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교회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제물포항에 첫 발을 디뎠다. 당시 국내 상황은 갑신정변의 여파로 어지러웠다. 그러나 언더우드 선교사는 한양 입경을 감행해 앨런의 제중원 교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아펜젤러 부부는 인천에 머무르며 상황을 살피다가 4월 13일 일본으로 돌아갔다.
6월 20일 다시 한국을 찾은 아펜젤러 부부는 여전히 입경하지 못하고 제물포에 머무르다가 7월 19일 입경했다. ‘내리백년사’를 집필한 홍기표 장로는 이 날을 교회 창립일로 삼았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인천에 머무르며 기도의 단을 쌓은 후 떠난 날이기 때문이다. 1890년 성도 노병일 씨가 자력으로 6칸의 교회당을 건축했으며 1892년부터 본격적으로 교회의 모습을 갖추고 선교활동에 나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천=글·박재형 기자/사진·김용두 기자
충무교회
경상남도 통영시에 처음 교회가 세워진 것은 1905년. 호주 선교사로 내한한 손안로 선교사가 권희순씨 사저에서 송사원 조사와 함께 예배를 드린 것이 시초이다. 첫 예배를 드린 교회는 대회정교회로 지금의 충무교회다. 그러나 1895년 조선조 정삼품 통정대부 김치몽이 고향인 통영에 낙향해 개화에 앞장서면서 사저에 기도처를 세워 이미 복음이 전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충무교회를 시작으로 호주선교부는 1912년 통영선교부를 설치하고 진명학교를 세웠으며 1914년에는 의료선교사 테일러가 이곳에 진료소를 설립해 의료선교 활동을 펼쳤다. 또 1923년 신미애 선교사가 통영 진명유치원을 설립해 유아교육에 헌신했고 진명야학교와 도천야학교를 세워 인재 양성에 노력했다.
통영=글·박재형 기자/사진·김용두 기자
목포 양동교회
목포 유달산 산자락에 세워진 양동교회는 100년 전 건물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교하고 위엄있는 모습을 갖추고 있다. 목포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인 양동교회는 전남지역에서 세워진 최초의 교회이기도 하다.
이 교회는 1897년 유진 벨 선교사와 레이놀즈 선교사 그리고 20여 명의 성도들이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린 것이 시초가 됐다. 그 후 1910년 교인들의 헌금으로 석조 예배당을 건축, 지금의 양동교회가 됐다. 1904년까지 1대 담임목사로 시무했던 유진 벨 선교사는 정명여학교와 영홍학교를 세우는 등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교육에 열정을 쏟으며 신앙인들을 키워나갔다.
양동교회는 목포의 모든 교단이 성령으로 하나될 수 있었던 구심점 역할을 감당한 만큼 시련도 컸다. 지난 1942년 일제의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제직 20여 명과 10대 담임 목사였던 박연세 목사가 검거되는 일이 있었는데 박 목사는 결국 감옥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사진 ①1910년에 세워진 석조건물 예배당 창틀 위에 새겨진 ②현재의 양동교회 예배당 ③글씨대한제국의 년호와 중앙의 태극기 문양
목포=글·이미나 기자/사진·김용두기자
목포 선교 100주년 기념비
107년의 역사를 지닌 목포 양동교회에 들어서면 오른편에 검은색 돌로 만들어진 기념비를 발견하게 된다. ‘이곳은 목포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 맨 처음 터’라고 기록이 된 이 선교 기념비는 지난 1986년 목포시내의 교회가 연합으로 부활절 예배를 드린 후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며 세운 것이다.
목포=글·이미나 기자/사진·김용두 기자
박화성 문학기념관
사적 제289호인 목포문화원 안에 아담하게 자리한 박화성 문학기념관은 1900년 초에 건축된 만큼 오랜 역사를 간직한 건물이다. 일제시대에는 목포의 일본영사관으로도 사용되었다는 이 곳은 유달산의 노적봉 자락과 어우러져 멋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문학기념관에는 한국문단 최초의 여류작가인 소영 박화성 선생의 문학과 생활유품 18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소설가 박화성은 근대문학의 태동기인 1925년, 문단에 등장한 이후 60여 년의 작가생활을 통해 수많은 기독교 정신의 작품을 남겼다. 특히 유아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으로, 그는 책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사람들에게 전해주었다. 그는 하수도공사, 홍수전후, 백화 등의 작품을 통해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가난과 핍박에 시달리는 농민들과 노동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했다.
목포=글·이미나 기자/사진·김용두 기자
한국기독교박물관
숭실대학교 교정에 있는 한국기독교박물관은 고 김양선(숭실대) 교수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탄생했다. 기독교 박물관은 1948년 서울 남산에 위치한 전 조선신궁 터에 개관됐으나 한국전쟁 때 유물 일부가 불에 탔다. 숭실대에 마련된 기독교 박물관은 1967년 김 교수가 모교에 유물을 기증하면서 학교 부설기관으로 개관됐다.
이후 1997년 개교 100주년을 기념해 방습 및 방화 설비를 보완, 건물을 신축하면서 다시 문을 열게 된 것이다. 박물관은 한국기독교사실과 근대화 및 민족운동사실, 고고미술실, 숭실역사실 등 4개실로 구성돼 있다. 특히 한국기독교사실에는 한국기독교 역사의 전사(前史)에 해당하는 경교의 역사부터 초기 천주교 신앙의 수용과 박해, 개신교 도입과정 등 한국의 기독교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초기 교리서와 성경, 각종 서적 등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글·박재형 기자/사진·김용두 기자
▶사진설명(왼쪽부터) ①한국기독교 박물관 ②한국교회 초기 찬송가를 묶은 찬성시 ③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1900년대 초반 제작된 그림전도지 명심도 ④언더우드가 1897년 창간한 순한글판 기독교주간신문인 그리스도신문 ⑤1887년 만주에서 출판된 한국개신교 최초 한글 성서 누가복음
한경직기념관
한경직기념관은 고 한경직 목사의 목회정신을 지속적으로 계승하기 위해 숭실대학교 내에 지어졌다. 1902년 평남 평원군 공덕면 간리에서 한씨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한 목사는 숭실전문학교 재학 시절 구미포 해변을 혼자 걷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주의 종으로 살아갈 것을 결심했다. 그가 개척한 영락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한 피난민들을 돌보는 것으로 시작해 지금은 대한민국 전역에 세워져있다.
한 목사는 복음전도뿐 아니라 선교사들과 함께 전쟁 미망인과 고아를 돌보는 선명회(현 월드비전)를 조직, 보육원 모자원 양로원 등을 세웠다. 큰 교회를 섬겼으면서도 결코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고 검소한 그의 성품에 많은 이들이 감화를 받았다. 90세가 되던 1992년 그는 종교 분야의 노벨상이라는 템플턴상을 받았고 새 천년의 첫 고난주간이었던 2000년 4월 19일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의 신앙 유산은 지금도 한국교회의 자랑이자 사표가 되고 있다.
글·박재형 기자/사진·김용두 기자
광혜원
1884년 7월 고종황제는 일본에서 들어온 매클레이 선교사에게 ‘학교와 병원’ 사업에 국한해 선교를 허락했다. 이에 따라 미국 선교부가 먼저 착수한 사업은 의료사업. 1884년 10월 미국 공사관 소속 의사로 우리나라에 온 앨런은 갑신정변 때 부상당한 민영익을 치료, 고종과 명성황후 등의 신임을 얻었다.
앨런은 갑신정변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처형당한 홍영식의 재동집을 하사받아 1885년 4월 광혜원 즉, 제중원을 세웠다. 제중원은 우리나라에 세워진 최초의 서양식 근대병원일 뿐 아니라 선교 전초기지로 활용됐다. 언더우드와 스크랜턴, 헤론 등의 선교사는 물론 여의사로 처음 입국한 엘러스 역시 제중원을 거쳤다. 장로교 선교부는 1887년 제중원을 재동에서 남대문 안쪽의 구리개로 옮겼다. 1894년에는 에비슨에 의해 운영되다가 미국인 실업가 세브란스가 기부한 건축기금으로 남대문 밖에 새 건물을 마련해 이전했다. 이 병원은 후일 세브란스병원으로 발전했다.
글·박재형 기자/사진·김용두 기자
한서교회
“일하러 가세 일하러가 삼천리 강산 위해”라는 후렴구를 가진 찬송가 371장의 가사를 쓴 사람이 독립운동가 한서 남궁억 선생이다. 3·1운동 뒤 일제의 압제가 심해지자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나 미국으로 옮겨갔지만 한서 선생은 고향인 강원도 홍천군 모곡리로 돌아와 한서교회(당시 모곡교회)를 세우고 무궁화를 심었다.
한서 선생이 새벽마다 올라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도했던 유리봉에는 현재 묘소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유리봉에서는 200여 가구의 모곡리가 한눈에 보인다. 왼편으로 산밑을 휘감아 흐르는 강이 아름다운 경치를 이룬다. 한서교회 옆에는 무궁화 묘포장이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
글·박재형 기자/사진·김용두 기자
광희문(光熙門)
한국교회의 역사는 그야말로 피로 점철된 박해의 고난기였다. 단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매를 맞아 숨이 끊어졌고 목이 잘렸다. 중구 신당동 을지로 7가에 있는 광희문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었다. 수없이 되풀이되는 박해의 칼바람은 서울과 수원, 용인 등 인근 지역의 교우들을 도성 안으로 끌고 들어왔고 이들은 말할 수 없는 고문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 끝내 이를 거부함으로써 가차없이 치명의 길을 가야 했다.
장충단에서 한강 사이의 남소문(南小門)이 없어진 뒤 북쪽의 수구문(水口門)을 일컬어 광희문이라고 불렀다. 본래 수구문은 서소문과 함께 도성 안의 시체를 성밖으로 운반해 내던 곳으로 송장 혹은 시체의 문이라는 뜻에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렸다. 도성 안에서 참수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은 짐짝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이곳에 버려졌다. 살아서 이 문을 들어섰던 이들은 시체가 되어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채 이 문을 나와야 했다.
글·박재형 기자/사진·김용두 기자
새남터 순교지
마포와 이웃하고 있는 새남터는 절두산 순교성지와 함께 목숨으로 신앙을 지킨 신앙선진들의 선혈이 흐른 곳이다. 사남기(沙南基)라고도 부르던 이곳은 조선 초부터 군인들의 연무장(鍊武場)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후에는 국사범(國事犯) 등 중죄인의 처형장으로도 사용되었다.
1456년(세조 2년)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을 처형한 것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을 이곳에서 처형하였는데, 특히 1801년(순조 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이후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 등 교회에 대한 탄압이 있을 때마다 신앙을 지키려는 교인들을 처형한 곳으로 유명하다. 여기에는 조선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과 사제로서 조선에 처음 입국한 중국인 신부 주문모, 한국에 들어왔던 최초의 프랑스인 주교 앵베르 등 11명의 성직자와 현석문 외 많은 교인들이 포함되어 있다.
글·박재형 기자/사진·김용두 기자
유진 벨 선교사 기념교회
1895년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로 한국에 온 유진 벨(Eugene Bell,한국명 : 배유지)은 나주,목포,광주 등 주로 전라도에서 활동하며 많은 학교와 병원, 교회를 세웠다. 유진 벨 선교사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유진 벨 선교사 기념교회는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수피아여자고등학교 안에 위치해 있다. 초기, 이 건물은 건축 헌금 기증자의 이름을 따 코넬리아 커티스 기념교회라 불렀다.
그러나 유진 벨 선교사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유진 벨 선교사 기념교회로 명칭을 변경하게 됐다. 1923년 건축을 시작해 이듬해 완공된 이 교회는 반지하 건물로, 아래층은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학교와 선교사 숙소로, 윗층은 주일 오전 사역을 마친 선교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 예배 드리는 장소로 활용됐다.
광주=글·오정선 기자/사진·김용두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