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삼성 특검 당시 미술품 거래를 통한 자금세탁 의혹을 받은 서미갤러리가 또 한 번 화두에 올랐다. 이번엔 CJ와 함께다. CJ 이재현 회장과 서미갤러리 홍송원 대표 사이에는 어떤 그림이 오간 것일까.
CJ-서미갤러리 의혹의 전말
지난 5월 29일. CJ그룹의 비자금 조성 및 탈세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이 CJ 이재현 회장의 장충동 자택을 압수수색했다. 검찰은 CJ가 2008년 이후 최근까지 4~5년간 국외 투자 등을 가장해 해외에서 조성한 비자금 수백억 원을 CJ미국법인으로 빼돌린 사실을 확인하고 정확한 규모와 사용처를 조사하고 있다. 또한 검찰은 해외에서 고가 미술품을 사들여 가격을 부풀리는 방식으로 자금을 빼돌렸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수사 중이다. 이에 앞서 CJ가 홍송원 서미갤러리 대표를 통해 1천억 원이 넘는 고가의 미술품을 사들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화제가 됐다. 이 과정에서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이 리스트에 오르내리며 주목을 받았다.
앤디 워홀 ‘마오’ 등 이재현 회장이 구입한 그림은?
대기업 비자금이나 횡령, 로비 수사 때마다 거론되는 서미갤러리는 끊임없이 비자금 세탁 창구라는 의혹을 받아왔다. 6년 전 삼성 특검 당시,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을 삼성이 비자금을 주고 홍송원 서미갤러리 대표로부터 구입했다는 증언이 나와 논란이 됐다. 특검 수사 결과 이건희 삼성 회장이 개인 돈으로 구입했다고 밝혀졌다. 이후 2010년 ‘오리온그룹 배임횡령사건’, 2011년 ‘한상률 전 국세청장 그림로비사건’, 2012년 ‘부실저축은행 비리사건’ 때도 빠짐없이 서미갤러리가 등장했다.
지난 3월 말 <조선일보>는 탈세 의혹으로 조사를 받고 있는 서미갤러리를 통해 CJ그룹 일가가 1천422억 원 상당의 비용을 들여 138점의 미술품을 구입했다고 보도했다. 미술품 거래내역이 공개되자 CJ 고위관계자는 “2008년 말 국세청 조사에서 자진신고한 내역으로 추측된다”며 “미술품 세금납부 등에 대해 국세청에서 조사를 한 결과, 전혀 문제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설명했다. 보도에 따르면 CJ 이재현 회장 일가는 서미갤러리를 통해 2001년부터 2008년 1월까지 약 7년간 해외 유명 작가들의 작품 138점을 사들였고, 특히 2006년부터 약 2년간 71점을 1천276억 원에 집중적으로 구매한 것으로 전해졌다.
CJ 일가가 사들인 이른바 ‘CJ 컬렉션’에는 어떤 작품들이 있을까. 먼저 삼성 특검 때 유명세를 치른 작가 리히텐슈타인의 작품만 4점이다. 이 가운데 ‘인테리어 위드 다이아나’는 32억9천만 원에 이른다. 미국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의 작품도 7점에 이른다. 마오쩌둥 전 중국 주석의 초상화 ‘마오’ 연작 2점은 총 115억 원에 사들였다. 또 다른 팝아트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니트 론’은 41억 원에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생존 작가 가운데 경매 최고가를 번갈아 경신하고 있는 데미안 허스트, 게르하르트 리히터, 제프 쿤스의 작품도 20점 넘게 보유하고 있다. 허스트의 작품 ‘스트립티저’는 70억 원, 리히터의 유화 ‘트로이스도르프’는 44억 원, 쿤스의 ‘그린링’과 ‘포플스’는 총 73억 원이다.
CJ는 이렇게 사들인 작품을 더 비싼 값에 되팔기도 했다. 앤디 워홀 작품을 45억 원에 사들여 60억7천7백만 원에 되파는 등, 총 34점을 되팔아 43억 원의 수익을 낸 것으로 전해졌다. 수십억 원에 이르는 이 작품들의 절반은 서미갤러리에, 나머지는 이 회장의 자택과 골프장 등에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왜 재벌가는 홍송원 대표와 거래하나?
재벌들과 거래가 많은 국내 화랑으로는 서미갤러리, 갤러리현대, 국제갤러리, PKM갤러리 등이 있다. 이 중 대기업 비자금 사건이 터질 때마다 유독 서미갤러리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이유는 왜일까. 우선 홍 대표의 두터운 재계 인맥이 큰 몫을 차지한다는 게 중론이다. 홍 대표는 리움에 외국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조달하며 홍라희 관장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또 자신이 이화여대 출신이라는 점을 활용해 재계 안방마님들과도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물론 작품을 보는 홍 대표의 안목이 뛰어나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전통 옹기 컬렉터로 일을 시작한 그는 1980년대 뉴욕 화랑가에서 활동하며 화랑주로서 역량을 키웠고, 1990년대 미국과 유럽의 추상미술과 팝아트를 국내 화랑가에 소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홍 대표는 유망 작품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들여오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는 세계적인 작가가 아직 뜨지 않았을 때부터 주목해 미리 작품을 확보해뒀다가 국내에 소개해왔다. 대표적으로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은 2억 원이었던 게 1백억 원대로 훌쩍 뛰었다. 그가 권한 또 다른 작품 마크 로스코, 알렉산더 칼더, 도널드 저드, 신디 셔먼도 5~30배쯤 가격이 뛰었다. 세계적인 경매회사 크리스티 에돌먼 회장으로부터 “당신 눈(뜰 만한 작품을 보는 안목), 세계에서 세 번 안에 든다”는 말을 들었을 만큼 수완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재벌가의 그림 구매
“국내 미술시장 파이 키워” vs “비자금 마련을 위한 것”
우리나라에서 재벌가의 미술품 구매에 대한 인식은 양면적이다. 실은 부정적인 시선에 더 치우쳐 있다. 자금 추적이 어렵다는 점을 악용, 재산 증식 또는 탈세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해외미술품은 더더욱 자금 추적이 어렵다. 이번 CJ 오너 일가의 미술품 구매를 향한 검찰의 칼날이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운 것도 이 때문이다.
미술품은 정해진 시장가가 없어 탈세의 여지가 있다. 증여나 상속할 경우 세금을 피할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 예를 들어 한 자산가가 현금 5억 원을 자식에게 증여한다고 치면 1억 원을 세금으로 내야 하지만, 미술품의 경우 5억 원짜리 그림을 9천999만 원에 샀다고 신고할 수 있다. 그 뒤 자식에게 증여하면 세금으로 1천만 원 정도만 내면 된다. 또 자손은 상속받은 그림을 다시 5억 원에 판매한 뒤 구매금액인 1억 원에 팔았다고 신고하면 양도에 따른 기타소득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
반대로 재벌가의 미술품 구입에 대한 긍정적인 의견도 있다. 우선 재벌 오너 부인 중 유독 미술 전공자가 많아 미술품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는 것이다. 이번 검찰 수사의 타깃인 CJ 이재현 회장의 부인 김희재 씨는 이화여대 장식미술학과를 졸업했다. 기업 소유 미술관이 탄탄한 재정을 바탕으로 경기침체에도 무풍지대로 활약, 미술계 발전에 기여한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재벌가의 미술관 경영은 미술시장의 파이를 키우고 스타 작가를 발굴하는 효과가 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의 금융황제로 군림한 JP모건의 2대 회장, 피어폰트 모건은 광적인 미술품 컬렉터였다. 그는 그리스 골동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노트, 셰익스피어와 바이런의 육필 원고 등 진귀한 보물과 예술품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회장의 과도한 미술품 구매가 경영 악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소문이 돌 만큼, 모건의 미술품 사랑은 못 말렸다. 하지만 그는 수집한 예술품을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상당수 기증하는 모범(?)을 보였다. 일부는 고향인 코네티컷 주에 있는 선친의 기념관에 내놓았다. 모건이 예술품 수집에 몰입한 것은 미국 최고 부자의 허영심 때문만은 아니다. 문화 후진국이던 미국인들에게 유럽 문명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미국 문화의 수준을 유럽과 동등하게 높이고자 했던 애국심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라커펠러, 구겐하임 등 미국 부호들은 자신이 설립한 미술관을 전문가에게 맡겨 투명하게 운영하고 있다. 국내 미술계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