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死)의찬미" 윤심덕과 김우진
191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시조, 가사, 판소리, 창 등이 불려 왔습니다.
1920년대에 이르면서 천재 성악가 윤심덕 출현으로
현대음악 대중가요에 관심이 증폭 되었고 1924년부터
방송시험전파가 발사되면서 그 노래는
새롭게 부각 되었습니다.
그때 신문이나 잡지 에서도 새로운
음악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 했습니다.
윤심덕이 출연하는 공연장에는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방송전파와 함께 신문, 잡지에 대서특필 되었습니다.
윤심덕은 당대 선망의 대상 이었지만 '사의 찬미' 노래처럼
현해탄의 물결 속에 사라지고 말았으니 이 때가
윤심덕의 나이 서른 살 때의 일 이었습니다.
1927년 8월 4일 새벽 4시.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 부산행에 승선했던
극작가 김우진과 배우겸 소프라노 윤심덕이 실종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신문들은 두사람의 선상 실종을
"조선 최초의 선상 정사"로 단정 했습니다
유부남이지만 빼어난 인물이며 극작가로 인텔리젼트하였던
당대의 '엄친아' 김우진과 당시 최고의 소프라노며 스타였던
두사람의 죽음은 많은이의 입에 희자되었습니다.
특히
두사람의 실종 직후 그녀가 마지막으로 취입한 노래가
유성기와 방송에 실려 울려 퍼지면서 당시 식민지 젊은이들은
자신의 절망을 투사하며 애절한 사랑극으로 끌어 올렸습니다
헝가리 민족 작곡가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에 가사를 붙인 "사(死)의 찬미"는
당시 조선인들이 두사람 죽음에서 받은 연상(聯想)과
결합해 공전의 히트를 하였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윤심덕이 그의 애인과 함게
현해탄에 몸을 던져 자살한 것이라고 하지만
목격자가 없으니 둘이 죽음을 가장하고 이탈리아로
사랑의 도피를 하였다는 설등이 난무하였습니다
그의 생사에관해서는 두고두고 미스레리로 남아서
그의 명성만큼이나큰 화재거리 였습니다.
1926. 8. 1. 오사카 일동축음기주식회사(NITTO)녹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