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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매국(21명) : 없음 |
2. 수작/습작 (137명) : 없음 |
3. 중추원 (337명) : 2명
안병길(安炳吉,1886~1936) 일제 강점기의 기업인 겸 관료로, 본적은 경상북도 경산시 삼남동이다. 어린 시절 한문을 수학했고 1886년 일어학교를 졸업했다. 1925년 11월 27일 경상북도 관선 도평의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927년 경산금융조합장을 역임했다. 1927년 6월 3일부터 1930년 6월 2일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으며 1928년 11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9년 5월 1일 조선박람회 평의원에 촉탁되었으며 1930년 4월 1일 경상북도 관선 도평의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30년 6월 2일 정7위에 서위되었고 1931년 경산수리조합장과 경산면협의회원을 역임했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 경일은행 감사를 역임했으며 1934년 4월 9일 여자의학전문학교 설립준비위원회 증선(增選, 추가 선출)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4년 9월 12일 대구세무서 소득조사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1935년 대구상업은행 감사와 경산면협의회원을 역임했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중추원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중추원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안종철(安鍾哲, 일본식 이름: 廣安鍾哲, 1881~?) - 관료 부분에도 중복 등재.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본관은 광주이며 출신지는 경기도 양주군이다. 1904년에 관립한성일어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에 졸업했다. 학교 졸업 후 탁지부에서 근무하며 대한제국의 관리가 되었다. 1910년에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총독부 통역관에 임명되었고, 1913년에는 총독부 군수가 되면서 빠른 승진을 하였다. 전라남도 장흥군, 나주군, 순천군 군수를 차례로 역임했다. 1932년에는 도 참여관으로 승진하여 충청북도에 발령받았고, 충북 참여관을 마지막으로 퇴관한 후에는 중추원 참의로 발탁되었다. 1929년에 훈5등 서보장을 수여받는 등 1943년을 기준으로 종4위 훈4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충북 참여관이던 1935년에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353명의 공로자 중 한 명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 책자에는 욕심이 없고 덕을 갖춘 인물이라는 칭찬과 함께 군수로서 10년 동안 치적을 쌓았으며 참여관으로서 농촌 진흥의 제일선에 있다는 평가가 적혀 있다. 태평양 전쟁 중에 동민회와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하며 전쟁에 협력한 행적이 있다. 1944년에 학도병 제도가 실시되자 충청남도 지역에 파견되어 학병 지원을 호소하는 순회 연설을 하기도 했다. 안종철의 부인은 애국금차회의 발기인 중 한 명이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의 중추원과 도 참여관 부문,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중추원과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
4. 제국회의(11명) : 없음 |
5. 관료(1,207명) : 17명
안국선(安國善,1878~1926) 구한말의 작가이다. 본관은 죽산(竹山)(舊)이며 경기도 안성군 고삼면에서 출생했다. 1911년부터 약 2년간 경상북도 청도군 군수를 역임했다.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공진회(共進會)》라는 소설과 《외교통의(外交通義)》를 지었다. 안회남(安懷南, 1909~?)의 아버지.
안기선(安琦善) : 관련자료 없음
안배항(安培恒, 일본식 이름: 信安永照, 1889~?) 함경남도 함흥부가 출신지이다. 1914년 3월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4월부터 함경남도 갑산군에서 근무하면서 조선총독부 관리가 되었다. 1917년에는 정식 직원인 군서기로 승진하여 갑산군과 정평군에서 재직했다. 이후 삼수군 권업과장, 신흥군 서무주임, 풍산군과 이원군의 서무주임 등을 역임했다. 1931년에 총독부 군수로 발탁되어 정평군수로 발령받았고, 단천군과 영흥군 군수를 차례로 지냈다. 단천군수로 재직 중이던 1935년에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 단천군수이던 1939년을 기준으로 종6위 훈6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1937년에 잡지 《삼천리》가 조선인 관리들에게 희망사항을 듣는 기사를 실었을 때, 조선인 관리가 근무지에 자택이 없는 경우가 많다며 이들의 숙소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과 중의원 선거법을 조선에서도 실시하는 것의 두 가지를 희망사항으로 들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안병춘(安秉春) 일제 강점기의 지방행정 관료이다. 충청북도 사람으로, 1914년에 조선총독부의 임시직원이 되면서 관계에 들어섰다. 이후 정식직원으로 채용되어 총독부 식산국 농무과에서 근무하다가 1924년에는 총독부 군수로 승진했다. 고등관 8등의 군수로 전라남도 해남군에 발령받은 데 이어 장흥군 군수를 지냈다. 이때 종7위에 서위되어 있었다. 1929년에 고등관 6등으로 총독부 도소작관에 임명되어 황해도와 충청남도에서 차례로 근무했다. 소작관은 일본 제국이 곡물을 관리하고 소작쟁의에 대비하기 위해 각 도에 배치한 직책이다. 황해도 내무부 농무과에서 소작관으로 근무하던 1932년에는 고등관 5등과 종6위를 서위받았다. 1934년에 소작관으로 충청남도 내무부 농무과에 발령받았다. 충남 내무부에서 근무하던 1935년에 총독부가 시정 25주년을 기념하여 표창한 표창자 명단에 들어 있다. 이때를 기준으로 정6위에 서위되어 있었다. 2008년 친일인명사전 편찬 준비 과정에서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안병헌(安炳憲) : 관련자료 없음
안성호(安聖濩) : 관련자료 없음
안승렬(安承烈) : 관련자료 없음
안승복(安承馥) - 경찰 편에 중복됨
안식(安植) : 관련자료 없음
안영수(安永洙) : 관련자료 없음
안용대(安龍大, 일본식 이름: 安田龍大, 1913~1999)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2대, 제4대 국회의원(경상북도 경주)을 역임하였고, 변호사로도 활동했다. 일본 주오 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였으며 사천ㆍ함안ㆍ창원ㆍ거창군수를 역임하고 국회전문위원을 지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관료 부문에 수록되었다.
안용백(安龍伯, 일본식 이름: 竹山龍伯, 1901~1977)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며 대한민국의 교육인이다. 제4대 국회의원(전남 보성)에 당선되었으나 부정개표 행위가 적발되어 당선 무효 판결을 받았다. 전라남도 보성군 출신이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윤리학과를 졸업하고, 경상남도 하동군 군수와 조선총독부 학무국 관리 등으로 약 15년간 근무했다. 1941년 총독부 기관지 《조선》에 창씨명으로 〈유도정신 진흥의 의의〉라는 글을 투고해 일본 정신을 체득함으로써 내선일체를 이루자는 주장을 편 바 있다. 안용백은 조선인으로는 드물게 《녹기》에 글을 실었을 정도로 친일 논설 분야에서 인정을 받았다. 광복 후 경남고등학교 초대 교장을 지냈고, 문교부 고등교육국장, 제2대 전라남도 교육감(1964~1968), 대한교육연합회 상임이사 등으로 교육 분야에서 계속 이력을 쌓았다. 경남고 교장 시절에는 후에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이 된 김영삼의 스승이었고, 김영삼이 대학에서 철학 전공을 선택하게 된 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린이 교육을 위해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실례했습니다'라는 말을 생활화하자는 '미고안실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58년 대한민국 제4대 총선에 자유당 후보로 고향 보성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개표 과정에서 야당측 참관인들에게 수면제를 탄 닭죽을 먹인 뒤 이들이 잠든 사이에 표를 조작한 이른바 '닭죽 사건'이 발각되어 당선 무효 판결을 받았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관료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수록되었다. 광주광역시 어린이대공원에 안용백의 흉상이 세워져 있어 친일 행적 논란이 있었다.
안윤옥(安允玉) : 관련자료 없음
안정기(安定基) : 관련자료 없음
안종철(安鍾哲) - 중추원 분야에 2번 이름을 올림
안창선(安昌善) : 관련자료 없음
안창환(安昌煥, 일본식 이름: 安川昌煥, 1887~?) 일제 강점기의 교육인 출신 관료이다. 출신지는 한성부 또는 원적지인 경기도 여주읍이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듬해인 1911년에 관립한성외국어학교를 일본어 전공으로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효제초등학교의 전신인 어의동보통학교와 어의동간이실업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고, 1915년에는 경성고등보통학교 훈도로 임용되었다. 1920년에 조선총독부 시학으로 임명되어 경상북도에 배치되면서 교육행정 관리로 전업하게 되었다. 경기도 내무부 학무과를 거쳐 1931년에는 고등관 8등의 총독부 군수로 승진하였고, 경기도 여주군에 발령받았다. 여주군수로 재직 중이던 1935년에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353명의 공로자 중 한 명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 책자에는 "명목민관으로 부끄럽지 않은 원숙한 인물"이라는 평이 실려 있다. 이후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경기도 안성군 군수로 재직했다.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을 수여받는 등 안성군수이던 1940년을 기준으로 종6위 훈6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
6. 경찰(880명) : 11명 - 2명은 관료에서 중복 등재
안경선(安慶善)
안병록(安秉祿)
안수병(安洙丙)
안승복(安承馥) - 관료
안정국(安貞國) - 관료
안정옥(安廷玉)
안종렬(安鍾烈)
안종철(安鍾哲)
안창준(安昌濬)
안형식(安瀅植, 일본식 이름: 安中瀅植, 1888~?) 일제 강점기의 경찰이다. 한성부 출신으로 대한제국 말기인 1908년에 순사가 되면서 경찰계에 입문했다. 한성부 북부경찰서에서 근무하던 중, 1910년에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총독부로 소속을 옮겼다. 1912년에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수여받았다. 1914년에 경기도 고양경찰서, 1916년에는 경성부 창덕궁경찰서에 발령받아 근무했다. 1916년에 총독부 경부로 승진하였고, 이듬해부터 전라남도 곡성군의 곡성경찰서에서 근무했다. 이후 나주경찰서와 목포경찰서에서 근무하는 등 전남 지역에서 장기간 경부로 재직했다. 1931년에는 고등관 7등의 경시로 승진하여 전남경찰관교습소 소장에 임명되었다. 1935년에는 총독부가 시정 25주년을 기념해 표창한 표창자 명단에도 들어 있다. 1937년까지 전남경찰관교습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었고, 정7위 훈6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의 경시 부문에 수록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경찰 부문에 포함되었다.
안흥준(安興駿) |
7. 군(387명) : 7명
안광수(安光銖, 일본식 이름: 龜村正經, 1925~1975)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안병범(安秉範)의 아들. 예편 후에는 외교관으로도 활동했다. 일본군 대좌를 지낸 안병범의 아들이다. 태평양 전쟁 종전 직전인 1945년 5월 12일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58기로 졸업했다. 정래혁, 신상철과 일본육사 동기이다. 일본군 소위로 임관하여 약 3개월 동안 복무하다가 종전을 맞았다. 종전 후 미군정 지역으로 들어와 1946년에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였고, 안병범(安秉範, 일본식 이름: 龜村貞信, 1890~1950)과 함께 대한민국 국군에 참여하였다. 부자가 모두 군 장교로 복무하다가 1950년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함께 참전하였으며, 안병범은 개전 초기에 자결했다. 5·16 군사정변 직후에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였으며, 로스앤젤레스 주재 총영사를 시작으로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휴스턴 주재 총영사와 대한민국 외무부 의전실장을 거쳤다. 1974년에 대사로 승진하여 본부대기 중 암으로 서울에서 사망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군 부문에 안병범과 함께 포함되었다.
안병범(安秉範, 일본식 이름: 龜村貞信, 1890~1950)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군인이다. 안종인(安鍾寅)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다. 한성부 출신이며 대한제국 말기에 무관 생도로 일본에 유학했다. 육군중앙유년학교를 거쳐 1914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26기로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근무했다. 영친왕 시종무관과 일본군 보병 대좌를 지냈으며, 아들 안광수도 일본육사에 진학시켰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 대한민국 국군이 창설되었고, 안병범은 군사 경력자 기용 방침에 따라 1948년 다시 육군사관학교에서 1주일 동안 훈련을 받은 뒤 제8기 졸업생이 되었다. 안광수와 함께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계급도 같은 육군 대령이 되었다. 103여단장과 수도방위대 고문 등을 역임하다가 1950년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개전 초기에 서울이 조선인민군에게 점령되자 인왕산에서 칼로 자결했다. 안병범의 동생 두 명도 한국 전쟁 중 전사했다. 1955년에 안병범장군순의비가 제막되었으며,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에 묻혀 있다. 고은의 《만인보》에도 실려 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군 부문에 안광수와 함께 포함되었다.
안영길(安永吉)
안영치(安永恥)
안옥기(安玉琪)
안익조(安益祚, 1903~1950)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음악인, 의사 겸 군인이다. 본관은 순흥(順興). 작곡가 안익태의 둘째 형이다. 평양의 객주업을 하는 집안에서 7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안익태와는 세 살 차이의 바로 위 형이였다. 음악과 체육에 모두 재능을 갖춘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야구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고, 만돌린 연주가 수준급이었으며, 가극 공연에 관여하고, 태평레코드에서 문예부장으로 재직하면서 테너인 자신의 음반을 출반하기도 했다.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제국대학 의과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폐결핵 전문의로 의원을 열어 경영하기도 했으며, 만주군 군의관으로 단둥에 있는 안동지구 경비사령부에서 소교 계급에 올랐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 미군정 지역에서 대한민국 국군에 투신하여 헌병 장교가 되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 6월 25일에 제7연대 헌병사령부에서 중령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한국 전쟁 개전 초기에 이승만이 서울을 버리고 남하하면서 사흘 만에 서울이 조선인민군에게 점령되었는데, 이때 안익조(安益祚)가 자신의 집을 인민군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고 무기도 내주었다. 이 일로 인해 인민군이 후퇴하고 9월 28일에 국군이 돌아오자 부역죄로 체포되었다. 계엄고등군법회의 명령에 의해 주요 부역자 26명이 사형 판결을 받았을 때 포함되어 11월 7일에 부인과 함께 처형되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군 부문에 포함되었다. 동생 안익태는 이 명단의 문화/예술 부문에 들어 있다.
안홍도 (安洪濤) |
8. 사법(228명) : 없음 |
9. 친일단체(484명) : 9명
안근모(安謹模)
안방렬(安邦烈)
안순환(安淳煥)
안익수(安翼洙) : 일진회
안인식(安寅植, 1891~1969) - 종교에서 중복 등재 일제 강점기의 교육인이자 유교 계열의 학자로, 자는 공작(公鵲), 호는 미산(嵋山)이며 본적은 충청남도 당진군 순성면이다. 일제 강점기 초기에는 공립학교 교유로 근무한 교육인이었다. 1930년대부터 조선총독부 직속의 명륜학원 강사로 임명되면서 유교계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경학원 사성과 명륜학원 강사, 교과용도서조사위원회 위원 등을 겸임했다. 중일 전쟁이 발발한 1937년에 시국과 오인의 각성이라는 제목의 시국 연설을 한 것을 시작으로 태평양 전쟁 기간 중 전쟁협력 행적이 뚜렷하다. 1944년에는 《조선》에 〈황도유학의 본령〉이라는 글을 발표하는 등 저술 활동도 병행했다. 1942년에는 조선중견유림성지참배단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단장을 맡고, 일본의 신사를 성지라는 이름으로 순회 참배하기도 했다. 참여한 단체로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조선언론보국회 등이 있다. 1949년에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기소되어 공판 과정에서 《황도유학 개론》과 같은 책을 쓴 사실에 대해 추궁받았으나 반민특위의 활동이 방해를 받는 과정에서 보석으로 풀려났다. 2008년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해 작성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유교 부문과 친일단체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안종국(安鍾國) : 일진회
안준(安浚, 1889~?) 일제강점기 공산주의 운동가·언론인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말기에 친일파로 변절해 대동민우회 단체 이사장을 지냈다. 일명 안병현(安秉鉉)이라고도 한다. 1889년 경상남도 창원에서 태어났다. 3.1 운동 이후 고조된 청년운동에 호응하여 1919년 12월 창원에서 '남면(南面)청년회' 결성을 주도했다. 1920년 경성부에서 청년단체의 전국적 조직화를 도모하기 위해서 '조선청년회연합회기성회' 발기모임이 개최되자, 여기에 참여하여 경리부 담당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12월에 소집된 조선청년회 연합회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집행위원 15인 가운데 한명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4월 초순에 열린 조선청년회연합회 제2회 정기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재선되었다. 1923년 4월 조선청년회연합회 제4회 총회에 참석하여 조선물산장려운동에 가담한 집행부를 공격하는데 앞장섰다. 같은 달 '민중운동의 표현기관'을 자임하던 잡지사 청년당사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4년 4월 15일부터 경성에서 열린 '조선노농대회' 총회에 남면노농회 대표자격으로 참석했다. 총회 첫날 치러진 의장 선거에서 입후보자 5인 중 한사람으로 나섰으나 당선되지는 못했다. 같은 달 17일 열린 조선노농총동맹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집행부 선출을 위한 10인 전형위원에 선임되었다. 대회 마지막 날 일본경찰의 집회해산명령에 항의하여 1000여명 인파와 더불어 시위에 주동하여 나섰으나 이 사건으로 안준을 포함하여 시위 참가자 25명이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었다. 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던 같은 달 21일부터 23일까지 열린 조선청년총동맹 창립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여섯 차례 개최된 조선청년총동맹 집행위원회 회의에 정기적으로 참석했다. 1924년 10월 무렵 비밀결사 고려공산동맹 대회에 참석하여 경상남도 위원장에 선임되었는데, 이 비밀결사는 새칭 '서울파 공산당'이라고 불렀다. 이즈음 자신의 고향인 경남 창원 지역에서 대중운동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1925년 1월 창원군의 중심부인 상남면과 웅남면의 사회주의자들과 규하하여 사상단체 '적성회'를 결성하고 간부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2월 경남사회운동자동맹을 조직하려다 일제 경찰의 불법화로 금지되어 결성되지 못했다. 같은 해 4월 5일 창원군내 7개 청년단체를 통합하여 창원청년연맹을 결성하는 데 참여하고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달 17일 전국적 사상단체를 표방한 조선사회운동자동맹 발기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1925년 6월 시대일보 진해분국 기자를 맡았다. 같은 달에 청년총동맹 제6회 집행위원회에 출석하여 제2기 집행부 선출을 위한 5인 전형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고 신임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특히 1925년 7월 29일 과 30일에 열린 제1회 신임 집행위원회에서 의장으로 선임되어 사회를 맡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같은 해 7월 경남수해구제회를 발기했고, 8월 청년총동맹 집행위원으로서 각지를 순방하며 이재민 구호활동을 벌였다. 1926년 4월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화 창립준비위원을 맡았다. 1926년 11월 서울파 비밀결사 구성원들이 조선공산당 가입문제를 둘러싸고 두 진영으로 분열될때, 약 30%에 이르는 비가입파에 가담했다. 이즈음 경남 밀양으로 생활근거지를 옮기고 이듬해 1927년 5월 밀양 은산 농민조합 집행위원장을 맡았고, 6월 동아일보 밀양지국 수산분국 분국장에 취임했으며, 9월 조선농민총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12월 신간회 밀양지회 창립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1928년 12월 동아일보 밀양지국 수산분국 경영을 중단하고 분국장을 사임한 뒤 부산에서 경남인쇄주식회사를 경영했다. 1930년 6월 인쇄소를 경영하던 중 '격문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다. 그 후 조선총독부 전직촉탁이자 잡지사 신민사 사장인 이각종의 종용과 전향 권유를 받아들여 변절했다. 1936년 2월 사상전향자 13명으로 이뤄진 백악회 창립 총회에 참석했다. 이후 사상전향자의 복지,후생을 목적으로 하는 백악회를 더 활성화하여 일본국가주의를 포방하는 적극적인 사상운동단체로 바꾸는것에 주도하였고, 대동민우회 발기에 나섰다. 같은 해 7월 대동민우회 발기인대회에 참석하고 창립대회에서 의장을 맡았다. 창립 대회에서 대회 주도권을 둘러싸고 참석자들이 이각종파벌과 김경식파벌로 분열되자, 안준은 이각종파벌에 가담했다. 그 후 반대파를 배제하고 자파 소속 사상전향자를 규합하여 대동민우회 독자 창립 움직임을 이끌었다. 그 해 8월 중순 대동민우회 창립위원회 명의로 '내선일체'등을 주장하는 글을 발표하고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을 격렬히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같은 해 9월 사상전향자 140명을 결집하여 대동민우회 창립대회를 성사시키고 최고위직인 이사장에 취임한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이를 지지하는 다양한 활동에 착수했다. 1937년 7월 19일 '시국인식강연회'를 개최를 주도하고 강연회를 여는가 하면 조선총독부에서 주최하는 전 조선 순회 시국강연반에 참가하여 시국강연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수록한 친일인명사전에 교육,학술 분야에 선정되었다.
안중수
안태영(安泰永) : 일진회 |
10. 종교(202명) : 1명
(1) 개신교(56명) : 없음
(2) 천주교(7명) : 없음
(3) 불교(54명) : 없음
(4) 천도교(30명) : 없음
(5) 유림(53명) : 1명
안인식(安寅植) - 친일단체에 중복 등재 |
11. 문화/예술(174명) : 4명
(1) 문학(40명) : 없음
(2) 음악/무용(43명) : 1명
안익태(安益泰, 스페인 이름: Iktai Ahn, 1906~1965) 스페인 시민권자 신분이었던 한국의 작곡가, 첼리스트, 트럼페터,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로, 대한민국의 국가(國歌)인 애국가를 작곡했으며, 대표 작품으로 한국환상곡이 있다. 일제 시대의 친일 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안익태는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순흥(順興). 평양종로보통학교와 평양 숭실고등보통학교를 마쳤다. 1921년에 일본으로 유학, 도쿄 세이소쿠 중학교에 음악특기자로 입학하였다. 1926년에는 도쿄 구니타치 고등음악학교에 입학해 첼로를 전공했고, 1930년 졸업 후 다시 미국으로 유학했다. 신시내티 음악학교과 커티스 음악학교, 펜실베이니아 주립 필라델피아 템플 대학교 음악대학원에서 첼로와 지휘 등을 배웠고 한인 교회 등에서 음악감독으로 일하기도 했다. 1936년에 처음 유럽을 방문했고, 이때 파울 힌데미트와 펠릭스 바인가르트너를 만나 음악 활동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때부터 친일 행적을 시작했다고도 알려지고 있다. 1937년에 펜실베이니아 주립 필라델피아 템플 대학교 음악대학원을 졸업한 뒤 1938년에 아일랜드의 더블린 방송 교향악단을 객원지휘했다. 이후 헝가리에 머물면서 부다페스트 음악원에서 졸탄 코다이와 에르뇌 도흐나니 등에게 작곡을 배웠고, 종전 직전까지 독일과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프랑스, 스페인 등지에서 지휘 활동을 했다. 전황이 악화되자 1944년 4월에 파리에서 베토벤 축제 연주회를 마친 직후 중립국인 스페인으로 피난했으며, 그 해 12월에는 그의 대표작인 한국 환상곡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필 악보를 완성했다. 1946년에는 스페인 여성 롤리타 탈라베라와 결혼했고,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이후 스위스, 멕시코, 과테말라 등에서 지휘했고, 1955년 3월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했다. 1962-64년까지 3년간 서울에서 국제음악제를 주관했고, 런던 교향악단과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도쿄 교향악단 등을 객원지휘했다. 1965년 7월 4일에 런던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마지막 연주회를 가진 직후 건강 상태가 악화되었고, 9월 16일에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병원에서 타계했다. 안익태의 작품 중 '애국가' 는 현재 대한민국의 정식 국가로 쓰이고 있지만, 그 작곡 연도와 장소에 대한 이견이 많다. 1964년 제 3회 서울 국제음악제 때 내한한 불가리아 지휘자 페터 니콜로프는 애국가가 불가리아 민요인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O! Dobrujanski Krai)' 를 표절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안익태의 활동에 대해 독재적이라고 비판하던 국내 음악계의 분위기와 맞물려 큰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에 음악학자 허영한이 애국가는 안익태가 유럽을 방문하기 전인 1935년 11월에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작곡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어서 1936년에 베를린에서 작곡되었다는 견해가 수정되기도 했다. 허영한의 연구가 표절이 아니라는 충분한 근거는 아니지만, 그 동안의 유럽 작곡설을 뒤집었기 때문에 표절이 아니라는 신빙성이 강화되었다는 주장이 많다. 애국가 외에도 '강천성악' 에 나오는 선율이 일본의 궁중 음악인 '에텐라쿠' 와 동일하다는 이유로 문제가 되기도 했고, 최근에 안익태의 유럽 체류 시절 연구에서 발견된 작품인 환상곡 '에텐라쿠' 가 원본이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안익태는 1930년대 후반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제자가 되었다고 밝혔으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1942년경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 시기의 안익태 공연 프로그램에 '슈트라우스의 제자' 라는 내용이 실리기 시작했고, 슈트라우스가 자신의 작품인 '일본 축전 음악' 을 지휘한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작성해준 추천장이 남아 있다. 안익태는 2차대전 종전 후 슈트라우스의 교향시들을 본격적으로 다루었으며, 일본의 옹가쿠노토모샤(음악지우사)에서 슈트라우스의 전기를 출판하기도 했다. 안익태의 1940년대 유럽 활동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김경래와 롤리타 탈라베라의 전기에 기록된 자료로 전해져 왔으나, 최근에 진행된 연구들에서 이들 자료의 잘못된 정보와 왜곡 사례를 지적하고 있어 상당한 파문이 예상되고 있다. 유럽 체류 시절 안익태가 관변 단체였던 '일본-독일 협회' 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으며, 일본의 가가쿠를 주제로 한 '에텐라쿠' 와 일본제국에 의해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세워진 일을 기념한 '만주국 축전곡' 등을 작곡했다는 기록도 발표되었다. 2000년에는 음악잡지 '객석' 의 베를린 통신원이었던 진화영이 안익태의 베를린 필 지휘 기록이 종전의 1940년이 아닌 1943년이며, 단 한 차례 뿐이었다는 기사를 발표했다. 같은 해 발굴되었다는 안익태의 지휘 모습이 담긴 기록 영화가 2006년에 독일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있는 송병욱에 의해 만주국 축전 음악회의 실황 녹화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국내 음악계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2006년 11월 19일에 송병욱의 강연회를 통해 만주국 축전 음악회의 기록 영화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개 상영되었으며, 2007년에는 음악학자 이경분이 독일과 스위스 등지의 문서 보관소 등에서 찾아낸 자료들로 안익태의 1938-44년 활동상을 정리한 책이 출간되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음악 부문에 선정되었다. 이에 대해 안익태기념재단 측은 "당시 본인 선택과 상관없이 국적을 잃은 안 선생은 일본인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하였다. 이 명단의 군 부문에는 형인 안익조도 포함되어 있다.
(3) 미술(24명) : 없음
(4) 연극/영화(58명) : 3명
안석영(安夕影, 일본식 이름: 安田榮, 야스다 사카에, 1901~1950) 일제 강점기에 주로 활동한, 한국의 화가, 영화 각본가 겸 영화 감독이다. 호가 "석영"(夕影)이라 안석영으로도 불린다. 한성부 출신으로 교동보통학교와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과 미술 수업 후에 언론사 삽화 작가로 일했다. 안석영은 예술 다방면에 다양한 재주를 지닌 팔방미인형의 인물이었다. 일본 유학 후 미술, 영화, 문학, 연극의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이념적으로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계열에 속해 있었다. 박영희, 김기진 등과 함께 참가자들 각자의 이름 머릿글자를 따서 작명한 파스큘라에 참가하여 카프로 발전시키는 등 문예 운동 부문에서 활발한 행보를 보였다. 삽화가로는 나도향, 이무영, 박종화, 백철 등의 글에 그림을 그렸고, 한국 최초의 아동 만화로 알려진 〈씨동이의 말타기〉를 내놓았다. 《개벽》, 《백조》, 《학생》, 《어린이》, 《별건곤》 등 유명한 잡지의 표지화도 그렸다. 특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연재한 시사만화로 이름을 알렸다. 영화계에는 미술감독으로 참여하다가, 1937년 《심청전》을 연출해 감독으로도 데뷔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1년, 조선인은 지원병으로 갈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하던 조선 청년이 마침내 지원병 제도의 문호 개방에 힘입어 지원병으로 참전한다는 내용의 어용 영화 《지원병》의 영화 각본을 쓰고 연출했다. 이 영화에는 최운봉과 문예봉이 남녀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안석영은 《지원병》과 《흙에 산다》와 같은 친일 영화 제작 외에도 황도학회 결성식에 참가하고 조선임전보국단에 가담했으며 《신시대》의 표지화도 그려, 친일 행적이 뚜렷한 편이다. 광복 후에는 조선 영화인 동맹에 참가했다가 좌익 계열이 주도권을 잡아가자 탈퇴하여 우익 영화인들을 규합하여 영화감독구락부를 조직[2]하였고, 우익 계열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47년 아들인 작곡가 안병원(安丙元, 1926년생)이 곡을 붙인 〈우리의 소원〉 노래를 작사하였다. 이 노래는 본래 "우리의 소원은 독립 / 꿈에도 소원은 독립"이라는 가사였으나, 이듬해 교과서에 실리면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 / 꿈에도 소원은 통일"로 바뀌었고, 이후 오랫동안 널리 불리고 있다. 2000년 남북 정상 회담 때 양 정상인 김대중과 김정일이 손을 잡고 함께 부른 노래이기도 하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안영일(安英一, 일본식 이름: 安部英樹, 1909~?) 한국의 연극인으로, 본명은 안정호(安禎浩)이며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이다. 일본에 유학하여 니혼 대학 공과에 재학하던 중 1931년 대학을 중퇴했고 신극 운동에 투신했다. 일본의 좌익극장에서 신극을 공부하고 1932년부터 조선인 극단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함께 연극 운동을 한 이서향 등은 먼저 귀국하였으나 안영일은 일본 연극계에 남았다. 1935년 조선예술좌의 창립 공연에서 〈토성낭〉을 연출하여 연출가로 데뷔하였고, 조선예술좌 해체 후에 일본 극단인 신협극단의 조연출로 일하면서 일본인 연출가 무라야마 도모요시(일본어: 村山知義)의 영향을 받았다. 귀국한 뒤인 일제 강점기 말기에 관제 연극을 연출한 기록이 있다. 1942년 조선총독부의 후원으로 열린 제1회 연극경연대회에 김태진의 〈행복의 계시〉를 연출해 출품했고, 제2회 대회에서는 박영호의 〈물새〉를 연출하여 연출상을 수상했다. 광복 직전 개최된 제3회 대회에도 송영의 〈신사임당〉, 조천석의 〈개화촌〉, 김승구의 〈산하유정〉, 세 편의 친일 연극을 한꺼번에 출품했다. 또한 친일 연극단체인 조선연극문화협회의 이사를 맡기도 하여,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광복 직후에 조선연극건설본부 서기장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좌익 연극인 계열에서 활발히 활동하다가 월북했다. 북조선에서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을 역임했고 평양연극영화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57년 국립연극극장 총장, 1964년 조선연극인동맹 위원장에 오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연극의 성립과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67년 복고주의 종파분자로 몰려 숙청되었다는 설이 있다.
안종화(安鍾和, 일본식 이름: 安田辰雄, 1902~1966)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한 대한민국의 영화 배우 겸 영화 감독, 연극인이다. 본명은 안용희(安龍熙)이다. 한성부에서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가정에서 아버지에게서 한학을 배우다가 신교육을 받기 시작하면서 문예 방면에서 소질을 드러냈다. 1922년 도쿄 유학생들이 함흥부에서 창립한 연극단체 예림회에서 문예부장을 맡아 공연예술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 안종화는 아들이 예술 분야에서 일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몰래 함흥으로 간 것이었다. 예림회가 해체된 뒤 부산으로 내려가 무대예술연구회에서 참가했다가 이 단체가 일본인이 세운 영화사인 조선키네마주식회사로 흡수되면서 영화계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1925년 제주도에서 촬영된 《해의 비곡》에 아버지와 아들의 1인 2역으로 출연하는 등 1920년대 중반부터 영화 배우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1927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산파 역할을 한 조선영화예술협회에 가담했고, 1928년 최초의 카프 영화인 《유랑》을 제작했다. 1930년대에는 활발한 영화 연출 작업으로 《꽃장사》, 《노래하는 시절》, 《청춘의 십자로》, 《은하에 흐르는 정열》, 《역습》, 《인생항로》 등을 내놓아, 한국 영화의 맹아기인 이 시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영화인이었다. 2008년 현재 대한민국 국내에 현존하는 극영화 중 가장 오래된 작품도 안종화의 《청춘의 십자로》이다. 신파극 정서에서 벗어난 신극의 보급에 노력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어용 단체인 조선영화협단을 조직하고 내선일체를 표방하는 조선영화인협회의 임원을 지내 친일 영화 제작에 독려했다. 《매일신보》에 〈신체제에 순응하는 조선영화의 장래〉, 〈전환쇄신의 시 영화의 국가사명〉과 같은 친일 논설을 싣기도 했다. 특히 조선영화인협회가 검열을 담당하고 친일 활동을 실무적으로 전담할 수 있도록 산하 조직으로 설치한 영화인기능심사위원회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본업인 영화 외에도 친일 단체인 황도학회와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을 역임하여, 영화계에서는 친일 행적이 가장 뚜렷한 편에 속한다. 이 때문에 후에 친일 행적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광복 후에는 1945년 말 결성된 조선영화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았다가, 영화동맹의 주도권을 좌익 계열 영화인들이 잡게 되면서 이탈한 영화인들의 모임 영화감독구락부에 참가하는 등 우익 계열에서 활동했다. 한국영화인협회의 전신인 대한영화협의회가 조직될 때도 이를 주도했다. 이후 서라벌예술대학 학장을 지냈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문화훈장도 수여받았다. 1930년 《꽃장사》와 《노래하는 시절》을 연출해 감독으로 데뷔한 이래 광복 후에는 《사도세자》 (1956), 《천추의 한》 (1956), 《춘향전》 (1958) 등 사극 및 시대극을 주로 만들었다. 안종화의 조감독으로 연출 수업을 받은 제자 중에는 이만희가 있다. 저서로 초창기 연극계를 다룬 회고록 《신극사 이야기》(1955) 가 있다. |
12. 교육/학술(62명) : 없음 |
13. 언론/출판(44명) : 없음 |
14. 경제(55명) : 없음 |
15. 지역유력자(69명) : 없음 |
16. 해외(908명) : 12명
(1) 중국 만주(798명) : 12명
안기초(安基礎) 안덕선(安德善) 안삼룡(安三龍) : 간도특설대 제3기 안삼룡(安三龍) : 간도특설대 제4기 안성도(安成道) 안영언(安英彦) 안용정(安容禎) 안용택(安龍澤) 안응록(安應綠)
안창호(安昌鎬, 1891~?) 일제 강점기 당시 중국에서 활동했던 경찰이다. 1918년 조선총독부 순사보로 임명된 뒤부터 젠다오(間島, 간도) 일본 총영사관 혼춘분관에서 순사보로 근무했다. 1918년 5월 간도 일본 총영사관 혼춘분관이 배일 조선인 회유를 위해 조직한 모국방문단을 인솔했다. 1919년 일본 외무성 순사로 임명된 뒤부터 젠다오(간도) 일본 총영사관에서 근무하는 한편 항일 세력에 대한 정보 수집, 항일 독립 운동가 회유 및 감시 업무를 맡았다. 이 때문에 대한독립군단과 맹호단 등 많은 항일 독립운동 단체로부터 항일 독립운동의 방해자로 지목되어 사직하라는 협박을 받기도 했다. 1920년 삼단동맹회(三斷同盟會) 의사(議事), 1921년 간도구제회(間島救濟會) 서기를 차례로 역임했고 1923년 젠다오(간도) 일본 총영사관 경찰로 복직했다. 1923년 자신이 고용한 밀정을 통해 이른바 동양학원 사건(東洋學院事件)을 적발하는 한편 독립운동가 방한민 등 관련 인사들을 체포했다. 1932년부터 1934년까지 간도 일본 총영사관 경찰부 경부로 재직하는 동안 항일 세력의 활동을 감시하는 한편 항일 운동가 190여 명을 체포했다. 1933년 12월 21일 항일 세력 체포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상여금 20원을 받았으며 1934년 10월 15일 간도 일본 총영사관 경찰부 경부(1932년~1933년) 재직 시절 치안유지법 위반자들을 검거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경찰 관리 공로 기장을 받았다. 1935년 이후에 동만농사개발주식회사(東滿農事開發株式會社)를 창립한 뒤부터 토지 구입과 농장 경영, 일반 농민에 대한 자금 융자 업무를 수행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해외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안채운(安采云)
안홍익(安鴻翼)
(2) 중국 관내(66명) : 없음
(3) 일본(38명) : 없음
(4) 러시아(6명) : 없음 |
첫댓글 4776명 친일 행위자 중 60명이 포함되었습니다. 성씨 인구로 볼 때 상당히 적은 수가 참여하였으며 애국 충절이 더 많았다는다는데 자부심을 가집시다. 그 분들의 말 못할 사정이야 어찌 알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