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6월 26일
제목 : 영원한 민족의 횃불, 백범 김구 암살
분류 : 정치
지역 : 국내
암살 직후의 백범 김구 선생의 시신
''현시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삼천만동포와 손목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1949년 6월26일 정오 조금 시각. 초여름 햇살이 눈부시던 일요일 서울 서대문 경교장 2층 거실에서 네발의 총성이 들렸다. 육군소위 안두희(당시 32살)가 쏜 총탄에 백범 김구는 머리를 책상 위에 얹고 손은 테이블 한 모서리를 쥔 채 쓰러졌다. 사건 뒤 체포된 안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곧 15년형으로 감형되고 50년 7월 소위로 복귀했다. 그는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대령까지 진급했으나 이승만 정권 몰락 뒤 뜻있는 이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암행을 계속했다. 특히 김용희, 곽태영, 권중희 등은 은신 중인 안을 집요하게 찾아내 역사적인 증언을 이끌어내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애초 단독범행이라던 안은 일부 배후를 털어놓기는 했지만 계속 말을 뒤집어 진상규명작업을 혼란에 빠트리다가, 96년 10월23일 버스기사인 박기서의 습격을 받아 숨졌다. 선생님이 안두희 총탄에 쓰러진 것과 거의 동시에 서대문서 경비주임이 경교장으로 뛰어들어왔어요. 그리고 잠시 뒤 군복차림의 정체불명 청년 4~5명이 들이닥쳐 안을 지프에 태워 어디론가 데리고 갔습니다. 암살사건 당시 백범의 수행비서로 현장에 있던 선우진(77)씨는 31일 범행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는 경찰과 군 등 당국이 이미 선생의 암살 작업을 주도면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金九先生殺害의 內幕
백범선생살해진상규명투쟁위원회, 1961. 4. 22
老革命家는 이렇게 쓰러졌다.
''三八障壁을 베고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통일조국만을 세우겠다'' … 이렇게 절규하던 노혁명가 백범 김구선생을 잃은 지도 벌써 13년. 一人獨裁에 정면으로 항거했고 民族의 自主統一을 웨쳤다는 이유로 政敵의 陰謀에 쓰러진 백범선생. 김구선생살해범은 검찰에 연행되었으나 배후의 진실은 아직 들어나지 않고 있다.
독재 치하에서 13년간 곰팡이 쓸도록 들어나지 않은 [惡의 眞相]을 우리 鬪委는 제2공화국 지붕 밑에 공개한다. 독재를 맨주먹으로 끊어뜨린 그날의 4월은 아직도 時點을 차지하고 있다. 革命精神式은 4월에만 있은 것이 아니고 13년 전에도 살아 있었다.
吳炳順, 韓京一(敬溢), 朴潤根, 獨孤錄成, 鄭益泰. 韓國相, 韓國榮, 李春翼, 安斗熙 등 9명은 김구선생을 살해할 목적을 품고 4282년 6월 23일 2대의 찝차에 분승 - 경교장 앞을 배주하면서 집단습격의 때를 노렸다. - 適期를 얻지 못한 일당들은 지휘자 오병순의 명령으로 일단 행동을 중단, 서울시내 中央中學 정문 앞 10번지에 있는 일당들의 密會巢窟로 돌아가 다음 대책을 세우고 이날은 해산했다.
다음 대책의 내용은 이렇다.
김구선생이 6월 25일 建國實踐養成所 11기 개소식에 참석하기 위해 공주로 간다는 정보를 입수, 그 기회를 노리기로 결정했다. 일당은 6월 25일 路上殺害를 꾀하려고 洪鍾萬(일당에 보강한 자)의 지휘 밑에 권총, 단기관총 등을 가지고 헌병 대위, 중위, 소위 등의 계급장을 달았다. 일당(10명)은 2대의 찝차에 분승, 수원·오산간 餠店고갯길에서 김구선생 일행의 승용차를 노렸다.
공교롭게도 공주 경찰 당국의 집회 불허로 김구선생 일행은 공주행을 이미 중지했었으므로 일당의 두 번째 살해계획도 헛탕이 되고 말았다.
두 번째 살해 실패의 보고를 받은 당시 砲兵司令官 張銀山은 크게 화를 내며 어떠한 일이 있을지라도 다음날인 26일에는 必殺하도록 명령했다. 집단행동에 실해한 후 전략을 바꾸어 單獨殺害計劃으로 들어갔으므로 안두희를 제외한 8명의 일당들은 세 번째 계획은 깜쪽같이 몰랐다. 예정표대로 6월 26일 안두희 단독으로 경교장에 침입, 김구선생습격살해는 뜻을 이루었다. 살해 비밀이 샐까 두려워 일당 중 5명을 즉각 영등포에 있는 포병사령부에 3일간 구금했다. 그후 행동대원들은 군부 장교와 경찰 간부 등으로 등용했다.
[기타의 사실]
(1) 金泰善은 당시 서울시경찰국장으로 있으면서 金志雄을 통해 前記 행동대원에게 금품을 주었다.
(2) 金炳三(당시 憲司 行政課長)은 사건 당일 상오 10시 45분 비상소집령을 내렸다. 저격시간은 (12시 34분)이였다.
(3) 당일 헌병사령관 張興 대령은 개성에 있는 선산에 성묘갔다. 하오 7시쯤 귀경, 곧 남산 의무실로 달려가 범인 안두희를 보니 좋은 침대에 누어 우대받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래며 분격했다. ''저놈 중대 범인인데 누가 저렇게 했느냐? 당장 지하실 감방으로 잡아 가두라''고 호령하자 부하들은 ''부사령관의 명령입니다''고 대답했다. 다시 격노한 사령관은 ''사령관이 높으냐? 부사령관이 높으냐?''하고 야단쳤다. 범인 안두희는 지하실로 끌려갔다. 잠시후 이번에는 부사령관이 또 나타나 ''안두희는 어디 갔는가?''하며 노발대발. 범인 안은 지하실에서 침대로 되돌아왔다. 극적인 의무실이었다.
前略
''나는 김구를 죽였는데 공작금도 안주는 개새끼 이승만 운운'' ''양구에 있는 두희형에게 가면 몇 천만환이도 준다 운운''
白凡金九先生眞相糾明鬪爭委員會
委員長 金昌淑
呼 訴 文
백범 김구선생을 살해한 민족반역자 안두희를 애국자로 명명한 자 그 누구이었던가? 이제 그 진상이 백일하게 드러날 날은 하루 하루 다가오고 있다. 70평생을 異域風霜에서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자유를 찾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오신 백범 김구선생이 해방된 조국 땅에 돌아와 갈라진 강토를 다시 잇고 나누어진 겨레를 한데 모아 남북이 통일된 완전자주독립국가를 세우고 자손만대에 남에게 욕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 주시려다가 흉한의 손에 쓰러지신지 벌서 12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동안 反逆의 大罪를 범한 안두희란 자는 오히려 거리를 활보했고 致富豪華하였건만 그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었음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는 두말할 것 없이 그 배후에 집권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선생이 귀국하시기에 앞서 멀리 상해에서 조국강산을 바라보시며 ''이 겨레의 나갈 길이 순탄치 않구나!''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우리의 궛전에 사라지지 않었건만 우리들을 이 땅에 남겨 놓고 가시게 된 것은 선생이 조국 땅에서 어떠한 외국의 권력도 물러가고 두개의 정부를 만들지 말라고 웨쳤던 까닭이다. 선생이 흉변을 당하시던 날 그 시간 전에 벌서 헌병들은 경교장을 포위했고 총성과 함께 달려든 헌병들은 검사의 현장검증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서대문경찰서장의 경교장 입장을 거절하고 범인 안두희는 애국자로 헌병사령부 의무실 침대에 높이 모셨던 것이다.
선생의 비보를 들은 국민들이 전국적으로 물끓듯 일어나지 않었던들 범인 안두희는 감옥에 조차 가지 않었을 것이다. 怒濤와 같이 밀려드는 겨레의 통곡소리에 낙담한 집권자들은 선생을 살해해 놓고 국장을 하자고 우겨대는 한편 대통령 국무총리를 비롯한 각 기관장으로 하여금 경고문 성명서 담화문 등을 발표하여 안두희의 범행을 애국적 행동인양 합리화 하면서 軍裁에서는 虛僞調査書를 작성하여 이 어마어마한 천인공노할 대사건을 단 4일 동안에 결심하고 不法裁判을 했었던 것이다. 국민의 여론이 두려워 종신형을 언도는 하였으나 그 신변이 自由 自在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일년도 못되어서 減刑했고 重要機關 文官으로 특채할 뿐만 아니라 刑免除 處分이라는 陰凶한 作亂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일개 匹夫를 죽였어도 살인범으로 사형에 처하거늘 하물며 위대한 애국자요 민족의 태양인 백범 김구선생을 살해한 자를 사면한다는 것은 민족의 이름으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이승만독재가 이렇게 하기를 한두번이 아닌 죄과를 범하고 민족을 塗炭과 飢餓에 몰아넣고 마지막에는 어린 학생들의 鮮血을 뿌리게까지 하지 않었던가. 이승만역도들의 죄악이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될 날이 오고야 말 것을 예측한 간악한 무리들이 이승만을 도피케 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저지른 죄과는 이제부터 폭로될 것이며 그와 동조했던 공범자들의 마각도 들어갈 날이 다가오고 있다.
작년 6월 26일 선생이 가신 지 11년만에 그동안 한 번도 자유로히 갖어볼 수 없었던 追悼祭를 올렸다. 억수같이 퍼붓는 험궂은 날씨에도 추도의 인파는 효창공원을 메웠고 悲憤 切痛한 통곡소리 강산을 뒤흔들 적에 우리는 스스로 결심한 바가 있었다. 이 겨레의 나갈 길이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우리는 그 즉석에서 白凡金九先生殺害眞相糾明鬪爭委員會를 조직하고 결의문을 채택한 후 구슬피 나리는 비를 맞아가며 시가로 ''데모''행진을 하였고 뒤이어 진상규명을 당국에 요구하였으나 당시 과도정부 허정내각은 이를 묵살하고 말았던 것이다.
제2공화국이 수립된 후에도 계통당국에 그 조사를 요청했고 {弑逆의 苦悶}이라고 하는 간행물에 의한 名義毁損罪로 제소하여 법정투쟁을 전개하였으나 범인 안두희를 수사중이라고만 하면서 즉시 立件取扱치 않고 5·6개월을 끌어 오다가 종내에는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訴狀을 기각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본 투위는 그 배후관계를 조사하기 시작하여 무려 10개월 동안 血鬪한 끝에 비로소 그 全貌를 파악하기에 이르렀고 안두희의 소재를 탐색한 후부터는 그를 연행하는 날까지 시종 그 주위를 지켰던 것이다. 우리는 범인 안두희의 처단은 물론이려니와 그 배후를 철저히 규명하여 민족의 앞에 斷罪함으로써 후일에 다시는 민족과 국가를 망치는 逆徒가 나지 않도록 하자는 데서 오히려 身元을 보호해왔던 것이다.
그러던 중 4월 17일 하오 돌연 안두희가 종로거리에 나타나 본 투위 간사이며 한국독립당 조사위원회의 김용희 동지와 마주치게 되자 이를 추격한 끝에 드디어 극적인 연행을 하고야 말았다. 당국에서 잡지 못한 안두희를 검찰에 인계하고 진상규명을 강력히 요청하였으나 아직도 정식 구속조차 집행되고 있지 않은 것은 民族的 公憤을 다시금 폭발케 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직면한 본 투위 위원장 김창숙옹은 18일 상오 긴급회의를 한국독립당 사무실(종로 2가 장안빌딩 206호실)에서 소집하고 그 진상이 규명될 최후의 일순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하는 한편 즉각 대표를 선출하여 윤대통령, 장국무총리, 곽민의원의장, 현국방장관, 이검찰총장을 역방하고 그 진상규명을 요청하였으나 형식적인 법리론에만 구애하여 아직도 단안을 못 내리고 있는 실정에 있다.
4·19를 혁명이라 하여 이승만을 내쫓고 그 일당을 엄벌하는 이 마당에 있어서 불법조처할 안두희를 어찌하여 재심할 수 없단 말인가? 원래 본건은 이승만이 안두희의 범행을 정당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사전모의로 그 진상을 전부 陰蔽하고 범인을 애국자로 대우하면서 그로 하여금 허위진술을 시키고 그것을 근거로 捏造處理한 것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알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불법재판이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그러한 이승만의 반민족적인 살인행위를 합법화시키려는 것은 고의로 민족정기를 말살해 버리려는 것밖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만일에 이 문제가 민족정기와 국민윤리에서 이탈하여 그 진상을 규명하지 않고 넘어간다면 앞으로의 삼천만은 모두 국가와 민족을 저버리는 길로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본 투위는 각 정당사회단체의 이름으로 전 민족 앞에 호소하여 부정과 불의에 항거하고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코저 단호한 전 국민적 투쟁을 통하여 목적을 달성코저 하는 바이다.
조국만을 사랑하시던 백범 김구선생의 그 거룩한 이념과 고귀한 정신은 아직도 가슴속에 깃들어 있다. 북쪽 하늘을 바라보시며 삼팔선을 넘어 가실 때 ''이북 동포도 내 동포요, 이남 동포도 내 동포인데 분열하면 民族相殘의 流血로 이 강산을 悲慘하게 만들 것이고, 합하면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하시던 그 말씀이 이제 우리들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겨레여! 다같이 뭉쳐 한마음 한뜻으로 선생의 유지를 받들고 민족정기를 다시 살리자. 그러기 위해서 안두희 배후의 정치적 음모를 철저히 규명하려는 본 위원회에서 결정한 투쟁방침에 따라 다같이 공동투쟁을 전개할 것을 전 민족 앞에 호소하는 바이다.
4월 13일 동아일보에 보도된 안두희의 자백(?)과 14일 문화방송과의 인터뷰는 백범암살사건을 다시 국민적 관심사로 부각시켰으며, 사건의 배후를 밝히는 데 ''어느 정도'' 의미있는 단서를 제공하였다. 여기서 ''어느 정도''라고 표현 한 것은 그간 추적 정리되어 온 바에 비추어 안두희의 증언은 대단히 부분적이며, 안두희 본인의 언급도 이전의 증언들과 사실관계에서 상충하는 바 없지 않아 그 진실성이 다소 의문시되기 때문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이번 안두희의 증언 이전에도 백범암살사건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증언과 정리가 있었다. 4·19 직후 고정훈의 폭로, 1974년 홍종만의 고백, 장흥의 [백범암살은 신성모의 지령이었다] 『월간조선』 1984.8) 등의 증언과 손충무([이것이 진상이다] [암살작전]), 이경남([백범 김구는 누가 죽였나]), 김재명([안두희의 배후를 벗긴다] 『월간경향』, 1987.5) , 김진배([김구암살의 막후 ''8·8구락부''] 『옵서버』, 1990.5) 등의 추적·정리가 있다. 또한 안두희도 감옥에 있을 때 『시역의 고민』이란 수기를 썼으며, 그후 1984년 오효진과의 인터뷰에서([안두희의 고백] 『월간조선』 1984.7, 8월호) 사건의 상당 부분을 고백(?)하였다.
이상의 증언과 정리는 다소의 불일치는 있지만, 이를 바탕으로 백범암살사건의 주요한 윤곽을 잡는 데 특별한 어려움은 없다. 다만, 그것이 해당 당사자들로부터 ''실제'' 확인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아쉬움과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번 안두희의 증언도 대체로 사건의 단서를 전면적으로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미흡한 수준에서 조금씩 확인해주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다만 안두희의 이번 증언은 두가지 점에서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하나는 ''이심전심''의 배후로 장택상·김창룡·김태선·노덕술·최운하 등의 이름이 거명한 것이다. 이들은 모두 정보계통의 군인이나 경찰들이란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두번째 특징은 미국정보원의 관련 문제인데, 권중희와의 증언에서는 상당 수준 구체적으로 언급했다가 문화방송과의 인터뷰에서는 다소 애매하게 부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가 관심을 두는 부분은 이 두번째 문제이다. 미국과의 관련은 암살사건 자체도 문제이지만, 민족주의자로서 김구선생의 전반적 면모를 밝히는데 대외관계는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안두희, "미국에 ''백범제거계획''자료 있을지도"
우선, 암살사건과 미국의 관련에 대한 안두희의 증언을 보면, 그의 다른 부분에 대한 증언과 마찬가지로 ''조금씩 다르게 그러나 조금씩은 진전된'' 언급을 하다, 4월 14일 문화방송과 인터뷰에서는 애매하게 부인하였다. 그러나 안두희는 1984년 오효진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백범에 대한 인식을 언급한 적이 있다. 그는 인터뷰에서 "당시 서북청년회회원들이 미국의 정보원으로 많이 활약하였으며, 따라서 미국사람들이 백범을 싫어하는 것을 알았다"고 밝혔다. 즉 미국이 백범의 죽음을 원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만 자신과의 구체적 관계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안두희는 흥미롭게도 "언젠가는 미국의 비밀자료에서 ''백범제거계획'' 같은 것이 나올 지 모른다"고 밝히고 있어 주목된다. .
그러나 안두희는 작년 권중희에 의해 강요된 자백(?)에서 자신이 직접 OSS 요원이었다고 밝힌 데 이어, 이번에는 경무부장 조병옥과 수도청장 장택상의 소개로 OSS의 한국책임자 모중령을 소개받았고, 그로부터 ''백범암살의 암시''를 받았다고 진전시키고 있다. 이 증언은 다소 부정확한 것인 데 그 점은 뒤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자. 아무튼 안두희는 미국인의 개입을 조금씩 언급하면서 ''백범암살계획''과 같은 비밀자료가 나올 지 모른다고 밝히고 있지만, 설령 자료가 있다 하더라도 당분간 공개되기는 힘들 것이다. 『미외교문서(FRUS)』에 의하면 백범 암살사건과 관련하여 주한미대사 무쵸가 미국무성에서 보낸 전문은 세가지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 암살사건에 대한 단순한 보고로 알려져 있는 1949년 6월 26일자 전문 779호와, 암살사건에 관한 이승만대통령의 성명을 보고한 6월 27일자 전문 785호는 공간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백범암살사건에 관해서는 1949년 6월 27일 오후 5시발 2급·지급(CONFIDENTIAL PRIORITY) 전문이 유일하게 『미외교문서』에 수록되어 있다.
미대사의 공식보고인 이 전문에는 예상한 바와 같이 특별한 내용은 없다. 전문은 ''공식 비공식적 여러 정보에 의한 사실''로 안두희는 한독당원이며, 암살동기는 백범의 정치노선(북한과의 합작과 대한민국에 대한 지지 거부)에 대한 불만이라 밝히고 있다. 요컨대 암살사건을 당내 노선대립의 일환으로 보고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그 다음날 국방부의 수사 중간발표로 이어졌으며, 그후 정부의 공식입장으로 정착되었다는 사실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전문은 또한 김구선생이 국민적 추앙을 받고 있으며 암살사건에 대해 모든 사람이 비난하고 있어 장례식에서 혼란이 예상되나, 한국정부는 경찰과 군대의 주도면밀한 준비로 충분히 수습할 수 있을 것으로 밝히고 있다. 암살사건 하루만에 장례식상황까지 비교적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어 주목되는 대목이다.
미국자료의 상황이 현재 이러하기 때문에 암살사건에 대해서 안두희는 [백범제거계획] 같은 비밀자료에 기대지 말고 아는 범위 내에서 정확하게 증언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것이 진상에 접근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안두희가 속한 미군정보기관은?
여기서 안두희의 그간의 증언을 다시 살펴보면, 오효진과의 증언에서 밝혔듯이 안두희가 미국의 백범에 대한 입장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권중희씨에게 애기한 ''자신이 OSS요원'' ''OSS 한국담당 중령'' 등은 부분적인 착오일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OSS는 해방직후 1945년 10월초 바로 해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두희의 정확하고 진전된 증언이 필요한 데, 이를 위해서 먼저 미국의 정보기관과 미군정의 정보기구를 간단히 살펴보자.
미국의 정보기관은 2차대전 때 창설되어, 전후 CIA로 정비될 대까지 다소의 개편이 있었다. 이를 간단히 정리하면, 정보조정국(OCI : 1941) → 전략사무국(OSS : 1942) → 중앙정보그룹(CIG : 1945.10) → 중앙정보국(CIA : 1947. 10)으로 변화되었다. 한편, 해방후 한국에 진주한 미육군 24군단은 자체의 정보기구와 한국인 경찰기구를 수립하였다. 당시 미군 정보기구으로는 G-2와 CIC가 대표적이었다. 『G-2 약사』, 『CIC 역사』 등의 문헌이 남아 있어 G-2와 CIC의 구성과 인원을 대체로 파악할 수 있다. 먼저, 미육군 24사단에는 일반참모부(General Staff)를 의미하는 G-1에서 G-5까지의 참모부가 있었으며, 그 중에서 정보를 담당한 것이 이른바 ''G-2'' 였다. G-2의 초대책임자는 ''세실 N 니스트 대령''이었으며, 그 밑에 미군장교와 사병, 미국인 민간요원 그리고 한국인들이 있었다. 또한 미 24군단에는 한국진주 초기 G-2와는 달리 별도의 정보기구인 CIC(방첩대)가 있었다. 알렉산더 스위프트 대령이 초대책임자였던 방첩대는 진주초기에는 7사단에 배속되었으나, 업무의 효율화를 위해 45년 9월 20일자로 G-2 산하로 편입되었다. 이밖에도 미군정은 조병옥 경무국장, 장택상 수도청장을 수뇌로 하는 한국인 경찰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군정시대 주요 정보·수사기관은 G-2, CIC, 경찰 등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으며, G-2나 CIC 등 미군정보기관은 한국인으로 구성된 경찰조직과 긴밀한 협조관계에 있었다.
백범사건과 미군정의 관련을 밝히기 위해서는 안두희가 미군정보기관 어디에 소속되어 있었는지 여부와, 조병옥 장택상의 소개로 만났다는 미군 중령의 소속(CIC, G-2, CIA)과 지위, 무엇보다 이름을 밝혀야 할 것이다. 이와 아울러 조병옥과 장택상이 미군중령을 소개해준 시기와 경위도 보다 자세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백범과 미군정과의 갈등
백범과 미국의 관계를 암살사건에만 국한하여 볼 때, 안두희 등 관련자들의 증언이 더 이상 제시되지 않은 한 현재 수준을 넘어서기 힘들다. 그러나 백범과 미국과의 전반적 관계는 앞으로 중요하게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이 문제는 암살사건의 배경과는 별도로 해방 후 백범사상의 추이와 한국 현대 민족주의의 이념정립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백범을 비롯한 임정요인들은 미국인과 상당한 정서적 차이가 있고, 정치행위의 패턴 또한 다르지만, 해방이후 서로 대립적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백범과 미군정은 해방이후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인 국가건설의 근본노선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었으며, 이로해서 점차 갈등과 대립의 관계로 변화하였다. 해방직후가 차이를 내재한 우호적 관계였다면, 1945년말 이후 1947년까지는 과도정권수립문제로 임정법통론과 군정강화론이 갈등을 빚던 시기, 1948년 이후는 정부수립문제로 통일정부와 남한단정이 대립하던 시기로 요약할 수 있다.
일제하 백범과 임정은 미국과 친밀한 중국 국민당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1945년 임정 산하의 광복군은 OSS와 합동작전을 위한 훈련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전에 투입되기 전에 일본이 항복하였고, 해방을 맞아 백범은 1945년 9월 2일 [14개조 당면정책]을 발표하였으며, 그 중에서 핵심은 임정법통론의 국가건설방안이었다. 임정법통론의 구체적 내용은 1) 중경임시정부의 정권 접수, 2) 임정주도의 민족대표회의 소집에 의한 과도정권 수립, 3) 선거에 의한 정식 정부 수립의 3단계로 요약할 수 있다. 따라서 임시정부자격을 유지하면서 국내에 들어가는 것이 임정법통론을 펴기 위한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미군정은 국내 다양한 정치세력을 미군정주의에 묶어 세우려고 이승만을 귀국시켰으나 별 효과가 없자, 우익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는 임정요인들의 귀국을 극도의 보안 속에 추진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임정법통론에 대한 인정, 그 첫걸음으로서 임정자격으로의 귀국을 단호히 반대하였다. 때문에 미군정은 11월 19일 엄밀히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며 귀국후에도 ''정부로서 활동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요구하여 백범으로부터 받게 된다(HUSAFIK 2권).
임정법통론이 첫걸음부터 미국에 의해 저지되었다는 것은 앞으로의 사태진전에서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백범은 귀국 후 정세를 관망하다가 모스크바삼상회담에 대한 반대운동과 더불어 [國字 1호] [國字 2호]의 포고령을 발표하고 임정의 정권접수를 선포하였다. 미군정은 이를 ''쿠데타''라 규정하고 초기에 제압하였으며, 하지는 백범을 불러 질책·경고하였다. 미군정은 채 자리잡히기 전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 해서 미군정은 백범과 임정을 경원시하였고, 미군정을 지지해준 경찰을 더욱 신뢰하였다.
장덕수 암살사건 계기로 백범·미군정 대립임정법통론의 1단계는 좌절되었지만, 좌익이 우세한 상황에서 우익들은 전반적으로 임정을 지지하고 있었다. 즉 임정은 미군정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거부되었지만 다수 우익에게는 사실상 인정받고 있었다. 따라서 김구는 임정주도하에 정권수립의 2단계로 우익 정당 사회단체 대표와 지역대표가 포함된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고 이를 과도정권수립을 위한 입법체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승만의 협조와 굳펠로우의 ''재치있는 노력''으로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을 하지사령관 개인의 자문기관인 남조선 민주대표의원으로 전환시켜 버린다. 백범을 비롯한 임정계열은 "임정을 알로, 비상국민회의를 유충으로, 민주의원은 번데기로 여기며 여기서 장래의 정부인 나비가 나올 것"으로 기대했지만(FUSAFIK 2권), 미군정은 임정과 비상국민회의를 환골탈퇴하여 미군정의 기반확대에 동원하였던 것이다. 김성숙선생이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의 민주의원 편입을 [오호 임정30년 만에 해산하다](『월간중앙』 1968년 8월)라고 통탄 한 것은 이러한 연유 때문이었다.
임정을 기반으로 국가를 건설하려는 백범진영과 미군정의 확대강화를 우선시하는 미국의 갈등은 심상치 않았으나, 당시 좌익에 대한 비슷한 입장 등 공통성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미군정과 백범진영의 관계는 대립이라기 보다는 갈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1947년 후반기 이후 미군정 및 단정세력과 남북합작을 주장하는 백범진영의 대립은 국가체제의 차이가 개재된 근원적인 대립으로 비화되었으며, 그것을 증폭시킨 것은 장덕수 암살사건에 대한 미군정과 경찰의 백범에 대한 ''전쟁과 같은 공격''이었다. 당시 한민당 정치부장이며, 미군정과 가장 절친하며, 유엔에 가장 우호적인 정객의 한 사람인 장덕수의 죽음은 매우 중요한 시기에 일어난 ''악재''였다. 유엔에서 한국문제 처리를 고대하고 있던 미군정은 유엔임시위원단의 입국과 안전한 활동을 보장해야할 중요한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라 단호한 태도를 취하였고, 조병옥 장택상 등 한국인 경찰수뇌부도 한민당과 가까왔기 때문에 매우 공격적으로 수사를 진행하였다. 미군정과 경찰의 장덕수사건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그 이전 송진우·여운형 암살사건의 배후에 대한 소극적 입장과는 뚜렷하게 대비되는 것이었다.
하지사령관은 암살범을 미국인에 대한 공격을 주로 처리하는 군사재판에 회부하였고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극형에 처할 것 임''을 선언하였다. 경무부장 조병옥은 하지사령관이 말한 군사재판이란 1946년 10월 대구폭동에 대한 군사재판과 같은 비중임을 밝혔다.
남북합작 주장으로 미군정의 표적돼
미군정장관 하지는 여운형암살사건의 배후도 백범으로 내심 지목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조병옥은 범인의 배후가 4단계라고 밝혀 그 정치적 파장을 예고하였으며, 장택상은 김석황의 검거에 이어 배후로 김구를 은연중에 지목하였다. 결국 뚜렷한 증거도 없이 독립운동의 전통을 이은 유일한 대의기관으로 자부하던 임정계의 국민의회는 사실상 불법단체화되고 간부들이 다수 구속되었으며, 미대통령 트루만의 메세지에 의해 김구는 군사법정에서 아들과 같은 미군중위에게 취조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1948년에 들어와 단정수립이 표면화되자 백범은 2월 10일 [삼천만동포에게 읍고함]이란 성명으로 ''해방''이 오히려 ''분단''을 가져왔음을 통탄하며 미군정과 분단세력을 비판하고,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 협력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이러한 백범의 통일노력을 한민당은 ''모스크바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 매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범은 남북합작을 주장하며 연석회의에 참여함으로써 이제 분단노선과 는 화해할 수 없는 대립관계로 접어들었다.
연석회의 이후 한독당은 다소 분열되기도 하고 조소앙은 사회당을 만들어 선거에 참여하였으나, 조완구 엄항섭 등 백범직계는 여러가지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단정에 계속 반대하였다. 백범은 통일을 강조하는 강연회를 계속하였고, 1948년 분단반대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하는 서한을 김규식선생과 공동으로 작성하여 서영해를 통해 유엔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우익 ''3영수'' 중 두분이 참여하지 않은 이승만정권의 불안한 기반, 국회 안팎에서 제기되는 민족통일에 대한 요구, 그 자리에 백범이 태산같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철군완료를 앞둔 시점에서. 미군정 또는 단정세력과 대립적 관계였다는 것이 암살사건과 직결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백범의 삶과 죽음은 그의 사상 및 통일론과 결합하여 검토하여야 보다 온전한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백범 암살의 동기는 친일과 민족, 좌익과 우익, 정치인의 정치적 경쟁 등 여러 변수들이 관련되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포괄하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틀은 역시 분단과 통일의 문제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점은 현대 한국 민족주의의 과제를 규명하기 위해서도 필요할 것이다.
김구의 일생은 한국근현대사를대표한다.
19세기 후반 질풍노도(疾風努濤)와 같은 격변의 시기에 태어난김구는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일제가 한국을 강점했던 암흑의 시기에는 민족의 광복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으며, 특히 3.1운동 이후에는 온갖 고초와 역경을 뚫고 임시정부를 이끌면서 민족의 자존과 민주체제의 정통성을 지켰던 것이며,광복 이후에는 우리민족자신에의한 민족의 자주통일과 독립정부의 수립을 위해 전력투구하다가 비극적으로 그 생을 마쳤다. 그의 서거는 바로 그 자신의 비극이기에 앞서민족의 비극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비극적 서거는 한국현대사의 전개에 헤아리기 어려운 손실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첫째로, 그의 서거는 일제식민통치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청산할 수 있는주도세력이 상실되었음을 뜻하였다.
많은 수의 항일애국지사들이 일제에항거하는 투쟁에서 온갖 고초를 당한 끝에 순국하였고, 일제에 쫓기면서 조국의 광복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며, 다행하게 살아서 광복을 맞이한 인사들도 분단과혼란의 군정기에 권력투쟁과 이념적갈등으로 영일(寧日)이 없었던 것이다.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은 남한의 사회체제 관리를 효과적으로 수행한다는 이유로일제식민당국의 앞잡이였던 경찰, 법조인, 교육자, 기업인, 행정관리,언론인, 문화인 등등의 친일세력들을 다시 채용하여 미군정의하부조직으로 충원하였고, 이에 이들 친일세력들은 건국과정에서 강력한정치세력으로 조직화 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였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정권안보를위해서 친일세력의 숙정을 소극적으로 하다가 드디어 친일세력을정치적으로 충원하였다. 이것은 한국현대사에서 또 하나의 비극의 씨앗을심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승만에 한 친일세력의 정치적 충원은 그. 이후 한국정치체제의 ''정통성위기''의 주요한 원인의 하나로 작용하여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제 식민통치의 유산을 열정적으로 청산할 수 있는마지막으로 남은 지도자는 김구뿐이었던 것이다.
둘째로, 그의 서거는 분단된 조국을 주도적으로통합할 수 있는 민족적 양심을 가진 지도자와 그를따르는 새력이 상실되었음을 의미하였다 . 김구는 l948년 2월 l3일에 발표한 「삼천만 동포에게읍고(泣告)한다」는 성명서에서 " 현시에 있어서나의 유일한 염원은 3천만 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된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분투하는 것 뿐이다. 이육신을조국이수요한다면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된 안일을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는 협력하지아니하겠다.."는 소신을 확고히 밝히고 있다. 그는정권과 이념을 초월하여 민족통일문제에 순수하게 접근하였으니. 비록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한국문제는 한국인 의해서 풀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대북접촉을 과감히 시도하고.단독정부수립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구의 그러한 통일을 향한 신념과 대북접촉이 공산주의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순진한 노력이라고 비판하는 소리도 컸고, 실제로 그의 제l차 대북접촉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항일독립운동 과정에서도 이념적갈등을 심각하게 경험한 그가 공산주의의 본질을 간과했으리라고 생각할 수 는 없다. 그것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민족의 양심에 따른신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고자 했던 것이며, 만약 그가 더 오래 생존했다면 또 다른 대안들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실천하였을 것이다
세째로, 김구의 서거는한국현대정치사에서 폭넓은 국민적지지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민주적지도자가 상실되었음을 뜻하였다.
한국헌정사에 있어서 비록 망명정부이긴 하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은 전근대적 군주정치체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근대적 민주정치체제가 수립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상해로부터 중경(重慶)에 이르기까지의 망명지에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몇번의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민주공화정으로서 민주적으로 운영되었으며, 김구 자신이 임시정부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도 물론 민주적으로 임시정부를 운영하였다. 이처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정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한국현대정치사에서 그 정통성(正統性)의 문제에 비교적 반론이 적은 것이다. 또한 김구는 이렇게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임시정부의 정치과정을 통해서 민주적 지도자로 훈련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민족공동체를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운영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확고한 정치적 신념을 가진 지도자였으며, 이러한 배경이 그로 하여금 결코 카리스마에 의한 지도자가 될 수 없도록 하는요인이되었다.그가 항일독립 운동 과정에서 비밀결사적 성격을 가진 조직활동이나 테러리즘을 이용하였다고 해서 그를 반민주적 지도자로 비판하는 견해도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항일투쟁의 방편이었던 것이다. 그가 생존했더라면 이승만의 카리스마적 권위주의를 견제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한국의 정치발전에 기여하였을 것으로 상정할 수 있음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김구는 식민지 유산의 청산문제, 민족분단의 극복문제, 그리고 민주적 체재운영 문제에 있어서 확고한 신념을 가진 지도자였다. 따라서 그의 비극적 서거는 엄청난 민족적 손실이 었으며 곧 민족의 비극이었다.그렇지만 광복 50년이 되는 오늘에 와서야 그의 이와 같은 순수한 민족적열정과 사상의 체계는 우리들에게 더이상 역사적 오류를 범하지 못하게 하는 지침으로 남겨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더욱이 김구의 사상체계가 서 있는 기초는 정치적 리더쉽에 있어서의 고도의 도덕성이다.
이 도덕성을지닌 정치적 리더쉽이 민족공동체를 민주적으로 운영하면서 민족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며 드디어 높은 문명의 수준을 누리는 문화적대국을 건설하는 것이 김구의 원대한 이상이었다. 백범 김구는 높은도덕성을 가진 민주적 지도자로서 민족의 영원한 사표로 남을것이다.
버금일지
▶1945 유엔헌장 조인
- 분류 : 정치
- 지역 : 국외
- 내용 : 국제 연합 즉 유엔(UN)은 제 2차 세계 대전 후 설립된 현재 하나밖에 없는 범세계적인 국제기관이다. 그 전에 있던 국제 연맹은 제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남으로써 해체고 그래서 세계 평화의 유지와 인류 복지의 향상을 목적으로 1945년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국제 연합 헌장에 의해서 유엔이 설립되었다.
1945년 4월에 개최되었던 샌프란시스코 국제 연합 회의를 거쳐 거기에 참가한 50개국이 6월 26일에 조인을 마침으로써 회원국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국제간의 평화와 안전 유지, 국제 우호 관계의 촉진, 경제, 사회, 문화 문제에 관한 국제 협력을 촉진하려는 목적으로 조직된 국제 연합은 19장 111개 조로 된 유엔 헌장을 조인하였다.
1945년 10월 24일에는 5대 강국을 포함한 29개국이 비준서를 기탁함으로써 세계적으로 국제연합 헌장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그 해 12월 27일까지 51개 회원국 모두가 비준을 완료하였습니다. 이 국제 연합 헌장이 발표된 날을 국제연합일로 정하고 기념하는 것이다. 국제연합 헌장은 국제 연합의 조직과 기능, 그리고 활동 원칙을 규정한 다원적 국제 조약의 성질을 지닌 국제 연합의 기본법이다. 헌장은 전문과 19장 111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문은 중국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그리고 영어로 씌어져 있습니다. 국제 연합의 주요 기관으로는 총회, 안전 보장 이사회, 경제 사회 이사회, 신탁 통치 이사회, 국제 사법 재판소, 사무국 등이 있다.
우리 나라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제연합일을 공휴일로 지정 했었으나 지금은 공휴일을 취소했으며, 현재 국제연합에는 남북한이 공동 가입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1970 체코 공산당, 제1서기 두브체크 쫓아냄
- 분류 : 정치
- 지역 : 국외
- 내용 : 공산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유화를 위해 소련과 맞섰던 두브체크 공산당 제1서기가 소련에 의해 당 간부 회의에서 쫓겨났다. 그는 1921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동유럽에서는 가장 젊은 나이인 46세에 당 제1서기를 지냈다.
프라하의 봄이란 체코의 지식층이 중심이 된 68년 민주화 운동으로 당시 소련을 추종하는 노보트니 정권을 무너뜨리고 두브체크 당 제1서기를 옹립한 사건이다. 두브체크가 일련의 탈공산 개혁을 추진하고 정책의 변화를 일으키자 이를 프라하의 봄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프라하의 봄은 소련이 주도하는 바르샤바 조약 기구 국가들이 탱크를 앞세우고 프라하를 침공함으로써 프라하는 프라하의 봄은 짓밟혔다. 그러나 이 일은 당시 동서 양진영이 주목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1987 민주헌법국민운동본부, 평화대행진
- 분류 : 정치
- 지역 : 국내
- 내용 :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이 이날 오후 6시를 전후해 서울을 비롯한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대전 전주 춘천 등 전국 37개 시-군 지역에서 국민운동본부, 민주당, 재야인사, 학생들에 의해 시도됐다. 이날 대행진은 6월10일 대회에 비해 개최도시 및 시위발생지역, 시위가담인원이 훨씬 많았다. 오후 6시가 되자 서울과 지방에서 일부 차량들이 경적을 울렸고 연도의 시민-학생들이 태극기와 손수건을 흔들거나 박수를 치기도 했다. 일부 성당,교회,사찰에서도 타종이 있었다. 이날 시위는 오후 7시 이후 시민들의 가세로 규모가 불어나 서울에서는 한때 서울역의 2만여명을 비롯, 동대문 영등포 일대 3만여명, 광주에서는 5만여명, 부산에서는 2만여명 등 전국적으로 20여만명이 참가했다. 6만여명을 동원해 저지에 나선 경찰은 이날 하루에만 2천9백60여명의 시위참가자를 연행했고 김영삼 민주당 총재는 경찰이 버스로 강제 격리시켜 시위에 참가하지 못했다.
▶1974 한미원자력협정 체결
- 분류 : 정치
- 지역 : 국내
- 내용 : 전후의 폐허 속에서 절대빈곤으로부터 탈출이 지상명제였던 50년대. 1953년 12월에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의 UN총회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과 국제원자력기구(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의 창설을 제의했다. 그로부터 세계 각국의 관심이 한참 고조돼 가는 3년후 1956년 2월 3일, 한미원자력협정이 발효되 우리나라 원자력의 여명기가 열렸다. 이에 따라 원자력을 위한 제도와 정부조직을 마련하고 선진국과의 원자력기술정보협력과 교류를 촉진하고자 IAEA회원국으로 가입하게 되었다.
▶1909 매독 치료약 개발
- 분류 ; 과학
- 지역 : 국외
- 내용 : 1909년 세계 최초의 화학치료약인 ‘살바르산’(매독치료제) 가 나왔고 1910년대엔 혈청검사가 매독·임질 같은 성병을 진단할 수 있는 주요 수단으로 등장했다.1928년에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개발했고 속속 각종 항생제와 치료제의 개발이 잇따랐다.1930년대 세포배양의 발전은 바이러스 백신의 대량보급을 가능케 했고 1940년대 선진국에선 소아백신 프로그램이 갖춰져 소아마비와 천연두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었다.
그러나 이런 이면에는 그늘도 있다.암과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으로 인한 위협과 변화한 생활패턴으로 인한 암의 증가가 바로 그것.‘세기의 흑사병’으로 불리는 에이즈(AIDS) 로 전세계에서 3천3백60만명이 신음하고 있다는 것이 유엔에이즈(Unainds·유엔산하에이즈대책기구) 의 추정이다.또 WHO에 의하면 전세계적으로 암으로 사망한 사람은 7백22만8천여명에 이른다.
매독은 대표적인 성병(성접촉에 의하여 전염되는 질환)의 하나다. 항생제가 개발되기 전에는 치료방법이 없어서 매우 많은 사람들이 매독으로 사망하기도 하였지만, 페니실린이 탄생한 이후 완치가 가능하고, 건강 진단시 기본적인 검사로 포함되기에 조기에 발견하고 조기에 치료하여 요새는 매독 환자를 거의 볼 수가 없다. 매독을 피부과에서 다루는 이유는 다양한 피부 병변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1기 매독에서는 성기 주위가 헐어서 생기는 경성하감이라는 증세가 특징적이지만, 2기 매독에서는 다양한 피부 증상을 나타낸다.
▶1949 프랑스 작가 셍떽쥐베리 행방불명
- 분류 : 인물
- 지역 : 국외
- 내용 : ''야간비행'' ''어린 왕자''라는 작품으로 행동주의 작가군에 해당되면서 실천하는 인간에 대한 작품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관심을 보여주었던 그는 1949년 마지막 비행을 떠나 행방불명되었다. 그의 극적인 삶을 다시 한 번 되돌아 보게 한다.
내생각엔 더 시끄럽지 않았을까 생각이 드는데 모르지....우익,좌익 나뉘어서... 다수가 주도하는 정치는 그것이 정의를 실현하는것이라해도 언젠간 잡음이 또 생기지 않았을까 ?더구나 개혁기인데 순간에 잠재워지진 않았을거라 생각이 드는구나 ..어려움은 항시....힘 없는 자는 설움을 겪는건 마찬가지였을거고..
그랬어도 서민들은 무엇이 진실인지 왜곡인지 잘 몰랐을거야 군중심리가 좌우했을거고 안다고 해도 비판이나 제대로 해볼수 있는 시대는 아니었을거란말이지 ( 정치깡패라는말 그때 생겼지 않았나? ) 권력이 지배햇던 시대였으니 혼란스럽기는 ...사실 그때의 정의는 오로지 나라의 독립이 주목적이었을테니까 ..
첫댓글 어린왕자의 주인공은 어느별로 사라졌을까 찾아보면 있을라나..보아뱀은 코끼리를 다 소화시켰겠지?
김구 선생이 끝까지 살아서 미국과 대립하면서 정치를 했었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이승만의 썩은 정치가 좀 덜했을까?...
내생각엔 더 시끄럽지 않았을까 생각이 드는데 모르지....우익,좌익 나뉘어서... 다수가 주도하는 정치는 그것이 정의를 실현하는것이라해도 언젠간 잡음이 또 생기지 않았을까 ?더구나 개혁기인데 순간에 잠재워지진 않았을거라 생각이 드는구나 ..어려움은 항시....힘 없는 자는 설움을 겪는건 마찬가지였을거고..
하긴 통일조국을 그렇게 염원하던 분이시니까 그시절엔 더 혼란스러웠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시절 너무 정치를 몰랐던 우리 서민들은 좀더 일찍 정치판의 비정을 알았을지도....
그랬어도 서민들은 무엇이 진실인지 왜곡인지 잘 몰랐을거야 군중심리가 좌우했을거고 안다고 해도 비판이나 제대로 해볼수 있는 시대는 아니었을거란말이지 ( 정치깡패라는말 그때 생겼지 않았나? ) 권력이 지배햇던 시대였으니 혼란스럽기는 ...사실 그때의 정의는 오로지 나라의 독립이 주목적이었을테니까 ..
권력이 난무햇던 시대에는 항상 약한자는 더 눌리게 되어있었어...그래서 우리나라 정치 뒷면엔 올바르지 못한 배경이 있었지 않았나 싶은데...지금도 별 차이 없는것 같고..
그래 맞아 지금도 무엇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모른채 그저 정치하는 사람들 욕 하는 것이 고작이니.....그래도 지금은 시위들도 많이 하지만.....
생각이 많이 깨어있으니까 지금은...판단의 능력이 옛날보다는 나아졌겠지 그래도 강건너 등불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