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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夢友 원문보기 글쓴이: 夢友...
천상병 시인은 1993년 4월 28일 세상을 떠났는데, 그것은 오래 전에 예행 연습이 끝난 죽음이었다. 그가 처음 세상을 떠난 것은 1967년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서울 중심부에 있는 그들의 본부인 그 무시무시한 지하실로 끌고 갔을 때였다. | |
간첩 혐의로 기소된 대학 시절 친구의 수첩에서 그의 이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930년 일본 땅에서 태어난 그는 해방되던 해 가족을 따라 귀국하여 마산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그가 아직 학생이었던 1949년 월간잡지 [문예]에 그의 첫 작품 "강물"이 발표되었다. 서울대학교에서 공부하던 1952년경에는 이미 추천이 완료되어 그는 기성 시인 대접을 받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잠시 부산에서 일을 했는데 시를 쓰는 한편으로 문학 평론을 여러 잡지에 발표하기 시작하면서 평론 활동도 그의 작가로서의 생활에 중요한 일부분을 이룬다. 고문을 받은 사건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천상병은 또 한 번 "죽음"을 맞게 된다. 고문의 깊은 후유증에 시달리며 술타령으로 나날을 떠돌던 그가 마침내 1971년 실종된 것이다. 친구와 친척들은 백방으로 그를 찾아 보았지만 허사였다. 행려병자로 사망하여 아무도 모르는 어디엔가에 파 묻힌 것으로 결론을 내린 그들은, 비통한 심정으로 그의 작품들을 모아 유고 시집을 발간했다. 여러 차례의 죽음으로 점철된 것이 천상병 시인의 생애라면, 그의 삶은 또한 여러 겹의 부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가 살아 있다는, 서울의 청량리 정신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느닷없는 소식이 왔다. 그는 거리에서 쓰러져 그 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그 때 그는 자신의 이름과 자신이 시인이었다는 사실말고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 두 번째 기억이 그의 생명의 끈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천상병은 되살아나서 자신의 유고 시집의 출판을 목격하는 진귀한 특권을 누렸으며,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의 첫 유고 시집 이후에 몇 권의 시집을 더 출판할 수 있었다. 그의 두 번째 유고 시집, 이번에는 진짜인 유고 시집이 간행된 것은 1993년이었다. -한국문학 영역 총서2 천상병 "귀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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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 그는 나이 마흔둘이 되도록까지 결혼도 하지않고 또 이렇다 할 직업도 없이 인생활을 했고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 그에게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았고 그야말로 동가식서가숙으로 살았다. 그는 소풍가듯 하늘나라로 갔다. 저승가는데도 차비가 필요하다면 차비가 없어 저승도 못 가겠다고 걱정하던 그사람 이 세상 소풍 오듯 왔다가 소풍가듯 저 세상으로 떠난사람 평생을 가난했던 시인 그저 막걸리 한잔이면 인생의 자족을 알았던 시인 그는 진실로 天上의 시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다시 올까?/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산등성 외딴 곳 애기 들국화 빛깔과 파란 가을 하늘의 겹침을 보며 때묻지 않은 만남을 소망했다. 그만큼 가을은 번잡한 일상 속에 잊어버린 우리 마음을 찾아나서기에 좋은 계절이다. 천상병.. 그는 생을 마감하는 그 날까지.. 순수한 어린이었다.. 이 시 `귀 천`에서도 보는 것과 같이 "아름다운 이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라는 시구는 감히 누구도 쉽게 적을 수 없는 것 아닌가.. "늙고, 초라한.. 하지만.. 누구보다도 순결한 영혼을 가진 천사.. 어찌 보면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강박하고, 깨끗치 못한 이 세상에 힘이 되어주라고 하늘에서 보낸 아기 천사 일런지도...... 천재 천상병. 세상은, 세상의 악마들은 그를 짖밟고 짖밟고 짖밟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천진한 어린아이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하늘로 돌아가신 천상병님. 그리고 그분은 "이 세상 소풍은 아름다웠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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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시인은 어디로 갔을까 천상병 시인은 지금, 여기 지상에는 없다. 어린애나 다름없게스리 천진무 구하게 살았고 또 순결무구한 시들만을 즐겨 썼던 그는, <귀천> 이란 시가 소원했듯이 지금은 하늘 나라에서 살고 있다. 그의 말마따나 긴 여행이 아닌 인생이란 잠깐 동안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올라가 지상에서 의 삶이 '아름다웠다'고 추억하는지 모른다. 살아 생전 그는 가난했다. 친지들한테는 '내미는 빈 손'밖에 없었다. 그것 도 큰 손이 아닌, 막걸리 몇 잔 정도일 뿐인 '작은 빈 손'만을 내밀었을 뿐이었다. 서울대 상대를 중퇴하여 지식인 계층에 속했으나 그의 몸과 시 세계는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시를 쓰는 일에 있어선 잔재주나 속이 빤히 보이는 언어적 테크닉은 과감하게 떨쳐 버렸다. "하늘로 돌아가리라"로 시작되는 <귀천>이란 시는 그래서 쉽게(아, '쉽 다'란 말은 사실 얼마나 어려운 말린가!)씌어졌고 감동의 폭이 넓을 수밖 에 없다. 서울 인사동 골목을 가면, 시방 그의 아내가 찻집 '귀천'을 문 열어 놓고 있다. 하늘로 간 남편이 별 밝은 밤 더러는 종종 찾아 내려올지 몰라 서...... |
『귀천』의 시인 천상병(1930~1993)은 술을 너무 좋아해 술을 친구 삼고, 세속의 관행을 무시한 기이한 행동으로 한평생을 살았지만 이 세상, 우리 세대 누구보다도 맑은 영혼의 소유지였다. 천상병의 고향은 마산시 진동면이다.고향의 생가는 오랜 세월의 탓인지 허물어지고 없으나 어린 천상병이 상상의 나래를 한 껏 펼친 던 상북초등학교는 아직까지 남아있다. 일제시대에 가족을 따라 일본에 갔다가 해방 후 귀국한 천상병은 마산에서 생활했다. 마산중학교 2학년으로 편입한 그는 내내 책 속에 파묻혀 살다시피 했다. 그는 술을 좋아해 술에 얽힌 일화가 많다. 대학시절 소설가 한무숙의 집에 식객으로 있을 시절, 어느날 잠도 안 오고 술생각이 간절해 낮에 얼핏 본 안방 화장대 위의 양주병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모두가 잠든 사이 안방에 숨어들어 어둠 속에 어렴풋이 보이는 양주병을 들고 나와 단숨에 들이키고 보니 향수였다는 일화가 있다.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후 천상병의 몸과 마음은 서서히 파괴되어 갔다. 한때 행방불명되어 그가 죽었다고 생각한 문우들은 80여 편의 시를 모아 유고시집 『새』를 내었다. 살아있는 사람을 두고 유고 시집이 나오는 해프닝이 벌어진 것이다. 시집 『새』,『귀천』,『주막에서』 등과 산문집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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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한되 값 없던 때도 행복" 한해를 뒤둘아보는 세모의 달이다. 이루지 못한 일들, 후회와 미련이 쌓여 가슴 속에 찬바람이 일기도 하는 시기이다. 맨 손바닥 하나 내보이며 다정한 친구들에게 천원, 이천원씩 술 값 적선은 받았어도 늘 재벌 못지않게 여유를 갖고 호기를 부렸던 시인, 천상병. 새처럼 날개를 달고 하늘을 훨훨 날고 싶던 그에게도 두가지 간절한 소원은 있었던 것 같다. 그 하나는 밤이 되면 찾아들어가 눈을 붙일 방 하나요, 또하나는 사랑스런 자식을 가져보는 것이었다. 종로에서 탄생한 천재시인 이상이 명동에서 깡패들과 맞서 호통을 쳤듯 천상병도 한번은 깡패들을 건드렸다가 큰 소란에 휘말릴 뻔했다. 시인 민영, 성춘복, 송영택 등이 힘을 모아 1971년 12월 그의 유고시집 <새>를 펴냈다. 이 시집이 세상에 알려지자 출판사 측에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죽었다던 천상병이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 온정 덕분에 목순옥은 천상병의 '수호 천사'로 의연히 일어설 수 있었다. 20여년을 같이 살았으면서도 아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서 돈을 벌고 쌀을 사는지 도통 관심조차 없이 태평했던 천상병. 막걸리 한병, 담배 한갑이면 천하에 부러울게 없었던 그는 의지할 아내와 눈을 부칠 방까지 해결되고나자 자신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 60먹은 노인과 마주 앉았다. / 걱정할 거 없네 / 그러면 어쩌지요? / 될대로 될걸세. 보지도 못한 내 간이 / 괘씸하게도 쿠데타를 일으켰다. / 그 조무래기가 무얼 알까마는 / 아직도 살고픈 목숨 가까이 다가온다. > <간의 반란>이란 시를 통해 이미 그 자신이 계속된 음주로 해서 간이 점점 망가져 가는 것을 알면서도 술을 끊지 못해 마침내 그는 1993년 4월 28일 이 세상을 떠나갔다. 늦게서야 결혼했지만 22년의 결혼 생활 동안 한번도 떨어져 지낸 적 없이 날마다 머리를 매만져주고 발을 씻어주었던 아내 목순옥. 예쁜 여자만 보면 어린애처럼 "내 애인"이라는데도 질투 한번 하지 않았던 그녀. |
귀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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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의 고즈넉함은 찻집에서 온다. 누렇게 빛바랜 한지 벽지, 투박 한 나무탁자와 의자, 희뿌연 불빛 속에 은은히 퍼지는 감잎차 향기…. 찻 집하면 우선 「귀천」, 「옛찻집」, 「다원」 등이 떠오른다. 시인 고 천상병씨 가 11년 전 문을 연 「귀천」. 안국동에서 종로쪽으로 걷다 왼편 중간지점 쯤에 있는 이곳은 아직도 시인을 가슴으로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발 길이 끊이질 않는다. 소설가 조정래, 하근찬씨와 시인 박재림, 신경림씨,화가 김영주 , 변영 원씨, 가수 양희은 자매가 단골 손님이기도 하다. |
지난 10월16일 찾아간 귀천엔 역시 앉을 자리가 없었다. 모두들 작은 방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비비고 끼여앉아 있었다. 천상병씨 부부의 빛바랜 흑백사진, 투박한 주전 자, 패랭이꽃 화분, 중광스님 작품…. 천상병 시집을 펴 든 여중생 한 명 이 앉아있고, 반대쪽에는 시집 「귀천」을 「백 투 해븐(Back to Heaven)」으 로 영역한 서강대 영문과 교수 안토니오씨가 마침 이곳에 들러 모과차를 마시고 있었다. | |
제주도 에서 「귀천2」를 개업한 「아줌마 팬」인 박길복씨는 『 제주도 사람 들에게 귀천의 이모저모를 전하기 위해 이곳에 자주 들른다』고 했다. 최 근 이곳에 자주 들르는 낯익은 얼굴이 하나 있다. 가곡 「명태」의 오현명 씨. 얼마 전 작곡가 변훈씨가 곡을 붙였다는 「귀천」을 노래하기 위한 「순 례」인가. 여학생 같은 생머리를 한 천씨의 부인 목순옥 여사는 『천선생이 주로 앉았던 자리가 어디냐며 지방에서 올라온 분, 여기서 연애를 했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온 젊은 부부들도 있다』고 말한다. - 조선일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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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시인은 어디로 갔을까 천상병 시인은 지금, 여기 지상에는 없다. 어린애나 다름없게스리 천진무 구하게 살았고 또 순결무구한 시들만을 즐겨 썼던 그는, <귀천> 이란 시가 소원했듯이 지금은 하늘 나라에서 살고 있다. 그의 말마따나 긴 여행이 아닌 인생이란 잠깐 동안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올라가 지상에서 의 삶이 '아름다웠다'고 추억하는지 모른다. 살아 생전 그는 가난했다. 친지들한테는 '내미는 빈 손'밖에 없었다. 그것 도 큰 손이 아닌, 막걸리 몇 잔 정도일 뿐인 '작은 빈 손'만을 내밀었을 뿐이었다. 서울대 상대를 중퇴하여 지식인 계층에 속했으나 그의 몸과 시 세계는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시를 쓰는 일에 있어선 잔재주나 속이 빤히 보이는 언어적 테크닉은 과감하게 떨쳐 버렸다. 그의 시는 공자님이 말씀한 '사무사(思無邪 사악함이 없는)' 바로 그 길목 가운데에 놓인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돈이 없어 저승도 못 가겠네"라고 노래했던 천상병 시인, 그의 시에는 정녕 꾸밈이 없다. 그의 마음(혹은 詩心)또한 꾸밈이 없다. 그의 시는 그가 사는 것만큼, 생각하는 대로 만큼 그대로 씌여졌을 뿐이다. "하늘로 돌아가리라"로 시작되는 <귀천>이란 시는 그래서 쉽게(아, '쉽 다'란 말은 사실 얼마나 어려운 말린가!)씌어졌고 감동의 폭이 넓을 수밖 에 없다. 서울 인사동 골목을 가면, 시방 그의 아내가 찻집 '귀천'을 문 열어 놓고 있다. 하늘로 간 남편이 별 밝은 밤 더러는 종종 찾아 내려올지 몰라 서...... ※이 시평은 김준태 시인의 <사랑의 확인> 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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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천상병시인 부인 목순옥씨/ 날개없는 새 짝이되어 출간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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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이 남긴 기막힌 뒷얘기 천상병 시인은 60년대 중반 간첩 사건에 연루된 서울대 상대 동기 동창에게 포섭자금을 받았다는 이유로 법정에 섰다. 그는 특유의 어눌한 말투로 "정말로, 오백 원을 받아 술을 마셨다"라며 "그렇게 손을 내민 사람은 동창 뿐만 아니라 시인 박재삼, 성춘복, 이형기 등등이고 현대문학사에도 갔지만, 거기는 기분이 내키지 않아서, 잘 안갔다" 고 읍소했다. 마침내 재판장이 웃음을 참지 못했고, 법정은 그야말로 웃음바다가 됐다. | |
6.25때 북한 의용군에 끌려가 거제도 포로 수용소 생활을 거친 시인 김수영은 포로 체험에 대한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었다. 문단 모임에서 그가 6.25때 어디에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금기 사항에 속했다. 한편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은 김수영과 친구이자 경쟁 관계였다. 어느날 박인환이 현란한 수사학이 넘치는 시를 발표하자, 김수영이 그 중 한 단어를 두고 도대체 무슨 뜻이냐며 은근히 힐난했다. 박인환이 받아쳤다. "그건 네가 포로 수용소에 있을 때 생긴 말이야." 박인환은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이상(이상)의 기일에 "이상을 위해 술잔을 들자"고 외친 지 3일 후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술상 위에 고개를 떨군 채 쓰러졌다. 문우들은 그의 무덤에 [조니 워커]를 붓고 조시를 읊었다. 박인환이 사랑했던 이상의 전성기는 30년대. 그는 창대 같은 수염을 기르고 다녔다. 어느날 카페에서 술을 마시며 세상을 조롱하자 [수준높은](?) 여급이 "창대수염 이상은 D.H 로렌스의 이미테이션이에요!"라고 했다. 이상은 술을 벌컥 들이키면서 "이 발칙한 것, 채털리 부인의 이미테이션도 못되는 것이…"라고 했다. 시인 서정주와 박재삼은 처음부터 시적 만남을 거쳤다. 미당이 술집에 들어설 때 주모가 이불 홑청을 갈아 끼우는 것을 보면서 "아주먼네, 세상이 아주 찬란하네요"라고 하자, 여린 감성의 시인 박재삼이 그 표현에 금세 반해 술잔을 건넸다. 평생 고전 음악과 술을 사랑한 낭만파 시인 김종삼은 고급 만년필과 라이터를 애용했지만, 집에는 돈 한푼도 갖다 주지 않았다. 그는 초등학생 딸의 소풍에 따라갔다가 슬쩍 숲 속에 홀로 들어가 잠을 자면서 배 위에 돌을 올려놓았다. 이유는 "하늘로 날아갈 것 같애서"였다. |
가난했던 한 시인이 천국으로 떠났다. 조의금이 몇백 걷혔다. 생전에 그렇게 「큰돈」을 만져본 적 없는 시인의 장모는 가슴이 뛰었다. 이 큰 돈을 어디다 숨길까. 퍼뜩 떠오른 것이 아궁이였다. 거기라면 도둑이 든 다해도 찾아낼 수 없을 터였다. 노인은 돈을 신문지에 잘 싸서 아궁이 깊숙이 숨기고서야 편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시인 의 아내는 하늘나라로 간 남편이 추울 거라는 생각에 그 아궁이에 불을 넣었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 푸르스름한 빛이 이상했다. 땔나무 불빛 사 이로 배추이파리 같은것들이 팔랑거리고 있었다. 조의금은 그렇게 불타버렸다. 다행히 타다남은 돈을 은행에서 새돈으 로 바꾸어주어, 그 돈을 먼저 떠난 시인이 「엄마야」며 따르던 팔순의 장모님장례비로 남겨둘 수 있게 되었다. 시인은 늘 「엄마」의 장례비를 걱정했기 때문이다. | |
이 슬픈 동화 같은 이야기는 시인 천상병가의 이야기이다. 평생 돈의 셈법이 어둡고 돈으로부터 자유로왔던 시인이었다. 지상에 소풍왔던 천사처럼 순진무구하게 살다간 시인의 혼은 가고 남은 자리마저 그런 식으로 자유로와 지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처럼 숫자 계산에 어둡고 어린애 같은 셈법으로 살다간 시인은 사 실「서울상대」 출신이었다. 우리 모두는 천상병 시인을 사랑했다. 우리에게 달라붙어 있는 세속 과 악의 혐의가 짙을수록 그 어린아이 같은 시인을 그리워했다. 지상에 서 가난했고 고초당했던 그 시인은 그러나 천국에 가면 땅은 선한 것이 었다고, 지상은 아름다왔노라고 전할 것이라고 썼다. 악은 그의 머릿속 에도 없었고 가슴에도 없었다. 악에 관한 한 그는 지진아인 셈이었다. 병구완에 헌신적이었던 아내 목순옥을 그는 하나님이 숨겨두셨던 천사라고 했다. 그는 생전에 고문 후유증으로 활발한 걸음걸이가 아니었지 만 인사동에 나오기를 즐겨했다. 아니, 인사동 골목의 아내가 하는 작은 찻집 「귀천」에 나오기를 좋아했다. 귀천에 나오면 무엇보다 하루종일 아내를 볼 수 있어 좋고, 문인·화가·연극인 같은 다정한 사람들을 만 날 수 있어서 좋다고 하였다. 하지만 빨간 옷 입고 오는 여자나 안경 낀 남자는 무척이나 싫어했다고 한다. 무슨 논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싫어했다는 것이다. 이 역시 아이 같은 일면이다. 빨간 옷 입거나 안경 낀손님이 오면『문디가시나 문디가시나』하며 아내를 원망했다는 것이다. 그의 행복에 대한 고백은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답다. 『하루에 용돈 2천 원이면 나는 행복하다… 내가 즐겨 마시는 맥주 한 잔과 아이스크림 하나면 딱 좋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을 좋아했다. 바 늘귀를 통과하는 낙타가 있겠는가. 그런데 사람들은 다 부자가 되려고 하니 딱한 노릇이다. 굶지 않기만 하면 되는데… 내게 만일 1억 원이 생 긴다면 나는 이 돈을 몽땅 서울대학교에 기증하겠다. 장학금으로….』.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나쁜 일도 있었다고/그렇게 우는 한 마 리 새(「새」)처럼 가볍게 살다가 시인은 이제 인사동을 떠나 천국으로 갔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 다웠다고 말하리라…(「귀천」)고 작별을 고하며. 천상병이 떠나버린 인사동은 쓸쓸하다. 야트막한 집들과 필방과 도자 기와 그림과 그리고 한국차와 시의 동네 인사동. 모든 것이 번쩍거리기 만 하는 시대에 무채색으로 가라앉아 있어 정겹던 그 인사동. 이제는 그 동네도 반들반들 닳고단 상업의 거리가 되어간다. 인사동이 때묻어 갈수 록 시인의 맑고 투명한 정신이 그 때묻음을 씻어내고 정화시켜 그래도 인사동의 인사동다운 맛을 지켜내었건만, 그 인사동 지킴이 천상병은 새 되어 천상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촉수 낮은 「수희재」 전등 밑에서 세 상과 인생을 들려주던「민병산 선생」 떠나고, 인사동을 홀로 지키던 「귀천」의 시인 천상병마저 천국으로 돌아가버려 인사동은 허전하기 그 지없다. 천상병(1930~93) 일본에서 출생하여 마산에 정착. 마산중학을 나와 서울대학교 상과 대학을 수료하고 '문예' , '현대문학' 등을 통해 시와 평론을 발표했 다.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육개월의 옥고를 치른 후 고문후유 증으로 고생했다. 시집으로 '주막에서(1979, 민음사)' ,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1984, 오상출판사)' , '저승가는데도 여비가 든다면(1987, 일선출판사)' 등 여러 권이 있고 동화집과 산문집을 내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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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夢友 원문보기 글쓴이: 夢友...
첫댓글 세상을 천상병 처럼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 문제는 그게 안된다는데에 있지 않겠니 ?
그렇게 살기 쉽지않지 요즘 세상에 ... 그러나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은 항상 한쪽 구석에 남아 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