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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순철 회원은 유년기 대부분을 제주시 묵은성에서 보냈지만, 원래 고향마을은 애월읍 신엄리이다. 지금도 河氏姓을 가진 분들이 많이 살고있다. 하사장이 신엄리에 대한 추억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신엄리 전경
신엄리 마을 올레길, 지금도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사진 - 한승훈>
<사진 - 한승훈>
<사진 - 한승훈>
애월읍 신엄리
명칭유래
옛 이름은 새엄쟁이다. 18세기 중반 이전에 엄쟁이에서 새엄쟁이[新嚴]가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형성 및 변천
1500년경 사람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1765년(영조 41)경에 제주목 우면에 속한 마을로 신엄장리·중엄장리·구엄장리가 기록되어 있다. 1905년 이후에 중엄은 신엄에 포함되었다.
본래 제주군 신우면 지역으로 구엄리의 엄장이 남서쪽에 새로 마을을 이룩하였으므로 새엄장이·신엄장 또는 신엄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신엄리라 하다가 1952년에 중엄이 신엄에서 다시 분리되고, 1953년 신엄에 포함되었던 송냉이가 용흥리로 되었다. 1980년 12월 1일에 애월면이 애월읍으로 승격되었다.
자연환경
해안선의 굴곡은 완만한 편인데 일부 300m 정도는 낭떠러지로 되어 있다. 신엄리 해안도로변 쪽에는 녹구물 또는 노꼬물이라고 불리는 해안 용천수가 솟아나고 있다.
현황
읍의 북서부 해안에 위치하며, 2007년 7월 말 현재 면적은 2.83㎢이며, 총 411세대에 1,083명(남자 563명, 여자 52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총 면적 283.5㏊ 중 경지 면적은 201.7㏊로 71.1%에 이르며, 임야 24.6㏊, 기타 57 .2㏊로 되어 있다.
주요 농산물로 수박과 양배추가 많이 재배되고 있어서 주 소득원이 되고 있다. 북쪽으로 바다와 연접해 있는 지역으로 농업과 어업을 병행하는 농어촌 마을이다. 교육 기관으로 신엄중학교가 있다.
남쪽으로 국도 12번 도로가 제주시와 한림읍을 연결하는 도로가 지나고 있다. 이 외에도 남쪽으로 하가리를 지나 상가리와 납읍리로 연결된 도로가 있다.
[참고문헌]
• 『한국지명총람』-전남편 4, 제주편- 16 (한글학회, 1984) • 오창명, 『제주도 오름과 마을 이름』(제주대학교 출판부, 1998) • 『북제주군지』(북제주군, 2006)
돌코냉이
위치 ; 애월읍 신엄리 신엄중학교 입구 시대 ; 조선 유형 ; 민간신앙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신엄리는 비교적 평탄한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풍수지리적으로는 金盤型(금접시모양)이라고 한다. 또 바다 쪽이 선두(船頭), 남쪽의 '감제기 르' 쪽은 선미(船尾)와 흡사하여 배 형국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마을의 동북쪽은 허(虛)한 것으로 이해되어 이것을 염려한 노인들은 속칭 '중숫물'이라는 지경에 방사탑 1기를 쌓았고, 풍수지리적으로 가장 약하다고 이해되던 곳에 방사(防邪)짐승을 만들어 세워 놓았다. 이는 제주도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매우 희귀한 일로 그 중요성이 인정될 만하다.
짐승은 속칭 '가운(果園)목이'라 불리는 곳에 있었다. 가운목이는 지번 1068번지 일대로 조선시대에 북과원(北果園)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 과원의 울타리 일부로 추정되는 넓고 높은 동서 방향의 울타리 위에 약 20m의 간격을 두고 머리가 길고 몸이 통통한 짐승 형태의 돌 4기가 놓여 있었다. 모두 동남쪽 방향을 향하고 있었는데 개·고양이·말·소 또는 공룡돌·뱀 같은 형상이라고 전해진다.
이 석상들은 근래에 들어서 방치 상태였던 것을 30여년 전 속칭 '창남밭(참남밭)'이라고 불리는 마을 남쪽의 놀이동산으로 옮겨졌다. 그러던 것이 약 20년쯤 전에 2기를 분실하였고 1기는 신엄중학교 입구, 1기는 제주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현재 신엄중학교 입구에 놓여 있는 석상은 높이88cm, 너비 78cm, 폭 43cm이고 머리와 얼굴은 길이 56cm, 너비 34cm이다. 규격에서 보듯이 머리와 얼굴이 길고 넓적하여 마치 삼각형 비슷하다. 원에 가까운 타원 형태의 눈과 반원의 눈썹, 정면에서 측면까지 길게 표현된 입, 입 위로는 삼각형 모양의 코가 돌출되어 있다. 머리 밑으로 넓고 길게 만든 둔탁한 귀가 있다. 눈·눈썹·귀·입은 음각이고, 코만 양각이다. 머리와 얼굴은 세밀다듬을 하고 있는데 현무암 재질이어서 시각적으로는 거친 듯하다. 넓적하고 통통하게 표현된 몸통 부위는 거친다듬을 하였고 몸을 비롯하여 하반신 부분은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짐승은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주고 있다. 머리는 수평으로 들고 먼 곳을 향하고 있어 수호적 의미의 양상이 짙은 개의 자태로 보인다.
이 석상은 마을 중심부의 허약한 곳을 보강하고 재앙을 막는 수호신(守護神)의 기능 외에도 마을의 경계석 또는 과원을 알리는 표석(表石)으로도 관련이 있을 듯 싶다.(제민일보 1995년 7월 5일)
1700년대 제주읍에는 동·서·남·북·중·별과원 등 6개소의 과원이 있었다고 하며, 그보다 앞서 1526년에 이수동 목사는 별방·수산·서귀·동해·명월방호소에 과원을 설치하고 그곳을 수비하는 군인으로 하여금 관리토록 했다고 한다. 그 후에 과원은 제주목에 22개소, 정의현에 7개소, 대정현에 6개소로 증설되었으며 숙종시에는 모두 42개소에 이르렀다. 이들 과원에서 생산되는 귤은 모두 중앙으로 봉진되었는데 봉진을 위한 양이 모자랐으므로 민가에 있는 귤나무를 일일이 조사하여 관리하였다. 백성들에게는 귤나무 8그루를 기준으로 하여 1년의 역(役)을 면제하여 주는 제도가 시행되기도 했지만 귤의 열매가 맺자마자 그 수를 일일이 세어 장부에 기록하였다가 그 수를 소유자에게 모두 부과했기 때문에 많은 폐단이 있어 백성들은 일부러 귤나무에 더운 물을 부어 고사시키는 경우도 있었다.(제주시, 탐라순력도. 24쪽)
< 아래 사진 - 한승훈>
녹구물(노꼬물)
신엄리 바닷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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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나의선대 어르신네들의 삶의터전인 엄쟁이 에대한 스토리를 알게되어 너무 너무 반갑고 고맙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뵐수 있겠지요. 기대합니다.
하사장~!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신지? 구엄에서 애월까지 중핵교 때 걸어서 통학하면서 매일 지나다닌 신엄리... 신엄이 거의 끝나고 고내리가 시작되는 즈음에 어른들이 '고냉이'라고 부르는 지역이 있었는데, 이번에야 그 유래를 알았다네. 돌코냉이라는 石物을 세웠던 곳이라서 그렇게 불렀는데 말일세. 향토사나 향토유적에 대해서는 핵교에서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어르신덜도 아는지 모르는지 알려줄 생각도 없었으니, 어릴 땐 그저 아 여기 지명이 '고냉이'구나 하고만 지나다녔는데 말일세. ㅎㅎ
추운 겨울, 건강에 유의하시게나. 나이드니 건강이 젤 큰 재산이란걸 새삼 느끼게 되는 요즘이네. ^^
화이팅
금년에는 유달히 눈이 많이 내리네, 어릴때 기다리던마음이 언제였었나 하는 기분이 드네 눈을보는마음도 지겨움으로 변하고 날씨가 풀려야 거동도 할텐데 하는 생각뿐, 여기 오등동은 한라산 자락이라 더욱 쌀쌀 하네.
신엄사진 몇장은 한승훈 작품이더군 언제 포토 순례시 데려가기로 했는데 연락이없군, 겨울독감 조심하게 ..
한승훈씨는 어디 아픈거 담다~! 병원에 입원했다는 말도 있고... 한번 알아보라마는... 마음에 병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