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단경31-1 20040809 329P-1.zip
惠庵 門人 淸峯 淸韻 선사 의역 강설
자성은 - 體(定)인 평등문의 원리로 보면 청정본연하여 단지 중생의 작용 뿐 아니라 부처의 작용까지도 본래 한 물건도 얻을 것이 없는 절대(상대적이 아닌)의 진공묘유(반야)한 것으로 영원불변하는 것과,
차별문인 用의 원리로 보면 인연을 따르는 것으로 청정하나 어지로움을 모두 갖추어 일으켜 36대의 상대법을 내어 함유함으로 항상 대상에 따라 응하여 작용하고 나투므로 고정해 있기만 하지 않고 항상 변화하는 묘유묘용의 온 우주법계의 성품이다.
따라서 무명중생은 치우친 변견으로 한쪽 법에 집착하여 삿된 소견을 일으켜 인과에 따르며, 깨달은 불보살은 일체를 밝은 지혜로 살펴 중도로써 보아 자유 자재하여 걸림이 없는(원만경지, 평등성지, 묘관찰지, 성소작지인 4지 작용을 냄) 것이다.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36 상대법을 만약 쓸 줄 알면 곧 도가 일체 경전의 법을 꿰뚫어, 들고 남에 곧 양변을 여의어서,
자성이 움직이고 작용하고 사람과 같이 말을 함에 밖으로 상에서 상을 여의고 안으로 공하나 공을 여의거니와,
만일 온전히 相에 집착하면 곧 사견을 기르게 되고 만일 온전히 空을 집착하면 무명을 기르게 되느니라.
공을 집착하는 사람은 경을 비방하게 되서 곧바로 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말하나니,
이미 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면 사람이 또한 합당히 말도 하지말아야 할 것이니 다만 이 말이 바로 문자의 相(假說된 모습)인 것이니라.
또 말하기를 "直道는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直道는 不入文字)”하나니 곧 이 세우지 않는다는 두 글자(不立)가 역시 바로 문자거늘,
사람이 말하는 것만 보고(뜻은 모르고) 문득 곧 저를(그것을) 비방하여 "문자에 집착했다”말하니라.
너희는 모름지기 알라,
자기의 미함은 오히려 허용하나 또한 불경(부처님의 말씀)까지 비방할까 보냐?
요컨대 경을 비방하게 되면(誤解) 안 될 것이니 죄의 업장이 무수하리라.
만일 밖으로 상에 집착하여 법(相見)을 만들어 참을 구하며,
혹 도량을 널리 세워서 있고 없는 허물과 근심을 말한다면 이와 같은 사람은 몇겁을 지나더라도 가히 견성하지 못하리니,
다만 들은대로 법(진리)에 의하여 수행하며,
또 백가지 일(萬事)을 사유하지 않는 것으로(공견의 定에 국집하여) 도의 (청정한)성품을 (사견으로)막아 꺼리끼게 하지 말지니라.
만약 설법(이러한 불법의 진리의 말)을 듣고도 닦지 않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뒤집힌 삿된 생각을 내게 하나니,
다만 법을 의지해 수행하여 상에 머무름 없는 법을 베풀지니라.
너희들이 깨달음에 의하여 이것을 설하고 이에 의하여 쓰며 이에 의하여 행하고 이에 의하여 지으면 곧 본래의 종지를 잃지 않으리라.
강설:
이 36 상대법을 바르게 제 때 제 곳에 쓸 줄 알면
도가 일체 경전의 법(바른 이치)을 꿰뚫게 되어(밝게 깨달아 알게 되어) 만사에 양변을 여의어서(치우친 소견을 여의고 중도로써)
본성(반야)의 작용으로써 사람과 더불어 응대함에 밖으로 상(속세의 갖가지 모습)에 있되 상을 여의게 되고(허망한 것에 집착하지 않게 되고)
안으로 공하나 공(비어 없다는 것)에 국집하지 않게되는 것이다.
따라서 상에 집착하면 변견에 치우쳐 삿된 소견을 기르며,
공(空)에만 국집하면 無明을 기르게 되는 것이다.
공에 집착하는 자는 도리어 경의 뜻을 잘못 앎으로써 비방(그릇되게 앎)하게 되는 것이니,
이를테면 "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하는 말에 그 뜻하는 바는 깨닫지 못하고
문자(말)에만 끄달려 아예 문자 그 자체를 써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말도 또한 쓰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문자를 쓰지 않는 다는 말이 바로 문자와 서로(相) 같은 것이며,
"直道는 不立文字"라 하나,
세우지 않는다(不立)는 그것이 또한 문자인 것을 모르고 말(경)만 보고 그 말의 뜻은 깨닫지 못하고 말이나 글 자체를 집착하는 소견을 짓게되는 것이니,
경에서 말씀하는 비어 공하다는 말씀의 뜻을 잘못 알아 일체가 아예 없다거나 공이라는 것에만 국집해서 알면 오류라,
이것이 치우쳐 집착하는 변견인 삿된소견인 것이다.
따라서 경의 뜻이 왜곡되어 비방함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미혹은 그렇다 치고 부처님의 말씀까지 오도하게 되면 그 죄업이 한량없게 되는 것이며,
이렇게 깊은 뜻은 모르고 문자나 언어에만 국집하여
밖으로 상에 집착하여 스스로 자기 소견으로 불법이라는 고집을 세우고 남에게 일러주고
그것으로 참을 구하고 널리 절을 짓고 있고 없는 허물 근심을 말한다면
그 미혹의 업장이 견성을 크게 장애하는 것이라 하신 것이며,
들은 법문(이러한 불법인 진리에 들게 하는 말씀)의 뜻을 바로 알아 법(진리)에 의해서 수행하고 번뇌 망상을 쉬어서 미혹을 더하지 말 것이며,
설법을 듣고도 닦지 않으면 도리어 삿된 소견을 스스로 기르게 될 것이니,
법대로 수행하여 무상주 보시를 기꺼이 할 것이며
깨달음에 의하여 법문을 설하고 쓰고 행하면 불법의 종지를 잃지 않게 된다 하신 것이다.
경문을 읽되 경의 뜻을 깨달아 문자를 스스로 굴려야 하거늘,
글자(말)에 국집해서 글 풀이나하며 글에 굴림을 당하는 어리석은 짓으로 도리어 문자에 매여 자기 스스로의 소견으로 이것이 불법의 진리라는 법을 세워(지어 만들어) 자기를 속이고 남까지 그릇되게 이끌게 됨을 경계하셨다.
만일 사람이 너희에게 뜻을 묻되, 있음을 묻거든 없음을 가져 대하고 무를 묻거든 유를가져 대하며, 범부를 묻거든 성인으로써 대하고 성인을 묻거든 범부로써 대하여 두 도(양쪽)가 서로 因이 되어 중도의 뜻을 나게(깨달음을 이루게) 할 것이니,
너희는 한번 물으면 한번 대답하고 나머지 물음을 한결같이 이에 의해하면 곧 이치(진리의 뜻)를 잃지 않으리라.
설사(예를 들면) 사람이 묻기를 '어떤 것을 어두움이라 이름하는가?' 하면
답해 이르기를 '밝음은 因이요 어두움은 緣이니 밝음이 사라지면 곧 어두운 것이라'하여
밝음으로써 어두움을 드러 내고 어둠으로써 밝음을 드러 내서 오고 감이 서로 인하여 중도의 뜻을 이룰지니라,
나머지 물음도 모두 다 이와 같이 할지니 너희가 후에 법을 전함에 이러함에 의해서 번갈아 서로 가르쳐 주어서 종지를 잃지 말지니라.
강설:
법을 거량할 때는 상대로써 물음에 답하여 물음과 답함을 서로 因으로써 치우침을 파하여서 중도를 깨닫게 할 것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