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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방울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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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토크 스크랩 천상병
simple 추천 0 조회 44 10.02.04 11:39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 1930년 1월 29일(양력) 일본 姬路市에서 2남 2녀중 차남으로 출생. 중학교 2학년 재학중 해방을 맞음
  • 1945년 일본에서 귀국, 마산에 정착함.
  • 1946년 마산 중학 3년에 편입함
  • 1949년 마산 중학 5년 재학 중 당시 담임 교사이던 김춘수 시인의 주선으로 시<강물>이  <문예>지에 초회 추천됨.(추천 시인 유치환)
  • 1950년 미국 통역관으로 6개월간 근무
  • 1951년 전시중 부산에서 서울대 상과대학 입학, 송영택,김재섭 등과 함께 동인지 < 처녀지>를 발간. <문예>지 평론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 를 전 재함으 로써 시와 평론활동을 함께 시작함.
  • 1952년 시 <갈매기>가 <문예>지에 게재되어 추천이 완료됨(추천 시인 모윤숙)
  • 1954년 서울대 상과대학 수료
  • 1956년 <현대문학>지에 월평 집필, 이후 외국서적을 다수 번역하기도 함
  • 1964년 김현옥 부산시장의 공보비서로 약 2년간 재직
  •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약 6개월간 옥고를 치름
  • 1971년 고문의 후유증과 음주생활에서 오는 영양실조로 거리에서 쓰러짐
    행려병자로 서울 시립 정신병원에 입원됨
    유고시집 <새>가 발간됨. 이로써 살아있는 사람의 유고시집이 발간되는 일화를  남기기도 함 
  • 1972년 친구 목순복의 누이동생인 목순옥과 결혼.
  • 1984년 시집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를 간행
  • 1985년 천상병 문학선집 <구름 손짓하며는>을 간행
  • 1987년 시집 <저승 가는데도 여비가 든다면>을 간행
  • 1988년 간경화증으로 춘천의료원에 입원함.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통고  받았으나 기적적으로 회생
  • 1990년 시집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를 간행
  • 1993년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를 간행
  • 1993년 4월 28일 숙환으로 별세.

 

천상병 시인은 1993년 4월 28일 세상을 떠났는데, 그것은 오래 전에 예행 연습이 끝난 죽음이었다.

그가 처음 세상을 떠난 것은 1967년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서울 중심부에 있는 그들의 본부인 그 무시무시한 지하실로 끌고 갔을 때였다.
그는 거기서 물 고문, 성기에 전기 충격을 가하는 전기 고문을 받았다.

간첩 혐의로 기소된 대학 시절 친구의 수첩에서 그의 이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천상병은 여섯 달을 갇혀 있다가 풀려 났다. 자백을 강요 받았으나 친구가 여럿 있다는 사실 말고는 자백할 것이 없었다. 이 때의 전기 고문으로 그는 자식을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1930년 일본 땅에서 태어난 그는 해방되던 해 가족을 따라 귀국하여 마산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그가 아직 학생이었던 1949년 월간잡지 [문예]에 그의 첫 작품 "강물"이 발표되었다. 서울대학교에서 공부하던 1952년경에는 이미 추천이 완료되어 그는 기성 시인 대접을 받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잠시 부산에서 일을 했는데 시를 쓰는 한편으로 문학 평론을 여러 잡지에 발표하기 시작하면서 평론 활동도 그의 작가로서의 생활에 중요한 일부분을 이룬다.

고문을 받은 사건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천상병은 또 한 번 "죽음"을 맞게 된다. 고문의 깊은 후유증에 시달리며 술타령으로 나날을 떠돌던 그가 마침내 1971년 실종된 것이다. 친구와 친척들은 백방으로 그를 찾아 보았지만 허사였다. 행려병자로 사망하여 아무도 모르는 어디엔가에 파 묻힌 것으로 결론을 내린 그들은, 비통한 심정으로 그의 작품들을 모아 유고 시집을 발간했다.

여러 차례의 죽음으로 점철된 것이 천상병 시인의 생애라면, 그의 삶은 또한 여러 겹의 부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가 살아 있다는, 서울의 청량리 정신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느닷없는 소식이 왔다. 그는 거리에서 쓰러져 그 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그 때 그는 자신의 이름과 자신이 시인이었다는 사실말고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 두 번째 기억이 그의 생명의 끈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심한 자폐증상을 보이는 가운데서도 대학 때 친구의 여동생인 목순옥의 방문을 받은 뒤로는 그의 병세가 호전되기 시작했다.
의사는 그녀에게 자주 찾아오는 것이 도움이 되며 모든 것이 잘 되면 한두 달 뒤에 퇴원할 수있을 거라고 말해 주었다. 그래서 목순옥은 오빠의 친구를 매일 방문하게 되었고, 마침내 사화로 복귀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다만 그에게는 스스로를 부양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는 철없는 어린애 같았고 어린애처럼 약했다. 천상병과 목순옥은 1972년 결혼을 하게 되고, 이들의 결혼 생활은 때로는 심한 고난과 어려움을 겪으며 20년간 계속 되었다.
친구들을 좋아하고 그냥 아무나 믿으며 술과 담배를 즐기는 그의 성품으로는 이 신혼부부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목순옥은 서울 인사동 골목에 작은 찻집을 열었고, 예술인, 작가, 언론인, 지식인들이 단골 손님이 되었다. 천상병 초기 작품 중 하나의 제목을 따서 이 찻집의 옥호를 귀천(歸天)이라고 불렀다.  이들 부부는 서울 북쪽 교외로 나가 의정부에 있는 낡은 가옥의 작은 방에서 살림을 시작하였다.
술에 곯은 시인의 간장이 성할 리가 없었다. 1988년 목순옥은 의사로부터 남편의 시련이 막바지에 이르렀으며결코 회복할 가망이 없으니 불가피한 임종에 대비하라는 얘기를 들었다.
춘천에서 개업하고 있는 의사의 친구가 그들을 돕기로 했다. 천상병은 곧 입원했고 목순옥은 그 뒤 여러 달 동안 버스를 타고 춘천까지 달려가 매일 저녁을 그와 함께 보냈다. 그녀는 매일 춘천에서 돌아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적고 있다. "하느님! 아직은 안됩니다. 그에게 오 년만 더 주십시오. 제발 빕니다. 오 년만 더요."
놀랍게도 그는 원기를 되찾았고 그 뒤 퇴원하여 그럭저럭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오 년 동안이었다. 이 유예의 기간 중에 그의 새로운 시집들과 에세이집들이 출간되었고, 1993년 월 28일 그는 마지막 귀천 길에 올랐다. 이제 인사동 찻집 문을 열어도 사람들은 늘 그가 앉던 자리에서 들려오던 시인의 꺼칠한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열 다섯 명만 들어와도 ?차는 그곳이 만원일 때에도 그는 말했다. "어서 와요, 여기 자리 있어요, 여기요!"

천상병은 되살아나서 자신의 유고 시집의 출판을 목격하는 진귀한 특권을 누렸으며,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의 첫 유고 시집 이후에 몇 권의 시집을 더 출판할 수 있었다. 그의 두 번째 유고 시집, 이번에는 진짜인 유고 시집이 간행된 것은 1993년이었다.

 -한국문학 영역 총서2 천상병 "귀천" 中-

 

 

천상병 그는 나이 마흔둘이 되도록까지 결혼도 하지않고 또 이렇다 할 직업도 없이 인생활을 했고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 그에게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았고 그야말로 동가식서가숙으로 살았다.
호주머니에 돈 한푼이 없어도 걱정을 하지않고 그저 만나는 선배나 친구에게 손을 내밀어 요새돈으로 돈백원 얻으면 그것으로 넉넉하게 생각한 사람. 그런 그가 바로 천상병이다.
좋다,좋다,참좋다 를 연발하며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기라고 예쁜아내와 후덕한 장모님과 반갑의 담배, 한병의 맥주가 있는데 이 어찌 행복하지 않을쏘냐고 . . .  

그는 소풍가듯 하늘나라로 갔다. 저승가는데도 차비가 필요하다면 차비가 없어 저승도 못 가겠다고 걱정하던 그사람  이 세상 소풍 오듯 왔다가 소풍가듯 저 세상으로 떠난사람  평생을 가난했던 시인 그저 막걸리 한잔이면 인생의 자족을 알았던 시인 그는 진실로 天上의 시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다시 올까?/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속세에 전혀 물들지 않은 천상의 순수시인 천상병이 가을을 보내며 노래한 '들국화' 일부다.

산등성 외딴 곳 애기 들국화 빛깔과 파란 가을 하늘의 겹침을 보며 때묻지 않은 만남을 소망했다. 그만큼 가을은 번잡한 일상 속에 잊어버린 우리 마음을 찾아나서기에 좋은 계절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천상병 '귀천 (歸天)' 단 한번 부산직할시 김현옥 시장의 공보실에 출근한 적이 있는 이 평생 무직의 시인 천상병 (千祥炳.1930~1993) 은 그 하루하루의 전설이 시를 압도하고 말았다.

천상병.. 그는 생을 마감하는 그 날까지.. 순수한 어린이었다..

이 시 `귀 천`에서도 보는 것과 같이 "아름다운 이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라는 시구는 감히 누구도 쉽게 적을 수 없는 것 아닌가.. "늙고, 초라한.. 하지만.. 누구보다도 순결한 영혼을 가진 천사.. 어찌 보면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강박하고, 깨끗치 못한 이 세상에 힘이 되어주라고 하늘에서 보낸 아기 천사 일런지도......

천재 천상병. 세상은, 세상의 악마들은 그를 짖밟고 짖밟고 짖밟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천진한 어린아이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하늘로 돌아가신 천상병님. 그리고 그분은 "이 세상 소풍은 아름다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시대의 마지막 기인, 마지막 떠돌이 천상병 시인, 폐품이 된 몸을 지탱하며, 뒤틀린 세상을 향해 막걸리를 뿌리며 퍼붓는 독설과 사랑과 눈물의 결정체가 내림 소주처럼 걸러져 맑게 빛나는 시로 순수하게 태어난다. 그러나 그저 맑은 순수시처럼 보이는 천상병 시인의 시에는 적당한 알콜도수가 감춰져 있어서무심코 읽는 순수한 독자들을 취하게 한다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시인은 어디로 갔을까

천상병 시인은 지금, 여기 지상에는 없다. 어린애나 다름없게스리 천진무 구하게 살았고 또 순결무구한 시들만을 즐겨 썼던 그는, <귀천> 이란 시가 소원했듯이 지금은 하늘 나라에서 살고 있다.

그의 말마따나 긴 여행이 아닌 인생이란 잠깐 동안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올라가 지상에서 의 삶이 '아름다웠다'고 추억하는지 모른다. 살아 생전 그는 가난했다. 친지들한테는 '내미는 빈 손'밖에 없었다.

그것 도 큰 손이 아닌, 막걸리 몇 잔 정도일 뿐인 '작은 빈 손'만을 내밀었을 뿐이었다.

서울대 상대를 중퇴하여 지식인 계층에 속했으나 그의 몸과 시 세계는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시를 쓰는 일에 있어선 잔재주나 속이 빤히 보이는 언어적 테크닉은 과감하게 떨쳐 버렸다.
그의 시는 공자님이 말씀한 '사무사(思無邪 사악함이 없는)' 바로 그 길목 가운데에 놓인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돈이 없어 저승도 못 가겠네"라고 노래했던 천상병 시인, 그의 시에는 정녕 꾸밈이 없다. 그의 마음(혹은 詩心)또한 꾸밈이 없다. 그의 시는 그가 사는 것만큼, 생각하는 대로 만큼 그대로 씌여졌을 뿐이다.

"하늘로 돌아가리라"로 시작되는 <귀천>이란 시는 그래서 쉽게(아, '쉽 다'란 말은 사실 얼마나 어려운 말린가!)씌어졌고 감동의 폭이 넓을 수밖 에 없다. 서울 인사동 골목을 가면, 시방 그의 아내가 찻집 '귀천'을 문 열어 놓고 있다. 하늘로 간 남편이 별 밝은 밤 더러는 종종 찾아 내려올지 몰라 서......

 『귀천』의 시인 천상병(1930~1993)은 술을 너무 좋아해 술을 친구 삼고, 세속의 관행을 무시한 기이한 행동으로 한평생을 살았지만 이 세상, 우리 세대 누구보다도 맑은 영혼의 소유지였다.

천상병의 고향은 마산시 진동면이다.고향의 생가는 오랜 세월의 탓인지 허물어지고 없으나 어린 천상병이 상상의 나래를 한 껏 펼친 던 상북초등학교는 아직까지 남아있다.  
도시 외곽에 있으면서도 전교생이 52명밖에 되지 않는 아담한 시골학교의 정경이 그대로 남아 있다. 천상병은 생전에 고향마을 정자 밑에 냇물이 흐르고, 거기서 멱감고 가재 잡던 이야기며, 또 7살 때 산에 갔다가 밭을 헛디뎌 벼랑으로 굴러 '이젠 죽었구나'하는데 다음 순간 몸이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더라느 이야기 등 고향에 대한 추억담을 털어 놓곤 했다.  

일제시대에 가족을 따라 일본에 갔다가 해방 후 귀국한 천상병은 마산에서 생활했다. 마산중학교 2학년으로 편입한 그는 내내 책 속에 파묻혀 살다시피 했다.
가난 때문에 책을 사볼 수 없었던 천상병은 학교와 집 중간에 있었던 서점에 매일같이 들러 책을 보고, 다 못 보면 페이지를 접어 두었다가 다음날 와서 계속 읽곤했다. 가끔은 서점주인이 책을 빌려주기도 했는데 천상병은 이를 평생동안 고마워 했다. 천상병은 마산중학교 시절 국어교사였던 시인 김춘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가끔 시를 지어 김춘수에게 보여주곤 했는데 마산고교 뒷산에 올라 지은 시 『강물』도 김춘수가 『문예』지에 근무하던 유치환에게 보내 추천됐다.  

그는 술을 좋아해 술에 얽힌 일화가 많다.

대학시절 소설가 한무숙의 집에 식객으로 있을 시절, 어느날 잠도 안 오고 술생각이 간절해 낮에 얼핏 본 안방 화장대 위의 양주병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모두가 잠든 사이 안방에 숨어들어 어둠 속에 어렴풋이 보이는 양주병을 들고 나와 단숨에 들이키고 보니 향수였다는 일화가 있다.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후 천상병의 몸과 마음은 서서히 파괴되어 갔다. 한때 행방불명되어 그가 죽었다고 생각한 문우들은 80여 편의 시를 모아 유고시집 『새』를 내었다. 살아있는 사람을 두고 유고 시집이 나오는 해프닝이 벌어진 것이다.
1993년 4월 28일 그는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갔다.  소설가 천승세의 말처럼 평생 평화만을 쪼던 새가 하늘로 날아간 것이다.

시집 『새』,『귀천』,『주막에서』 등과 산문집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를 남겼다

 

 

"쌀 한되 값 없던 때도 행복"

한해를 뒤둘아보는 세모의 달이다. 이루지 못한 일들, 후회와 미련이 쌓여 가슴 속에 찬바람이 일기도 하는 시기이다.
이런 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게 무엇일까. 사랑과 용서를 바탕으로 한 인간의 훈훈한 정을 나누는 일 아니랴. 고슴도치들이 추운 겨울밤을 보낼 때, 상대방의 가시에 찔리지 않으면서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거리까지 가까이 가는 법을 배우듯 우리도 체온이 감도는 손을 조심스럽게 내밀어야 할 때다.
용서와 사랑. 입에 담아 표현하기는 쉬워도 참으로 실천하기 어려운게 바로 이것 아니랴. 내게 상처를 남겨주고 간 타인들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우리가 용서하는 일도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기독교의 주기도문에서도 이 '용서'를 아주 중시하여 "내게 죄지은 자를 내가 용서하여 주듯이 (주님께서도) 내 죄를 용서해 주시옵시며"라고 간구하지 않던가.
이렇게 기도하면서도 <자신의 죄>만 용서해 달라고 빌 줄 알았지 그 전제 조건인 <남의 죄를 내가 용서하는 것>에는 소흘하지 않았나 반성하는 시기도 지금이 가장 알맞은 시기일 것 같다.

맨 손바닥 하나 내보이며 다정한 친구들에게 천원, 이천원씩 술 값 적선은 받았어도 늘 재벌 못지않게 여유를 갖고 호기를 부렸던 시인, 천상병. 새처럼 날개를 달고 하늘을 훨훨 날고 싶던 그에게도 두가지 간절한 소원은 있었던 것 같다. 그 하나는 밤이 되면 찾아들어가 눈을 붙일 방 하나요, 또하나는 사랑스런 자식을 가져보는 것이었다.

종로에서 탄생한 천재시인 이상이 명동에서 깡패들과 맞서 호통을 쳤듯 천상병도 한번은 깡패들을 건드렸다가 큰 소란에 휘말릴 뻔했다.
제주도 출신의 쌍과부가 운영하는 술집 '추자네 집'에서였다. 어깨가 떡 벌어진 주먹패가 천상병에게 시비를 걸자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꺼져, 이 자식아!"하고 소리쳤던 것, 그렇게 호기를 부리면서도 의연할 수 있었던 천상병이 어느날 이 쌍과부집 아들 비룡이를 보고 수작을 건넸다.
마침 손님 한명 없이 어린 비룡이 혼자 아이스크림을 빨고 있는 장면을 대하자 그는 이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줘가며 세뇌를 시켰던 것이다.
"자, 내 말을 따라서 해 봐. 나의 아버지는 천상병이다. 나는 천상병씨의 아들이다." 아이스크림 맛에 홀린 이 아이가 어느정도 세뇌되어 있는 꼴을 뒤늦게 들어온 과부가 보고 질겁을 했다. 그 뒤로 아이에게 어떻게 새뇌를 했는지 다음에 천상병이 들어섰을 땐 비룡이가 그 얼굴에다 대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천상병은 X새끼다." 그렇게 X새끼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한 아이의 아버지이기를 소망했던 그는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당시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에 끌려들어가 호된 고문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나중에 무혐의로 풀려나긴 했지만 그 길로 그는 종로구 관철동등 그의 주무대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아무리 수소문해도 종적이 묘연해지자 주위 친지들은 그가 추운 날 어느 길목에서 쓰러져 행려병자로 취급되어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것으로 간주했다.

시인 민영, 성춘복, 송영택 등이 힘을 모아 1971년 12월 그의 유고시집 <새>를 펴냈다. 이 시집이 세상에 알려지자 출판사 측에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죽었다던 천상병이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대소변도 제대로 못가려 기저귀를 차고 지내야 될 만큼 폐인이 되어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었다. 주위 친구들이 예상했던 대로 추운 겨울 날 그는 길거리에 쓰러져 얼어죽어가고 있었는데 경찰이 그를 보호하여 행려병자로 취급, 정신병원에까지 보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 어린애처럼 순수한 시인을 살리고자 하셨던 걸까. 마침 이 병원에 근무하던 의사 감종해박사가 천상병을 알아봤다.
문인들을 좋아하여서 두루 가깝게 사귀고 자신의 문집도 한권 펴낸 적이 있는 김박사는 천상병을 보호하여 묵묵히 치료하고 있다가 그의 유고시집 발간 소식을 듣고 놀라서 연락을 취했던 것이다. 천상병에게 있어 수호천사와 같은 사람이 된 목순옥과의 인연은 이 병원에서 깊어졌다.
천상병의 친구 여동생이기도 했던 목순옥은 반년이 넘도록 소식이 끊겨 죽은 사람으로까지 인정했던 그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통조림 몇 통을 사들고 응암동 시립정신병원으로 달려갔다.
김박사는 그녀의 오빠 순복이 큰형님으로 불렀던 박종우 선생의 부산고교 제자였고 또 천상병, 목순옥과 친했던 화가 하인두의 고교동창이기도 해서 전에부터 두 사람은 친히 알고 지냈던 사이었다.
이때 나온 천상병의 병명은 '신경황폐증', 기계에 기름을 치지 않아 기계가 멈춰 서듯 정신마저 황폐해진 상태라고 했다.
그에게 병문안을 다니는 횟수가 늘자 천상병은 유난히 목순옥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으면서 그녀에게 의지하는 태도를 보였다. "미스 목, 언제 또 올래? 팥빵이 먹고 싶다." 이렇게 의지하는 그를 내칠 수 없어 마침내 두 사람은 서울 변두리 수락산 기슭에 사글세 방을 하나 얻고 김동리 선생 주례로 72년 5월 14일 결혼식도 올렸다. 그때가 천상병은 43살의 노총각이었고, 목순옥은 36살의 노처녀였다.
<결혼 후 남편을 대하는 내 마음은 남편이라기보다는 어린아이를 보살피는 심정이었다. 병원에서 나가기는 했으나 건강이 나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고 그런 가운데에서도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생활 대책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아내 덕분에 천상병은 천원권 적선을 구하러 다니지 않아도 됐으나 그런 만큼 아내의 두 어깨는 더욱더 무거웠다. 결혼 초에는 몸이 불편한 남편을 곁에서 돌보기 위해 병풍 자수를 집에서 놓아 번 돈으로 쌀 한말 연탄 열장씩을 사서 살아갔다.
그러다가 친구 언니의 지원으로 1977년 청계천 8가에서 친구와 함께 고가구점을 경영했으나 계속되는 경영난과 비싼 이자 부담 때문에 결국 고생만 하고 문을 닫았다.
그 3년동안 쌀 한되를 살 돈이 없어 눈물을 삼킨 적도 많았으나 그들은 행복했다. 그런 때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던 시인 강태열이 "천 형, 막걸리 값이나 하면서 돈은 천천히 갚으라"고 선뜻 3백만원을 빌려주며 지금의 가게 '귀천'을 추천했다.

     

그 온정 덕분에 목순옥은 천상병의 '수호 천사'로 의연히 일어설 수 있었다. 20여년을 같이 살았으면서도 아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서 돈을 벌고 쌀을 사는지 도통 관심조차 없이 태평했던 천상병. 막걸리 한병, 담배 한갑이면 천하에 부러울게 없었던 그는 의지할 아내와 눈을 부칠 방까지 해결되고나자 자신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 60먹은 노인과 마주 앉았다. / 걱정할 거 없네 / 그러면 어쩌지요? / 될대로 될걸세. 보지도 못한 내 간이 / 괘씸하게도 쿠데타를 일으켰다. / 그 조무래기가 무얼 알까마는 / 아직도 살고픈 목숨 가까이 다가온다. >

<간의 반란>이란 시를 통해 이미 그 자신이 계속된 음주로 해서 간이 점점 망가져 가는 것을 알면서도 술을 끊지 못해 마침내 그는 1993년 4월 28일 이 세상을 떠나갔다. 늦게서야 결혼했지만 22년의 결혼 생활 동안 한번도 떨어져 지낸 적 없이 날마다 머리를 매만져주고 발을 씻어주었던 아내 목순옥. 예쁜 여자만 보면 어린애처럼 "내 애인"이라는데도 질투 한번 하지 않았던 그녀.
급성 간경화증으로 죽음 직전까지 갔던 그를 친구가 후원해 주는 춘천의료원에 입원시킨 뒤 춘천에서 서울로 5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오르내리며 간병에 매달렸던 그녀는 이제 천상병 기념관을 가꾸고 지키는걸 자신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사명으로 알고 살아간다.
또 기일이 되면 버스를 전세내어 의정부 송산시립묘지까지 가서 추모행사를 벌이고, 상경해서는 종로 인사동 골목의 '천상병 기념관'에서 해마다 추모 세미나도 연다.

귀 천

 

인사동의 고즈넉함은 찻집에서 온다. 누렇게 빛바랜 한지 벽지, 투박 한 나무탁자와 의자, 희뿌연 불빛 속에 은은히 퍼지는 감잎차 향기…. 찻 집하면 우선 「귀천」, 「옛찻집」, 「다원」 등이 떠오른다. 시인 고 천상병씨 가 11년 전 문을 연 「귀천」. 안국동에서 종로쪽으로 걷다 왼편 중간지점 쯤에 있는 이곳은 아직도 시인을 가슴으로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발 길이 끊이질 않는다.

소설가 조정래, 하근찬씨와 시인 박재림, 신경림씨,화가 김영주 , 변영 원씨, 가수 양희은 자매가 단골 손님이기도 하다.

지난 10월16일 찾아간 귀천엔 역시 앉을 자리가 없었다. 모두들 작은 방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비비고 끼여앉아 있었다. 천상병씨 부부의 빛바랜 흑백사진, 투박한 주전 자, 패랭이꽃 화분, 중광스님 작품…. 천상병 시집을 펴 든 여중생 한 명 이 앉아있고, 반대쪽에는 시집 「귀천」을 「백 투 해븐(Back to Heaven)」으 로 영역한 서강대 영문과 교수 안토니오씨가 마침 이곳에 들러 모과차를 마시고 있었다.

제주도 에서 「귀천2」를 개업한 「아줌마 팬」인 박길복씨는 『 제주도 사람 들에게 귀천의 이모저모를 전하기 위해 이곳에 자주 들른다』고 했다. 최 근 이곳에 자주 들르는 낯익은 얼굴이 하나 있다. 가곡 「명태」의 오현명 씨. 얼마 전 작곡가 변훈씨가 곡을 붙였다는 「귀천」을 노래하기 위한 「순 례」인가. 여학생 같은 생머리를 한 천씨의 부인 목순옥 여사는 『천선생이 주로 앉았던 자리가 어디냐며 지방에서 올라온 분, 여기서 연애를 했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온 젊은 부부들도 있다』고 말한다.

                                      - 조선일보 -

 

  다경향실

  주인아저씨와의 인터뷰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시인은 어디로 갔을까

천상병 시인은 지금, 여기 지상에는 없다. 어린애나 다름없게스리 천진무 구하게 살았고 또 순결무구한 시들만을 즐겨 썼던 그는, <귀천> 이란 시가 소원했듯이 지금은 하늘 나라에서 살고 있다. 그의 말마따나 긴 여행이 아닌 인생이란 잠깐 동안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올라가 지상에서 의 삶이 '아름다웠다'고 추억하는지 모른다. 살아 생전 그는 가난했다. 친지들한테는 '내미는 빈 손'밖에 없었다. 그것 도 큰 손이 아닌, 막걸리 몇 잔 정도일 뿐인 '작은 빈 손'만을 내밀었을 뿐이었다. 서울대 상대를 중퇴하여 지식인 계층에 속했으나 그의 몸과 시 세계는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시를 쓰는 일에 있어선 잔재주나 속이 빤히 보이는 언어적 테크닉은 과감하게 떨쳐 버렸다. 그의 시는 공자님이 말씀한 '사무사(思無邪 사악함이 없는)' 바로 그 길목 가운데에 놓인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돈이 없어 저승도 못 가겠네"라고 노래했던 천상병 시인, 그의 시에는 정녕 꾸밈이 없다. 그의 마음(혹은 詩心)또한 꾸밈이 없다. 그의 시는 그가 사는 것만큼, 생각하는 대로 만큼 그대로 씌여졌을 뿐이다. "하늘로 돌아가리라"로 시작되는 <귀천>이란 시는 그래서 쉽게(아, '쉽 다'란 말은 사실 얼마나 어려운 말린가!)씌어졌고 감동의 폭이 넓을 수밖 에 없다. 서울 인사동 골목을 가면, 시방 그의 아내가 찻집 '귀천'을 문 열어 놓고 있다. 하늘로 간 남편이 별 밝은 밤 더러는 종종 찾아 내려올지 몰라 서...... ※이 시평은 김준태 시인의 <사랑의 확인> 에서 가져왔습니다.

 

 

고 천상병시인 부인 목순옥씨/ 날개없는 새 짝이되어 출간

*함께한 22년의 삶 그리며 /"평생을 아기같이 산 사람 이젠 하늘 나라서 행복" 지상에 소풍 나온 천사를 하늘로 돌려보낸지 넉달.지난 4월28일 작고한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씨가 22년간 시인과 함께 한 삶을 날개없는 새 짝이 되어 (청산 간)라는 한권의 책으로 담아냈다." 안돼요. 지금 우리가 그림사게 생겼어요? 안돼 요 안된다! 안된다! 니가 그 그림 안갖다 놓으면 내가 죽을 때까 지 니를 원망할끼다 남편은 마구 화를 내며 몇백만원 짜리 그림을 당 장 1만5천원 계약금으로 사고 나머지는 죽을 때까지 갚겠다고 한 것이 다."(본문에서) 1년작업 영전에 바쳐 평생을 아기같은 무구함 속 에 살다간 천시인. 산동네를 그린 한 화가의 그림을 본 그는 그자리에 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좋은 그림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한푼이 어려운, 부인 목순옥씨가 꾸려가는 서울 인사동의 찻집 귀천 의 수입으로 살아가던 천씨가 그렇게 좋아했 던 산동네 그림은 평소 귀천 단골이던 화가가 선물, 지금도 귀천에 걸 려있다. "그분이 그렇게 가실 줄 모르고 1년전부터 매일 밤 열두시 부터 새벽 두시까지 두시간 씩 우리의 결혼생활에 대해 글을 썼어요. 그때마다 뭐라고 쓰나? 뭐라고 쓰나? 묻기에 천 선생 욕쓰고 있 어요. 나오면 보세요 했었는데 ." 대학 노트 세권에 가득 써내려간 이 글은 결국 시인의 영전에 바치게 됐다.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고 노래했던 천시인. 목씨가 그를 처음 본 것은 1955년, 당시 문화인들의 아지트 이던 명동 갈채다방. 경북 상주여고 2학년 학생이 던 목씨는 오빠가 여러 문인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서울 상대를 갓 졸업 하고 시를 쓰고있던 천시인을 처음 보았다. 정작 부부의 연으로 만난 것은 17년 후인 1972년. 70년 소위 동백림 사건 연루 혐의 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갖은 고문에 폐인이 다됐던 그는 죽은 것으로 여겨졌다. 43세 신랑-36세 신부 우리 문학사에 둘도 없는, 살 아있는 사람의 유고 시집이 나오는 소동이 벌어지는동안 시인은 응암동 서울시립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입원한 그를 위문다니며 목 씨는 자연스럽게 그의 반려자가 되기로 생각한다. 작가 김동리 선생의 주례로 마흔 세살의 신랑과 서른여섯살의 신부가 탄생했다. 전기 고문 을 두번만 받았어도 아기를 낳을 수 있었을 텐데, 세번의 전기 고문이 자기를 망가뜨렸다고 늘 말했죠. 사람이나 일이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 한 길만 택해서 살았던 그분이나, 그런 사람과 사는 나를 우습고 엉뚱 한 부부로 생각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우리는 정말 행복했습니다. 아기 를 좋아하고 평생 자기 집 갖기를 열망했던 그 분이 이제는 하늘 나라 에서 행복하실 거예요.

                                                                                       -조선일보-

 

 시인들이 남긴 기막힌 뒷얘기 

천상병 시인은 60년대 중반 간첩 사건에 연루된 서울대 상대 동기 동창에게 포섭자금을 받았다는 이유로 법정에 섰다. 그는 특유의 어눌한 말투로 "정말로, 오백 원을 받아 술을 마셨다"라며 "그렇게 손을 내민 사람은 동창 뿐만 아니라 시인 박재삼, 성춘복, 이형기 등등이고 현대문학사에도 갔지만, 거기는 기분이 내키지 않아서, 잘 안갔다" 고 읍소했다. 마침내 재판장이 웃음을 참지 못했고, 법정은 그야말로 웃음바다가 됐다.

6.25때 북한 의용군에 끌려가 거제도 포로 수용소 생활을 거친 시인 김수영은 포로 체험에 대한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었다. 문단 모임에서 그가 6.25때 어디에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금기 사항에 속했다. 한편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은 김수영과 친구이자 경쟁 관계였다.

어느날 박인환이 현란한 수사학이 넘치는 시를 발표하자, 김수영이 그 중 한 단어를 두고 도대체 무슨 뜻이냐며 은근히 힐난했다. 박인환이 받아쳤다. "그건 네가 포로 수용소에 있을 때 생긴 말이야." 박인환은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이상(이상)의 기일에 "이상을 위해 술잔을 들자"고 외친 지 3일 후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술상 위에 고개를 떨군 채 쓰러졌다. 문우들은 그의 무덤에 [조니 워커]를 붓고 조시를 읊었다.

박인환이 사랑했던 이상의 전성기는 30년대. 그는 창대 같은 수염을 기르고 다녔다. 어느날 카페에서 술을 마시며 세상을 조롱하자 [수준높은](?) 여급이 "창대수염 이상은 D.H 로렌스의 이미테이션이에요!"라고 했다. 이상은 술을 벌컥 들이키면서 "이 발칙한 것, 채털리 부인의 이미테이션도 못되는 것이…"라고 했다. 시인 서정주와 박재삼은 처음부터 시적 만남을 거쳤다. 미당이 술집에 들어설 때 주모가 이불 홑청을 갈아 끼우는 것을 보면서 "아주먼네, 세상이 아주 찬란하네요"라고 하자, 여린 감성의 시인 박재삼이 그 표현에 금세 반해 술잔을 건넸다.

평생 고전 음악과 술을 사랑한 낭만파 시인 김종삼은 고급 만년필과 라이터를 애용했지만, 집에는 돈 한푼도 갖다 주지 않았다. 그는 초등학생 딸의 소풍에 따라갔다가 슬쩍 숲 속에 홀로 들어가 잠을 자면서 배 위에 돌을 올려놓았다. 이유는 "하늘로 날아갈 것 같애서"였다.

가난했던 한 시인이 천국으로 떠났다. 조의금이 몇백 걷혔다. 생전에 그렇게 「큰돈」을 만져본 적 없는 시인의 장모는 가슴이 뛰었다. 이 큰 돈을 어디다 숨길까. 퍼뜩 떠오른 것이 아궁이였다. 거기라면 도둑이 든 다해도 찾아낼 수 없을 터였다. 노인은 돈을 신문지에 잘 싸서 아궁이 깊숙이 숨기고서야 편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시인 의 아내는 하늘나라로 간 남편이 추울 거라는 생각에 그 아궁이에 불을 넣었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 푸르스름한 빛이 이상했다. 땔나무 불빛 사 이로 배추이파리 같은것들이 팔랑거리고 있었다.

조의금은 그렇게 불타버렸다. 다행히 타다남은 돈을 은행에서 새돈으 로 바꾸어주어, 그 돈을 먼저 떠난 시인이 「엄마야」며 따르던 팔순의 장모님장례비로 남겨둘 수 있게 되었다. 시인은 늘 「엄마」의 장례비를 걱정했기 때문이다.

이 슬픈 동화 같은 이야기는 시인 천상병가의 이야기이다. 평생 돈의 셈법이 어둡고 돈으로부터 자유로왔던 시인이었다. 지상에 소풍왔던 천사처럼 순진무구하게 살다간 시인의 혼은 가고 남은 자리마저 그런 식으로 자유로와 지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처럼 숫자 계산에 어둡고 어린애 같은 셈법으로 살다간 시인은 사 실「서울상대」 출신이었다.

우리 모두는 천상병 시인을 사랑했다. 우리에게 달라붙어 있는 세속 과 악의 혐의가 짙을수록 그 어린아이 같은 시인을 그리워했다. 지상에 서 가난했고 고초당했던 그 시인은 그러나 천국에 가면 땅은 선한 것이 었다고, 지상은 아름다왔노라고 전할 것이라고 썼다. 악은 그의 머릿속 에도 없었고 가슴에도 없었다. 악에 관한 한 그는 지진아인 셈이었다.
사물과 사람을 투명하게 관조하여 그려내었던 천상병은 그러나 1967 년 7월 친구 한 사람이 동백림사건에 연루되면서 엉뚱하게도 기관에 끌 려가 전기고문을 받게 된다. 그 후유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평생 아이를 갖지 못하는 몸이 된다. 뜻밖의 고초와 충격으로 그의 정신 은 황폐해졌고 어느날 거리에 쓰러져 행려병자로 분류되어 시립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의 친구들은 그가 어디에선가 죽은 것으로 생각해 유 고시집 '새'를 출간하고…. 유명한 사건이었다. 유독 어린아이를 좋아했 던 시인은 훗날 아내에게 『전기고문을 두 번만 받았어도 아기를 볼 수 있었는데…』하며 아쉬운 마음을 술회하곤 했다 한다.
동백림사건 이후 그의 시세계는 죽음 저편을 바라보는 초월의식과 함 께 종교적 원융무애의 어린아이 같은 세계로 나아간다. 엄청난 고초를 겪었지만 절망과 증오와 비탄 아닌 맑고 투명한 어린아이의 세계를 열어 보인 것이다. 그 점에서 그는 성자였다.

병구완에 헌신적이었던 아내 목순옥을 그는 하나님이 숨겨두셨던 천사라고 했다. 그는 생전에 고문 후유증으로 활발한 걸음걸이가 아니었지 만 인사동에 나오기를 즐겨했다. 아니, 인사동 골목의 아내가 하는 작은 찻집 「귀천」에 나오기를 좋아했다. 귀천에 나오면 무엇보다 하루종일 아내를 볼 수 있어 좋고, 문인·화가·연극인 같은 다정한 사람들을 만 날 수 있어서 좋다고 하였다. 하지만 빨간 옷 입고 오는 여자나 안경 낀 남자는 무척이나 싫어했다고 한다. 무슨 논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싫어했다는 것이다. 이 역시 아이 같은 일면이다. 빨간 옷 입거나 안경 낀손님이 오면『문디가시나 문디가시나』하며 아내를 원망했다는 것이다.

그의 행복에 대한 고백은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답다.

『하루에 용돈 2천 원이면 나는 행복하다… 내가 즐겨 마시는 맥주 한 잔과 아이스크림 하나면 딱 좋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을 좋아했다. 바 늘귀를 통과하는 낙타가 있겠는가. 그런데 사람들은 다 부자가 되려고 하니 딱한 노릇이다. 굶지 않기만 하면 되는데… 내게 만일 1억 원이 생 긴다면 나는 이 돈을 몽땅 서울대학교에 기증하겠다. 장학금으로….』.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나쁜 일도 있었다고/그렇게 우는 한 마 리 새(「새」)처럼 가볍게 살다가 시인은 이제 인사동을 떠나 천국으로 갔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 다웠다고 말하리라…(「귀천」)고 작별을 고하며.

천상병이 떠나버린 인사동은 쓸쓸하다. 야트막한 집들과 필방과 도자 기와 그림과 그리고 한국차와 시의 동네 인사동. 모든 것이 번쩍거리기 만 하는 시대에 무채색으로 가라앉아 있어 정겹던 그 인사동. 이제는 그 동네도 반들반들 닳고단 상업의 거리가 되어간다. 인사동이 때묻어 갈수 록 시인의 맑고 투명한 정신이 그 때묻음을 씻어내고 정화시켜 그래도 인사동의 인사동다운 맛을 지켜내었건만, 그 인사동 지킴이 천상병은 새 되어 천상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촉수 낮은 「수희재」 전등 밑에서 세 상과 인생을 들려주던「민병산 선생」 떠나고, 인사동을 홀로 지키던 「귀천」의 시인 천상병마저 천국으로 돌아가버려 인사동은 허전하기 그 지없다.
하늘이 낮게 가라앉고 눈발이라도 흩날릴 때 「귀천」을 찾아가는 마 음들이 비단 그 모과차의 따뜻함 때문만은 아니었을 터이다. 저기 저만 큼 어두운 한쪽에 언제나처럼 앉아 있던 시인의 순수가 더 그리워서였을 것이다.

천상병(1930~93) 일본에서 출생하여 마산에 정착. 마산중학을 나와 서울대학교 상과 대학을 수료하고 '문예' , '현대문학' 등을 통해 시와 평론을 발표했 다.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육개월의 옥고를 치른 후 고문후유 증으로 고생했다.

시집으로 '주막에서(1979, 민음사)' ,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1984, 오상출판사)' , '저승가는데도 여비가 든다면(1987, 일선출판사)' 등 여러 권이 있고 동화집과 산문집을 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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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2.04 12:06

    첫댓글 세상을 천상병 처럼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 문제는 그게 안된다는데에 있지 않겠니 ?

  • 10.02.04 12:17

    그렇게 살기 쉽지않지 요즘 세상에 ... 그러나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은 항상 한쪽 구석에 남아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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