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화경』요즘 공부하고 있는 부분이「약초유품」입니다. 우리 교재 134쪽 위에서 다섯 번째 줄 15번
15 如來說法 一相一味 所謂解脫相 離相滅相 究竟至於一切種智
여래설법 일상일미 소위해탈상 이상멸상 구경지어일체종지
其有衆生 聞如來法 若持讀誦 如說修行 所得功德 不自覺知
기유중생 문여래법 약지독송 여설수행 소득공덕 부자각지
如來說法은 一相一味니 所謂解脫相이며
아주 멋진 말이죠. 부처님의 설법은 한 모습이고 한 맛이다. 한 모습이고 한 맛이다. 이를테면 所謂(소위) 이른바 解脫相(해탈상)이다. 해탈의 모습이다.
뭐 다른 말로도 표현할 수가 있겠지만은 온갖 시비곡절과 또 너니, 나니 하는 차별 그런 그 차별을 통해서 그 차별은 너무 많죠. 좋다. 나쁘다. 잘났다. 못났다. 있다. 없다. 뭐 내 민족이다. 너 민족이다. 내 식구다. 너 식구다 하는 그런 모든 차별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것이 한 모습이요. 한 맛입니다.
그 이제 부처님은 사실은 무슨 따지고보면은 그 우리하고 별로 안맞아요. 우리는 불교를 통해서 또는 부처님을 통해서 좋은 꿈 꾸게 해달라고 빌거나 또는 좋은 꿈 꾸고 싶어서 어떤 기대감이나 이런걸 가지고 불교를 믿고 절에 찾아오고 부처님께 귀의해요.
세상 사람은 나쁜 것과 좋은 것이 반반이기 때문에 나쁜 것은 좀 멀리 떠나고 좋은 것만 그저 있기를 바라는 거죠. 그 어떻게 하면 좋은 것만 있을까? 내가 살아가는데 무슨 뭐 사업상의 문제, 사람 관계의 문제, 자녀의 문제 뭐 모든 분야에서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이 보통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그건 뭐 당연한 거죠. 나쁜 것도 아니고 그것은,
그런데 살다보면 이제 좋은 것만 있는게 아니지 않습니까? 좋지 아니한 것도 한 반은 있어요. 밤이 있으면 낮이 있듯이, 낮이 있고 또 밤이 있고 늘 이제 그런거와 마찬가지로 그런데 이제 부처님은 그런 그, 그건 일종의 종교적인 입장에서 보면은 악몽은 꾸지말고 길몽만 꿨으면 하는 그런 그 꿈속의 삶이니까, 어차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꿈속에 사는 거라고 그렇게 하니까 그래 이제 꿈으로 보는데 그 어차피 꿈인데도 불구하고 자꾸 길몽만 바라는 거요. 길몽, 악몽은 꾸지말고
그런데 부처님의 참다운 뜻은 악몽이든 길몽이든 꿈깨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꿈을 깨는게. 악몽도 깨야되고 길몽도 깨야돼. 길몽도 꿈이니까. 그 우리 생각은 악몽은 꾸지말고 길몽만 꾸게 하십시오. 꿈이 됐든 뭐가 됐든간에 길몽만 꾸게 해달라고 공부도 하고 빌기도 하고 하는 것이 대개 이제 우리들 마음입니다. 사실은 부처님 마음은 그게 아니에요. 길몽꾸라고 하는 뜻으로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도 아니고 길몽꾸라고 우리에게 오신 분이 결코 아니야. 또 우리에게 길몽꾸라고 뭐 어떤 신통력을 발휘하거나 부처님의 그 능력을 발휘하는 것도 아니에요. 절대 부처님은 길몽꾸라고 우리에게 뭐를 하는게 아니여. 꿈 깨라고 하는 분이지. 그 분은, 꿈 깨도록 가르치는 분이야. 이게 이제 우리하고 다른 거여.
우리 생각은 악몽꾸지 말고 길몽꾸게 바란다면은, 부처님은 길몽이든 악몽이든 그건 전부 꿈이야. 꿈 깨는게 중요하지 무슨 길몽 그 길몽 아무리 꾼들 꿈속에서 대통령 열 번, 스무 번 한들 그 한낱 꿈인데 그 뭐할라고 꿀라고 하느냐? 수천 억, 수만 억을 설사 뭐 돈을 번다한들 그 역시 꿈이다 이거여. 그‘꿈 깨라.’하는게 불교의 가르침이야. 사실은 알고 보면, 뭐 다 알고 계시겠지만은
그래 해탈상이라고 하는 것이나 그 다음에
離相滅相이라
離相(리상) 滅相(멸상) 이게 전부 뜻이 같에요. 벗어난 모습, 떠나는 모습 그 다음에 滅相 소멸하는 모습. 이건 이제 악몽이든 길몽이든 다 벗어나는 거, 떠나버리는 거. 악몽도 떠나고 길몽도 떠나고 악몽도 소멸하고 길몽도 소멸하는 것 滅相 이것을 이제 부처님이 법문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은 一相이다. 또는 一味(일미)다. 一相(일상)이라고 하나 一味라고 하나 이제 그건 같은 뜻입니다. 한 모습이다. 한 맛이다.
이게 이제 참 그렇다고 부처님 법이 내 마음에 안든다고 안받아들일 수도 없고, 말은 듣고보면은 세상사 전부 꿈이니까 꿈 깨라고 하는게 성인의 말씀으로써 참 당연하긴 한데, 우리는 아직 꿈 깨는 것보다는 달콤한 꿈 꾸기를 바라는 그런 그 꿈에 대한 미련이 있어요.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 좀 시원하게 깨버리면은 꿈도 뭐 악몽도, 길몽도 다 소멸한 그런 상태가 되면 오히려 좋을텐데...
우리가 꿈을 생각해 보면은 밤에 잠잘 때 좋은 꿈도 꾸고 나쁜 꿈도 꾸지요. 그런데 꿈 깨는 것만 같지 못한거야. 아무리 좋은 꿈 꿔도 꿈 깨는 것만 같지 못해. 또 어떤 때는 달콤한 꿈 꾸면‘이 꿈 안깨졌으면’하고 이제 그런 경우도 많잖아요.
그러나 그것은 어차피 허망한 것이고 언젠가 우리가 깨야할 꿈이라. 새벽이 오면 잠을 깨게되고 잠 깨게되면 꿈도 깨게 돼있어. 꿈 깨야하는게 우리의 갈길인데 그 좋은 꿈이라 그래서 깨기를 바라는게 아니다. 그러니까 꿈 깨야된다 하는 것입니다. 一相一味라. 所爲解脫相이며 離相이며 滅相이다.
究竟至於一切種智하나니
결국은 이른다 至 어디에? 一切種智(일체종지)에 이른다. 일체것을 다 꿰뚫어 아는 지혜에 이른다.
그러니 꿈을 환희 깨는 거여. 꿈을 환희 깨고 나면은, 그게 이제 눈을 뜨고 지금 현재가 어떤 상황이다 라는 것을 환희 알지 않습니까? 아는 것을 種智라 그래요. 지혜라 그래요. 그러니까 온갖 이치가 어떻게 돼있든지간에 돼있는 그런 모습들을 다 아는 것. 얼마나 좋습니까? 환~하죠. 시원하죠. 새벽이 오고 해가 뜨면은 그 다음에 환~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높고 낮은데를 보이고 길인지 길아닌지 낭떠러지인지를 다 보이는 거여. 그래 다 보이면은 길아닌데를 가지 않고 똑바른 길만 가. 저 전봇대나 담벼락에 가서 부딪힐 필요가 없어. 그럼 상처도 받지 않고, 상처 안받는 인생을 산다 이겁니다. 결국은
그 아무리 좋은 꿈 꿔도 그 꿈속에는 상처받는 일이 있기 마련이라. 그래서 부처님은 지혜, 꿈을 깬 상태의 어떤 그 밝은 안목으로 인생을 사는 것. 이게 이제 一切種智 또는 지혜 또는 깨달음
참 정말 성인의 말씀답죠. 성인의 말씀답지만은 보통 우리들 뭔가 세속적인 기대감이라든지, 세속적인 그 소원이라든지 이런 것을 가슴에 가득히 안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좀 거리가 멉니다. 하지만은 결국은 우리도 눈을 떠야하고 지혜를 갖춰야 하고 꿈을 깨야 하는 그런 인생을 가고 있는 거죠.
其有衆生이 聞如來法하고
그 어떤 중생이, 또 그 중생이 있어 이렇게도 말합니다. 중생이 있어서 여래의 법을 듣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若持讀誦커나 如說修行하면
만약에 들고 다니거나 持 그리고 경전을 가지고 다니죠. 그 다음에 읽거나 외우거나 말씀하신대로 수행한다.
가지고 다닌 것도 수행이고 읽는 것도 수행이고 외우는 것도 수행이고, 내가 조금 이제 강도 높은 수행을“사경을 하라. 사경을 하라.”자꾸 사경을 하라고 하는, 그건 참 좋은 수행이야. 수행중에 우리가 지금 실천할 수 있는 제일 좋은 수행입니다.
읽고 외우는 것도 생각이 딴데가서 읽을 수도 있고 외울 수도 있어요. 익숙하면은 딴 생각 다 하면서도『천수경』돌돌돌돌 다 외웁니다. 그 어려운‘신묘장구대다라니’도 다 외워요. 다른 생각 실컷하면서도 왜냐? 입으로 외웠기 때문에 그런데 사경을 하면은 그게 안돼. 사경을 하면 딴 생각하고 사경을 할 수는 없어. 금방 한 획이 틀려버리고 글자가 틀려버리고 비뚤어지고 그러기 때문에 그래서 현대인들에게, 오늘을 살아가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제일 수행이 좋은 수행으로써 사경수행(寫經修行)이 제일 좋다.
그리고 많이 쓰는 거 힘들면은‘南無妙法蓮華經’일곱 자만 천 번, 만 번 반복해서 써도 좋다. 내가 그러거든요. 그러고 하다보면 그 다음에 이제 한 품 가지고도 쓸 수가 있고 뭐「보문품」하나만 가지고도 쓸 수가 있고 얼마든지 발전 가능한 일이 나오는 거죠. 如說修行(여설수행) 설한바 대로, 말씀한 것과 같이 수행할 것같으면은
所得功德은 不自覺知니라
그래 되면은 얻은 바 공덕은 스스로 覺知(각지)하지 못한다. 깨달아 알지 못한다. 자신은 몰라요. 자신은 몰라. 자신은 모르는데 언젠가 달라져 있어. 不自覺知(불자각지)여. 스스로 覺知하지 못한다. 깨닫고 알지 못한다.
우리들 예불하는데 보면‘명훈가피력(冥熏加被力)’이라고 하는게 있어요.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고 부처님믿고 기도하고 뭐 이런 불교적인 인연을 자꾸 쌓아 가다보면은 나도 모르게, 나도 모르게 불교 사상이 자꾸 배어 들어.‘꿈을 깨야한다.’고 하는 오늘의 말씀과 같은 이런 내용도 이제 자꾸 이제 듣다보면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게 우리 의식속에 배어 있어요.
우리 의식은 이렇게 보고 이렇게 느끼고 하는 이런 그 분별의식만 있는 것이 아니고 저기 심층의식이라고 하는게 있어요. 불교용어로는 제8식이라고도 하고 장식(藏識)이라고도 하는데, 아주 저기 심층의식. 무의식, 잠재의식 그런 표현을 쓸 수 있는데 그 의식속에 전부 갈무리되어가지고 이렇게 말 한 마디 듣는 것도 전부 거기 갈무리돼가지고 언젠가 그게 이제 밖으로 표현이 됩니다. 드러나요. 그래서 자기 생활속에 그것이 저절로 그게 표현이 되거든요.
그래서 어떤 아픔을 겪었을때라든지, 손해를 봤을때라든지, 상처를 입었을때 그럴때 부처님의 이런 법문을 많이 들은 사람들은 그것을 그 아픔을 치유하는데 아주 특효약을 발휘합니다. 스스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아주 특별한 효과가 입게 돼요. 그게, 그런데 전혀 듣지 못하고 그런 이치를 듣지 못한 사람들은 정말 아프면 아픈 그대로 겪게 되고 상처받으면 상처받은 그대로 겪게 되고 그러는데, 불자들은 그 점이 다른거지. 그게 명훈가피력이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훈습이 돼있어. 가만히 몰래 훈습이 돼있는 힘이다. 이게 冥熏加被力(명훈가피력)이야. 어두울 명(冥)자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훈습이 돼있는 그런 그 가피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이런 법문도 자꾸 듣게 되고 불교경전도 많이 읽어야되고 또 외우기도 하고 쓰기도 하고 쓰다보면 참~ 자기 마음에 정말 싹 드는 그런 구절을 많이 발견하거든요. 그건 뭐 노트에다 천 번, 만 번 써도 좋습니다. 그건, 자기 마음에 드는 구절은, 그건 뭐 꼭 숙제로 내준바가 없으니까 한 권을 한 달안에 써라. 두 달안에 써라. 그런 이치가 없으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구절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노트 몇 권이고 쓸 수 있는 거지. 한두 가지만 가지고
저는 그래서 그전에 경을 읽다가 보면은 마음에 드는 구절은 그저 그 이상 안나가는 거라. 거기서만 계속 맴돌아. 좋은 구절은, 그 꼭 외워야 할 필요도 없고 다 읽어야 할 필요도 없고 하니까. 그 구절에서 계속 음미하고 깊이 마음에 새기고 거기서 맴돌면서 그러면 이제 어떤 법희선열을 거기서 이제 느끼게 되고 그러면 신심이 나고 깨달음이 있게 돼있는 거야. 거기서 깨달음이 있게 되있는 거라.
그래 독경(讀經)하고 경을 쓰고 하는 것도 그렇게 하면 아주 가볍게 가볍게 사경도 접할 수가 있습니다. 좋은 구절들 이렇게 보고 좋은 구절‘究竟(구경)에 至於一切種智(지어일체종지)라.’한다든지 뭐‘所得功德(소득공덕)을 不自覺知(불자각지)라.’이것도 근사하잖아요? 공부하는데 있어서 내 공덕을 나는 저절로 알지 못한다. 스스로 알지 못하는데 어느새 그 능력과 그 훈습이 돼있다.
그 다음 여기 까닭을 이야기했어요.
16 所以者何 唯有如來 知此衆生 種相體性 念何事 思何事 修何事
소이자하 유유여래 지차중생 종상체성 염하사 사하사 수하사
云何念 云何思 云何修 以何法念 以何法思 以何法修 以何法得何法
운하념 운하사 운하수 이하법념 이하법사 이하법수 이하법득하법
所以者何오
所以者(소이자)가 何(하)오. 까닭이 무엇인가? 정확하게 하면 所以는 까닭이고 者자는 것, 까닭이라고 하는 것이 何 何오 무엇이냐?
唯有如來가 知此衆生의 種相體性하대
오직 여래가 있어서 이 중생의 種相體性(종상체성)을 안다.
이 중생들 수행하고 있고 독송하고 수지하고 하는 우리들을, 그 말이요. 우리들의 그 종류. 아 어떤 사람이 어떤 그 모습을 한 또 어떤 그 신체를 가진 또 어떤 그 성품을 가진 그게 이제 種相體性이야. 어떤 종류의 사람, 어떤 모습의 사람, 어떤 신체 또 어떤 본 성품. 어떤 성품, 어떤 신체, 어떤 모양 이 相은 외상이에요. 밖으로 드러나는 것. 어떤 종류 남잔지 여잔지 뭐 그런 것들
또 그리고 사람도 하나의 사람같지만은 그 분류하기로 하면요. 성품과 또 어떤 체질에 따라서 여러 종(種)이 있습니다. 뭐 흑인, 백인 그거 말고라도 의학적으로도 무슨 사상으로 나누기도 하고 팔상으로 나누기도 하고 또 성격으로도 또 여러 가지로 나눌 수가 있잖습니까? 그래서 그걸 이제 말하는 種相體性 그걸 전부 아는데
念何事와
그 사람이 무슨 일을 기억하는가? 念자는 기억할 념자에요. 여기서는, 무슨 일을 잘 기억하고 있는가? 전부 기억하고 있는게 달라요. 오늘 공부를 한 시간했다 그러면은, 열 사람한테 물어보면 열 사람 다 오늘 공부 무슨 공부했나 이야기하는게 다 다르다구요. 자기가 마음썼을때 또 취미에 맞는거, 자기 마음에 드는거 그 다음에 자기가 정신차리고 있을때 등등 해가지고 기억하고 있는게 다 다릅니다.
그런데 여래는 다 안다. 또
思何事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이 思자는, 지금 현재 생각하고 있는 거에요. 그리고
修何事며
무슨 일을 반복해서 닦고 있는가? 반복해서 그것을 복습하고 있는가? 그게 이제 修자야.
念 思 修 그러니까 기억하고 지금 생각하고 또 그것을 또 두 번, 세 번, 네 번 반복해서 할려고 하는 거 그런 것을 여래는 다 안다. 그리고
云何念과
기억을 하는데 이 사람 기억방법은 어떤가?
자꾸 써가면서 기억하는 사람이 있고, 그전에 행자생활할 때 보면 염불을 나이 들어서 온 사람은 입으로 이렇게 외우는 거 싫어해. 또 습관이 안되가지고 그렇더라구요. 그 계속 쓰는거야. 막 이렇게 염불을 써.『천수경』을 쓰면서 외우는 사람이 있어. 그 몇 번 쓰는거 보면 다 외웠다 하는 사람이 있어. 그렇게 외우는 방법도 어떻게 외우는가? 云何念(운하념)
또
云何思와
또 생각은 어떤 식으로 하는가? 그것도 사람따라서 다 달라요. 내가 생각하는 방법대로 딴 사람도 생각하려니 하지만, 전혀 달라. 기억하는 것도 내가 기억하는 대로 기억하리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사람들마다 다 다릅니다.
예를 들어서 글자 하나 외우고 단어 하나 외우는 것도 외우는 방법이 다 달라요. 뭐 연관시켜서 외우기도 하고요. 어떤 단어 하나 외운다면 그 말을 음성하고 연관시켜서 외우기도 하고 또 그 저기 저 ㄱ ㄴ 그 무슨 책같은거 보면 인체, 인체를 전부 제일 기억하기 쉬운게 자기 사람 몸아닙니까? 그럼 머리에서부터 저 발끝까지 전부 번호를 매기고 연관시키는 단어를 거기다 딱딱딱 그냥 그림도표로 그려놨어요. 또 그걸 연상해가지고 외우는 사람이 있어. 숫자로 해서 모든 낱말을 전부 숫자로 또 하는 사람도 있고 등등이 다 다릅니다.
여기도 云何思(운하사) 어떻게 또 생각하는가?
云何修며
어떻게 또 수행하는가? 반복해서 익히고 있는가? 또 修何事(수하사) 또 무슨 일을 수행하는가? 云何修(운하사)
以何法念과 以何法思와 以何法修며 以何法得何法이니라
무슨 방법으로써 기억하는 것과 무슨 방법으로써 생각하는 것과 무슨 방법으로써 수행하는 것 또 무슨 방법으로써 무슨 법을 얻는가?
그러니까 우리가 일상생활에 살아가면서 각각 그 다르게 공부하고 다르게 기억하고 다르게 쓰고 뭐 전부 세밀하게 들여다 보면요. 사람사람이 그렇게 다르다고 하는 것 그런 미세한 차이점까지도 여래든 다 꿰뚫어 안다. 그런데 우리는 모르죠. 不自覺知 해놨어요. 이것을 수행하되 본인들은 잘 모른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걸 다 꿰뚫어 알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지혜가 뛰어나신 분이니까 그 지혜로써 안다 하는 것입니다.
17 衆生 住於種種之地 唯有如來 如實見之 明了無礙 如彼卉木叢林
중생 주어종종지지 유유여래 여실견지 명료무애 여피훼목총림
諸藥草等 而不自知上中下性
제약초등 이부자지상중하성
衆生이 住於種種之地를
중생이 가지가지의 지위, 가지가지의 입장에 住 머물러 있는 것을
唯有如來가 如實見之하야
오직 여래가 계셔서 사실과 똑같이 그것을 보아서
明了無礙하대 如彼卉木叢林과
明了(명료) 밝게 요달해가지고 아무것도 걸림이 없으대. 예컨대 여기 이제「약초유품」이니까 예를 들어서 비가 오면은 온갖 산천초목들이 전~부 각자 영향따라서 수분을 흡수하는 것과 같다 하는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저 卉木叢林(훼목총림)과, 숲과 나무와 뭐 풀과 그리고
諸藥草等이 而不自知上中下性이니라
여러 가지 藥草等(약초등)이 스스로는 上中下의 성품을 알지 못한다.
예를 들어서 고추나무는 지 혼자 고추만 알고 있는 거야. 소나무 입장 모르죠. 왜 소나무는 저렇게 물을 많이 빨아들이는가? 알 수가 없는거야. 감나무는 감나무는 왜 저렇게 물을 빨아들여서 저런 입이 피고 저런 열매가 열리는가? 서로 몰라. 그리고 큰 것과 작은 것 또 서로 몰라요. 그래서 이제 모든 초목들이 서로 모르지만은 그러나 여래는 그러한 사실을 다 아는 것과 같다.
18 如來知是一相一味之法 所謂解脫相 離相滅相 究竟涅槃 常寂滅相
여래지시일상일미지법 소위해탈상 이상멸상 구경열반 상적멸상
終歸於空 佛知是已 觀衆生心欲 而將護之 是故不卽爲說一切種智
종귀어공 불지시이 관중생심욕 이장호지 시고부즉위설일체종지
汝等迦葉 甚爲希有 能知如來 隨宜說法 能信能受 所以者何
여등가섭 심위희유 능지여래 수의설법 능신능수 소이자하
諸佛世尊 隨宜說法 難解難知
제불세존 수의설법 난해난지
如來知是一相一味之法하나니 所謂解脫相이며 離相滅相이며
여래는 이 一相一味의 法을 아나니. 궁극적인 차원에서 다~ 꿰뚫어 알고 있다. 저 앞에서 있었죠. 解脫相이며 離相이며 滅相이다. 모든 것을, 이 차별상(差別相) 좋다 나쁘다 너다 나다 뭐 예를 들어서 크다 작다. 우리 인간은요. 그 차별 때문에 고통이 있고 또 차별을 그냥 그대로 보면 좋은데 자꾸 비교한다구요. 비교해서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내.
‘하~ 누구는 뭐 사경을 그래 잘했는데 나는 부끄러워서 못내놓겠다.’이거부터 저저 비교해가지고 스스로 좋은 공부하면서 스스로 고통을 만드네 또. 근데 아무리 객관적으로 잘쓴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못쓰는 글씨 쓰라고 하면 못써요. 못쓴다고, 자기 글씨체가 그럴 뿐이야. 근데 남의 글씨체 흉내내봐야 흉이 제대로 안나와. 다~ 독특한 소질이 있고 독특한 가치를 가지고 있고 다 개개인으로서의 완전무결한 자신의 모습인데, 비교하지 마라고 그 비교하는 안목이 첫째 잘못돼있어요. 잣대가 첫째 잘못돼있어. 자기 엉터리 잣대를 가지고 괜히 비교해 놓고는 그 비교하면 틀리게 나오잖아요. 잣대가 벌써 틀리니까.
부처님이 一相一味라고 했어. 모든 사람은 사실 따지고 보면 동등해요. 똑같은데, 각자 자기 모습일뿐이지. 뭘 그걸 비교해가지고 스스로 그렇게 부끄러워한다든지 창피해한다든지 뭐 위축된다든지 하등에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내 모습이다. 네 잘 썼다고, 그래 이제 잘 쓴 사람보고 못쓰라하면 못쓴다니까 그거. 못쓰는 글씨 못써요. 그 잘 쓰고 못 쓰고 따지고보면 없는 거지. 우리가 표현하자니까 그런 것이지. 뭐 까짓껏 그거야 사경이야 설사 좀 비교해서 부끄러워하고 못내논다 하더라도 그거까지는 괜찮아. 이거는 공부안하면 그뿐이니까.
그런데 세상에 처해있는 우리의 형편들을 가지고, 세상에 처해있는 형편들을 가지고 다 각자 인연따라서 각자 그 물질적인 복따라서 뭐 전부 다른것을 가지고 그걸 괜히 비교해가지고 괴로워하는 거야.‘아이고 저 집에는 말이야. 벌써 취직한지 3년만에 자기집 샀는데 나는 10년돼도 전세방 전전한다.’이래하면서 비교하는 거죠. 각자 자기 분이 달라요.
‘안분낙도(安分樂道)’유교(儒敎)에서 그러거든요. 자기분에 안주해. 자기분에 안주해. 그리고는 그 삶을 즐겨. 그 삶을 누리는 거야. 자기분을, 자기 분에 맞게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 그 삶을 누리는 거야. 자기 삶을 누린다. 자기분에 안주해서 자기분을, 자기 삶을 누린다. 분에 맞춰서 삶을 누린다. 이렇게 해석합니다. 분에 맞춰서 삶을 누린다. 그러면 되는 거지. 분에 맞춰서 삶을 누리면 되는 거지.
요즘 뭐 그 아파트같은 거 이렇게 지으면 좌~악 그냥 연결해서 지어놓은데가 있죠. 첩첩히, 그 제일 앞에만 남향이고 나머진 전부 남의 뒤만 바라보고 있는데 그걸 가지고 자꾸 제일 앞집만 선호하면 어떻게 된다 말이요. 이치에 안맞잖아요. 그냥 제일 뒷집에 있으면 뒷집은 뒤로 보니까 좋고, 또 중앙에 있으면은 전부 바람막이를 해주니까 안전해서 또 좋고, 회오리바람 몰아쳐도 앞에 있는 집이 먼저 당할거니까 중앙에 있는 집은 좋잖아. 안전하고, 1층은 안 올라가서 좋고 높은 데는 멀리 바라봐서 좋고 각자 자기분에 맞춰가지고서 자기 삶을 누리면 돼.
그 여기 저 오늘 중요한 법문이 解脫相 離相 滅相이거든요. 이건 어떤 그 차별을 괜히 우리가 눈여겨봐가지고 스스로 그것을 비교하고, 비교하는데서 오는 스스로 만드는 고통이야. 이거 누가 만든것도 아니야. 누가 주는것도 아니라. 누가 주는것 같으면은 항의라도 하지만, 자기가 만드니까. 그 참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자기분에 맞게 자기 삶을 누리면 되는거여.
解脫相(해탈상)이며 그런걸 모두 떠난것으로부터, 그것으로부터 해탈하고 그런것을 떠나고 또 그런것을 소멸해버려. 아예, 마지막에는 싹 내 맘에 그거 없다.
究竟涅槃인 常寂滅相이라
究竟涅槃(구경열반) 끝내는 모든 차별이 사라져버려. 다~ 불이 타고 재가 식고 싸늘하게 재가 돼버리지. 그런 차별이 내 마음에는 이미 아무관계없이 사라져버린 항상 寂滅(적멸)한 그 모습이다.
終歸於空하나니
그야말로 내 마음으로부터 텅 비어 버렸어. 그런 차별현상은, 그냥 나는 나로서 살 뿐이야. 그게 空이에요. 마음에 자꾸 그 차별을 떠올리고, 차별을 떠올리면 비교하게 되고 비교하다보면 부끄러운 생각, 고통스러운 생각, 괜히 자존심 상하는 생각 이게 자꾸 일어나잖아요.
참 오늘 법문 좋네요. 解脫相(해탈상) 離相(리상) 滅相(멸상) 究竟涅槃(구경열반) 常寂滅相(상적멸상) 終歸於空(종귀어공) 전부 이제 뜻은 같습니다. 終歸於空이나 常寂滅相이나 究竟涅槃이나 滅相이나 離相이나 解脫相이나 낱말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개지만은 전부 뜻은 같습니다.
그래 우리 마음으로부터 이래 부처님 법을 많이 배워서 우리 일상 생활에 무슨 아파트가 크느니, 작느니 무슨 자가용이 있느니, 없느니 또 있어도 큰 자가용, 작은 자가용 뭐 온갖 차별현상으로 이 세상은 이루어져 있어. 그게 그야말로 만물상이야. 그게 아름다운 현실이라구요. 예를 들어서 금강산 만물상이 왜 그리 아름답다고 세계적으로 소문났습니까?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아름다운거요. 다르기 때문에, 그게 똑같은 바윗덩어리라면 무슨 그 아름다울게 있습니까? 전~부 다른거여. 그야말로 만물상이라. 바위 하나하나마다 전부 생긴게 다 달라. 그러니까 아름다운거지. 그게 하모니를 이루는거지. 조화
세상도 그렇게 돼있어요. 사실은, 그렇게 돼있어야 이게 제대로 된 세상이지. 이미 제대로 잘돼있어. 제대로 잘돼있어. 큰 차, 작은 차 뭐 자가용 무슨 뭐 자전거, 리어카 뭐 아주 잘 돼있는데,‘나는 왜 자전거타고 다니는가? 나는 왜 리어카 끌고 다니는가? 나는 왜 버스만 운전하는가?’내 그렇게 이제 비교해가지고 쓸데없는 비교를 해가지고 거기서 차별을 보고 비교를 해가지고 비교하면 뭐가? 열등감이 생기고 고통이 생기고 그래서 결국은 자기가 자꾸 위축이 되고, 본래 가지고 있는 정말 무한자유, 무한공덕의 자기본성, 자기의 보물인 그 내면의 위대한 심성을 위축시키고 그냥 멍들게 하는거여.
그거는 어떤 살생보다도 더 큰 살생이라. 자기 자신을 그렇게 위축시키는 것은, 그러니까 어떤 현상적인 그런 것으로부터 확 벗어나가지고 당당하게 살라는 그런 그 가르침이라고도 볼 수가 있습니다. 참 멋지잖아요. 그냥 그대로 그 모습 그대로가 말하자면은 아름다움이고 조화야. 아버지는 아버지 역할을 하고 어머니는 어머니 역할을 하고 어린아이는 어린아이 역할을 하고
佛知是已하시고 觀衆生心欲하사
부처님은 이러한 사실을 다 아시고 중생들의 마음에 하고자 하는 것을 觀하사
而將護之일새 是故不卽爲說一切種智니라
그것을 가져서 그들을 보호할새. 그래서 곧바로 一切種智(일체종지)를 위해서 설하지 아니했다.
근데 중생들의 마음을 가만히 관찰해보니까 이거 뭐 그거 아무 소용없다. 그렇게하면은 당장에 그게 받아들여지나? 안받아 들여지는거라. 그래서 뭐 복 짓는 것도 이야기하고 인과도 이야기하고 뭐하면 좋다. 뭐하면 좋다. 여러 가지 방편설을 내놓게 되는거죠. 그래『법화경』정도 공부하는 불자라면은 이제 그런데서부터 떠나야 된다 이거지. 차원이 달라져야 된다 이거여. 칠성당에 가서 빌면은 뭐 명이 길어진다. 산신각에 가서 빌면은 뭐 집이 잘 팔린다. 이런데서부터 떠나야 된다.『법화경』공부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저기 저 한용운스님도『불교유식론』에서 비불교(非佛敎)적인 것을 개혁하는 그런 그『유식론』을 썼고 또 이제 우리 국민선사 성철스님도 한때 젊을때 한참 청담스님 뭐 이런 큰스님들 향곡스님, 자운스님 이런 스님들하고 늘 이제 불교의 현실을 걱정할 때, 제일 표면적으로 드러난게 산신각부수고 칠성각부수자 하는 운동을 했어요. 산신각, 칠성각. 이 불교거 아니다. 물론 방편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방법으로써는 좋지만은 끝날 날이 없는거야. 이게,
칠성각가는 사람은 365일 10년, 20년 내 칠성각가고 내 산신각가지 한 번도 부처님 앞에 와서 부처님 정법을 제대로 공부할려고 하지 않으니까“이거 이대로 두면 안되겠다. 좀 무리가 있더라도 두드려 부수자. 우리 한국불교에서 산신각, 칠성각 다 없애자.”그랬어요. 그래가지고 한때 야단이지. 우리 어릴 때. 그래가지고 뭐 어떤 사찰에서는 반대하기도 하고 어떤 사찰에서는“좋다. 그렇게 하자.”해가지고 또 없애는 사찰도 있고, 그런 사건이 있었어요. 여러 해 갔었어요. 그게, 옛날 신문 뒤져보면 그거 다 나올거요.
그래 그건 다 방편으로써 불교안에 있는데, 그래 이제 부처님은 그런 방편은 아니지만은 그래도 방편을 이야기했다하는 것입니다. 그게 이제 소위 삼승(三乘)이라는거죠. 聲聞 緣覺 菩薩 바로 말이야.“네가 부처다. 눈을 뜨고보면 바로 부처다.”이렇게 가르치지 않고“인생은 괴로운 것이야.”괴로운 거 떠올리면 다 괴롭지. 사실, 괴로운 일이지.“왜 괴로운가? 괴로움의 원인은 이것, 저것이 다 모여서 그래. 그럼 그 소멸해야 될거 아니냐? 괴로움은 없애야 될 거 아냐? 없애는 데는 무슨 방법이 있을까?”그 방법 道 그래 고집멸도(苦集滅道) 이걸 이제 처음에 이야기한거요. 그러니까 이제 아 그거 귀에 솔깃하거든요. 아주 쉽고 또 누구나 다 있을 수 있는 일들이니까. 그래서 귀를 귀울이기 시작해서 이제 그런 소승법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 부처님은 중생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다 알아서 그들을 또 보호하고자 해서 그래서 바로 一切種智『법화경』의 경지인 지혜의 눈을 떠라. 그러면“네가 바로 부천데, 부처면 다지 더 이상 있느냐?”하는 그런 이야기를 곧 설하지않고
汝等迦葉이 甚爲希有하야
그대들 가섭은 매우 희유해서, 뛰어나다 이 말이여.
能知如來가 隨宜說法하야
내가 편의를 따라서 방편으로 설하는 것을 다 안다. 이 말이여. 능히 안다. 여래가 隨宜所說(수의설법) 편의를 따라서 설법하는 것, 편의를 따라서 설법하는 것을 다 안다.
그러니까‘아 부처님이 방편으로 이렇게 하신다.’하는 것을 다 안다 이거여. 그러니까『법화경』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이건 이제 정말 불교에서 가장 차원이 높은 공부니까요.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를 해야지. 그래서 이제『법화경』차원에 와서는 이제 그런데서 깨어나는 거죠. 가섭존자 같은 이들도 다 그런데서 깨어나는거죠. 그래서
能信能受하나니
『법화경』의 가르침을 갖다가 또는 방편 응기방편(應機方便)이라고도 하죠. 근기에 맞춘 그런 방편설법을 能信 능히 믿고 능히 받아들이나니
所以者何오
까닭이 무엇인가?
諸佛世尊의 隨宜說法은 難解難知니라
諸佛世尊(제불세존)께서 편의를 따라서, 거기 이제 사람의 근기에 맞춰서 이런 뜻이죠. 근기에 맞춰서 설법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고 알기 어렵다.
이제 내가 자주 말씀드리는 어린아이가 울면“호랑이가 밖에 왔다.”밤에 또“호랑이가 밖에 왔다.”그러면 겁이 나서 얼른 울음 그치잖아요. 그런데 그 속을 어린아이가 압니까? 모르지. 어쨌든 뭐 지금 자야하는데 시끄러우니까 그러니까 어린아이 울음 그치게 하는 그런 그 깊은 속을 모르는거지. 그래서 難解難知(난해난지)라. 그런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거 저기 중송인데요.「약초유품」중송 아주 시형식으로 다시 한 번 이야기합니다.
『법화경』은 물론 전체적으로 크게 보면 연결도 되지만은 부분부분만 들어도 한 시간만 들어도 고 나름대로 전부 완전한 하나의 법문이 됩니다. 오늘은 아주 그 핵심이 참 좋은 내용이죠. 解脫相 離相 滅相 究竟涅槃 常寂滅相 終歸於空 요것만 써도 좋겠네요. 이 여섯 낱말
부처님의 설법은 解脫相이고 離相이고 滅相이야. 참 좋은 뜻인데 이것처럼 한 시간만 들어도 아니 십 분만 들어도 고대로 고것만으로도 완벽한 하나의 교훈도 되고 우리 삶에 아주 빛이 되는 그런 그 내용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부분이든지 또 반복해서 공부하든지 그게 이제 상관없는거요.
그래서 이제 여기서는 이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법화경』을 가지고 무한정 우리가 공부하다보니까 낱낱이 중송, 스님들은 이 중송 서울에 가서 가르치는데 중송안해요. 내가, 할 시간이 없어. 참 중송까지 다 낱낱이 속속들이 짚어가면서 자세하게 하는데는 여기 뿐이야. 또 불교TV에도 건성으로 막 번역가지고 대의(大義)만 딱 추려가지고 하지 않습니까? 들어보면 그렇게 하거든요.‘왜 저렇게 뛰어넘는가?’어떤 사람은 찾아와.“스님 왜그리 뛰어넘어요?”그 뛰어넘는 속을 누가 아랴? 몰라. 허허 답답한지 와서 물어 또.
한 자, 한 자 야무지게 짚어가면서 넘어가지않고 그냥 넘어가는게 한 줄, 한 줄이 아까워서 그런거요. 일부러 와서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은 한 줄, 한 줄 넘어가는게 아까워서 그런거라. 그렇게 소중하게 아주 값지게 생각하는거요. 아깝게 왜그렇게 넘기느냐 이거여. 천천히 하나씩 하나씩 짚어가면서 넘어가지. 그래 여기서는 이제 지루할 정도로 짚어가면서 허허 공부합니다.‘그 좀 빨리빨리 넘어가지 뭐 그렇게 꼭답스럽게 저렇게 또 설명한것 또하고 또하고 하느냐?’
그 좀 이제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좀 참고, 또 어떤 사람들은‘하~ 이거 자세하게해서 좋다. 우리같은 머리둔한 사람에게 스님이 딱이다. 그만’허허‘스님공부가 제일 딱 맞다.’그런 사람도 있을 거예요.
|
첫댓글 [부처님의 설법은 한 모습이고 한 맛이며 해탈의 모습이다...如來說法은 一相一味니 所謂解脫相이다] [결국은 일체 것을 다 꿰뚫어 아는 지혜에 이른다...究竟至於 一切種智] [얻은바 공덕은 스스로 깨달아 알지 못한다..所得功德은 不自覺知라]...화풍정 님! 수고하셨습니다.._()()()_
如來知是一相一味之法하나니 所謂解脫相이며 離相滅相이며...고맙습니다. _()()()_
如來知是一相一味之法(여래지시일상일미지법)하나니 所謂解脫相(소위해탈상)이며, 離相滅相(이상멸상)이며, 究竟涅槃(구경열반)인 常寂滅相(상적멸상)이니라. 終歸於空(종귀어공)하나니...고맙습니다._()()()_
_()()()_
그런데 부처님의 참다운 뜻은 악몽이든 길몽이든 꿈깨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그런데 저는 ㅠㅠ_()()()_
_()()()_
_()()()_
_()()()_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석가모니불.나무.석가모니불.나무.석가모니불.나무.묘법연화경.나무.묘법연화경.나무.묘법연화경.부모님의은해을잇지마세요..우주법개의사생육도유정무정.일체중생.이생에.현생에.불법을만나씀니다.성불하십시요.절.절.절.
_()_
고맙습니다-나무묘법연화경-
解脫相 離相 滅相 究竟涅槃 常寂滅相 終歸於空 ............
감사합니다_()_
이미 제대로 잘돼있어. 제대로 잘돼있어. ... _()_
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잘 보았읍니다
우리는 꿈깨는 것 보다는 달콤한 꿈을 꾸기를 바라고 있다
念;기억하는 것
思;생각하는 것
부처님법을 듣고 그대로 수행한 공덕을 중생을 스스로 알지 못한다
_()_
감사합니다._()()()_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2번째 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_()()()_
南無妙法蓮華經 南無妙法蓮華經 南無妙法蓮華經 _()()()_
_()()()_
감사합니다 나무묘법연화경 _()_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