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해서 김종철 딸 결혼식 참석을 망설였다.
지난해 12월, 40년 만에 김종철을 처음 보았다. 사실, 그와 고교 시절 가깝게 지낸 것도 아니고, 졸업 후 한 번도 만나거나 전화 한 적이 없다. 그랬으므로 만난 지 한 달 남짓 만의 딸 결혼식에 참석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나는 지난번 아버지 장례와 관련된 글에서도 언급했듯 이미 몇 년 전 일이지만, 여전히 동기에 대한 섭섭함이 남아 있다. 내가 저장하고 있는 전화번호는 직접 메시지를 날리고, 연락이 닿지 않은 친구에게는 다른 친구가 연락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창피할 정도였다. 참석한 친구는 얼마 되지 않았다.
현대그룹을 퇴직하고, 빚을 크게 진 후의 내 삶은 자판기 커피 한잔 뽑아먹기를 망설일 정도로 궁핍했다. 이 바람에 변두리로 이사해야 했고, 생계가 우선이었다. 거의 날마다 사람 만나는 것이 일이었던 현대그룹 편집장 시절은 이미 어제의 일이고, 이렇게 저렇게 알던 사람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내가 사람 만나기를 피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나를 찾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나를 찾았다면 나는 한걸음에 달려갔을 것이다. 가난보다 더 힘든 것은 외로움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처절한 고독감을 달래기 위해 부르지도 않는 사람을 굳이 찾아다닐 일도 아니어서 이래저래 만남은 줄어들었다.
삶이 그랬을망정 내가 동기와 등을 지고 산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장례식에 올 만한 친구가 오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씁쓸했다. 이때의 감정이 남아 있던 나는 어찌 보면 별것 아닐 수도 있는 일에 거칠게 반응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전라도 사는 동기의 딸 결혼식에 참석지 않았던 일이다.
전라도 친구와는 고교 시절 서로 집을 방문하면서 꽤 가깝게 지냈었다. 그러므로 그의 누나나 여동생도 나를 포함한 몇 친구는 기억하고 있었으리라. 왜 나는 안 보이느냐고 물었을 테고, 그래서 이 얘기를 듣고 함께 친했던 그가 내게 전화했을 것이다.
"야, 인마! 너 왜 안 왔어?'
나무라기부터 하는 투다. 이 녀석은 평소에도 함부로 말을 뱉는 바람에 한 번씩 친구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었다. 가령, 많은 사람 앞에서 친구의 이혼 소식을 그 친구 면전에서 알린다든가 하는 따위. 이혼이 부끄러울 일도 아니지만, 자랑할 일도 아니다. 더욱이 그 얘기가 남의 입을 통해 나와야 하겠는가. 우리끼리만 할 얘기를 부인들 앞에서도 거론한다든가, 안 해도 될 얘기를 해서 상대방을 난처하게 한다든가, 그래서 더 예민하게 반응했을지도 모른다. 올 만한 친구인데, 어쩐 일로 못 온 거냐는 식으로 물었으면 그렇게 감정이 뒤틀리지는 않았을 텐데, 몇 년 만에 전화하면서, 한다는 소리가 대뜸 훈계부터 하려 든다는 생각에 순간 불쾌했다.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걘 내 아버지 장례식에 오지 않았어. 그래도 나는 걔 딸 결혼식에 참석해야 하느냐? 난 사는 게 여유가 없으니까 너나 군자 되라. 뭘 추궁하려면 최소한 한두 마디 사정을 들어보고나 말해라, 인마!"
마구 쏘아붙이고는 좀 미안했다. 뭐 그도 친구 누이들이 내 말을 하니까 생각이 나서 전화했을 뿐일 텐데 내가 너무 지나쳤다 싶었다. 그래서 며칠 후 그에게 전화했다. 만난 지 오래됐는데, 이 기회에 불쾌했다면 화해도 할 겸, 아니면 영 못마땅해서 결별하게 되든 술잔에 마음 좀 부어보자 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약속한 시각을 몇 시간 앞두고 갑자기 취소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나를 만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급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그쯤은 이해한다. 그러나 그랬으면 그다음에라도 제가 연락 한 번쯤 했어야 순서 아닌가.
종철이 딸 결혼식 참석은 자꾸 망설였다. 안 가도 그만이라는 생각과 그래도 지난번 40년 만이기는 하지만 노래방까지 같이 갔는데 인사는 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 사이에서 자꾸 시간만 흘렀다. 열 명 가까운 동기에게 전화했다. 축의금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방에 있다, 일하고 있다, 뭐 어떻다면서 참석 못한다는 대답이 대부분이었다. 개중에는 참석할 생각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고교 시절 그다지 친한 것도 아니었고 그동안 교류도 없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해할 만했다. 나도 그런 마음이었으니.
누가 참석하느냐고 물어도 그것조차 대부분 모르고 있었다. 축의금을 대신 부탁하기는 글렀다. 모른 척 참석하지 않든가 늦더라도 참석하든가 두 가지 중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마지막으로 전화한 친구에게, 전라도 친구 딸 결혼식 불참 때문에 말다툼했던 녀석이 참석할 거라는 얘기는 들을 수 있었다. 그 녀석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가기로 했다.
콜택시를 불렀다. 고양동과 벽제 시립장제장을 거쳐 식장인 합정동까지의 거리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택시비도 꽤 많이 나왔다. 합정동 부근은 예식장이 많아서인지 거의 도착했음에도 차가 많이 밀렸다. 다행히 많이 늦지는 않았다.
이곳저곳 둘러봐도 동기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축의금만 내면 결혼식도 보지 않은 채 식당으로 곧장 향하는 풍경, 우리 동기도 그 풍경에 동참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식당에 내려가니 동기들이 보인다. 나를 포함해 다섯 명. 그나마 한 명은 같은 학교에 다닌 동기도 아니다. 내 아버지 장례식 참석 인원보다도 적다. 부모 장례와 딸 결혼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초라했다.
참석하고 싶었지만, 사정이 있었으면 늦게라도 축의금을 전하는 것으로 대신하면 된다. 그러지도 않을 거라면 어설픈 핑계 대지 말고 입 다무는 게 낫다. 혹, 축의금을 전할 형편이 안 된다면 진심이 담긴 자필 편지 한 통이 대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참석을 안 한 친구의 마음은 내가 망설였던 것과 비슷해서였을 것이다. 그건 누구 탓이 아니다. 없었던 교감이 새삼스럽게 스파크 일 듯 불붙을 수는 없을 테니까.
사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심정 속에는 실망이 커서이다. 그 실망이란 기대했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다. 기대하지 않았으면 실망할 일도 없고, 실망하지 않으면 '이에는 이'와 같은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참석을 못한 친구보다 참석을 안 한 친구에게 더 여지가 생긴다.
내 아버지 장례식 때 기대하지 않았는데 참석했던 친구가 있다. 고맙다. 그렇다고 참석할 만한 친구가 참석한 것보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친구의 참석을 더 고마워할 건 아니지만, 뜻밖의 일에 사람은 더 마음이 움직여진다. 나도 그 같은 마음을 염두에 두어 김종철 딸 결혼식에 참석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짝사랑에는 한계가 있다. 보통사람이라면 주고받으면서 관계가 형성되기 마련이다. 그 주고받는다는 것조차 쉽지 않다. 여유 있는 사람이 더 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여유의 정도와는 상관없이 항상 나는 더 많이 준 것 같고, 상대는 늘 덜 준 것처럼 인식한다. 이 때문에 상대적이면서도 그 상대적인 것에 불균형이 자리한다.
나이 드니 말이 많아지고, 작은 일에도 섭섭해지고, 점점 고집이 세어진다. 저렇게 늙지는 말아야지 했던 바로 그 모습을 내가 자꾸 보이곤 한다. 이미 육십이 된 친구도 있고, 그보다 좀 어린 친구도 있다. 이쯤 됐으면 세상을 관조하지는 못할망정 추해지지는 말아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그래. 나도 잘 안 되지만, 좀 잘 늙어 보자. 고교 동기랍시고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생각은 하지 말자. 기본적인 예의부터 갖추자. 대화의 출발은 말하기가 아니라 듣기라고도 했다. 무엇보다 아픔을 묻기보다 간직해 주자.
첫댓글 경사스런 날에 축하하는 마음으로 가야 하는데 이것저것 따지게 되는 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네요.
내 경우는 어디 나가질 못해서 받기만 하고 주지를 못하니 많이 미안할 뿐이네요.
동창 중에는 이런저런 친구들이 있는데 촉새처럼 잘 끼어드는 친구도 있고 얄밉게 찔러대는 친구도 있고 한결같이 열심히 얼굴을 보이는 친구도 있지요.
껄끄러운 친구는 이것저것 잴 필요없이 훌훌 털어버리고 멀리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나저나 세노야님이 모질지를 못해서 이 생각 저 생각 하는 것이니 그것도 세노야님 몫인 듯..
놓을 건 놓고 그냥 편하게 나이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쉽지 않네요...
그렇지요. 껄끄러우면 털면 되는 것. 간단하지요. 근데 그러다 보니 별나 보이는 모양입디다. 실은 제 속마음도 비슷할 거면서 말이에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