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움풍물학교에서는 우리역사를 보다 잘 이해하고 우리문화의 우수한 점을 체험하기 위하여 매년 봄 역사문화기행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3월 30(토)~31(일) 1박 2일로 서울 창덕궁과 경운궁(덕수궁)일대를 답사하였습니다.
가장 오랫동안 법궁의 역할을 한 창덕궁 창덕궁은 처음에는 경복궁의 이궁(임금의 행차할 때 묵던 별궁, 행궁이라고도 함)으로 출발하였으나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이 불타 없어지면서 조선의 법궁(정궁, 나라의 공식적인 행사를 치르던 궁궐)으로 가장 오랫동안 사용된 궁궐입니다. 경복궁과는 달리 권위적이지 않고 자연적인 환경을 고려하여 조화롭게 지은 궁궐로 1997년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이기도 합니다. 창덕궁은 특히 후원이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발길이 끊이질 않습니다.
↑서울로 출발하기 전 신경주역 KTX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면서 학생들은 미리 나누어 준 답사 안내지를 읽고 있습니다.
↑창경궁 안내도. 오늘 창덕궁 답사 주요 코스는 돈화문-궐내각사-금천교-진선문-인정문-인정정-선정문-희정당-대조전-경훈각-낙선재입니다. 후원은 시간이 모자라서 다음 기회로 미루고 고개를 넘어 창경궁으로 갈 계획입니다.
↑드디어 돈화문에 도착하여 기념사진 한장. 돈화문은 중용의 대덕돈화(大德敦化)에서 온 말로 임금의 큰 덕으로 백성들을 도탑게 교화시킨다는 의미입니다. 도탑다는 우리말은 정이나 인심이 깊고 많다는 뜻이지요. 임금이 형벌이나 폭력으로 나라를 통치하지 않고 큰 덕으로 다스려서 백성들의 마음을 순화하여 태평스러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말입니다.
↑돈화문을 통과하여 곧장 진선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궐내각사를 미리 살펴봅니다. 아이들이 종로에서부터 걸어왔기 때문에 궐내각사 가운데 옥당과 구선원전을 돌아 책고(책을 보관하는 곳)에서 잠시 쉬기로 합니다.
↑왼쪽으로 보이는 것이 금천(錦川)입니다. 창덕궁의 금천(禁川)은 금천(錦川)입니다. 금천(禁川)은 궁 안으로 흐르는 내를 말합니다. 궁궐의 안과 밖을 자연적으로 구분지어주는 것이 금천입니다. 물론 궁을 둘러 싼 담장이 있지만 그것은 인위적인 조형물이고 자연적으로 구분짓는 것은 바로 금천입니다. 이 금천 안으로 오면 실질적인 왕의 거주 영역으로 들어오는 셈입니다. 창덕궁의 금천은 물이 비단같이 맑고 곱다고 하여 금천(錦川)이라고 하였습니다.
↑ 여기는 규장각으로 왕실의 서책과 문서를 보관하는 곳입니다. 규장각은 처음에는 단순히 서책 보관 정리 업무만을 담당하지만 정조 때에 오면 당쟁을 혁파하고 국정을 일신하는 개혁의 산실이 됩니다. 세종의 집현전과 비슷한 기능을 한 셈입니다. 그러나 집현전이 세종 사후 해체되었듯이 규장각도 정조 사후에 비슷한 운명을 겪습니다.
↑ 항시 국익보다 사익을 중시하고 권력을 사유화하는 집단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조선 영정조 시대는 국왕과 이런 신하들과 대립이 치열하였습니다. 부패한 관료들은 영민한 왕을 원치 않습니다. 왕이 우매하여 자신들의 주장에 휘둘리기를 바라지요. 그런 신료들에게 영조와 정조는 아나 눈엣가시였을 것입니다.
↑ 정조의 힘은 학문에서 나왔습니다. 그 자신이 엄청나게 많은 독서을 하였고 또 무예를 단련하여 백발백중의 활쏨씨를 자랑하였습니다. 경연시에는 오히려 자신이 신하들을 가르치는 입장이었고 신하들은 번번히 경연에서 임금에게 무안을 당하여야 했습니다. 이 규장각이야말로 정조의 힘의 원천이었습니다.
↑ 창덕궁의 금천교입니다. 이 다리는 태종 11년(서기 1411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된 돌다리입니다. 금천교 아래 교각에는 서수(상서로운 짐승)가 조각되어 있는데 남쪽에는 백택이 북쪽에는 거북(현무)이 물길을 지키고 있습니다. 위의 사진의 동물이 백택입니다. 백택은 덕이 있는 임금이 다스리는 곳에만 나타난다는 신령스러운 짐승으로 여덟 개의 눈을 가지고 있고 사람의 말을 한다고 합니다. 일부에서는 이 동물이 백택이 아니고 해태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 금천교를 넘어서면 본격적인 왕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셈입니다. 그래서 금천교 앞에 회화나무나 느티나무를 심어서 신하들이 그 아래에서 기다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 궐내각사를 돌아나와 진선문 앞에 섰습니다. '진선'은 '선으로 나아간다, 혹은 선에 힘을 쏟는다'는 말입니다. 창덕궁을 처음 건립했을 때 태종은 여기에다 신문고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문고는 연산군 때 폐지되고 맙니다. 그러다가 한참 지나서 영조 때 다시 신문고가 설치되었습니다. 진선이라는 말은 신문고와 관계가 있는 말입니다.
↑ 대궐을 크게 나누면 외조, 치조, 연조로 구분됩니다. 외조는 정문에서 시작하여 정전(가장 중심이 되는 전각)으로 들어서는 문 사이의 공간을 말합니다. 창덕궁의 경우는 돈화문에서 인정전 앞 인정문 사이의 공간이 됩니다. 이 외조는 궁궐에 출입하는 관료들의 집무 공간이며 동시에 궁궐과 임금을 호위하는 경호 공간이기도 합니다. 궐내각사와 내병조, 상서원, 호위청 등이 여기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호위청은 임금의 경호를 목적으로 하는 관청으로 인조반정 이후에 창설되었습니다.
↑ 진선문 안으로 들어서서 인정전으로 가기 전에 호위청과 상서원 앞에서 잠시 설명을 합니다.
↑ 인정문 앞.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이 인정문입니다. 궐 밖에서 인정전으로 들어오기까지 모두 세 개의 문을 통과하여야 합니다. 돈화문과 진선문 그리고 여기 인정문. 이 삼문(三門)을 정문, 대문, 중문으로 부르기도 하였는데 인정문은 곧 중문이 되는 셈입니다. 여기를 넘으면 임금과 신하들이 함께 국사를 의논하고, 외국의 사신을 영접하며, 법령을 반포하는 공간 즉 치조(治朝)에 들어서게 됩니다.
↑ 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에서 장난을 치다니. 옛날 같으면 아마도 대역죄로 다스렸을 지도 모릅니다.
↑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이 눈 앞에 장엄하게 펼쳐집니다. 어진 정치를 베풀라는 의미의 인정전. 경복궁 근정전과 함께 2층 지붕 양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내부는 2층이 아니라 단층입니다.
↑ 인정전 뜰에 깔린 박석을 보고 있습니다. 원래의 박석은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었습니다. 일제는 박석을 걷고 이 위에 잔디를 깔았습니다. 우리나라 건축에서 잔디는 죽은자의 공간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집에는 잔디를 깔지 않는 법입니다. 최근에 잔디를 걷고 다시 박석을 깔았지만 화강암을 자연석 그대로 쓰지 않고 가공하여 썼기 때문에 경복궁 근정전 앞 마당처럼 소박한 아름다움은 느낄 수가 없습니다.
↑ 품계석입니다. 조례를 할 때 문무백관들이 각자 자신의 품계에 따라 여기서 도열하여 섭니다. 이 품계석은 정조 때 설치되었습니다. 이곳 품계석이 원조인 셈입니다. 그 이후 창덕궁이나 덕수궁 정전 앞 마당에도 품계석이 놓이게 됩니다.
↑ 인정전은 이 단의 월대 위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월대를 오르는 어도(임금이 다니는 길)에 답도라고 하여 봉황이 새겨진 사각형의 돌이 있습니다. 봉황은 성군이 세상이 다스릴 때만 출현하는 상서로운 새입니다. 이 답도의 봉황은 임금에게 성군이 되라고 무언의 시위를 하는 듯합니다.
↑ 인정전 내부를 열심히 촬영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있을까요?
↑ 어좌가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 국왕의 어좌 뒤에 반드시 일월오악병이 있습니다. 임금이 있는 곳이면 항상 이 일월오악병이 둘러져 있습니다. 물론 임금이 훙서(薨逝 임금이나 왕족, 귀족 등 신분이 높은 사람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 하였을 때도 일월오악병은 따라 갑니다. 일월오악병은 임금을 상징하는 것으로 임금 외에는 그 누구도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 일월오악병은 '일월오봉산도'라고도 합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우선 크게 하늘과 땅으로 나눠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에는 해와 달이 동시에 떠 있고 땅은 다시 산과 바다로 구분되어 있는데 그 사이로 두 줄기 물 기둥과 두 그루의 적송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가운데 임금이 앉으면 천지인 삼재(三才)가 모두 갖추어 지면서 그림이 완성됩니다.
하늘의 일월은 임금의 덕을, 오악은 국토를 그리고 바다는 백성을 각각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줄기의 물은 임금과 백성의 소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임금의 덕이 막힘없이 흘러 백성들의 삶이 윤택해지기를 염원하는 마음을, 양 가의 두 그루 붉은 소나무는 오랫동안 나라가 평안하게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드므는 화재예방을 위하여 궁궐의 주요 전각의 섬돌(월대)위에 설치한 커다란 청동(혹은 무쇠)항아리를 말합니다. 여기에 물을 가득 담아 놓으면 화마(火魔)가 와서 물 속에 비친 자신이 얼굴을 보고 놀라 달아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릇이 크지 않아서 실제로 방화수 역할을 하지는 못하였으리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궐안 사람들이 이 드므를 보면서 늘 화재에 대한 경각심을 늦추지 말라는 의미로 설치하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 시간이 이외로 많이 흘러 창덕궁의 나머지 전각은 오후에 보기로 하고 우선 창경궁으로 점심을 먹으로 갑니다.
↑ 창경궁으로 가는 언덕에 있는 해시계 앙부일구
↑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고 기온도 급강하. 아이들이 점심을 먹는데 추웠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점심은 집에서 싸온 김밥 도시락. 그래도 화학 조미료가 듬뿍 들어간 음식보다 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도시락 훨씬 따뜻한 법이지요.
↑ 점심을 먹고 창경궁을 둘러보기 전에 춘당지와 식물원을 주위를 산책합니다.
↑ 식물원 안은 아주 따뜻합니다. 수수꽃다리 꽃이 벌써 피었습니다. 흔히 라일락이라 하는 꽃이지요.
↑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다른 궁궐의 정문은 모두 남향인데 이 홍화문은 동향입니다. 남향으로 하려니 종묘가 훼손될 우려가 있어서 아마도 동향으로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설이 설득력 있습니다.
↑ 창경궁의 금천교인 옥천교. 이 옥천교는 현재 보물 38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창경궁을 흐르는 옥류천은 현재 유일하게 살아 흐르는 금천입니다. 이 옥류천 위의 다리가 옥천입니다.
↑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의 중문인 명정문.
↑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입니다. 창경궁은 원래 세종대왕이 아버지 태종을 위하여 지은 수강궁 터에 후일 성종이 세 대비를 위하여 증축하면서 이름을 붙인 궁입니다. 경복궁와 창덕궁 양궐체제가 자리잡은 조선 전기에는 별로 쓰임이 없다가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이 불타면서 창덕궁이 정궁이 되면서 그 쓰임이 많아졌습니다.
↑ 명정전 앞 조정에서 폼을 잡는 아이들. 지우의 똥품(?). 과거 같았으면 여기가 어딘데....... 세상이 좋아졌지요.
↑ 드무에 머리를 들이대고 있는 동규. 도깨비가 보이는가?
↑ 편전인 문정전. 편전은 임금이 정전을 대신하여 평상적인 집무를 보는 곳을 이릅니다. 정전이 조회를 하거나 하례를 받을 때, 그리고 외국 사신이 왔을 때 접견하는 곳이라면 편전은 상참을 하고 경연을 하며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할 때 이용하는 전각입니다.
상참(常參): 신하들이 매일 임금에게 업무를 보고하던 일 아침에 하는 것을 조강(朝講), 점심때 하는 것을 주강(晝講), 저녁 때 하는 것을 석강(夕講)이라고 했으며 임시로 하는 것을 소대(召對), 일과 후에 하는 것을 야대(夜對)라고 하였다.
↑ 이게 누구야? 창경궁의 다람쥐?
|
첫댓글 대역죜
다람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