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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원장 - 생명의 전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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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나이 올해 65세.생명의전화 원장,장미회 회장,한국간질협회 회장 등 직함도 많아졌고 그만큼 해야 할 일도 늘었다. 지난 5월 원장으로 취임한 ‘생명의전화’는 내가 20여년간 이사로 헌신해 온 곳이다.71년 서울 시청앞 코오롱빌딩 지하에 선교다방 을 차리고 ‘아가페의 집’ 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72년 이사회 발족때 참여한 분들이 강신명 김재준 최태섭 조향록 이영민 김옥길 장하구씨 등이다. 생명의전화 원장에 취임하던 날 많은 분들이 참석,축하해 주었다.그러나 취임식 직후 한국유리 명예회장 최태섭이사장의 소천소식은 한껏 부풀었던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최이사장은 생명의전화 발전에 큰 공을 세운 분으로 서울 하월곡동 복지관건립위원장직도 맡았다.특히 투병중에서도 센터와 복지관을 찾아와 상담자원봉사자들을 위로했고,기도로 후원하는 일을 아끼지 않았다.최이사장은 생전에 이 말을 항상 강조했다. “선교의 사명을 이루어 나가는 생명의전화를 만들어봅시다” 나는 그동안 전화를 통한 상담기관이자 자원봉사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해 온 생명의전화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을 늘 자랑으로 여기 고 있다. 특히 77년 자살하려던 한 청년을 살렸던 기억은 잊혀지지 않는다.유난히 쌀쌀하게 느껴지던 10월 마지막 밤이었다.그 청년은 전화를 걸어 절망적으로 한마디만 하고 끊었다.“죽어야겠습니다” 곧 파출소에 연락을 했고,전화국의 도움으로 자살 직전의 그 청년을 살릴 수 있었다.그리고 청년에게 “네가 마음이 굉장히 아팠구나 .우리 함께 해결책을 찾아보자.내일 다시한번 만날까”라면서 그를 위로했다. 그 청년이 자살하려 했던 이유는 아직까지 모른다.청년은 “얼굴도 모르고 단지 목소리만 듣고 이렇게 저를 살려주시다니 감사합니다 ”라며 새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생명의전화 상담원들은 ‘보이지 않게 움직이는 손’들이다.나는 이러한 일을 감당하는 봉사자들을 겸손 사랑 봉사 등의 정신을 바탕 으로 정성을 다해 섬길 것이다. 취임식날 명예이사장으로 추대된 조향록목사님은 나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당부했다.“원장님,늘 새롭게 발전하는 생명의전화가 되도 록 힘써주세요” 또 명예원장인 이영민 목사님은 생명의전화 인재양성을 위해 사용해달라며 장학금을 기탁했다. 이제 생명의전화는 그동안 숙원사업이었던 전국 단일방 전화번호도 받았다.‘15889191’번.9191은 ‘구원구원’을 뜻한다.이 번호 는 ‘자녀안심’의 대리신고전화로도 활용이 가능하다.생명의전화는 항상 열려 있다.<정리=노희경 hkroh@kukminilbo.co.kr>
나는 하마터면 힘찬 울음소리 한번 못 내고 어머니 뱃속에서 사라질 뻔했다.어머니는 나를 임신하고 마을에서 소문난 점쟁이를 찾아 갔다.과연 이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 잘 자랄 수 있는지,앞날은 어떠한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점쟁이는 어머니에게 충격적인 말을 했다. “이 아이는 곧 죽을 것입니다.그리고 아들 낳는 것은 꿈도 꾸지 마세요.아이를 낳으려면 공을 들여야 합니다” 청천벽력과 같은 점쟁이의 말에 어머니는 ‘어떻게 얻은 아이인데…’라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당시 우리 마을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농촌의 오지였다.밤이면 하늘에 달과 별만 빛날 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어머니에겐 온 통 ‘이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집을 향해 밤길을 터벅터벅 걸어오던 중 은은하게 울리는 교회의 종소리를 듣게 됐다 . 그 순간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는 살려야 한다’면서 어머니는 교회를 향해 뛰었다.어머니는 뱃속의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 이라도 할 심산이었다.집에서 6㎞나 떨어져 있는 교회로 단숨에 달려갔다. 어머니는 나를 임신하고 10개월동안 매일 새벽기도에 다녔다.이러한 정성으로 나는 1932년 3월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가끔씩 어머 니는 “그렇게 먼 곳에서 어떻게 교회종소리가 들렸는지 몰라.정말 기적이야”라고 말했다. 나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때부터 교회에 나갔다.교회에서는 내가 하도 잘 웃는다고 해서 ‘웃세’라고들 불렀다.목사님은 밝게 웃 던 나를 귀여워했다. 집에서 교회를 가려면 공동묘지를 지나 1시간30분을 걸어야 했다.그 길은 고된 훈련과도 같았다.어머니는 내게 교회에 가라고 강요한 적이 한번도 없다.그러나 주일이면 당연히 교회에 나가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했다.교회에 가기 싫어 배가 아프다며 투정을 부린 것이다.어 머니는 담담하게 “누워서 쉬어라”라고 말씀하시곤 그냥 나가버리셨다. 따뜻한 방에 누워 있는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곧 옷을 입고 어머니를 따라 교회로 갔다.나는 어머니에게 들키지 않게 뒤쪽에 숨어서 조용히 예배를 드린 뒤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교회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나를 보며 “종철아,너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단다. 엄마는 그것을 알아.네게 신앙을 가지라고 강요하지는 않지만 스스로 거듭나는 사람이 될 줄로 믿는다”라고 말했다. 어머니의 이러한 신앙지도는 내게 큰 힘이 됐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했던 내게 담임 선생님은 중·고사범학교 시험을 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다.선생님의 말에 친구 들은 모두 나를 부러워했다.그 시험은 전체 학생들 가운데 3명만 응시할 수 있었다.농촌을 떠나 견문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시험 전날 마을 사람들은 “종철이는 나중에 커서 훌륭한 학교 선생님이 될 것”이라면서 미리 합격을 축하해 주었다.으쓱해진 나는 당연히 시험에 합격할 것이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그러나 어머니만 유독 나를 믿어주지 않았다. 시험은 어렵지 않았다.좋은 결과를 기다렸지만 나 혼자 낙방하고 말았다.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그렇게까지 따가울 줄은 미처 몰랐다. 실망감에 사로잡혀 어머니가 걱정하는 것도 잊은 채 가출을 결심했다.그러던 어느날 이웃에 살던 한 아저씨가 나를 급하게 불렀다. “종철아,의사선생님 좀 모시고 와라.할머니가 또 넘어져서 다 죽어간다” 이웃집 할머니가 또 위독하단다.할머니는 벌써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다급한 아저씨의 말에 곧장 마을 중앙 회관에 있는 병 원으로 달려갔다.간판도 없이 운영되는 병원.그곳에서 단 한분의 의사선생님이 우리 마을사람들의 건강을 지켰다. 그날도 선생님의 모습은 단아했다.항상 그랬던 것처럼 하얗고 깨끗한 가운을 입은 선생님이 성경책을 보고 있었다.아무리 심하게 앓 는 사람이라도 선생님의 손길이 닿으면 금방 나았다. “선생님,옆집 할머니가 위독해요.빨리 가요” 선생님의 손을 끌면서 말했다.선생님은 황급히 가방을 챙긴 후 나의 손을 잡고 곧장 할머니에게로 달려갔다.할머니 옆에 앉은 선생님 은 두 손을 맞잡고 기도부터 했다. “하나님,할머니의 건강을 지켜주시옵소서.하루빨리 완쾌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정성껏 할머니를 간호하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서 한가지 꿈을 갖게 됐다.‘저렇게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은 어떨까’ . 그 의사선생님은 돈이 없는 사람은 없는대로 치료해주었다.무료로 치료를 받은 사람들은 나중에 채소 쌀 등으로 빚을 갚기도 했다.의 료혜택이 전혀 없는 곳에서 농민들을 대상으로 인술을 펴는 그 선생님을 마을 사람들은 좋아했다.어머니도 그 의사선생님을 예수님 다음으로 가장 존경하는 분이라고 항상 말했다. 그 선생님은 세브란스 출신이었다.선생님의 그러한 삶의 모습이 내가 의대를 지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 모른다.낮은 곳에 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모습.바로 내가 원했던 삶의 모습이었다
두 차례 ‘사선’(死線)에 섰던 것을 기억한다. 전주고등학교 2학년(당시 전주북중 5년)때 6·25전쟁이 발발했다.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혼자 전주로 올라와 하숙하고 있었다.전 쟁이 나자 친구들은 애국심에 불타 너도나도 학도병에 지원했다.당연히 나도 자원해 8사단에 배속됐다.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했던 군생활은 형편없었다.온 몸에는 이 서캐가 득실거렸고,밤낮을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서 폭음이 울렸다. 교회 성가대에서 함께 봉사했던 한 친구가 밤이면 나를 불렀다.그 친구는 기도를 하자며 내 손목을 붙잡았다.우리는 전쟁 통에도 하 늘을 이불 삼고 땅을 베개 삼아 나란히 누워서 별을 보며 소원을 말했다. “하나님,여기서 꼭 살아 돌아가게 해주세요.살아서만 가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습니다” 간절한 기도였다.그만큼 두려움도 컸다. 9·28수복 때 우리 8사단은 조치원까지 진주했다.그 무렵 이승만대통령은 “학생은 학교로 돌아가도 좋다”고 발표했다.얼마나 기쁜 소식인가.당시 교복 입고 가방을 들고 다니는 학생들처럼 부러운 존재도 없었다.나는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당장 학교로 복귀했다. 전주고로 돌아왔고,남원교회 성가대원으로 봉사활동을 재개했다.비록 전쟁중이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생각에 즐거웠다.당시 우 리교회에는 서울에서 피난을 온 사람이 몇분 있었다. 유동식선생은 추운 겨울 사과 궤짝을 뒤집어 놓고 요한복음을 강해했다.강해를 듣던 아이들이 유선생에게 춥다고 엄살을 부리면 선생 님은 소주 한 병을 양재기에 쏟아 그것을 나눠 마시게 했다.그리고 성경강의를 진행했다.성경이해의 기초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또 미당 서정주선생을 만났다.서정주선생은 당시 결핵을 앓고 있었다.그는 가야금을 타는 사모님의 모습과 함께 한 폭의 수채화를 연 상하게 했다.국어교사였던 서정주선생의 영향으로 문학에도 관심을 가졌다.그때 또다른 영상이 다가왔다.나보다 한 살이 어린 한 여 학생의 그림자였다.함께 성가대에서 봉사하던 그녀는 가끔 선생님들과 가진 모임에 나타나 말씀을 듣곤 했다.상냥하고 똑똑했던 그녀 를 가슴 속에 새겼다.그리고 먼 훗날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했다.그녀가 바로 아내 김혜자권사다. 전쟁 통에 그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학도병으로서 힘겨웠던 생활은 그렇게 잊혀졌다.그러나 고교 졸업식날 운동장 에서 통곡을 했던 기억은 잊지 못한다.나와 함께 입학했던 1천명의 학생들 가운데 졸업식에 참석한 학생들은 6백30명 뿐이었다.나머 지 학생들은 학도병으로 자원했다가 모두 죽은 것이다.내가 복교하던 날에 친구들은 속초까지 진군했다가 모두 전사했다.통곡의 운동 장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불렀다
인간의 죽음과 삶을 생각하며 진로를 놓고 고민했다.문학을 전공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지만,어린시절 농촌에서 만난 의사선생님이 생 각났다.어머니는 항상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라며 그 분을 칭찬했다.친구들은 모두 서울의대나 전남의대를 가겠다고 했고,나 혼자 만 그 선생님이 졸업했다는 세브란스의대를 지원했다.시험은 생각보다 어려웠다.시험에 떨어졌다는 생각에 합격자발표도 보지 않고 낚시를 다니며 울적한 마음을 달랬다.그러던 중 우연히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나를 보자마자 “종철아,축하한다”며 악수를 청했고,“등록마감이 내일인데 등록금은 마련했느냐”고 물었다.내가 정말로 합격했단 말인가. 그러나 기쁨도 잠시.마감일은 바로 내일인데 갖고 있는 돈이 한 푼도 없었다.어떻게 등록금을 마련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그때 하숙집 주인이 나를 도와주었다.중학교 1학년 때부터 하숙하면서 몇 달씩 방세도 못내고 있는 형편이었지만,그 분은 나를 믿고 돈을 빌려주었다.참으로 고마운 분이다.부모님과 떨어져 생활하던 나를 자식처럼 늘 사랑으로 대해주셨다. 등록금은 마련됐지만 피난지 부산에 있던 연세의대까지 가는 것도 문제였다.가장 빠른 길이라고 선택한 것이 뱃길이었다.전주에서 여 수로 가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대학캠퍼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등록이 마감된 후로 모든 문들이 굳게 잠겨 있었다.너무 허무하고 허탈해 운동장 바닥에 주저앉아 하나님을 원망하며 울었다. “어떻게 마련한 등록금인데.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그때 한 노인이 다가와 “왜 우느냐”고 물었다.나는 그 노인에게 “어렵게 등록금을 마련해 여기까지 왔는데 등록도 못하고 돌아가 야 할 처지”라고 하소연했다. 노인은 내게 “학생 이름이 무엇인가”라며 물었다.나는 훌쩍거리며 “의대를 지원한 박종철입니다”라고 대답했다.그러자 노인은 “ 허허허”웃더니 “자네가 종철군인가”하고 재차 묻는 것이 아닌가. 다른 과목의 성적은 형편없었지만 유독 국어성적이 우수해 눈여겨 봐두었다는 것이다.그리고는 추가등록을 허락한다면서 “합격을 축 하하네”라고 말했다.‘합격’이란 말에 몇번이고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그때 만난 그 노인이 당시 총장서리였던 김윤경박 사였다. 이처럼 ‘작은 예수’들은 소리없이 내게 다가와 큰 힘이 돼주었다.우연히 만난 친구가 전해준 합격소식,하숙집 주인이 마련해준 등 록금,그리고 김윤경박사님과의 만남.모두 하나님의 은혜였다
부산에서 등록을 마치고 돌아온 뒤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이곳저곳을 찾아다녔다.그러나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다.집에서 용돈으로 쓰라며 보내준 돈으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나갔다.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사 먹지는 못했지만,굶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 겼다. 등록을 마치고 며칠이 지난 어느날 밤 한 친구가 술이 잔뜩 취한 채로 나를 찾아왔다.한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친구였 다.그는 내게 주절주절 이상한 말을 했다. “천벌을 받을 놈들.어떻게 이럴 수가…” 나는 무슨 일인지 궁금해 그 친구에게 이유를 물었다.그러자 그는 대뜸 “종철아,돈 가진 것 있으면 좀 빌려다오”라고 말했다. 내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뻔히 아는 그가 그런 말을 하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한테 무슨 돈이 있겠어.대학등록금도 하숙집 주인의 도움으로 간신히 냈는데” 그러나 그는 다시 한번 애원했다. “실은 추가모집에 합격했는데 등록하러 가는 길에 소매치기를 당했어.그 돈이 어떤 돈인지 너도 잘 알잖아.부모님이 얼마나 심한 모 욕을 당하면서 그 등록금을 마련했는데….돈 잃어버렸다고 어떻게 집에 말해.종철아,나 좀 도와줘” 내가 가진 돈이라고는 생활비가 전부였다.어려움에 처한 친구를 외면할 수 없어 갖고 있던 돈을 모두 내주었다.그는 “고맙다.꼭 갚 을께”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제 어떻게 생활해야 하나.빈털터리가 되니 너무 추웠다.하루 이틀은 안먹고도 잘 견뎠다.그러나 얼마간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던 나는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방안에 누워 ‘혹시 학교도 못 가보고 굶어 죽는 것은 아닐까’하는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했다.배가 고 파 마치 방안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누워서 눈을 감고 기도했다.“하나님,이순간 내게 ‘만나’를 줄 사람은 없나요” 그때 귀에 익은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나 여기 있어”라며 간신히 대답했다.친구는 방문을 열고 거의 얼어붙어 있는 내 모습을 보더니 “나 때문에 네가 굶어 죽어가고 있었구나”라며 죄책감에 눈물을 흘렸다.그리고 따뜻한 밥을 지어 먹여줬다. 그러나 밥 한 숟가락이 들어가자 몸 안에 있던 모든 것들이 그대로 쏟아졌다.장이 뒤틀리며 모두 토해낸 것이다.힘이 빠지면서 정신 을 잃고 말았다.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눈을 뜨니 친구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내 실수야.며칠이나 굶은 네게 밥을 먹이다니”하면서 흰 죽을 내밀 었다.우리의 우정은 방안의 한기를 녹였다. 나는 친구에게 “너무 미안해 하지마.네가 나를 살렸잖아”라고 말했다.<\
남의 집 가정교사로 있으면서 아침엔 우유와 신문을 배달하는 등 어려운 대학생활을 보냈다.그러던 중 우연히 함석헌선생의 집회에 참석했다.그는 진지하게 생각하고 자신을 성찰하는 신앙,실천하는 믿음을 강조했다.‘그동안 나는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면서 어떻게 생활했고,무엇을 이루었는가’. 스스로 이러한 질문을 던졌다.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함선생의 집회를 계속 따라다니면서 내 삶을 새롭게 점검하고 예수 님의 가르침을 배우려는 신앙자세를 가질 수 있었다.여순반란사건과 6·25전쟁 등을 겪으며 숱한 죽음을 목격했던 내가 이웃과 사회 를 위해 좀 더 보람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중요한 기회였다.그런 기회를 갖도록 성공적으로 이 끌어 준 또다른 사람이 바로 김명선박사다. 예과 2학년 때 의과추천을 받아야 했다.그러나 문학에 관심이 있던 나는 문과대 건물에 살다시피 하면서 불어불문학과 문화사과목을 도강할 정도로 그 열정이 남달랐다.그러다보니 자연히 전공과목에 소홀했고,학점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학과장은 의과추천을 못 해준 다고 했다.그러면서 그는 “종철군,수학과로 전과를 하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말했다. 내 꿈이 산산조각나는 것 같았다.그러한 때일수록 마음을 강하게 먹기로 다짐하고 당시 세브란스의대 학장이었던 김명선박사를 찾아 갔다.자초지종을 설명했고,한 마디 덧붙였다. “박사님,의사가 되는 길을 열어주신다면 열심히 해보겠습니다.도와주십시오” 그는 내게 기회를 주었다.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했다. 김명선박사는 내게 결핵을 전공하는 내과의가 되는 것이 어떠하겠느냐고 했다.당시 의과대학생들의 전공은 담당교수들이 그들의 적성 을 보고 정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인간의 정신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학문이 문학과 통한다고 생각했고,내 의견을 김박사에게 전달했다.신경정신과 를 전공하겠다고 하면 당연히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그는 “정신과,그거 결핵보다 더 좋은 거지”라며 승낙해 주었다 . “돈도 제대로 벌지 못하는 의사가 돼서 무엇하려고”하며 동료와 가족들은 내 결정에 반대했다.그러나 내 결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초등학교시절에 의사선생님이 되겠다고 스스로 했던 다짐,중학교때 갖게 된 문학소년의 꿈,그리고 불어불문학과 문화사에 대한 관심 ….이 모든 것들의 타협점이 바로 정신과라고 생각했다.김박사는 그런 내 마음을 알고 “잘 선택했다”며 격려했고,세브란스의대 정 신과 1호로 훈련을 시작했다
아내 김혜자권사를 47년 교회 성가대에서 처음 만나 59년 결혼하기까지 10여년간 나는 그녀를 가슴 속에 그리며 살았다.‘좋아한다’ 든지 ‘한 번만 만나달라’는 식의 말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아내는 나보다 한 살이 적었다.예쁘고 똑똑해 남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그녀와 본격적으로 만나게 된 것은 대학생이 된 후다 .만나면서도 영화 한 번 보여준 기억이 없다.그녀와 나의 유일한 공통점은 신앙심 뿐이었다. 나는 그녀를 보면서 한 가지 꿈을 그렸다.바로 중학교때 서정주선생 부부의 수채화 같은 모습이다.가야금을 연주하는 사모님과 시를 쓰는 미당선생 대신 피아노를 치며 아름답게 노래 부르는 그녀와 흰 가운을 걸친 나의 모습이다. 의대를 졸업하고 육군 군의관으로 1년간 복무한 뒤 그녀에게 청혼했다.주말을 포함해 3일간 휴가를 내서 결혼한 후에 곧 복귀했다.군 복무중에 결혼한 우리 부부의 생활은 너무나 어려웠다. 아내는 기독교방송의 음악PD였다.신혼집은 서울 독립문 근처의 부엌도 없는 문간방이었다.살림은 아내가 버는 돈으로 꾸려 나갔다.게 다가 아내는 서울에서 유학하던 시동생들까지 혼자 챙겨야 했다.그런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못 했다. 62년 맏딸 향아가 태어났다.군복무중이었기 때문에 아내 혼자 그 짐을 져야 했다. 그날 초조한 마음으로 아기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세브란스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다.아내를 보증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너무 당황한 나는 겨우 안면있는 간호사를 찾아서 보증을 서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그리고 몇분 뒤 첫딸이 태어났다는 감격적인 소식을 접했다.아들 성수는 3년 뒤에 태어났다. 67년 신경정신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고,72년 소령으로 제대한 후 고려병원 신경정신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차츰 생활의 안정을 찾 아갈 무렵 아내가 임신을 했다. “마흔살이 넘어서 어떻게 아기를 낳느냐”며 나는 아내를 말렸다.병원 과장으로 있는 내 체면을 생각해달라고 아내에게 ‘억지주문 ’까지 했다.어머니 역시 “손자는 하나면 된다”며 만류했다. 그러나 아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귀한 생명”이라며 낳을 것을 고집했다.아내가 고려병원에 아기를 낳으러 왔을 때 나는 다 른 사람들이 알아볼까봐 고통스러워하는 아내를 외면했다. 그렇게 어렵게 태어난 막내딸 선아가 다음달에 결혼한다.선아는 내게 “아버지,제가 없었으면 얼마나 외로웠겠어요”라고 말하곤 했 다.선아에게 미안하다.“선아야,행복하게 잘 살아야 한다”
아침 일찍 전철을 타고 병원으로 출근하던 길이었다.한 건장한 청년이 갑자기 쓰러졌다.옆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 아무도 그 청년에게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내가 다가갔을 때 청년은 단지 쓰러져있을 뿐 특별히 이상한 행동은 눈에 띄지 않았다.가끔씩 몸에서 작은 경련이 일어날 뿐이었다. “이봐요.괜찮아요” 한 노인이 내 어깨를 치며 물었다.나는 그 노인을 쳐다보며 “괜찮은 것 같아요”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 손자가 간질병자라오.발작 때 잘못 부딪쳐 얼굴이 성치 않아요.쯧쯧.불쌍도 하지” 칠순의 노인은 그렇게 말했다. 몇분 뒤 청년은 멀쩡하게 일어났다.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전에 그런 일을 겪고난 뒤 내게 치료받던 한 여학생이 병원으로 나를 찾아왔다. 신학생이었던 유재춘양.그녀 역시 간질환자였다.그녀는 병을 앓고 있어서인지 같은 병을 앓는 환자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남달랐다 .당시 로빈슨이라는 미국 의료선교사와 함께 국내 간질환자들에게 약을 보급하며 선교하고 있었다. 그녀를 치료하면서 간질병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공부했다.국내에 약 40만명의 간질환자들이 있으며,그들은 자신의 병을 쉬쉬하고 숨 긴 채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그것은 내게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왔다.그리고 그중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형편이라는 사실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그들을 도울 수 있을까’. 65년부터 간질환자 무료진료사업에 참여하기 시작했다.간질환자를 돕는 ‘장미회’는 유양과 로빈슨 선교사가 주축이 되어 서울 기독 의사회와 함께 미국 개혁선교부의 후원으로 의료선교를 전개했다.그러던 중 1974년 진료 및 후원선교단체로 정부의 인가를 받고,사단 법인으로 정식 발족했다. 고려병원 신경정신과장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장미회 봉사에 꾸준히 참여했다. 서울 연지동 여전도회관 10층에 있던 장미회 본부는 행정사무실과 진료실 뇌파검사실 조제실 등을 갖춘 40여평의 공간이었다.현재 장 미회는 전국 13개 시·도에 49개 위탁진료소를 두고 있으며,2백60여명에 이르는 자원봉사 의사들과 9만여명의 회원이 있다.월회비는 진료비와 한달 투약료를 포함해 4천원이지만,영세민과 생활보호대상자들에겐 특별히 면제해주고 있다(장미회 연락처:023942325
76년에 처음 만난 김근종씨(가명).열세살이던 70년 겨울 간질이란 병을 얻었다.살얼음판 위에서 친구의 썰매를 밀어주다 실수로 친구 를 물에 빠뜨렸다.그 때문에 친구에게 머리를 심하게 얻어맞고 돌아온 그날 밤 갑자기 온몸이 마비되면서 의식을 잃는 발작을 일으켰 다고 한다. 그는 내게 울면서 말했다. “선생님,전에는 그렇게 건강했었는데 하루에 네댓번은 심한 발작을 일으킵니다.5남매 중 외아들인 까닭에 부모님은 빚을 내서 온갖 좋다는 약은 다 해주셨습니다.그러나 증세가 호전되기는 커녕 더 악화되는 것 같습니다”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중·고교 때는 수업도중에도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곤 했습니다.친구들 보기가 하도 창피해 이렇게 살바에야 죽어버리자고 결심하고 ,산에 올라간 적도 있었습니다.선생님,저 좀 도와주세요” 울고 있는 그를 토닥거리며 고칠 수 있다는 자신감부터 심어주었다.그리고 신앙을 가져보라며 성경책을 한 권 선물했다. “힘을 내라”는 의사의 자신있는 말 한 마디에 그는 금세 웃음을 보였다. 그후 그의 어머니는 한 달에 서너 차례 장미회에 와서 약을 타다 근종씨에게 먹였다.장기간 정기적으로 약을 복용하면서 조금씩 차도 를 보인다고 어머니는 좋아했다. 89년 근종씨가 한 여인을 데리고 장미회로 나를 찾아왔다.그 당시 근종씨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챌 수 없을 정도의 경미한 의식상실증 세가 나타나기는 했지만,거의 완치된 상태였다.또한 장미회를 통해 신앙을 갖고,신학교를 졸업해 88년부터는 한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고 있었다.그날 함께 온 아가씨는 그 교회에서 만난 근종씨의 애인이었다.그는 그 아가씨와 90년 9월에 결혼했다. 사실 간질은 천형(天刑) 혹은 무서운 유전병으로 인식돼 간질환자들은 사회에서 냉대를 받아왔다.의학적으로는 일시적 또는 반복적으 로 경련을 일으키는 의식상실을 수반한 중추신경계의 기능장애라고 정의한다.인구 1백50명∼2백명당 1명꼴로 이 병을 앓고 있는 것으 로 추산되며,통계적으로 20세 이전 발병률이 75%에 이르고 여자보다는 남자에게서 조금 많이 나타난다. 사람들은 보통 갑자기 경련을 일으켜 쓰러지고 입에서 거품을 뿜어내며 의식을 잃는 것이 간질이라고 생각하지만,이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간질환자에게 나타나는 대발작은 대개 의식을 잃고 쓰러지면서 몸 근육에 경련현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병은 완치될 수 있다.장미회 회원들 중에는 같은 병으로 고통받는 환우들의 투병을 보고 용기를 얻어 완치상태에 이른 예 가 많다
간질은 심각한 병이지만 절망과 비관만 할 병은 아닙니다.줄리어스 시저와 알렉산더대왕도 간질환자였습니다.간질환자들도 정상인과 다를바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장미회와 함께 현대의학의 혜택을 받고 또 신앙의 도움으로 의지한다면 곧 병을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81년 장미회 회장이 된 이후 줄곧 이곳을 찾은 환자들에게 이처럼 강조했다. 그러다 85년 장미회는 우연하게 제3세계에서 의료선교를 펼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네팔에서 유학온 여학생이 ‘장미회’를 소 개하는 나의 강의를 듣고,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가 내게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선생님,네팔에도 간질환자가 많습니다.필요한 약과 돈을 좀 보내주실 수는 없으신지요.괜찮으시다면 이곳에서 의료활동을 펼쳐보는 것은 어떠신가요” 의료활동은 선교사들이 비자얻는데 큰 도움이 됐다.이렇게 해서 네팔선교와 인연을 맺었다. 그 후 장미회 봉사회원들은 1년에 여섯차례씩 네팔을 방문했다.그곳의 중고등학교와 보건대학,국립직업훈련소 운영에도 힘을 보탰다. 특히 89년 1월 네팔의 고도(古都) 돌라카에 선교병원인 ‘한·네팔친선병원’을 짓기 시작했다.그리고 1년 후 총건평 2백여평의 3층 건물을 지어 개원했다.이 병원은 입원실,수술실,분만실,X선 초음파 진단기 등의 검사시설과 치과치료실,자가발전시설3대의 구급차 등 을 갖추고 있다.현재 강원희 박재영 선교사 부부와 김성순간호사가 파견돼 봉사하고 있다. 그러나 기도로 세워진 이 병원에도 분열움직임이 있었다.93년 현지답사를 갔을 때 네팔인들이 “중심경영”을 외치며 병원이 자신들 의 소유임을 강조하고 나섰다.우리들은 “함께 힘을 합쳐가는 존재”라고 설득했지만 현지인들은 막무가내로 우리를 내쫓았다.쫓겨간 곳이 카투만두였다.그곳서 3개월간 대기하며 보냈다. “하나님,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소서.사랑으로 베풀어온 우리들의 마음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3개월 뒤 다시 병원문을 두드렸다. “이 병원과 한국에서 보내오는 약품 등은 네팔 영토에 떨어지는 순간부터 당신들의 것입니다.이것들은 모두 네팔 국민들을 위해 합 리적으로 쓰여져야 합니다.단지 우리들은 봉사자일 뿐입니다” 이 말은 호소력이 있었다.병원문이 굳게 폐쇄된채 진료를 못받는 네팔인들의 마음을 울렸고,다시 병원은 재개됐다
‘장미회’는 95년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보금자리를 새롭게 마련했다.장미회 회장이 된 이후 판공비와 회장에게 제공됐던 자동차,운 전기사는 아예 없앴다.많은 액수가 회장 개인에게 제공되고 있었다.오직 회원들의 약값과 그들을 위해서만 사용하자고 자원봉사자들 과 약속했다.이렇게 해서 10여년 동안 돈을 모아 결실을 보았다. 95년 2월 이삿짐을 싣고 출발하기 직전 아침 일찍 부암동 새 사무실 측에서 연락이 왔다. “회장님,지금 이곳 주민들이 장미회의 입주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어서 이곳으로 오셔야겠습니다” 앞으로 장미회와 함께 건물을 사용할 사람들이 데모대를 만들어 피켓시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미회는 나가라” “우리는 장미회의 입주를 반대한다” “간질환자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 건물 앞에 섰을 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어느 새 왔는지 내게서 치료를 받고 있던 한 소녀가 피켓 든 손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 다.“의사선생님,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치료를 받을 수 없는건가요?” 환자와 가족들이 하나둘씩 부암동으로 몰려왔다.“이럴 수가….우리가 무슨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입니까.왜 우리를 내모는 겁니까” 모두들 원망스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건물사람들은 장미회가 입주하면 건물 값이 떨어지고,건물이 지저분해진다며 막무가내로 버텼다. 장미회 가족들과 함께 연지동 사무실로 되돌아갔다.환자들을 보살피는 간호사들은 “이럴 때일수록 하나가 돼야지요.우리 함께 기도 해요”라며 다독거렸고,모두들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도를 했다. “하나님께서 회원들의 쉼터로 자리를 삼아주신 곳입니다.한발짝도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앞에서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우리 장미회를 지켜주세요.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야 합니까.길을 열어주소서” 그들의 통곡어린 기도소리를 들으며 나는 용기를 내어 경찰서로 찾아갔다.그곳에 가서 경찰관들에게 장미회의 활동사항을 말했다.그 리고 지금 처한 난관에 대해 도움을 호소했다.경찰관들의 태도는 사뭇 진지했다.“아니,우리나라에도 그렇게 훌륭한 일을 하는 단체 가 있습니까.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걱정하지 마십시오” 부암동 사무실앞에서 데모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간 경찰관들은 그들을 어떻게 이해시켰는지 수십명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다.그리 고 장미회는 경찰관들의 호위를 받으며 입주할 수 있었다
지난해 11월 한민족복지재단 이사 자격으로 이성희 박은조 최홍준 목사,김형석 사무총장 등과 함께 북한을 처음 방문했다.목적은 북 한의 나진시 신흥동에 남·북합영회사인 ‘로뎀’(생명나무라는 뜻)사를 설립하기 위해서였다.로뎀사 설립건은 지난해 9월과 10월 두 차례 베이징(北京)에서 북한의 대외경제추진위원회 김정우위원장 등과 접촉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됐다.그리고 1차 방북 이후 빠르게 진행돼 8개월여만에 결실을 보게 됐다. 나는 복지재단 이사로서,또 한민족의료봉사단 단장으로서 처음부터 이 사업에 참여했다. 사실 한민족복지재단은 91년 목사 교수 의료인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이후 ‘사랑의 의료품 나누기운동’을 전개하면서 지속적으로 각종 의료품 지원과 구호활동을 펼친 순수 사회봉사단체다.출발 당시부터 북미기독의료선교회의 평양 제3병원 건립에 간접적으로 참 여해 북한지역 의료지원 사업에 꾸준한 관심을 보였고,그후 8년만에 북한 현지에 제약회사인 로뎀사를 설립하기에 이른 것이다.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물로 간구했는지…. 일은 순조롭게 진행됐다.방북전 북한측에서는 “참석자들을 소수로 하고,사람들이 들어오는 것보다 물건과 돈을 먼저 보내는 것이 좋 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우리들의 생각은 달랐다.“그들과 친해지려면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야 한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고,그것을 고수했다.철 저한 준비기도 덕분인지 그들과의 대화는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척됐다.서로의 필요가 충분히 양해됐다. 나는 방북을 앞두고 솔직히 두려운 감정을 누를 길이 없었다.이념과 사상이 다른 그곳에서 실수하지 않고 잘 견뎌낼 수 있을는지 무 슨 사고는 일어나지 않을는지 걱정이었다. 1차 방북 이후 돌아온 후에야 ‘괜한 두려움에 걱정을 했구나’ 싶어 쑥스럽기까지 했다.그들은 편안하게 우리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여러분을 환영합니다”라고 말하는 그들과 악수했을 땐 몸안에 있는 피가 한 곳으로 쏠리는 듯한 묘한 기분을 느꼈다. 바로 뜨겁게 끓어오르는 ‘동포애’였다.그들은 혹시 잠자리가 불편하지는 않은지 살피는 등 여러가지를 세심하게 배려했으며,자신들 의 삶의 모습을 구석구석 소개했다. 그렇게 서로의 의견이 절충을 이뤄 지난 7월 기공식때는 탤런트 정영숙씨와 유성희 대한의사협회장,정필근 한국제약협회이사장 등도 참석했다.물론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그때도 북한측은 많은 사람들이 방북하는 것을 반대했다.그러나 로뎀사 설립 계획은 남과 북의 주요단체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사업이므로 단체장의 참석이 중요함을 인식시켰고,그들은 다시 한번 수긍했다.
북한의 제도는 이론적으로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국가가 국민의 의료를 전적으로 책임지며 의료전달체계도 완벽했다.대부분의 치료가 읍·면·동단위 보건소에서 해결됐다.그러나 실제 그들의 모습은 시설 및 물자 부족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의사들은 많았지만 최신 의료기술과 지식을 가진 전문의는 매우 적었다.이것이 북한의료체계의 현실이었다. 지난 7월30일 북한 나진시 신흥동의 한 공터에서 열린 조촐한 행사.해방 이후 처음으로 남·북이 공동투자해 설립되는 로뎀제약회사 착공식 현장은 찌는 듯한 더위도 침범할 수 없었다. 총 3백만달러를 투자해 건설하는 로뎀사의 규모는 대지 9천8백㎡,건축면적 9백27㎡,연면적 1천98㎡로 공장건물과 2동의 편의시설을 갖추게 된다.12월 말이나 99년 1월 중순이면 가동에 들어간다.머지않아 이 회사에서 생산되는 약품이 북한과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시장에서 판매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꿈이 물거품이 될 뻔했다.사실 북한은 ‘동의학’에 관심이 많았다.그래서 그들이 우리에게 처음 제안했던 것도 양약개 발이 아닌 동의학약품 생산공장이었다. 북한의 동의학 종사자들은 우리에게 “세계 최초로 간염백신을 개발했으며 인삼을 소재로 한 약품도 몇가지 개발했다”면서 “동약( 한약)부문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확신한다”며 은근히 강조했다. 그러나 우리들의 입장은 확고했다.“북한의 수요와 생활수준을 감안해 약품생산계획을 추진하는 것이 원칙”이라면서 “북한 주민들 에게 필요한 기초의약품을 생산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결국 수요가 많은 위장약 구충제 비타민 등 기초의약품을 로뎀사에서 생산하기로 결정했으며,장기적으로는 북한 의료계에서 개발한 동약의 상품화도 추진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또 약속한 것이 있었다.바로 이익금 배분문제.한민족복지재단 김형석사무총장은 “한민족복지재단은 경제적 이익보다 사회적 기여에 더 큰 관심을 가진 봉사단체입니다.공장 운영으로 발생하는 이익금을 당분간 북한주민의 의료복지 증진을 위한 지원금으로 사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물었다.우리들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며 찬성했다. 남북의료진의 교류에 관해서도 합의해 선봉군의 인민병원을 지원하기로 했다.이에 따라 한민족의료봉사단 소속 의료인 아홉명이 빠르 면 이달 말에 그곳으로 간다.여섯명은 1년간 장기체류하고 세명은 3개월마다 교류하기로 했다.그들은 앞으로 나진과 선봉지역에서 북 한주민들과 나누고 협력하는 자비량 선교사역을 감당할 계획이다
서울시내 한복판에 ‘박종철신경정신과’를 개원한 지 벌써 20여년이 지났다.무일푼이었던 내게 아무런 조건없이 돈을 대준 친구 김 근식씨.그 덕에 병원을 운영할 수 있었다. 지금도 환자들을 대할 때면 늘 긴장하게 된다.오늘은 한 젊은 아가씨가 찾아왔다.“선생님,제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를 만나요.어떻게 하죠.전 그 사람 없으면 살 수 없어요.살 희망도 없어요.우린 결혼하기로 약속했었는데 진정이 안돼요.저를 좀 도와주세요” 애처롭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남자친구에 대해 이야기할 땐 웃었고,자신의 감정상태에 대해 말할 땐 손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가여운 아가씨를 어떻게 진정시켜야 하나. “그 사람을 많이 좋아하지요? 그동안 참 행복하게 지낸 것 같아요.헤어질 자신은 있어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건가요?”라고 되묻자 그녀는 “기다릴 거예요”라고 말했다.그녀에게 “그 사람 믿죠?”라며 재차 확인하자 그 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사람을 믿고 의지하는 모습,사랑은 그런 신뢰감이 있어야 이룰 수 있다. 내 계획도 그렇다.사랑과 믿음을 바탕으로 봉사와 선교사역을 감당할 것이다.내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만으로도 나는 당연히 봉사를 해야 했다. 쑥스러운 기억이지만 80년 장로장립을 받았을 땐 장로란 직분이 부담스럽고 부끄러워 사람들 앞에 내세우지 않았다.그러던 어느날 ‘ 하나님이 주신 직분인데’라는 생각이 들어 회개했고,신앙 안에서 더욱 충실한 청지기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다보니 빡빡한 일정표를 보면서도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하나님은 내게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고 웃는 것을 즐기는 천성을 주셨다.그것도 은혜였다. 최근 또 큰 은혜를 입었다.작년에 제2회 연세의학대상 봉사상을 받았다.크게 한 일도 없는데 상금으로 1천만원이 나와 전액을 장학기 금으로 내놓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하나하나 실천하는 삶.후배를 양성하는 일도 그것의 일부였다. 앞으로도 나는 장미회와 생명의 전화,내 전공인 학회활동을 제외한 친교모임엔 나가지 않을 생각이다.계속 장미회를 통해 소외된 채 음지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소망과 기쁨,복음을 나누기 위해 노력하겠다.또 생명의 전화는 각 분야 전문가들의 의견을 적극 수렴해 ‘함께 밀고 간다’는 생각으로 모든 계획을 추진할 것이다. 절대 서두르지 않고 최선을 다하면서 한 가지씩 실천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