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색의 흙이나는 풍수지리 명산 - 오토산
오토산은 풍수지리와 관련하여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어서, 전국 술가[術家]들이 예부터 찾아들곤 하던 곳이다. 따라서 "옛날 대홍수가 일어났을 때, 부근의 산들은 모두 물에 잠겼으나 이 산 꼭대기는 오리머리만큼 걸렸다하여 오토산이라고 한다"는 유래설을 제쳐두고도 오토산이라 하게된 사연이 다섯가지나 된다. 그래서 오명산[五名山]이라고도 한다.
첫째로, 다섯 개의 명당이 있다고 하여 오명산[五明山]이라고도 불렸는데, 다섯 개의 명당이 있는 지점과 형국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풍수 전설에 흔히 등장하는 성지[性智]도사가 상지[相地]한 것으로 구전돼 오는 혈처의 이름과 위치, 방향 등이 구체적이다. 산 봉우리는 제비집[燕巢刑], 동쪽의 산등성이는 등잔을 걸어놓은 [掛燈], 남쪽 산등성이는 잘록한 벌의 허리띠[蜂腰], 서쪽 산등성이는 직각자[曲尺], 북쪽 산등성이는 개구리 발자국[蛙跡] 모양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첨사공 김용비 공의 묘터를 잡기 위해서 연을 띄웠는데, 떨어진 자리를 파보니 누렇고[黃], 푸르고[靑], 붉고[赤], 검고[黑], 흰[白] 다섯가지 빛깔의 흙이 나와 오토산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셋째로, 풍수에서 산을 가리킬 때 쓰는 토성과 같은 의미로 산봉우리가 편평한 형태를 토산이라 하는데, 오토산의 형상이 바로 그러하다. 이같은 산의 모양새 때문이라는 것이다.
넷째로, 사방 산을 둘러보면 동쪽 귀천마을에서 바라볼 때 가장 빼어난 모습으로 다가선다. 그 전체적인 모습이 별 또는 불가사리처럼 생겼으며, 마치 거인의 다섯 손가락처럼 대여섯 갈래의 용맥[龍脈]이 사방으로 뻗어 내리는 드문 산 모습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다섯째, 산에도 면배[面背]라 하여 얼굴이 있고 등이 있다. 오토산 생김새가, 다섯 손가락처럼 정상으로부터 다섯갈래의 큰 지맥이 사방으로 뻗어내려 있으며, 그 모두가 명산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백두대간에서 이어온 산 줄기는 낙동지맥으로 이어져, 보현산을 거치며 북서쪽으로 치달리니 보현지맥이라 한다. 부지런한 세월 솟구치고 또 깍이며 낙동강을 연모해 달리는 가운데 춘산면 구무산을 지나며 다시금 두갈래로 분기 한다. 서쪽으로 금성산과 마주하고 서 있는 비봉산에 이르른 산 줄기는 북서진 족두리산 너머 흙고개에 이른다. 건지산[乾芝山, 錦山] 지난다음 여력을 다하여 또 하나의 산을 솟구치니 바로 오토산이다.
의성읍의 동남쪽에 위치한 이 산을 중심으로 28번 국도가 서쪽으로, 912번 지방도와 갈래친 길이 동쪽과 남쪽으로 돌아 다시금 28번 국도와 연결된다. 그러므로 동서남북 어디에서고 오토산을 바라볼 수 있다. 이왕 풍수와 관련된 산행길, 지세와 형국을 주변 사람들이 산과 관련지어 자신들의 삶을 이해하는 지인상관론적[地人相關論的] 입장에서 느끼는 오토산 관[觀]을 살펴보고자 한다.
오토산에서 사방으로 뻗어내린 산줄기 어느 한 부분에 기대어 살고 있는 마을, 즉 오토산을 마을의 주산으로 삼은 마을로는 서북쪽의 의성읍 오로리, 남동쪽의 사곡면 토현리, 남쪽의 금성면 만천리, 서쪽의 의성읍 정자리이다. 반대로 오토산을 바라보고 있는 마을, 즉 오토산을 마을의 안산으로 삼고 있는 마을로는 북쪽의 의성읍 치선리와 동쪽의 사곡면 오상리가 있다. 오토산 산자락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은 명산의 정기를 받으며 산다고 생각하여 삶터에 긍지를 갖고 장래에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오토산 북록에 터잡은 오로마을의 입장은 응봉하복치형[鷹峰下伏雉形]의 길지라 여긴다. 오토산 남쪽 골짜기에 터를 잡은 만래[晩來]마을은 옛날에 함양박씨문중 박제[朴濟]라는 사람이 인근 운곡리에 살다, 화성산형[火星山形]의 첨봉들로 이루어진 금성산 험한 산세로 인하여 자식들이 거칠게 자라나지 않을까 염려하여 뒤늦게 이곳으로 이거[移居]하였다고 여겨 지은 마을이름인 것이다. 그 위에 마을어귀에는 마을이 훤하게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행주형[行舟形] 마을을 안전하게 정박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한 것인지 조산수[造山藪]를 조성하는 등 풍수적 위의[威儀]까지 갖추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오토산을 바라보는 마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터가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등 좌절감을 갖고 있다. 오토산이 해발 높이로 475m에 불과하지만 자신들이 기대고 있는 산에 비해서 지나치게 높아 능압[凌壓]에 걸린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대천을 사이에 두고 무정한 모습의 오토산 북쪽 기슭과 마주하고 있는 치선1리가 그 대표적 사례라 할것이다. 마을 뒷산 지세가 마치 암꿩이 알을 부화시키기 위해 둥지를 틀고 않은 것과 같다고 하여 자치[雌 혹은 雌雉]라 하였으나, 마주보고 있는 오토산이 마치 암꿩을 덮치려는 매[鷹]의 형상과 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암꿩이 매 때문에 불안하여 알을 제대로 부화할 수 없어 관운과 재운이 따르지 않는다 하여, 궁여지책으로 나온것이 풍수적으로 지명에 비보[地名裨補]를 하는 것이었다. 동쪽의 베틀바위 전설처럼 그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 동네사람 스스로 마을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암꿩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대신 자치[自治 혹은 自致]라는 지명을 쓰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상리 또한 남대천 너머 장엄하게 오토산이 바라다 보이지만, 비봉산에서 흙고개로 향하는 산줄기에 위치한 금성산의 뿌리뫼 되는 봉우리(일명 족두리산)가 북쪽으로 날아가는 한 마리 학과 같은 지라 길조[吉鳥]가 쉬어가도록 마을이름을 오동이라 짓기도 하였으나 오토산은 크게 안중에 두지 않았다.
파리의 세느강 교각을 올려다보니 교량형태와 가로등, 불빛모양 어느 것 한가지도 똑같은게 없다. 저마다 개성이 있는 것이 사람이여서 모두 중하다 할 것이다. 일상 산행을 벗어나 풍수도 알아볼겸 오토산에 올라보면 어떨까 ? 풍수라고 하는 것은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다. 겨울이면 북서풍이 여름이면 동남풍이 불어오는 것을 고려, 양택을 택할 때에 장풍향양[藏風向陽]하고자 집의 방향은 남향으로 짓는다. 이처럼 따뜻하고 밝은 곳에다 살림집을 짓는 까닭에 양택이라 한다. 또한 살림집을 짓기 이전 산천경계가 제일먼저 스며드는 아늑하고 깊은 곳에다 가장 먼저 조상님들은 가묘를 지으셨다. 조상님들의 지혜와 효사상을 등산하며 배울 일이다.
[義城君]에 봉해진 석[錫]의 9세손이다. 상고하기가 힘든 것이 세계[世系]이며, 실전[失傳]된 의성김씨의 조상묘 가운데 발견된 가장 오래된 것이다. - 후손 동강 김우옹 선생이 묘비를 지으며 비문 첫머리에 "우리 시조는 고려 태자첨사 용비"라 하고, 오토산을 의성김씨 시조산이라 하는 까닭이다. 제사를 위한 일단의 건물들을 마주하기 이전, 양쪽으로 먼저 맞이하는 것은 장명등[長明燈]이다. 최근 후손들의 앞날을 길이 밝힌다는 뜻으로 새롭게 조성한 풍수적 비보 시설물로 보인다. 등
참고자료 : 이몽일, 영남일보 「영남신풍수기행」, 최영주와 유종근 저 「신한국풍수」,
이완규 저 「안동풍수기행, 돌혈의 땅과 인물」
오토산에 이르기 위해서는 28번 국도 영천 또는 탑리방면으로 남향한다. 읍내를 막 벗어날 즈음 교육청사거리 왼편 경신아파트 방면 912지방도 표지판 아래 등운사와 오토산 입구를 알리는 표지석을 따라 5km 남짓 나아가면 길 좌우 몇 채의 집과 버드나무 노송이 반기는 오상리에 다다르게 된다. "의성김씨 오토산 입구"라 새겨진 표지석 따라 귀천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그리고 왼쪽으로 들판을 가로지르면 하마비[下馬碑]가 위치하고 있으니, 오토제 가까이 다가왔음을 알린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돌아서니, 입구 오른편 어귀 비각이 있다. 비각 안의 신도비로 미루어, 오토산을 배경으로 군[群]을 이루고 있는 제사용 건물이 어느 분을 기리기 위한 것인지 또는 지금 향하는 이 길이 어느 분의 묘지로 가는 신도[神道]인 것인지 알 수 있다.
고려 공민왕 때에 홍건적이 대거 쳐들어와 임금이 복주(현 안동)로 몽진하고, 의성땅 옥산 성골 등지로 피란을 예정할 즈음 의성일원에서 날뛰던 도적의 무리를 현주로 이들을 토벌 민심을 수습한 공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냈으며, 의성군[義城君]으로 책봉된 김용비[金龍庇] 공의 위적[偉蹟]을 기리는 비인 것이다. 공은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이자,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자로서 의성군하불명[燈下不明]이라는 이야기와 관련된 듯하다.
등잔불을 켜면 바로 아래쪽은 어둡고 바깥쪽은 밝은 것처럼, 의성땅을 떠나 먼 외지로 나간 후손들은 집안이 번창하는 반면 고향을 지키고 있는 후손들은 잘되지 못한다 하는 이야기와 관련해 등잔밑에 다시금 불을 밝힌 듯하다. 이런 이야기들은 지역의 발전상을 비관적으로 본 것에서 연유한 것이 아닐까 ? 1926년 10월 3일 의성을 동아일보에 소개하면서 나온 이야기에도 10년전과 10년 후에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1927년 128천명이 이던 인구는 지금에서는 외려 절반쯤에 머물고 있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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