몸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요
폐가 된 고향집은 애면글면 버티어 보지만 결국은 와르르 무너지며 집의 일생을 마칠 것이니 타관 떠도는 자식놈들 훗날 필경 저녁놀에 울먹울먹 얼굴 묻고 고향집의 살 냄새 사무치게 그리울 것입니다 그러다 그러다
어둠이 밀물지는 생의 오후 어느 날엔 불현듯 돌아가고 싶겠지요 돌아가서 버리고 온 고향집 식은 아궁이에 다시금 군불 지피고 싶겠지요
고향집 없는, 너무 늦은 그때
그 노인이 지은 집 길상호
그는 황량했던 마음을 다져 그 속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먼저 집 크기에 맞춰 단단한 바탕의 주춧돌 심고 세월에 알맞은 나이테의 소나무 기둥을 세웠다 기둥과 기둥 사이엔 휘파람으로 울던 가지들 엮어 채우고 붉게 잘 익은 황토와 잘게 썬 볏짚을 섞어 벽을 발랐다 벽이 마르면서 갈라진 틈새마다 스스스, 풀벌레 소리 곱게 대패질한 참나무로 마루를 깔고도 그 소리 그치지 않아 잠시 앉아서 쉴 때 바람은 나무의 결을 따라 불어가고 이마에 땀을 닦으며 그는 이제 지붕으로 올라갔다 비 올 때마다 빗소리 듣고자 양철 지붕을 떠올렸다가 늙으면 찾아갈 길 꿈길뿐인데 밤마다 그 길 젖을 것 같아 새가 뜨지 않도록 촘촘히 기왓장을 올렸다 그렇게 지붕이 완성되자 그 집, 집다운 모습이 드러나고 그는 이제 사람과 바람의 출입구마다 준비해둔 문을 달았다 가로 세로의 문살이 슬픔과 기븜의 지점에서 만나 틀을 이루고 하얀 창호지가 팽팽하게 서로를 당기고 있는, 불 켜질 때마다 다시 피어나라고 봉숭아 마른 꽃잎도 넣어둔, 문까지 달고 그는 집 한 바퀴를 둘러보았다 못 없이 흙과 나무, 세월이 맞물려진 집이었기에 망치를 들고 구석구석 아귀를 맞춰나갔다 토닥토닥 망치 소리가 맥박처럼 온 집에 박혀들었다 소리가 닿는 곳마다 숨소리로 그 집 다시 살아나 하얗게 바랜 노인 그 안으로 편안히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작가 한승원의 해산토굴
그리운 옛집 김영남
옛집은 누구에게나 다 있네 있지 않으면 그곳으로 향하는 비포장 길이라도 남아 있네 팽나무가 멀리까지 마중 나오고 코스모스가 양옆으로 길게 도열해 있는 길 그 길에는 다리, 개울, 언덕, 앵두나무 등이 연결되어 있어서 길을 잡아당기면 고구마 줄기처럼 이것들이 줄줄이 매달려 나오네 문패는 허름하게 변해 있고 울타리는 아주 초라하게 쓰러져 있어야만 옛집이 아름답게 보인다네 거기에는 잔주름 같은 거미줄과 무성한 세월, 잡초들도 언제나 제 목소리보다 크게 자리 잡고 있어서 이를 조용히 걷어내고 있으면 옛날이 훨씬 더 선명하게 보인다네 그 시절의 장독대, 창문, 뒤란, 웃음소리 .. 그러나 다시는 수리할 수 없고, 돌아갈 수도 없는 집. 눈이 내리면 더욱 그리워지는 집 그리운 옛집
어느날 나는 전철 속에서 문득 나의 옛집을 만났다네
그러나,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나의 옛집이 아니었네
그린 듯이 앉아 있는 풍경 박형준
비가 오면 민둥산인 마음은 밑뿌리로 하얗게 울었다 비가 오면 새파란 양철지붕의 페인트칠이 벗겨진 자리에 녹이 한 번 더 슬고, 여름 내내 붉은 반점이 집의 살갗을 뒤덮었다 우리 집 앞으로 흐르는 개울창에 녹 같은 붉은 꽃들이 섞여 흘러갔고, 밤이 되어 송진이 녹아 흐르는 여름이 가장자리에 쇠파리떼들이 고요히 끓었다 하늘에 붉은 달이 양철지붕 칠이 벗겨진 자리에 돋아난 반점 같은 꽃들을 핥아주었다 달의 긴 혀로 인해 나의 몸은 언제나 신열이 났다 먼지 자욱히 날리며 집을 나간 개는 침을 하얗게 흘리며 돌아오고 가난한 집일수록 커다란 솥만한 잎을 흔들며 벌레 많은 해당화 그늘이 어둠 속에서 흔들렸지 언덕 위에 언덕이 생기고 구름을 이루며 산들이 달아나고 피가 도는 발바닥 같은 꽃들이 해당화 위를 지나가자 그 잎 몇 개에는 흔적으로 태어난 아이들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바람이 불 때마다 그린 듯이 앉아 흔적을 흔적으로 지우려고 열매를 무수히 매단 나무를 떠올리곤 한다 병든 어머니의 희게 빛나는 피부 밑에 천길 낭떠러지 검은 물이 흘러간다
해당화
그 영화 속 집으로 손한옥
가도가도 마사토 깔린 산길을 내가 달린다 캡슐처럼 싸인 감꽃을 찢어 떫은 한 입 가득 넣고 언제나 조급했다 올밤나무 아래서도 풋밤을 깠다 밤가시 박힌 고무신을 신고 길들지 않은 망아지처럼 산을 탔다 너무 일찍 나를 쫓던 남자 아이가 있었고 열두 살 그 아이는 얄궂게도 왕고모댁 손자였다 긴 강변 아따리목에서 수퉁미 강변까지 부농의 땅콩밭 지주였었다 생땅콩처럼 비린내 나던 풋정 그래도 난 땅콩이 익어가는 강변을 갔다
어른이 될 때까지 늘 어머니의 敵은 나였고 말없이 나만 지켰다 그 어머니 지금 가고 나의 과거만 남은 빈집 오늘 스크린 속으로 달려간다 나의 미래가 있을지 모를 어머니의 그 집으로
그 집 김상미
언제나 그 집이 그립습니다 대청마루 한 켠에서 들려 오던 엄마의 다듬이질 소리가 혀를 끌끌 차시면서도 끝까지 신문을 읽어 내리시던 아버지 토닥토닥 싸우면서도 동생과 함께 듣던 모차르트. 브람스,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이, 김민기의 노래가 뭐든지 숨길 수 있고 그 속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타인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던 집이, 집 안의 집. 우리집이 그립습니다
그 집에서 나는 삶의 계율을 익혔습니다 둥그랗게 깎인 사과의 심장을 맛보았습니다 불가사의한 가족의 현 그 나긋나긋한 갈등들을 호흡했습니다 평탄하지 않았지만 사방으로 난 창문 밖으론 하늘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그대로 보였습니다 마당 한 모퉁이의 깊은 우물 속의 짙푸른 이끼 냄새가 벽돌 하나하나에 스며들어 냄새만으로도 세월의 굴곡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집이었습니다
지금은 그 지붕 아래 아무도 살지 않습니다 포크레인의 방문과 함께 시작된 생체 해부 이후 그 집은 도로가 되어 버렸습니다 크고 작은 차들로 흩뿌려진 무덤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족애는 존재하지만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추억이, 음악이, 환희의 정령들이 짙푸른 숨소리가 한없이 배어있던 벽돌들은 다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집의 내력 또한 거기에서 끝이 났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더 이상 그 집은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세계는 집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집 안의 집, 우리집은 형이상학 속으로 잠겨 버렸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발굴되지 못한 황금의 사닥다리 그 사닥다리를 오르내리는 건 햇빛뿐입니다 바람뿐입니다 기억뿐입니다 가까스로 타오르는 옛 감정뿐입니다
그 집이 그립습니다 그 집의 활기, 그 집의 유리창 그 집의 우물 그 집의 흙 그 집의 채송화 그 집의 가족들이 다 그립습니다 하늘이 무너질까 두려워 잠을 설쳤다던 옛 켈트족처럼 내 삶에서 그 집이 무너져 내릴까 겁이 납니다 하여 나는 아직도 그 집에 빗장을 걸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집의 영화처럼 초목을 삼키고 보도를 삼키고 시간을 삼키고 슬픔을 삼키고 체취를 삼키고 사람들의 뜨거운 한숨을 삼켜 어찔어찔한 옛향기로 천천히 심연으로 심연으로 기울어들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 집은 바다가 보이는 언덕 끝에 있었습니다 그 집이 그립습니다 눈물겹게 그립습니다
그집 뜨락에는 박화목 그 집 뜨락에는 담장가에 철 따라 무지갯빛 고운 풀꽃이 소복이 핀다 꽃냄새 솔솔 아롱진 꿈을 담아 착한 아기 귓가에 소곤소곤 속삭인다
그 집 뜨락에는 하얀 달밤에 하얀 달빛 내리고 소쩍새도 날아와 밤새 노래한다 창문으로 조용히 들여다보며 달님이 들려주는 하늘나라 이야기
초록 바다 잔잔한 물결 같은 사랑의 손 아가 손을 꼭 잡아준다 언제나 변함없이 맑은 마음씨 고운 노래로 가득히 넘쳐 흐른다 그 집 뜨락에는
강원도 고성 어명기 고택 담장
그 집 뒤꼍 황학주 그 집 밤하늘에 바람이 불 때 말인데 그 집 가면 뒤꼍으로 눈과 귀를 끌고 갈 테니 풍경이 되어버린 우레와 번개들 때앵땡거리는 감나무는 알아볼 수 있겠네 금 나간 담장 밑에 상호없는 세월을 팔러온 방석이 있다 치면 그 위에 헛디딘 발 하나가 여태 가을 마다엥 달려있다 치면 그 열매가지에 비밀인 동안 낳아진 생에게 그리워요 하면
어머니, 나이테로만 된 감나무 옹그린 가지를 몸 위로 펴드는 일이 펑펑 또 한가지에서 발갛게 달려 울려는 것이었다는 것은
그 집에 누가 사나 이진명 그 집에 누가 사나 내가 사나 내 외로운 마음이 수족을 움직여 식기를 씻고 사나 그토록 기척 없다니 이슬비 벌써 반나절인데 지우산 쓰고 오늘도 올라가본 언덕 아래 지붕도 방문도 마당도 대문도 숨죽인 옛 영화의 먼 화면만 같네 방문 열릴 것만 같아 마당의 흰 빨래들 홀홀 걷어을일 것만 같아 그 집에 누가 사나 거울 속에도 이슬비가 내리고 눕고 일어나고 걸어다니는 한 형상 긴 치마를 끌고 차를 끓이는 노부인이랄지 미망인이랄지 그 집엔 꼭 그런 형상이 살리 지우산에 이슬비 받은 지 오래 하루가 가네 기다려도 하루만 가네 조용할 그 부인의 거동 볼 수 없네 기다리는 마음이 지우산을 접고 이슬비 속을 내려 대문의 고리를 따지 어느새 안에서 방문을 열고 나와 가엾은 마당의 흰 빨래들을 걷어 들이지 다시 옛 영화의 먼 화면처럼 숨죽이는 그 집에 누가 사나 내가 사나 내 외로운 마음이 손등에 똑 떨어지는 물방울에 놀라 한차례 지우산을 흔들며 사나 고흐 아뜰리에
그 집에 누가 사나 했어 양전형
그집에 누가 사나 했어 인기척 없는 옛날 기와집 그 집에는 뭔가 아픔이 있는 듯 했어 장벽처럼 바깥 세상을 막아 놓은 울타리가 그렇고 어린 봄날 길 쪽으로 눈물 떨구는 목련이 그랬어
그집에 누가 사나 했어 어쩌면 감금된 누군가가 울고 있을지 몰라 봄이 무르익은 4월 그믐밤 울타리를 기어 나와 길 밖으로 목을 내밀고 피를 토하듯 피어내리는 장미가 그랬어
하늘을 우습게 여긴다는 능소화가 한여름 불햇살을 맞밀며 흐드러지게 조악거리다가 울 밖으로 그 생모가지를 내던지고 있었다 도대체 그 집에 누가 살길래 무슨 일이 벌어지길래 얼마나 못 견뎠으면 저러랴 싶었어
그렇게 그렇게 꽃들 다 밖으로 떨어지고 낙엽지고 늦가을, 그 집에서 웨딩드레스 입고 나오는 노처녀 하나 눈이 부시게 걸어나오는 하얀 꽃 한송이!
그 집이 아름답다 신경림 저분이 선생님이시다 삼촌의 외경어린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그 사랑방은 주춧돌도 집터도 남아 있지 않다 모란과 작약이 있던 마당에 칙칙한 개망초가 어지럽게 피어 스산하다
그는 모시 중의 차림이다 어느새 그보다도 나이가 많아진 내가 그 앞에 앉아 있다 선생은 평양을 가보았소? 개성을 가보았소? 그것이 당신이 꿈꾸던 아름다운 세상이었소? 나는 묻고, 그는 대답이 없다 먼 산만 보고 있다
그 안채도 우물도 간 곳이 없다 울 너머로 내다보던 살구나무도 없다 묵밭에 개망초만 스산하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묵밭은 허옇게 빛이 바랜다 산도 하늘도 허옇게 바랜다 그의 뜻을 따라 목숨을 버린 젊은이들의 넋이 허옇게 바랜다
돌아오는 차 속에서 그 집은 재생된다 사랑방과 대문 안으로 들여다보이던 우물과 그 앞의 살구나무가 되살아나고, 집 뒤로 늘어섰던 대추나무들이 되살아난다 그는 모시 중의 차림이다 개망초와 젊은 넋들이 묵밭을 허옇게 덮고 있지만.
그 집이 아름답다 그가 이룬 것이 없어 아름답고 그의 꿈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어서 더욱 아름답다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아 아름답고 아무 것도 남길 것이 없어 아름답다 그 집이 아름답다 구름처럼 가벼워서 아름답다 내 젊은 날의 꿈처럼 허망해서 아름답다
녹우당
길갓집 장철문(1966 - ) 전북 장수 처마 밑에 빗방울이 물잠자리 눈알처럼 오종종하다
들녘 한쪽이 노랗다 은행나무가 두 그루 세 그루
빗방울 몇이 제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눈물처럼 뚝뚝 떨어져 내린다 남은 물방울이 파르르 떤다
은행잎이 젖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툭툭 떨어져 내린다 반나마 깔려서 노을이 이미 들녘 한쪽을 덮었다
빗방울 한쪽이 노랗다
기와집2 이윤학 죽은 줄 알고 잘라버린 호두나무가 뒤늦게 새순을 피워낸다, 새롭게 태어난다! 죽은 줄 알고 묻어버린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
검불들이, 날아가려고, 꿈틀거린다
굴뚝 옆에 세워놓은 나무 사다리 검버섯이 피고 있다, 뒤뜰에 딸기꽃이 저절로 하얗게 피어났다
오줌통이 쉴새없이, 부글부글 거품을 몰아 올리고 역겨운 냄새가 퍼져나간다
현기증 속을 새들이 날아간다 물 없이 깊은 물 속을 날아서 간다 ....
하늘은 언제나 푸르렀고 무너지지는 않았다
종달새 한 마리가 하늘 끝으로 솟구칠 때 아아아, 엉킨 마음의 실타래도 따라 풀려나간다
남아 있는 집 이명주(1952 - ) 대구
이삿짐 가득 실은 말 달구지 기적소리 들리는 푸른 굴다리 지나 門안 동네로 따각따각 들어갈 때 아버지 30촉 전구알 돌려 꼽으면서 씩씩히 말했네 "자 여기가 이제부터 우리가 살 집이다" 새 벽지가 뿜어대는 꽃 냄새를 맡으면서 나는 나비 같은 언니에게 물어 보았네 "왜 집은 함께 이사 오지 않았을까?" "바보야 집은 그냥 거기에 남아 있는 거야." 노을처럼 쓸쓸함이 몰려올 때 남아 있는 집 멀리 어둑어둑 누워 있었네 능소화 피어 있는,
시와 함께 하는 오후 ㅡ 김 용락 엮음
내 살던 옛집 마당에 안도현
내 살던 옛집 마당에 햇볕이여, 너는 어쩌자고 그리 서럽게 부서져내리는가? 담장 위에서 고추 널은 멍석 위에서 툇마루 끝에서 끼리끼리 도란거리다가 나에게 그만 들키고 마는가?
햇볕이여 어쩌자고 가을이면 내 살던 옛집 마당에 과꽃을 무더기로 피어놓는가? 어쩌자고 그 꽃송이마다 세상을 보는 눈을 달아 주는가? 아무 일도 없는데 괜스레 꽃잎들 눈물 핑 돌게 하는가?
살 속의 뼈까지 다 들여다보일 것 같은 날 너는 알겠구나 시냇물 따라 떠났던 내 유년의 송사리떼가 이맘때면 왜 살이 통통 오른 새끼들 데리고 상류로 거슬러오르고 싶어하는지를 물 속 내려다보듯 너, 알겠구나
내 살던 옛집 마다엥 햇볕이여 자두 같은 가슴을 가지고 있던 계집애들은 돌아왔는지 그동안 누가 세상한테 이기고 누가 졌는지 나는 어쩌자고 궁금한 게 많구나
내 살던 옛집 지붕의 갸륵함에 대해서 장석남
나는 그 집 지붕의 갸륵함에 대해서 노래할 수 있을까 불임으로 엉킨 햇빛의 무게를 견디는 때로는 고요 속에 눈과 코를 만들어 아래로 내려보내서는 서러운 허공중들도 감싸 안는 그 집 지붕의 갸륵함에 대해서
클레멘타인을 부르던 시간들을 아코디언처럼 고스란히 들이마셨다가 계절이 지칠 때 꽃 피는 육신으로 다시 허밍하는 그 집 지붕의 단란한 처마들
나는 걸음에 젖어서 그 갸륵함에 대해서
경복궁 자경전 서쪽담
너와집 한 채 김명인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국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 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 붙는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놓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버린 뒤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는 황토흙빛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겠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아주 잊었던 연모 머리 위의 별처럼 띄워놓고
그 물색으로 마음은 비포장도로처럼 덜컹거리겠네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 매봉산 넘어 원당 지나서 두천 따라오는 등 뒤의 오솔길도 아주 지우겠네 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네
농가 유금(1741-1788) 지붕에는 서리 내렸고 높은 언덕 모롱이에 해가 오르네 농부가 아침 일찍 일어나니까 머무는 나도 잠이 없어라 풀 먹인 후 나무에다 소 매어 놓고 아이보고 산에 가 섶 하게하네 아침놀 아득히 골짝에 어리고 우거진 풀 수북이 길을 덮었네 내외가 제각각 일하러 나가 인근 동네에서 서로를 부르네 집 보는 사람 아무도 없어 닭과 개가 부엌을 드나드누나
누구의 집이라 할까 이성복
햇빛 속 떠도는 바람은 무슨 얘기를 듣고 찾아온걸까 자갈 투성이 길을 걸어 내 괴로움 안으로
이것을 누구의 집이라 할까 햇빛 속 떠도는 바람의 집이라 할까 내 괴로움에는 내가 없고
보아라, 슬픔이 한 손으로 속곳을 잡고 조심조심 걷는 것을
달은 어둠 속에 집을 짓는다 임영석
까치가 은행나무 가지 사이를 파고 집을 짓는다 그 사이 달빛도 어둠을 파서 집을 짓는다 처음에는 손톱 같더니, 그 손톱 같은 사랑을 키우더니 치악산 소나무 위에 걸어 놓는다 나, 하루 일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서 바라보면 둥근 달, 치악산 솔바람 소리를 껴안고 일년 열두 달 허물고 짓고 허물고 짓다가 행구동 저수지 물속에 앉아 참선을 한다 저수지 물고기 함께 참선을 하다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물 밖으로 뛰어 오르며 파문을 일으킨다 그 파문 속에서도 달은 너울너울 춤을 춘다 치악산 그림자 저수지 물 속에 들어와 더위를 식히며 어둠 속에 집을 짓는 달을 내려다 본다 몇 년을 내려다 보았는지 치악산 눈빛은 능선 따라서 길이 나고 머리결 같은 앉은뱅이 나무 구름 한 점 잡아 두지 못하고 바위 곁에 앉아 어둠 속에 집을 짓는 달만 바라본다 아, 나는 바라만 봐도 현기증 난다 저수지 물 속 치악산은 꺼꾸로 매달려 나무를 키우고 달은 그 치악산 머리결 같은 나무에 달빛을 엮어 집을 짓는다 어둠이 깊은 만큼 단단해 보이는 치악산 솔바람 소리 울타리도 없는 달의 집을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다녀간다
들 가운데 그녀의 집 양성우 검푸른 미루나무 혼자 조을고 다알리아꽃 마당 끝에 피어 있는 집 들 가운데 그녀의 집 눈 맑고 살 붉은 그녀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 흰 두루미 낮게 날고 뻐꾹새 우는 이 여름날 한낮 바람 한 점 없는 들 가운데 빈집처럼 고즈넉한 그녀의 집 울 밖에 나란히 선 키 큰 옥수수잎들 눈부신 햇살에 반짝이는구나
낙산사 별꽃무늬 담장
두고 온 집 나희덕
오래 너에게 가지 못했어 네가 춥겠다 문풍지를 뜯지 말 걸 그랬어 나의 여름은 너의 겨울을 헤아리지 못해 너는 속수무책 바람을 맞고 있겠지 자아, 받아! 싸늘하게 식었을 아궁이에 땔감을 던져 넣을테니 지금이라도 불을 지펴볼테니 아궁이 속에 잠자던 나방이 놀라 날아오르고 눅눅한 땔감에선 연기가 피어올라 그런데 왜 자꾸 불이 꺼지지? 아궁이 속처럼 네가 어둡겠다, 생각하니 나도 어두워져 전깃불이라도 켜놓고 올 걸 그랬어 그래도 이것만은 기억해 불을 지펴도 녹지 않는 얼음조각처럼 나는 오늘 너를 품고 있어 봄꿩이 밝은 곳으로 날아갈 때까지 2005년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정진규
어쩌랴 하늘 가득 머리 풀어 울고 우는 빗줄기 뜨락에 와 가득히 당도하는 저녁 나절의 저 음험한 비애의 어깨들 오, 어쩌랴 나 차가운 한 잔의 술로 더불어 혼자일 따름이로다 뜨락엔 작은 나무 의자 하나 깊이 젖고 있을 따름이로다 전재산이로다
어쩌랴 그대도 들으시는가 귀 울이면 내 유년의 캄캄한 늪에서 한 마리의 이무기는 살아남아 울도다 오, 어쩌랴 때가 아니로다, 온 국토의 벌판을 기일게 기일게 혼자서 건너가는 비에 젖은 소리의 뒷등이 보일 따름이로다
어쩌랴 나는 없어라 그리운 물 설설설 끓이고 싶은 한가마솥의 뜨거운 물 우리네 아궁이에 지피어지던 어머니의 불 그 잘 마른 삭정이들, 불의 살점들, 하나도 없이 오, 어쩌랴 또 다시 나 차가운 한 잔의 술로 더불어 오직 혼자일 따름이로다 전재산이로다 비인 집이로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하늘 가득 머리 풀어 빗줄기만 울고 울도다
라일락 피는 그 집 이승희 1 철야를 하고 돌아온 아내의 어깨 위에 라일락 꽃잎 같은 흰 새벽이 묻어 있었다 라일락 피는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더니 밤새 그 꿈으로 울었나보다 밤새 그 집 담벼락에 몸 부딪혔나 보다 안지 않아도, 바라보지 않아도 쓸쓸하게 눈물나는 가라앉은 그 어깨에 손을 얹는다 단단하게 만져지는 허공 속으로 아직도 밤길이 길고 깊기만 하여.
2 내 마음 쓰러져 오래 묻히면 여기서도 씨눈이 생길까, 뿌리로만 자라기엔 이 불같은 그리움이 너무 커. 빈집을 지키는 날들이 길어지고 라디오에서 시작된 캘리포니아 드림이 온 방을 안개처럼 적셔 왔다 너의 목젖 너머로 숨막히는 상처가 자꾸 손 내밀 때 비행기 한 대가 창 왼쪽에서 떠올랐다 옥탑 아래로 무수히 접어 던진 종이배들은 지금 어느 복숭아밭에서 떠다니는지, 또 어떤 배후로 자라나는지,
3 보이지는 않지만 만져지는 것들이 있다면 거기는 이미 제 안으로 심어진 씨앗들이 꽃 피지 못하고 짓물러 짓물러 저녁을 붉게 물들일 것이다 날마다 벼랑인 삶도 내딛기만 하면 바닥을 딛고라도 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4 아내가 돌아오려면 다시 이 밤이 지나야 한다 이 승희 시와 창작. 2007년
마음의 집 한 채 감태준
바다를 건너 간 친구한테 편지를 쓰다가 바다를 밀어 오는 쓸쓸함에 밀리고 밀리다가 마음 혼자 아는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는 밤 열한 시
나는 가네, 서울을 나간 사촌은 고향 근처에서 벽돌을 찍고 있을까 어둠 속은 깊어지고 이제 더 깊어질 것이고 구두쇠 박씨는 지금도 문패 대신 맹견주의표를 붙이고 있을까 처음 보는 집을 나와 2층 3층에서 골목을 내려다보고 있는 집을 나와 담장 안에 숨어 있는 집을 나와 주인 없이 문만 열린 집을 나와 좁은 골목에서 서로 어깨를 밀고 있는 집을 나와
어제도 갔던 집 염치는 없지만 안심하고 머무는 집 소주를 마시고 죽은 멸치 몇 마리를 고추장에 찍어 먹은 잘못 밖에 없는 시인의 홑옷 한 벌이 빨래줄에 널려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
어둠 속은 깊어지고 이제 더 깊어질 것이고 시인 한잔 마음 한잔 신문지를 깔고 잠든 마른 멸치도 한잔 셋이서 구겨진 몸들을 펼쳐 놓고 자거라 자거라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 우는 소리를 재운다
머나먼 옛집 정병근
땡볕 속을 천 리쯤 걸어가면 돋보기 초점 같은 마당이 나오고 그 마당을 백 년쯤 걸어가야 당도하는 집 붉은 부적이 문설주에 붙어 있는집 남자들이 우물가에서 낫을 벼리고 여자들이 불을 때고 밥을 짓는 동안 살구나무 밑 평상엔 햇빛의 송사리 떼 뒷간 똥통 속으로 감꽃이 툭툭 떨어졌다 바지랑대 높이 흰 빨래들 펄럭이고 담 밑에 채송화 맨드라미 함부로 자라 골목길 들어서면 쉽사리 허기가 찾아오는 집 젊은 삼촌들이 병풍처럼 둘러 앉아 식사하는 집 지금부터 가면 백 년도 더 걸리는 집 내 걸음으로는 다시 못가는, 갈 수 없는, 가고 싶은
무늬들은 빈 집에서 이진명
언덕에서 한 빈집을 내려다 보았다 빈집에는 무언가 엷디엷은 것이 사는 듯했다 무늬들이다 사람들이 제 것인 줄 모르고 버리고 간 심심한 날들의 벗은 마음 아무 쓸모없는 줄 알고 떼어놓고 간 심심한 날들의 수없이 그린 생각 무늬들은 제 스스로 엷디엷은 몸뚱이를 얻어 빈집의 문을 열고 닫는다 너무 엷디엷은 제 몸뚱이를 겹쳐 빈집을 꾸민다 때로 서로 부딪치며 빈집을 이겨낸다 언덕 아래 빈집 늦은 햇살이 단정히 모여든 그 집에는 무늬들이 매만지는 세상 이미 오랬다 방이나 집은 수많은 기억을 지니고 있다 누군가 살다 떠난 자리에 도란도란 남아 있는 무늬들, 그무늬들 위에 또다른 무늬를 남기며 사는 사람들. 그러나 사람들은 모른다 빈집에서 무늬들이 서로 어룽거리다가, 깔깔거리다가, 때로 싸우기도 하다가, 누군가 들어서면 일제히 입을 다문다는 것을 엷디엷은 무늬로 다시 벽 속으로 스민다는 것을
물 속의 집 이상국
그 해 겨울 영랑호 속으로 빚에 쫓겨온 서른세 살의 남자가 그의 아내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가던 날 미시령을 넘어온 장엄한 눈보라가 네 켤레의 신발을 이내 묻어주었다
고니나 청둥오리들은 겨우내 하늘 어디선가 결 고운 물무늬를 물고 와서는 뒤똥거리며 내렸으며 때로 조용한 별빛을 흔들며 부채를 청산한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인근 모래기까지 들리고는 했다
얼음꽃을 물고 수천 마리 새떼들이 길 떠나는 밤으로 젊은 내외는 먼 화진포까지 따라나갔고 마당가 외등 아래서 물고기와 장난치던 아이들은 오래도록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애들이 얼마나 추웠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눈믈이 나의 뺨을 적신다
그래도 저녁마다 울산바위가 물 속의 집 뜨락에 오래 가는 놀빛을 떨어뜨리고 가거나 산 그림자 속 화암사 중들이 일부러 기웃거리다가 늦게 돌아가기 때문에 영랑호는 문을 닫지 않는 날이 많다
그런 날은 물 속의 집이 너무 환하게 들여다보였다
<현대시학> 1996년 2월호
바람이, 가끔 그 집을 들여다보네 이영식
싸리 울타리 안에 감나무 한 그루 서 있다 수백 개 알전구 켜들고 집 주위를 환히 밝힌다 비루먹은 누렁개 한 마리 잡풀 무성한 마당으로 들어선다 걸음걸음 옮길 때마다 옆구리에 패인 갈비 자국이 꿈틀거린다 등뼈가 휘도록 콧등을 땅에 붙이고 무언가 냄새를 찾는다 달맞이꽃과 망초 숲에서 놀던 가시멧노랑나비가 서둘러 자리를 뜬다 황구 녀석을 구석구석 푸새더니 뒤지더니 신발 한 짝을 몰고 나온다
실밥 터진 운동화를 혼자 밀고 당기고 굴리다가 그도 싱겁던지 대청으로 훌쩍 뛰어오른다 안방 건너방 맴돌며 부서진 서랍장, 베개, 아기나팔, 거울조각 ㅡ 버려진 세간을 끌어낸다 잡동사니 시간들을 마루 위에 쌓아놓고 킁킁대다가 온몸으로 문지르다가 가늘고 긴 목을 뽑아 목청껏 짖기 시작한다 여름내 홍시 속에 쟁였던 햇살이 순금으로 쏟아져 내린다
바람이, 가끔 그 집을 들여다본다 사람을 벗은 빈 집에서 뼈 부딪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詩香 2007년 여름 26
빨래 궁전- 인도 소풍 문인수
야므나 강변 작은 촌락 한 움막집에, 그집 빨래줄 위로 옛날 사랑 많이 받은 왕비의 화려한 무덤, 타즈마할 궁전이 원경으로 보입니다 궁의 둥근 지붕이 거대한 비눗방울처럼, 분홍 엷은 나비처럼 아련하게 사뿐 얹혀 있고요 빨래가 원색의 낡고 초라한 옷가지들이 젖어 축 처진 채 널려 있습니다 족보에도 없는, 이 무슨 경계일까요 오색 대리석으로 지어졌으나 죽음은 그 어떤 역사에도 불구하고 말 할 수 없이 가볍고 가벼워서 짐이 없는데요 삶이란 또 몇 벌의 누더기에도 당장 저토록 고단하고 무겁습니다 그러나 그때, 어린 새댁이 하얗게 웃으며 얼른 움막으로 숨어버렸는데요 개똥밭에 굴러도 역시 이승에 땡깁니다 오래 내 마음을 끄는 그녀의 남루한 빨래궁전 쪽, 저 검고 깊은 눈이 전적으로 아름답습니다
봄날 옛집에 가서 이상국
봄날 옛집에 갔지요 푸르디푸른 하늘 아래 머위 이파리만한 생을 펼쳐들고 제대하는 군인처럼 갔지요 어머니는 파 속 같은 그늘에서 아직 빨래를 개시고 야야 돈 아껴 쓰거라 하셨는데 나는 말벌처럼 윙윙거리며 술이 점점 맛있다고 했지요 반갑다고 온 몸을 흔드는 나무들의 손을 잡고 젊어서는 바빠 못오고 이제는 너무 멀어서 못 온다니까 아무리 멀어도 자기는 봄만 되면 온다고 원추리꽃이 소년처럼 웃었지요
봄날 지나쳐간 산집 문태준
한채의 햇살에 끌려 나는 오후의 산집으로 갔습니다
뜨락에 산도라지가 말라가고 검고 마른 탱자나무에 습하고 푸른 빛이 맴도는 집 그 산집에서 내 뜰과 울타리에도 마르고 곧 젖는 것들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햇살이 촬촬 끓는 마루에서 흰 찔레꽃처럼 웃는 여자를 만났습니다 여자는 가는 실을 실꾸리에 감아 옮기고 있었습니다 여자의 볼에 붉은 무덤이 쌓였다 허물어지는 걸 보았습니다 봄꽃이 지면 나무는 또 숲으로 가고 작은 무덤들 붉은 흙 위로도 들쑥이 돋아날 줄 압니다
그러나 참 오래되었지요 저 멀리서 밀려오는 산그림자를 마중 나가본 지도. 산그림자에 장지문을 걸어 잠그는 마음의 곳집에 가본지도.
불 꺼진 집 장석남
집을 찾다가 눈발을 만나고 어둠을 헤매며 겨우겨우 따라오는 찬 발자국이나 뒤돌아보면 나도 누군에겐가로 눈발처럼 한꺼번에 자우룩이 내려가고 싶네
단풍나무 같은 우리집 나 몰래 이사가버리고
얼음장 깨지는 소리가 마음으로 들어가네
비로 만든 집 류시화
비로 만든 집에서 나는 살았네 안개로 만든 집 9월의 오솔길로 만든 집 구름비나무로 만든 집
비로 만든 집에는 언제나 비가 내리지 비를 내리는 나무 비를 내리는 길 비를 내리는 염소들
세상이 슬픔으로 다가올 때마다 나는 그곳으로 가서 비를 맞았네 비의 새가 세상의 지붕 위를 날고 비를 내리는 오솔길이 비의 나무를 감추고 있는 곳
비로 만든 집에서 나는 살았네 비의 새가 저의 부리로 비를 물어 나르는 곳 세상 어디로도 갈 곳이 없을 때 나는 그곳으로 가서 비를 맞았네
비로 만든 집에는 언제나 비가 내리지 비를 내리는 나무 비를 내리는 길 비를 내리는 염소들
산골에 오두막을 짓다 이기철
산골에 오두막을 짓다 달빛으로 기둥을 세우고 바람으로 지붕을 덮었다 우우우 몰려오는 서풍의 축하객 손님처럼 찾아온 아카시아 잎 방문 두드리는 소리 배추잎은 아직 어려 잠에 빠져 있고 수수이삭은 저 혼자 시간을 먹고 가을만큼 자랐다 얘들아 얘들아 불러도 돌아오지 않는 놀러간 개울물 오소리들이 몰고 간 밤톨은 찾아볼 수 없다 전기밥솥에 쌀 안쳐놓고 사립문 열면 후욱 끼쳐오는 꿀밤나무들의 푸른 살 냄새 엄마 젖무덤 길은 산등엔 돌 지난 아이의 하연 젖니 같은 별이 뜨겠다
산속 깊은 집 정약용 깊은 산에 객이 있거늘 가는 봄에 시가 없어 쓰겠나 새로 심은 버들이 문을 가리고 동산이 비옥해 해바라기 정원에 가득하네 벼슬 그만두니 마음은 더 멀어지고 농사짓는 이치는 배우면 되는 걸 기나긴 해 참으로 좋아서 돌아가는 배 일부러 더디 가게 하네
새들은 황혼 속에 집을 짓는다 장석주
나는 안다, 내 깃발은 찢기고 더 이상 나는 청춘이 아니다 내 방황 속에 시작보다 끝이 더 많아지기 시작한다
한 번 흘러간 물에 두번 다시 손을 씻을 수 없다 내 어찌 살아온 세월을 거슬러 올라 여길 다시 찾아 올 수 있으랴
ㅡ쉽게 스러지는 가을 석양 탓이다 ㅡ 잃어버린 지도 탓이다
얼비치는 벗은 나무들의 그림자를 안고 흐르는 계곡의 물이여 여긴 어딘가, 내 새로 발디디는 곳 암암히 .... 황혼이 지는 곳
ㅡ 서편 하늘에 풀씨처럼 흩어져 불타는 새들 ㅡ어둠에 멱살 잡혀 가는 나 <꿈에 씻긴 눈썹> 종려나무 2007년
시골집 정약용(1762-1836) 냇가 부서진 집 바리때같이 북풍이 띠지붕 걷어가 서까래만 앙상 오래된 재 위에 눈 쌓인 부뚜막은 썰렁하고 체 눈처럼 숭숭 뚫린 벽 틈으로 별빛이 비치네 집안 살림 초라하기만 해 팔아도 일곱 푼이 안 되네 삽살개 꼬리 같은 조 이삭 셋 닭 염통 같은 매운 산초 한 꼬챙이 항아리 깨져 새는 곳은 베로 막았고 떨어지려는 시렁은 새끼줄로 묶었네 놋숟가락은 접때 이장이 가져가고 무쇠솥은 오래잖아 이웃 부자가 앗아 갔지 이불이라곤 다 해진 비단 이불 한 채니 부부유별은 말이 안 되지 구멍 난 저고리에 어깨 팔꿈치 드러낸 아이들 태어나 바지 버선은 걸쳐 보지도 못했지 큰애는 다섯 살에 기병으로 등록되고 작은 애는 세살에 군적에 올라 두 아이 세금으로 오백 푼을 바쳤으니 어서 죽었으면 싶은데 옷과 신이 다 뭐람 강아지 세 마리와 아이들이 함께 자는데 호랑이는 밤마다 울타리에 으흥 남편은 산에서 나무하고 아내는 방아품 파니 대낮에도 닫힌 문에 슬픔이 가득 아침 점심 굶고는 밤에 와 밥을 짓고 여름에는 가죽옷 겨울에는 베옷 깊이 박힌 냉이 캐려면 언 땅이 옥아야 하고 술지게미 먹으려면 시골에 술이 익어야지 지난봄에 꿔다 먹은 곡식이 닷 말이니 올해는 살아갈 방도가 없어라 포졸이 대문에 들이닥칠까 겁날 뿐 관아에서 맞는 건 걱정거리도 아니라네 아아, 이런 집들이 천지에 가득한데 깊디깊은 궁궐에서 어이 다 살피리 漢나라의 직지사자는 큰 고을 수령도 뜻대로 처결했지만 이 폐단의 근원은 어지러워 바를 수 없으니 공수와 황패가 있어도 뿌리 뽑기 어려우리 유랑하는 백성을 그렸던 정협을 따라 해오라지 이 광경 시로 그려 대궐에 바쳐야지 1794년 암행어사로 순찰할 때의 작품이다
시골집에 가면서 공광규 휘어진 시골길을 따라 가다보니 길이 왜 곡선으로 나 있는지 알겠네 아쉬워라, 논길에서 뱀을 만난 듯 진흙탕을 직선으로 달려간 친구들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가면서 사선으로 어깨가 기운 사람들을 만나보니 늙어가는 나의 등이 왜 비탈로 저물어 가는지 알겠네
노을을 날개에 묻히고 온 새가 추녀 끝에 흐린 전구불로 매달리는 흙집 입매가 감나무 잎처럼 둥근 영정사진들을 꺼내 해와 달이 둥근 비밀을 물어야겠네
옛날의 그 집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 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 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옛집 배경숙
무엇이든 엿듣는 것이 허락된 그 무엇도 누설하지 않는 노후 그 자체로 가득한 아버지의 지팡이에 검버섯처럼 머물고 있는 옛집 어떻게 비밀의 우물에 분노를 매장하고 거기에서 용기를 끄집어 내왔는지 넝쿨장미 가시가 몸을 세차게 흔들며 기어올라 돌담장을 넘던 화려하고 진한 발버둥의 병통을 달밤이면 몽정으로 피어나던 치자꽃 향기의 창백한 두려움을 목젖에 걸린 피멍들이 못난 상처를 보이지 않으려고 손톱 밑을 파고들던 숱한 비바람을 십수 년에 걸쳐 내 몸 안에 내장된 웅성거림들이 옆구리를 찌르는 동래 복천동 커다란 집 구들장 밑 연탄가스처럼 입안 가득 핏물이 고이는 4월의 저녁 어둠 속 구석구석 곰팡이를 살찌우던 처마 끝에서 감꽃은 이끼처럼 돋아나고 아낌없이 미움도 없이 그렇게 잠들어... 틈새를 빠져나가는 바람소리만 대추나무 몇 잎을 흔들고 있었다 우리시 2007년
오래된 집 이승희
1 이 집은 낡고 오래된 악기와 같아서 같아서 소리를 냈다 낮잠처럼 햇살이 흘러들고 나가는 마당은 깊어서 아 너무 깊어서 깊어서 어머니 등 뒤의 세울처럼 눈물 나 ,눈물 나, 배냇저고리 같은 옷을 입은 풀들, 아기들, 녹색으로 몸 물들이며 마당 가득, 지붕 가득히 피어올라, 동굴 같은 눈으로 노래 부르네, 노래 부르네 다시 고욤나무로 돌아간 감나무 한그루가 보낸 엽서가 마당에 가득하다
2 우물가에 앉아 햇감자를 숫가락으로 긁을 때마다 공중에도 둥글게 우물이 파였다
3 이젠 덜 아픈거니? 지금 난 네 안에 있어 네 안에서 자고 싶어 달이고 달인 세월 아직 따뜻하구나 종일 햇살에 발 담근 세월아, 난 마루에 앉아 자꾸만 네게 말 걸지 세월 속에는 또다른 세상이 저승의 세월이 이승의 세월로 꽃피는 늙음이 낡음이 이젠 떠나고 없음이 이리도 편안할 수 있는지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창비.2006년
오래된 집은 달밤에 알을 품는다 최종무
보름 달빛이 마당을 쓸고 있었다 부러진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여물 냄새를 풍기며 올랐다 봉당 무너져 내린 틈으로 구렁이 허물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오얏나무가 뒤울안에 새까만 알들을 수북이 낳아 놓았다 달빛이 알들을 품고 있었다 방에서 아버지 마른 기침소리가 났다 쪽문이 열렸다 이제 왔니
네 기둥은 비스듬히 개울을 향해 누워있었다 함석지붕에 베인 손바닥에서 붉은 녹물이 흘렀다 오래 전부터 나는 파상풍을 앓고 있었다 덧난 생채기에서 바람이 나고 있었다 바람은 집을 감싸고 휘 돌았다 마당귀 미륵 바위 그늘에서 질경이 씨가 여물고 있었다 달빛이 녹슨 괭이 날을 노랗게 벼렸다 오는 봄엔 굵은 물푸레 자루를 박고 비탈 밭을 팔 수 있을거라고 널빤지 부엌문 앞에서 짤순이가 벌건 쇳물을 짜내고 있었다 보름 달빛 술렁이는 오래된 집에선 까만 알들이 부화되고 있었다 집이 일어나 나를 손짓해 부르고 있었다 뚫린 창호지 안에서 까만 눈의 아이가 마당을 보고 있었다 이제 왔니
오래된 한옥 심재휘
햇살이 몸에서 슬금슬금 빠져나가는 초겨울 오후 미음자 한옥이 순식간에 헐리어 제 속을 드러낸다 푸른빛의 족쇄에서 벗어나 땅으로 갈 것은 땅으로 가고 먼지로 날아갈 것들은 먼지로 가고 참으로 오랫동안 손잡고 집이었던 것들이 뿔뿔이 거리로 나서는데 집의 부재를 눈치채지 못한 기왓장 몇 개 아직 제 삶인 양 허공에 떠 있다 저들은 원래 하늘에 속한 것이었을까 바람의 몸을 하고 바람소리로 중얼거리는 기둥 없는 집 기둥은 누워도 기둥이고 허공의 기왓장은 여전히 지붕이고 올해 아버지는 잃을 것도 없는 일흔이시다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 문학세계사
옹이 속의 집 김완하
상월초등학교 플라타너스 둥치에 딱따구리가 나무 파던 흔적 남았다 우듬지부터 둥치 따라 내려오다가 깊게 파인 구멍 하나 찾았다 나무의 옹이 아래 딱따구리는 둥지를 묻고 수없이 구멍 드나들며 하늘 물어 오고 어둠을 길어 냈을 것이다 거기 한철 딱따구리 새끼 쳐 나갔다 딱따구리가 밤마다 둥지 팔 때 허공 속에서는 목탁이 울었다 하늘에 별들도 그 소리에 귀를 열고 더 또렷이 빛이 났다 딱따구리는 나무의 가슴 길어 올리며 어둠을 파내 밤을 뚫고 끝내 한 칸의 새벽을 지어내 비로소 살아 있는 한 채 집이 되었다 나는 그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어 까치발 들고 나뭇가지 밀어 넣어도 그렇다 이 구멍은 끝내 닿을 수 없는 것이다 몇 날 밤 딱따구리 부리는 파고들어 플라타너스 옹이에 고인 어둠을 찍었다 나무의 멍든 가슴을 재워 허공이 지은 집 한 채 아직도 밤마다 어둠 속에서는 고요의 빗장을 푸는 딱따구리 살아 있다 김 완하( 1958 - ) 경기도 안성 . 한남대 교수
외인촌 김광균 하이얀 모색募色 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아란 역등을 단 마차가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루 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위에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이 창을 내리고 갈대밭에 묻힌 돌다리 아래선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 안개 자욱한 화원지의 벤취 위엔 한낮의 소녀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었다
외인 묘지의 어두운 수풀 뒤엔 밤새도록 가느단 별빛이 내리고 공백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의 시계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 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같이 언덕 위에 솟아 있는 퇴색한 聖敎堂의 지붕 위에선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우리 집 권정생 고향 집 우리 집 초가 삼간 집
돌탱자나무가 담 넘겨다보고 있는 집
꿀밤나무 뒷산이 버티고 지켜 주는 집
얘기 잘하는 종구네 할아버지랑 나란히 동무한 집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바보처럼 착하게 서 있는 집
소나무 같은 집
장독대가 있는 집
저녁의 집 이상국
해 떨어지면 나무들은 이파리 속의 집으로 들어가고 먼 개울물 흐르는 소리 울타리 너머 밥 짓는 냄새 속으로 꼴짐 높게 진 사람들 두런두런 혼잣말하며 배가 장구통 같은 소 앞세우고 돌아오네 제 새끼 안보인다고 아갈질해대는 소울음 사이로 박쥐떼들 아무렇게나 날아간다 고등빼기 우리집에서는 어여 와 저녁 먹으라고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 어머니도 딱하다 나도 이젠 자식 둘이나 두었는데 아직 내 이름을 알몸뚱이로 동네방네 불러대다니 하늘 두에서 별이 어둠을 씻고 나온다 키 큰 밤나무 꼭대기까지 차오르는 어둠 속에서 새는 보이지 않고 울음 소리만 들리고 변소 지붕 위의 박이 엉덩이처럼 희게 떠오른다 부엌문 여닫힐 때마다 불빛에 어리는 마당 식구들 어둠에 잠겨 찰랑거리는 마을에서 이파리들의 소근거림 쇠똥냄새 먼데 집 펌프대 삐걱거리며 물 올리는 소리 멍석가로 펄쩍펄쩍 개구리들 덤벼드는 그 머나먼 집 마당에서 나는 아직 저녁을 먹고 있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창비. 1998년
저 집 권대웅 저 언덕 지나가는 길에 집이 있었네 허리 굽은 등처럼 작고 보잘 것 없는 집 저녁 여섯시면 할머니 비그덕 문을 열고 나와 혼자 쌀을 일던 집 깊은 우물처럼 마당이 보이는 집 여름 내내 큰딸 같은 해바라기가 담장 위에 서 있던 집 이따금 연탄재를 버리려고 문 밖에 나왔다가 이마에 손을 얹고 뒤돌아보는 집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너무나 고요해 숨이 다 막히는 저 집에서 불도 켜지 않고 진종일 할머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저 언덕 지나가는 길에 저 집 내 마음 속에도 들어 있는 저 집 언제나 그 속에서 돌오올 주인을 기다리는 납골당 같은
집을 지나치다 이영선 풍경소리 쟁쟁 울릴 것만 같다 나무들은 알몸으로 순례의 길을 떠나고 한결 맑아진 산그늘 아래 저녁 해사 차창 안쪽을 기웃거린다 호숫가 나지막한 집에서는 이른 저녁밥을 짓는지 건초더미를 태우는지 흰 연기가 자욱이 피어오르는데 벙어리 바이올린을 부르는 어린 여가수 흐느끼는 노랫소리에 글헝에서 길 잃은 마음 물안개 속으로 사라진 흰 새가 그립다 늙은 머리칼 희끗희끗 나부끼는 억새밭 지나 천천히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낮달이 주춤거리며 뒤따라오고 바람을 점점 세차게 불고
집장구 손택수 일년에 한 번은 집이 장고 소리를 냈다 뜯어낸 문에 풀비로 쓱싹쓱싹 새 창호지를 바른 날이었다 한 입 가득 머금은 물을 푸 - 푸 - 분무기처럼 골고루 뿌려준 뒤 그늘에서 말리면 빳빳하게 당겨지던 창호문 너덜너덜 해어진 안팎의 경계가 탱탱해져서 수저 부딪는 소리도 새 소리 닭울음소리도 한결 울림이 좋았다 대나무 그림자가 장고채처럼 문에 어리던 날이었다 그런 날이면 코 고는 소리에도 정든 가락이 실려 있었다
초가집이 보인다 김영남
그 집에는 문이 따로 없다 그 집에 들어가려면 아무데나 밀면 되고, 또한 아무거나 잡아당기면 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유별난 문이 따로 있는 것 같으면서도 출입문이 따로 없는 집 야, 이런 집이 아직도 있을 수 있나? 지붕 위론 박넝쿨이 올라가고 있고 울타리엔 개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집 방에는 거미가 수없이 세들었지만 아직 향기로운 술독이 익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아랫목에까지 둥지를 틀어올 무렵이면 휘파람으로 달빛을 불러들이고 한 접시의 밤하늘을 술안주로 차려오는 집 그를 열면 , 그런 집이 보인다 <정동진 역> 민음사
폐가 강연호
이 집에서 마지막으로 밝힌 불빛은 근조등이었다고 한다 나는 부의금도 없이 이곳에 왔으므로 슬픔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너무 늦었다는 생각도 없다 대체로 인사치레의 조문이 아니라면 상가에서 정작 만나고 싶은 사람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인 것이다 죽은 사람이 그저 죽은 사람이듯 떠난 식솔들 역시 기다리지 않았으리라 한때 이곳에 쥔 붙였던 육신을 따라 빈집은 흙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창살과 문설주가 아직 버티는 것은 한꺼번에 무너지기 위한 악다구니일 뿐 햇살이 빈 집의 서까래를 들쑤신다 언젠가는 저 햇살의 무게조차 견디지 못해 폭삭 주저앉고야 말 것이다 나는 곡비가 아니어서 울지 않는 게 아니다 어떤 숨죽인 물음도 헛되이 빈집은 녹슨 못처럼 고요를 구부러뜨린다 나는 다만 밥 짓는 냄새를 그리워하는 것으로 간곡한 예를 올리고 돌아설 뿐이다
송광사 토담
피리 박형준
고개를 숙이고, 주방 창문턱에 놓고 기른 제라늄 화분을 살피다가 아랫집 지층에 멈춘 눈길을 뗄 수가 없다 시멘트 마당 쪽으로 개발사슴처럼 다리를 내놓고 방턱에 앉아, 장맛비를 골똘히 쳐다보고 있는 독거노인 등 뒤로 모시로 짠 발이 누추한 살림살이를 가리느라 방 안에 빗금을 긋고 있다 벌겋게 녹이 이는 우산을 당신 쪽으로 받쳐들고 노인은 움직이지 않는다 시멘트 마당 한쪽에는 장판을 씌운 평상이 놓여 있다 노인은 평상에 파문 이는 비를 보고 있다 나는 이사 가는 집마다 볕이 들지 않아 창턱에 식물을 놓고 길렀다 새로 이사 온 집에도 주방 창문에 제라늄 화분을 하나 놓고 빨간 꽃망울이 맺히는가 싶어 며칠 가슴을 졸이다가 꽃잎 맺힌 자국이 떨어져 창 아래를 내려다본 적 있다 가난한 집에는 저녁에 볕이 다 모여든다 다세대 건축물 사이로 환한 저녁 햇살이 내리고 노인이 평상에 앉아 나무 피리를 입에 물고 있었다 사나흘 장맛비는 그칠 줄 모르고 노인의 생각은 하도 깊어 머릿속에서 비는 몇십 년째 쏟아진다 평상에서 파문 이는 빗방울들 그 저녁에 본 피리 구멍에서 쏟아지는 음계 같다 번개가 치고 우주의 힘줄이 불거진다 그리운 사람 하나 음계의 계단을 밟고 하늘에서 내려올라나 내려올라나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제라늄 화분을 살핀다 저 아래, 지층의 잡목림 속에서 고라니가 넓적한 발을 내밀며 부서진 나무 피리에서 간절히 음계를 꺼내고 있다
제라늄꽃
하늘의 집 이상국
전깃줄에 닿는다고 인부들이 느티나무를 베던 날 아파트가 있기 전부터 동네를 지키던 나무는 전기톱이 돌아가자 순식간에 쓰러졌다 옛날 사람들은 가지 하나를 꺾어도 미안하다고 나무 밑둥에 돌멩이를 던져 주었고 뒤란 밤나무를 베던 날 아버지는 연신 헛기침하며 흙으로 그 몸을 덮어주는 걸 보았는데 느티나무의 숨이 끊어지자 인부들은 그 커다란 몸을 생선처럼 토막내어 싣고 갔다 이파리들의 그늘에 와 쉬어가던 무성한 여름과 동네 새들이 깃들이던 하늘의 집을 그렇게 어디론가 싣고 가버렸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창비. 2005년
경북 영양 서석지 담장
해바라기 집 오철수
시를 써서, 만약에 돈을 벌게 되어 근교 어디쯤에 집을 사게 된다면 나는 마당에 뒤란에 담장 옆에 해바라기를 엄청나게 많이 심을 것이다 하여 이웃들이 해바라기 집이라고 부르고 잠깐 다니러 온 이들도 우리집을 보며 해바라기집이라고 부르고 머리 희끗희끗한 내 처가 출퇴근하는 것을 보고는 논 건너 아랫마을 분이 <저기 해바라기집 안사람이야>라고 소개하고 아들도 해바라기집 아들로 불리고 친정 나들이하는 딸도 해바라기집 딸로 불리고 가끔 호주머니에 돈이 없어 외상 신세 지는 동네 구멍가게 장부에도 <해바라기>로 적히도록 해바라기를 많이 아주 많이 심을 것이다 마당이 온통 노란 날 내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내 집에 처음 오는 이들도 버스기사에게 상가집이라고 묻지 않고 해바라기집이 어디냐고 물을 수 있게 만약에 내가 시를 써서 돈을 벌어 ....
허물어진 집 심재휘
태백에서 사북 쪽으로 재를 하나 넘으면 그것은 뒤돌아보지 않겠다는 마음이었겠다 돌의 어둠을 기다랗게 파고 들어가 다시는 돌아 나오지 않겠다는 눈물이었겠다 그러나 이제는 막장 같은 삶도 사라지고 그 말도 사라지고 폐광들 근처 산비탈에는 허물처럼 빈집들만 남아 허물어지고 있다 그 옛날 몇 개의 재를 넘어 이곳까지 밀려와 기울어진 땅에 기울이지지 않게 세운집 최후의 후회인 듯 최초의 결심인듯 서 있던 집 생각하면 나에게도 그런 집 하나 있었으리라 검은 낯 씻으며 또 살아졌던 하루가 허리 숙여 들던 그런 집 누구에게나 있었으리라 오지 같은 마음에 세워졌던 집 하나가
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당신....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맘ㅇ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 그러나 킥킥 당신
흐르는 집 김명리 내 마음, 어떤 알 수 없는 비애를 떠받치려 사원의 두 기둥처럼 저만치 떨어져 서로 마주 보고 섰네 못질 안 한 그마음의 기왓장 밑으로 또 한바탕 비가 들이치네, 아닌 듯 즐겨 정정하다곤 해도 슬픔은 두 발이 함께 나아가는 것 우리 마음의 물불 뒤섞여 흐르는 그 아래, 헤쳐진 길들의 그 기슭에 녹아내리는 오라, 삶이라는 이름의 저 비등하는 외설 가득 살얼음 잡힌 물풀들 사이로, 그 마음 굽이치네 떠내려가네
힐던새는 집을 짓지 않는다 주용일 마음 속의 힐던새 운다 날 때부터 집짓는 법을 모르는 그러면서 날마다 밤이 되면 내일은 집을 지어야지 내일은 집을 지어야지 운다 그 마음속 새는 내가 키웠다 몇 번의 실패한 사랑과 먹이 찾기로 부러진 어깻죽지와 숱한 어둠과의 면벽 속에서 집 지을 줄 모르고 하늘 날 줄 모르는 그 새는 내 집시의 피를 먹고 자랐다 울음은 그 새의 언어임으로 밤마다 핏빛 선율 울음 물고 내일은 집을 지어야지 집을 지어야지 히말라야시다 가지에서 힐던새 운다
힐던새ㅡ 인도 히말라야 지방 전설상의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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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해물과 백두산이 원문보기 글쓴이: 아침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