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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함안조씨는 1985년에는 총 56,433가구 231,729명, 2000년에는 총 81,048가구 259,196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풍양조씨(豊壤趙氏)
[유래]
시조 조맹(趙孟)의 원래 이름은 바우(岩)이다.
그는 풍양현(현 남양주군 진건면 송능리)에서 태어나 농사를 지으며 천마산 기슭 바위동굴에 은둔해 살았던 도인이었다. 당시 신라를 정벌하던 왕건은 영해지방 전투에서 신라군에 참패를당하여 휘하의 장군들을 모아놓고 중지를 모았을때 한결같은 대답은 풍양현에 숨어 사는 바우도인의 지략을 빌리자는 것이었다. 이에 왕건이 그를 찾으니 당시 나이가 70세이었다. 이때부터 신라정벌의 길에 올라 뛰어난 지략과 용맹으로 고려통일을 이루자 태조 왕건이 맹으로 이름을 내렸다.
벼슬은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이르렀고, 지금도 천마산에는 왕건을 만났다는 암굴(巖窟)이 있으며 현성암(見聖庵)을 세워 그를 수호하여 온다.
[가문의번영]
고려때의 조운걸은 1357년(공민왕 6년)에 문과급제하고 홍건적의 침입으로 남쪽에 피난하는 왕을 시종하여 2등공신에 올랐고 그후 3도안찰사를 지내고 1374년에는 벼슬을 버리고 상주에 은거하고 출입할 때는 소를 타고 다니면서 "기우도(騎牛圖)"등의 작품을 남겼다.
풍양조씨 가문이 세도의 기반을 이룬것은 조선 숙종이후. 상신 7명, 대제학 4명, 공신 7명, 장신 7명을 냈다.
숙종 때 조도보는 조상경, 조상강, 조상기 등 아들 3 형제와 손자 8명이 있었는데 이들중 5명이 문과에 급제했다. 이들이 영조, 정조시대에 풍양조씨의 세력 기반을 다진 주역들이다.
학당 조상강은 영조때 병조판서를 네차례, 이조판서를 다섯차례 지냈다. 그의 증손자 조만영(趙萬永)은 순조의 외할아버지로 이때부터 풍양조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영조 때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오면서 고구마 종자를 들여온 조엄은 조만영의 할아버지이다.
그밖에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로 효종 때 좌의정에 올랐던 조익(趙翼), 숙종 때의 우의정 조상우(趙相愚), 영조 때의 좌의정 조문명(趙文命), 영조 때의 영의정 조현명(趙顯命), 영조 때의 우의정 조재호(趙載浩) 등이 회양공파이다. 현종 때 대제학을 지낸 조복양(趙復陽), 왜정때 상주에서 궐기하여 싸우다 일본 군경에 체포되어 순국한 조동범 등이 있으며, 현재 활약중인 바둑계의 천재기사 조치훈과 조순 전부총리도 이 가문에서 배출된 인물이다.
[계 파]
시조 조맹의 후대에서 조지린(趙之藺)을 중조(中祖)로 하는 전직공파(殿直公派)와 조신혁(趙臣赫)을 중조로 하는 평장공파(平章公派)로 크게 나누어지고 이들을 각각 1세조로하고 있다.
이 2파는 뒤에 다시 분파되는데, 전직공파는 호군공파(護軍公派), 회양공파(淮陽公派), 금주공파(錦州公派)의 3파로 나뉘고, 평장공파는 남원공파(南原公派)를 이루어 현재의 풍양조씨는 이 4파 아래 총망라되어 있다.
이 가운데 회양공파가 조선시대에 상신 6명, 문형 3명을 비롯하여 판서급이 30여 명이나 배출되어 벼슬을 도맡다시피 하였고 인구도 과반수를 차지한다.
이 파는 나중에 한평군파(漢平君派 : 이른바 노론집)와 청교파(靑橋派 : 이른바 소론집)로 나누어지는데, 한평군파는 조선 헌종 때 세도정치까지 폈던 집안으로 풍양조씨의 주축이 되며, 조선 후기에는 안동김씨와 쌍벽을 이루었다. 즉, 조만영의 딸이 문조(익종)와 결혼을 하고, 문조의 아들(조만영의 외손자)인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막강한 세력을 휘두르게 되었고, 1839년(헌종 5년)에는 조병현(趙秉鉉)이 형조판서가 되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대규모의 탄압을 하여 기해교난(己亥敎難)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집성촌]
경북 상주군 낙동면 승곡리.
마을의 대부분이 호군공파 후손들로 20여대를 이어 살고있는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 자리잡은 퇴색한 단청과 이끼낀 기와집이 3백년 마을의 역사를 말해준다. 마을 한가운데 낮은 야산 밑에 자리한 양진당(養眞堂)은 난중일기를 쓴 조청이 여생을 보냈던 99칸 기와집으로 호군공파 후손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1982년에 문중에서는 이곳을 보존하기 위해 문화재로 지정받고 보수정화 작업을 시작했다.
[본관지]
-풍양 : 현재의 남양주군 진건면 송능리의 옛 이름
[기 타]
[ 연락처 ] 조봉구 씨 : 02-392-4281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09,433명이 있었다
구지가 [龜旨歌]
《영신군가(迎神君歌)》 또는 《구지봉영신가(龜旨峰迎神歌)》라고도 한다. 가락국(駕洛國) 시조인 수로왕(首露王)의 강림신화(降臨神話) 가운데 곁들여 전하는 신화 중의 삽입가요(揷入歌謠)인데, 4구체(四句體)의 한역가(漢譯歌) 형태로 전한다(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출전문헌인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 제2가락국기(駕洛國記)에 의하면 가락국에 아직 임금이 없어 9명의 추장(酋長)이 백성들을 다스리던 42년(후한 건무 18) 3월, 김해(金海) 구지봉(龜旨峰)에서 신(神)의 소리가 들려 추장들은 모든 백성들을 구지봉에 모아 놓고 신의 계시대로 흙을 파헤치며,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만약에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는 노래를 합창시켰다. 이 노래를 300여 명의 군중이 춤추며 불렀다. 이윽고 하늘에서 6개의 황금알이 내려와 6명의 귀공자(貴公子)로 변하여 각각 6가야(伽倻)의 왕이 되었는데, 그 중 제일 큰 알에서 나온 사람이 수로왕이었다.
이 노래는 임금을 맞이하기 위한 민중의 노래이면서, 동시에 무가적(巫歌的)인 주술성(呪術性)을 지니고 있는 서사시의 하나이다. 이 노래에 대한 해석은 학자들간에 상당한 견해차이를 보이고 있다. 첫째, 잡귀를 쫓는 주문(呪文)으로 보는 견해, 둘째 거북을 신으로 풀이하여 “신이여, 신이여, 우리에게 머리(곧 우두머리:군주)를 내놓아라”라고 하는 견해, 셋째 거북은 신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영신제(迎神祭)의 절차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희생무용(犧牲舞踊)에서 가창(歌唱)된 노래라는 견해, 넷째 거북의 머리와 목은 남성의 성기(性器)를, 구워 먹겠다(燔灼而喫也)는 여성의 성기를 은유(隱喩)한 것으로 보고 원시인들의 강렬한 성욕을 표현한 노래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가사의 뜻과 표현형식이 이 노래와 비슷한 것으로 《해가사(海歌詞)》라는 것이 전해지는데, 《구지가》를 40∼50년경의 작품이라 본다면 《해가사》는 그로부터 약 700년 후의 작품이다.
인천이씨(仁川李氏) (경원이씨)
인천이씨(仁川李氏)는 본래 가락국 수로왕자로서 모후(허황옥)의 성을 따라 허씨(許氏)
가 되었으나, 그 후손 기(奇)가 신라 경덕왕(35代 742년5월-765년6월, 재위23년 1월)
때 아찬으로 사신이 되어 당나라에 공을 세워 현종으로부터 이씨(李氏)의 성을 사성 받았다. 그후 그의 17세존 허겸(許謙)이 상서좌복야를 지내고 상주국에 올라 소성백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이허겸(李許謙)을 시조로 받들고, 그가 식읍으로 하사받았던 인천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면서, 명문의 지위를 굳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자연(子淵 :허겸의 손자)이 문종때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내고 공신에 올랐으며, 뒤에 개부의동삼사 태사 겸 중서령 감수국사상주국으로
경원군 개국공에 이르렀고, 그의 맏아들 호(顥)는 선종의 국구로 문종때 호부낭중을 지낸
후 경원백에 추봉되어 아우 정(문하시중으로 경원백에 추봉), 의(재상에 오름) 등과 함께 가세를 일으켰다. 조선조에 와서는 태종때 형조참판과 함길도 도체찰사를 지낸 관(灌)과
대제학과 예조판서를 거쳐 참찬의정부사에 이르러 영의정에 추증된 문화(文
和)가 유명했으며,효상(孝常)은 지돈령부사에 올라 학문과 충효로 명망이 높았다.
참판 중손(仲孫)의 손자인 성동(成童)은 직제학과 대사간을 지내고 중종때
형조참의에 올랐으나 기묘사화때 파직되기도 했다.
그밖의 인물로는 판서 인(寅)의 아들 휴복(休復)이 곽재우와 함께 왜병과의
싸움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이괄의 난 때는 관군의 별장으로 안현에서 공을세워 진무3등공신으로 인원군에 봉해져서 무명을 떨쳤다
○김수로왕(인천이씨는 김수로왕의 후손이다.)
왕의 성은 김씨요 이름은 수로이니 김해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대가락 또는 가야라고 하였다.
동한 광무 18년(서기42년)인 임인년 2월에 비로소 탄생했으니 이상한 기운이 구지봉에 생겨..
하늘로부터 땅에 드리웠거늘 가락의 구간 중 아도가 나아가 살펴본즉..
붉은 끈으로 금합을 매어 내려져 있었다.
이에 금합을 열어 본즉 금빛이 찬란한 알이 여섯 개가 있어 해와 같이 둥글거늘..
아도의 집에 받들어 간직하였다. 다음날 알이 깨어 여섯 동자가 나왔는데 나이 십오세 가량 되고..
용모가 준수하거늘 여러 사람들이 모두 절하고 하례하였다.
그 동자가 날로 숙성하여 십여일이 지나매 신장이 구척이나 되었다.
여러 사람들이 드디어 그 한사람을 받들어 임금을 삼았으니, 그가 곧 수로왕이었다.
금합에서 알이 나왔으므로 성을 김이라 하였고 제일 먼저 낳았으므로 인하여 수로라고 이름했으니..
이는 신라 유리왕 19년때의 일이었으며 나머지 다섯 사람은 각기 지방을 나누어 오가야의 군장이 되었다.
수로왕은 재위한지 158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곧 한헌제 건안 4년(서기199년)의 일이다.
납능에 장사했으니, 능은 왕의 옛 도읍 토성안에 있어 임좌병향에 건득병파요..
읍성의 서쪽 백보의 거리가 되었다.
양나라 대통 4년(서기530년)에 나라가 멸망했으니 구세를 전하고 역년이 491년이었다.
수로왕이 왕자 열을 두었는데 왕비의 말에 감동되어 두 왕자에게는 왕비의 성을 사성하였다.
수로왕의 세대에 정치가 순후했으므로 나라사람들이 지금까지 사모하여 동지일에는 제사에 대로를 쓰고
왕비로서 배향했으니, 이 사실은 동사와 왕능 비석에 실려 있다.
○ 왕후허씨(인천이씨도 처음에는 허황후의 성을 따라 허씨였다.)
왕후의 성은 허씨요. 이름은 황옥이며 호는 보주태후이니..
아유타국의 왕녀라 하고 혹은 남천축국의 왕녀라고도 하였다.
동한 건무 24년 수로왕 7년인 무신년 7월에 왕후가 아유타국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이르니..
왕이 유천간에게 명하여 망산도에 올라 망을 보게 하였는데..
비단 풍석을 달은 범선이 붉은 깃발을 꽃고 서남방으로부터 북을 향하여 달려 오거늘..
왕이 궁성의 서쪽에 만전(장막으로 된 임시의 거처)을 베풀고 기다렸다.
왕후가 배를 매고 육지에 올라 고교(산이름)에서 휴식하고 입은 바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폐백을 드렸다. 그 곳에 당도하자 왕이 만전에 맞아들이고 이틀을 경과한 다음에..
함께 수레을 타고 궁전으로 돌아와 왕후를 삼았다.
한영제 중평 6년(서기189년)인 기사년 3월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이 157세였다.
옛도읍 토성 바깥 구지봉 동쪽에 장사지냈으니 왕능과 300여보의 거리가 되고..
왕능과 더불어 남북으로 마주 바라보였다.
왕자 10인을 두었는데 자신이 동쪽 나라에 멀리와서 성을 전할 수 없음이 슬프다고 하소연하거늘..
왕이 측은하게 여겨 두 왕자에게 왕후의 성을 사성했으니 우리나라에 허씨가 이에서 발단되었다.
나라 사람들이 왕후가 처음 와서 배를 맨 곳을 주포라 이르고 비단바지 벗은 곳을 능형이라 이르며..
붉은 깃발을 바다에 넣은 곳을 기출변이라했다.
○인천이씨의 내력 - 득성조 이허기
인천이씨의 선계는 가야계의 허씨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모든 허씨들의 세보 이전의 인물임으로 명확한 상대의 출계는 상고 할 수 없으나..
다만 서기 755년(신라 경덕왕 14년)에 아찬의 벼슬로 계신 허기(허황후의 23세손)께서 신라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을 때 그해 11월에 안록산의 난이 발생하여 당현종이 756년에 촉 나라로 피난하게 되었다.
그때 위험을 무릅쓰고 허기께서 호종하였으며 757년에 난이 평정되어 황제가 도성으로 돌아와서..
이를 가상히 여겨 시서와 황제의 성인 이씨성을 사성 받아 무술년(758년)에 신라로 환국 하심에..
신라 경덕왕께서 친히 그 공을 높이여 소성백의 작위와 식읍 1,500호를 봉하여 세습케 되었던 것이다.
이로서 허씨에서 이씨가 되었으니 우리는 이허기선조를 득성조라 한다.
※ 아찬:신라 17관등중 여섯 번째 관등
○시조 이허겸
득성조 이허기께서 소성부(인천)의 동쪽 소래산 아래에 거주했으며 휘(이름) 검과 파와 귀와 준은..
대대로 신라의 대관이 되어 소성백을 습봉하였고 그로부터 선대의 어른들께서 인천지방에 세거하면서..
토호문신세력으로써 복록가문의 영달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득성조로부터 10세에 내려와 이허겸공을 1세조로 하여 인천이씨 세보의 본관조로 삼았으며..
이 분이 뒷날 증.상서좌복야.상주국.소성현.개국후에 추증된 시조할아버님이며..
이때가 1024년(고려 현종15년)이다.
김해김씨의 시조인 가락국 수로왕의 후예로 전하며, 수로왕의 장자 계통은 김해김씨이고..
차자는 어머니 허태후의 성을 이어받아 허씨가 되었는데, 인천이씨는 허씨에서 갈리었다.
후에 인천 이씨, 허씨, 김해 김씨는 같은 혈족이라 종친회명을 '가락중앙종친회'로 하였다.
당 현종 이융기(唐玄宗 李隆基, 685년: 수공(垂拱) 원년 9월 8일 ~ 762년: 상원(上元) 3년 5월 3일)는 중국 당나라의 제6대 황제이다. 별호는 당명황(唐明皇)이며, 당 예종 이단의 3남으로, 어머니는 숙명황후 유씨이다. 당 태종 이세민 이후, 번영을 이끌었으나, 쇠퇴를 이끌기도 한 황제이다
재령이씨(載寧李氏) |
▣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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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 이우칭(李禹칭) 시조는 고려의 중신 이우칭이다. 이우칭은 경주이씨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의 7세손으로 고려 초-중기에 보조공신(補祚功臣)에 책록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후 재령군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재령을 본관으로 삼았다. 원래 경주이씨였으나 이 때에 분관하였다. |
▣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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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공부상서 이원영(李元英), 영동정(令同正) 이근인(李根仁), 상장군 이소봉(李小鳳)등으로 대를 이어왔다.
조선시대에 이운용(李雲龍)은 무과에 올라 옥포만호로 임진왜란을 맞아 경상수군(원균)과 전라수군(이순신)이 처음으로 합동작을 펴서 옥포대첩을 거두는데 선봉장이 되신후 임진왜란후에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하고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올라 식성군(息城君)에 봉해졌다. 또한 1607년(선조 40년) 북쪽 오랑캐들이 침입하자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이를 진압했고, 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또한 이숙은 광해군 때 군자감판관을 지냈고 이현일(李玄逸)은 숙종 때 공조참의, 예조참판, 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올라 가문의 명성을 높였다. 이홍훈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를 도와 창령 화왕산성(火旺山城) 등 지에서 적을 물리치고 큰 공을 세웠다. 이정(李瀞)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여 진해, 창원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후 의령현감, 상주목사 등을 역임하고 뒤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이재(李栽)는 학자로서 1713년(숙종 39년)에 "주서강록간보(朱書講錄刊補)"를 지어 간행했고 이휘일은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지만 부임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
▣ 과거급제자(조선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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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맹현(李孟賢) : 문과(文科) 세조6년(1460) 춘당대시 을과(乙科) 장원급제 이함(李涵, 1554 甲寅生) : 문과(文科) 광해군1년(1609) 증광시 병과(丙科) 이윤룡(李潤龍, 1776 丙申生) : 문과(文科) 헌종9년(1843) 식년시 병과(丙科) 이유신(李有臣, 1824 甲申生) : 문과(文科) 철종9년(1858) 식년시 병과(丙科) 이희(李憙, 1691 辛未生) : 문과(文科) 숙종45년(1719) 증광시 병과(丙科) 이상(李○, 1691 辛未生) : 문과(文科) 성종17년(1486) 식년시 병과(丙科) 이징(李徵, 1527 丁亥生) : 문과(文科) 명종16년(1561) 식년시 병과(丙科) 이운(李芸, 1527 丁亥生) : 문과(文科) 성종14년(1483) 춘당대시 병과(丙科) 이세후(李世○, 1681 辛酉生) : 문과(文科) 영조2년(1726) 식년시 병과(丙科) 이맹현(李孟賢, 1681 辛酉生) : 문과(文科) 세조12년(1466) 발영시 삼등(三等) 등 모두 58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15명, 무과 4명, 사마시 3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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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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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덕군 영해읍 창수면 인양2동. 영해파 문중이 4백70여년간 가풍을 이어온 마을이다. 이곳에 뿌리를 내린 인물은 고려때 절신 이오(李午)의 증손자요 성종 때 부제학을 지낸 이맹현(李孟賢)의 아들 이애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장수 이여송이 이마을의 산천경관을 보고 반드시 큰인물이 나올 형세라고 감탄하고 이를 시기하여 영해부(寧海府) 시리목, 쟁이골 등의 산맥을 끊어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이애(王+愛)의 손자 증(贈) 이조참판 이함(李涵)이 인부를 동원, 산맥을 다시 이었고 그후 이씨문중은 당대 천석의 부를 쌓기 시작했고 여러 석학들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
▣ 본관 연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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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소재지 : 황해도 재령 재령(載寧)은 황해도 중앙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구려 때에는 식성(息城: 漢城, 乃忽, 漢忽)이라 불리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 중반군(重盤郡)으로 개칭하였다가, 907년(효공왕 11)에 안주(安州)로 고쳤다. 995년(고려 성종 14)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가 1018년(현종 9)에 방어사를 폐하고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예속시켰으며, 예종(睿宗) 때는 감무(監務)를 두었고, 1217년(고종 4) 거란병의 침공을 막은 공으로 재령(載寧)으로 고치고 현으로 승격하였다. 1397년(태조 6) 풍주(豊州) 관하의 삼지현(三支縣)을 합하였고, 1415년(태종 15) 1천호 이상의 고을을 군(郡)으로 할 때 군수관(郡守官)으로 승격하였다. |
▣ 인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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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재령이씨는 1985년에는 총 11,060가구 45,417명, 2000년에는 총 16,112가구 50,940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
은진송씨(恩津宋氏) |
▣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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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 송대원(宋大源) 시조 송대원(宋大源)은 여산송씨의 시조 송유익(宋惟翊)의 아우 송천이의 후손이다. 송천이의 후손은 대대로 은진에서 살아왔으나 송천익 이후의 대는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고려때에 판원사를 지내고 은진군에 봉해진 송대원(宋大源)을 시조 및 1세 조상으로 하고 본관을 은진으로 하였다. |
▣ 과거급제자(조선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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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흠익(宋欽翼) : 문과(文科) 철종7년(1856) 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송민수(宋敏洙, 1814 甲戌生) : 문과(文科) 고종22년(1885)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송종오(宋鍾五, 1828 戊子生) : 문과(文科) 고종25년(1888) 별시2 갑과(甲科) 장원급제 송병찬(宋秉瓚, 1837 丁酉生) : 문과(文科) 고종28년(1891) 증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송석윤(宋錫胤, 1590 庚寅生) : 문과(文科) 인조2년(1624) 식년시 을과(乙科) 송유룡(宋儒龍, 1650 庚寅生) : 문과(文科) 숙종7년(1681) 식년시 을과(乙科) 송재경(宋載經, 1718 戊戌生) : 문과(文科) 영조40년(1764) 정시 병과(丙科) 송재희(宋載禧, 1711 辛卯生) : 문과(文科) 영조48년(1772) 기로정시 을과(乙科) 송종규(宋鍾奎, 1856 丙辰生) : 문과(文科) 고종29년(1892) 별시4 병과(丙科) 송희원(宋希遠, 1565 乙丑生) : 문과(文科) 인조1년(1623) 개시 병과(丙科) 등 모두 296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78명, 무과 1명, 사마시 216명, 음양과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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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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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世와 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27世孫은 26代孫) |
▣ 본관 연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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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소재지 : 충청남도 논산 은진(恩津)은 충청남도 논산시(論山市)에 속해 있는 지명으로 덕은(德恩)·시진(市津) 두 현을 합한 지명이다. 덕은현은 본래 백제의 덕근군(德近郡)을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덕은(德殷)으로 고치고, 고려 초에 덕은(德恩)으로 개칭하였다. 시진현(市津縣)은 본래 백제의 가지내현(加知奈縣: 加乙奈·薪浦)인데 757년(경덕왕 16) 시진(市津)으로 고치고 덕은군의 영현이 되었다가, 1018년(현종 9)에 덕은과 시진을 모두 공주(公州)에 편입시켰다. 1397년(태조 6)에 현을 두었고, 1406년(태종 6)에 덕은·시진을 합쳐 덕은으로 하고 감무를 두었다. 1419년(세종 1)에 은진(恩津)으로 개명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공주부 은진군이 되었고, 1896년 충청남도 은진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논산군에 병합하여 은진면으로 남아 있다. |
▣ 인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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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은진송씨는 1985년에는 총 42,972가구 179,261명, 2000년에는 총 64,590가구 208,816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
순흥안씨(順興安氏) |
▣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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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 안자미(安子美) 시조 안자미(安子美)는 광주안씨의 시조 안방걸(安邦傑)의 후손이다. 안자미는 고려시대에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 保勝別將)을 역임하고 신호위 상호군(神虎衛 上護軍)에 추증되었다. 후손들이 흥년(순흥)현에 살았으므로 본관을 광주안씨에서 분리하여 순흥으로 하였다.
- 시조 자미의 묘는 경북 영주군 순흥면에 있었으나 없어지고 제단을 설치하여 매년 음력 10월 1일에 향사한다. |
▣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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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자미의 아들 영유(永儒)·영린(永麟)·영화(永和) 3형제 대(代)에서 가세가 일기 시작하여 훌륭한 인맥을 형성하였다.
안씨의 대표적 인물이며 주자학의 태두인 향(珦)은 1파인 영유의 손자이다. 그는 고려 원종 때 문과에 급제,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을 역임했는데 중국에서 쓰는 서적을 도입하여 후진을 양성하는 등 유학의 진흥에 힘썼다. 그의 아들이 찬성(贊成) 우기(于器), 손자가 정당문학(政堂文學) 목(牧)이며, 증손대에서 원숭(元崇)·원형(元衡)·원린(元璘)의 3형제가 있는데 맏이 원숭은 순흥안씨로 이어지고, 둘째 원형은 신죽산으로 갈렸으며, 셋째 원린은 탐진안씨로 분적했다고 한다.
향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는데, 조선의 주요인물로는 침(琛)·당(d)과 위(瑋)·현(玹)·상의 3형제가 있다. 침은 세조 때 문과에 급제, 전라도관찰사·한성부윤·대사헌·경상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내고 공조판서를 거쳐 지돈령부사에 이르렀는데, 그의 5형제는 모두가 현달하였다. 당은 성종 때 친시문과에 급제, 중종 때 형조·공조·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오르고 좌의정이 되었는데 15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으로 아들 처겸(處謙)이 처형당할 때 사사(賜死)되었다. 위는 중종 때 문과에 급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찬수하고 호조판서·형조판서를 지냈으며, 군략가로 이름났다. 현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 명종 때 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을 역임했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상은 음악의 대가로서 선조 때 거문고·비파·장고의 악보를 망라하여 [금합자보(琴合字譜)]를 발간하였다.
3파에서는 고려 말의 명신 축(軸)·보(輔)·즙(輯)의 3형제가 유명하다. 축은 충숙왕 때 원(元)나라 제과(制科)에 급제,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고, 충목왕 때 첨의찬성사·춘추관감사(春秋館監事)가 되어 충렬·충선·충숙왕조의 실록을 편찬하였다. 보는 공민왕 때 정당문학, 즙은 대제학을 지냈는데, 3형제 중 축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그의 아들 종원(宗源)은 조선 개국 후 삼사영사(三司領事)에 오르고, 종원의 아들 경공(景恭)은 조선 개국공신으로 태종 때 집현전 대제학이 되었다. 경공의 아들 순(純)과 손자 숭선(崇善)·숭효(崇孝)도 모두 명신으로 유명하며, 숭선의 현손으로 자유(自裕)·명세(名世) 등이 뛰어난 인물들이다.
근세인물로는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의사 안중근(安重根), 선천(宣川)에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을 암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명근(明根,안중근의 종제), 독립운동가이며 교육가인 안창호(安昌浩)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安益泰) 등이 있다. |
▣ 과거급제자(조선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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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숭선(安崇善, 1392 壬申生) : 문과(文科) 세종2년(1420) 식년시 을과(乙科) 장원급제 안복준(安復駿, 1698 戊寅生) : 문과(文科) 영조4년(1728) 별시2 갑과(甲科) 장원급제 안극효(安克孝, 1699 己卯生) : 문과(文科) 영조17년(1741)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안재린(安在麟, 1820 庚辰生) : 문과(文科) 철종2년(1851) 별시2 갑과(甲科) 장원급제 안정간(安廷侃, 1846 丙午生) : 문과(文科) 고종29년(1892) 별시3 갑과(甲科) 장원급제 안치(安致, 1846 丙午生) : 문과(文科) 태종17년(1417)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안만철(安萬哲, 1846 丙午生) : 문과(文科) 성종21년(1490) 별시 병과(丙科) 안처선(安處善, 1846 丙午生) : 문과(文科) 연산군3년(1497) 별시 을과(乙科) 안수량(安秀良, 1846 丙午生) : 문과(文科) 중종21년(1526) 중시 을과(乙科) 안공신(安公信, 1846 丙午生) : 문과(文科) 중종32년(1537) 식년시 을과(乙科) 등 모두 641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121명, 무과 91명, 사마시 327명, 역과 42명, 의과 24명, 음양과 26명, 율과 9명, 주학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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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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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世와 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28世孫은 27代孫) |
▣ 본관 연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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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 순흥(順興)은 경상북도 영주시(榮州市)에 속해 있는 지명이다. 본래 고구려의 급벌산군(及伐山郡)이었다. 신라 경덕왕 때 급산군(岌山郡)으로 고쳤고, 940년(고려 태조 23)에 흥주(興州)라 하였다가, 1018년(현종 9)에 안동부(安東府)에 속하였다가 순안현(順安縣)으로 이속되었다. 1172년(명종 2)에 감무가 설치되었다. 그 후 충렬왕이 태(胎)를 봉안하여 지흥주사(知興州事)로 승격되었으며, 충목왕이 태를 봉안하여 순흥부(順興府)로 승격되었다. 1413년(태종 13) 도호부로 바뀌었다가, 1457년(세조 3)에 부사 이보흠(李甫欽)이 역모를 꾀하였다고 하여 풍기(豊基), 영천(榮川)에 나누어 편입시켰다. 1683년(숙종 9)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로 복구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안동부 순흥군이 되었다가 1896년 경상북도로 이관하였다. 1914년에 군면 폐합으로 군을 없애고 봉화(奉化)와 영주(榮州)에 각각 편입시켜 영주시에 속한 순흥면으로 남아 있다. 1980년 영주시가 생기면서 영풍군의 관할이 되었다가, 1995년에 영풍군이 영주시에 통합되었다. |
▣ 인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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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순흥안씨는 1985년에는 총 99,937가구 417,598명, 2000년에는 총 145,254가구 468,827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밀양 朴氏).
중시조 박언침은 시조왕 박혁거세의 30세손이요,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맏아들로 경명왕이 여덟왕자를 각기 분봉할 때 밀성대군(密城大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그를 중시조로 하고 밀성이 뒤에 밀양으로 개칭 됨에 따라 본관을 밀양으로 하였는데 옛 지명을 따라 밀성박씨라고도 한다.
밀양 박씨의 세계는 중시조 박언침의 8세에서 6파로,그 아래에서 다시 6파로 나뉘어 크게 12파로 분파되어 파마다 중조를 두고 있으며 이들은 각기 또 여러 소파로 분파되어 내려오고 있다.
그 12파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파조 박언부(朴彦孚).
도평의사공파(都評議事公派);-파조 박언상(朴彦祥).
좌복야공파(左僕射公派);-파조 박언인(朴彦仁).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파조 박양언(朴良彦).
판도판각공파(版圖判閣公派);-파조 박천익(朴天翊).
삼사좌윤공파(三司左尹公派);-파조 박을재(朴乙材).
규정공파(糾正公派);-파조 박 현(朴 鉉).
사문진사공파(四門進士公派);-파조 박 원(朴 元).
밀성군파(密城君派);-파조 박 척(朴 陟).
밀직부원군파(密直府院君派);-파조 박중미(朴中美).
영동정공파(令同正公派);-파조 박원광(朴元光).
정국공파(靖國公派);-파조 박 위(朴 蔿).
이 중 규정공파가 가장 번성하여 전체 밀양박씨의 60% 를 차지하고 있으며 인물 또한 규정공파,밀성군파,좌복야공파,사문진사공파 등에서 많이 배출했다.
밀양 박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261명,상신 1명,문형 1명,청백리 2명,
공신 6명,장신 1명을 배출했다
광주안씨(廣州安氏) |
▣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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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 안방걸(安邦傑) 시조 안방걸(安邦傑)은 고려 태조 왕건이 삼국을 통일하는 시기에 광주지방의 향리(鄕吏)로 광주지방의 안정에 공적이 있어 대장군(大將軍)이 되었고 시조가 광주를 생활근거로 하여 거주하였으므로 본관을 광주로 하였다. |
▣ 과거급제자(조선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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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록(安宗祿, 1566 丙寅生) : 문과(文科) 선조29년(1596)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안욱(安旭, 1564 甲子生) : 문과(文科) 선조35년(1602) 알성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안주(安宙, 1495 乙卯生) : 문과(文科) 중종23년(1528) 식년시 을과(乙科) 안대진(安大進, 1561 辛酉生) : 문과(文科) 선조19년(1586) 중시 병과(丙科) 안헌징(安獻徵, 1600 庚子生) : 문과(文科) 광해군13년(1621) 정시 을과(乙科) 안후석(安后奭, 1683 癸亥生) : 문과(文科) 영조2년(1726) 식년시 병과(丙科) 안효철(安孝轍, 1855 乙卯生) : 문과(文科) 고종24년(1887) 별시 병과(丙科) 안구(安○, 1855 乙卯生) : 문과(文科) 성종25년(1494) 별시 병과(丙科) 안한영(安漢英, 1855 乙卯生) : 문과(文科) 중종2년(1507) 증광시 병과(丙科) 안우(安宇, 1855 乙卯生) : 문과(文科) 중종19년(1524) 별시 병과(丙科) 등 모두 164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45명, 무과 11명, 사마시 10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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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족보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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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오보(戊午譜, 1738) - 기사보(己巳譜, 1749) - 경술보(庚戌譜, 1790) - 병인보(丙寅譜, 1806) - 임술보(壬戌譜, 1922) - 정유보(丁酉譜, 1957) - 계해보(癸亥譜, 1983) : 대동보 - 서령공파보(1999) : 국한문판 |
▣ 항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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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世와 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42世孫은 41代孫) |
▣ 본관 연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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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소재지 : 경기도 광주 광주(廣州)는 서울 남부일대와 경기도 중부를 통칭하는 옛 지명으로 13년(백제 온조왕 13)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라 불리어졌으며, 371년(근초고왕 25)까지 이곳을 한성(漢城)이라 하여 376년간 백제의 도읍이었다. 553년(성왕 31) 신라에게 땅을 빼앗겨 신라의 한산주(漢山州)가 되었다가 756년(신라 경덕왕 15) 한주(漢州)로 개칭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광주로 고치고, 983년(성종 2) 광주목이 되었다. 995년(성종 14) 12절도사를 둘 때 봉국군절도사(奉國軍節度使)로 고쳐 관내도에 예속시켰다. 1012년(현종 3)에는 안무사(按撫使)로 고쳤으며 1018년 목사를 두었다. 1395년(태조 4) 광주목으로 경기좌도에 편입되었다. 1505년(연산군 15) 주를 폐하였다가 1618년(광해군 10)에 광주부로 승격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광주군이 되었다. 1979년 광주면이 읍으로 승격한 이후 1989년 동부읍과 서부면이 하남시로 통합, 독립하는 등 규모는 축소되었다. 2001년 광주군이 광주시로 승격하였다. |
▣ 인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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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광주안씨는 1985년에는 총 12,500가구 53,523명, 2000년에는 총 13,517가구 43,609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
▣ 참고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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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산안씨대동보에 중국에서 들어온 후 안씨 성을 받았다는 기록과 죽산안씨와의 관계를 광주안씨에서는 부인한다. |
문화유씨(文化柳氏) |
▣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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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 유차달(柳車達) 시조 유차달(柳車達)은 원래 차(車)씨이며 차무일(車無一)의 38세손이다. 유차달의 5대조상인 차승색은 신라 애장왕 때 벼슬이 좌승상이었는데 809년(신라 애장왕 10년) 애장왕의 숙부 김언승(金彦昇, 41대 헌덕왕)이 애장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차승색은 애장왕의 복수를 위해 좌승상의 벼슬을 버리고 아들 차공숙과 함께 헌덕왕을 죽이려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령이 내려지자 차공숙을 데리고 도피하여 유주(문화의 당시 지명) 구월산 목방동에 들어가 숨어 살면서 할머니의 성인 양(楊)씨를 모방하여 유씨로 성을 바꾸고 이름도 색으로 고쳤으며, 아들 공숙도 숙으로 이름을 바꾸어 정착하여 살았다. 그후 유차달에 이르러 그 지방의 호부가 되었다.
유차달은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정벌할 때 군량보급이 어려움을 알고 재산을 털어 차 천량을 제작하고 군량을 보급해준 공으로 익찬 벽상공신에 서훈되고 벼슬이 대승에 올랐다. 그의 조상에서 성을 바꾼 사실을 안 태조가 "차씨의 공을 잊을 수 없고 유씨로 성을 바꾼지 6세가 지났으니 유씨도 없앨 수없다."하며 유차달의 첫째 아들 효전에게 차씨를 계승하게 하여 연안 차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둘째 아들인 효금에게는 유주에 살면서 유씨를 계승하게 하였다. 유주가 문화로 지명이 바뀌면서 본관을 문화로 하였다. |
▣ 과거급제자(조선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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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옥(柳沃, 1487 丁未生) : 문과(文科) 중종2년(1507)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유혼(柳渾, 1487 丁未生) : 문과(文科) 중종36년(1541)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유권(柳○, 1487 丁未生) : 문과(文科) 세조2년(1456) 식년시 정과(丁科) 유상(柳常, 1487 丁未生) : 문과(文科) 세조14년(1468) 별시 을과(乙科) 유인홍(柳仁洪, 1487 丁未生) : 문과(文科) 성종12년(1481) 친시 을과(乙科) 유성춘(柳成春, 1487 丁未生) : 문과(文科) 중종9년(1514) 별시 병과(丙科) 유게(柳○, 1526 丙戌生) : 문과(文科) 명종11년(1556) 알성시 병과(丙科) 유영서(柳永緖, 1549 己酉生) : 문과(文科) 선조9년(1576) 식년시 을과(乙科) 유중룡(柳仲龍, 1558 戊午生) : 문과(文科) 선조33년(1600) 별시 병과(丙科) 유정립(柳鼎立, 1583 癸未生) : 문과(文科) 광해군10년(1618) 증광시 을과(乙科) 등 모두 610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141명, 무과 67명, 사마시 389명, 역과 7명, 의과 5명, 율과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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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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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世와 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32世孫은 31代孫) |
▣ 본관 연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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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소재지 : 황해도 신천 문화(文化)는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문화면 일대에 있던 옛 지명으로 단군(檀君) 때에는 당장경(唐藏京: 황해도 구월산 밑에 단군의 네 아들이 도읍을 정했던 곳으로 추정)이었고, 고구려 때는 궁홀현(弓忽縣) 또는 궁올현(弓兀縣)으로 불리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궐구현(闕口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중반군(重盤郡: 載寧)의 관할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유주(儒州)로 개칭하였다가 1018년(현종 9)에 풍주(豊州)로 다시 바뀌었으며, 1106년(예종 1)에 감무가 파견되었다. 1259년(고종 46)에 문화현으로 승격된 이래 조선시대에도 유지되었다. 시령(始寧)·문성(文城) 등의 별호가 있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해주부 문화군이 되었다. 1896년 황해도로 이속되었으나 1909년에 문화군은 신천군으로 폐합되면서 문화면으로 축소되었다. |
▣ 인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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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문화유씨는 1985년에는 총 60,911가구 255,632명, 2000년에는 총 87,186가구 284,083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
경주최씨(慶州崔氏) |
▣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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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 최치원(崔致遠) 시조 최치원(崔致遠)은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의 24세손이며 신라 말기의 대문장가이다. 최치원은 869년(신라 경문왕 9년) 12살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을 간지 5년후 1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무랑시어사에 이르고 자금어의를 하사 받았으며, 제도행영 병마도총 고변의종사관을 역임하고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 병부시랑 지서서감이 되었으나 외직을 원하여 대산, 천령, 부성 등지의 태수를 역임하고 아손이 되었다. 그후 난세를 비관하여 전국을 유랑하다가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하며 수도하다 63세로 생을 마쳤다. 그는 한시문집으로 '계원필경(桂苑筆耕)'(20권) 등의 명저를 남겼다. |
▣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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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승로(承老) : 고려 성종 때 문하시중을 역임하였다. - 최항(沆) : 고려 현종 때 평장사를 지냈다. - 최제우(濟愚) : 동학의 창시자로 유명하다. - 최시형(時亨) : 동학의 제2대 교주이다. - 최익현(益鉉) : 한말의 거유(巨儒)로,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단식으로 일생을 마쳤다. - 최준(浚) : 경주시 교동에서 '최부잣집'으로 이름났다. 이 '최부잣집'은 12대 만석(萬石), 10대 진사(進士)로 유명하다. 최씨는 조선시대에 와서는 퇴조를 보여 겨우 문과에 42명을 배출하였을 뿐 상신, 대제학 가운데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다. |
▣ 과거급제자(조선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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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지(崔敬止) : 문과(文科) 세조6년(1460) 별시 을과(乙科) 장원급제 최관(崔灌) : 문과(文科) 성종5년(1474)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최벽(崔璧, 1762 壬午生) : 문과(文科) 정조7년(1783)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최유종(崔有悰, 1762 壬午生) : 문과(文科) 태종14년(1414) 친시 을과(乙科) 최응각(崔應珏, 1846 丙午生) : 문과(文科) 고종3년(1866) 평안도도과 을과(乙科) 최덕명(崔德明, 1834 甲午生) : 문과(文科) 고종3년(1866) 평안도도과 병과(丙科) 최중태(崔重泰, 1656 丙申生) : 문과(文科) 숙종12년(1686) 별시 병과(丙科) 최예(崔汭, 1371 辛亥生) : 문과(文科) 태조2년(1393)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최정진(崔廷鎭, 1769 己丑生) : 문과(文科) 순조3년(1803) 별시 병과(丙科) 최익현(崔益鉉, 1823 癸未生) : 문과(文科) 철종6년(1855) 별시 병과(丙科) 등 모두 669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42명, 무과 89명, 사마시 166명, 역과 86명, 의과 54명, 음양과 15명, 율과 14명, 주학 20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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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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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世와 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33世孫은 32代孫) |
▣ 본관 연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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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 경주(慶州)는 경상북도 남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기원전 57년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를 형성, 국호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로 하고,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65년(신라 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 시조가 탄생하여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다.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다. 935년(고려 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왕건에 항복하자 경주로 개칭하고 식읍을 주었고, 그를 사심관으로 삼았다. 비로소 처음으로 경주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유수(留守)를 두어 영동도(嶺東道)에 속하게 하였다. 1008년(목종 11) 때 낙랑군(樂浪郡)이라 별칭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편하였다. 1202년(신종 5) 경주 야별초의 반란으로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219년(고종 6) 동경으로 환원되었다. 1413년(태종 13) 계림부를 경주부로 개칭한 이후 1415년 병마절도사영을 두었다가 1417년 울산으로 이전하였다. 1637년(인조 15)에 속현인 자인현이 분리 독립하였다. 1895년(고종 32) 군면 폐합으로 경주군이 되었고, 1955년 경주읍과 내동면 전역, 천북면과 내남면 일부가 통합되어 경주시로 승격했으며, 경주군은 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1989년에는 월성군이 경주군으로 개칭되었다. 1955년에는 경주군과 통합하여 시로 승격하였다. |
▣ 인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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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경주최씨는 1985년에는 총 210,154가구 876,732명, 2000년에는 총 304,722가구 976,820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
경주김씨(慶州金氏) |
▣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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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는 신라 왕실의 삼성(박,석,김) 가운데 하나다. 시조 김알지의 7세손인 미추왕(신라13대)에 이르러 비로서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서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알지의 28세손)이 935년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빼앗기기 까지 38명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경주김씨는 경순왕의 아들 9형제 중 셋째 아들인 영분공(永芬公) 김명종(金鳴鍾 : 영분공파)과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 : 대안군파)을 1세조로 하는 계통이 대표적이며, 조상에 대한 계통은 확실하지 않으나 경순왕의 후손으로 전하는 김장유(金將有 : 판도판서공파), 김인관(金仁琯 : 태사공파), 김순웅(金順雄 : 대장군공파)을 1세조로 하는 계통 등 크게 5파로 갈라져 후대로 내려오면서 10여 개의 지파(支派)가 생겨났다. 그후 후손들이 번성함에 따라 현달한 인물이나 살고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분관되어 나갔다. |
▣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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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분공파 파조인 김명종은 경순왕이 나라를 빼앗긴 후 고려에서 경주군(慶州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8세손 김의진(金義珍)은 유학(儒學)의 종주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고, 12세손 김인경(金仁鏡)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고려의 명신으로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라 시와 글씨로 명성을 떨쳤다. 김명종의 6세손 김예겸(金禮謙)이 고려 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내중령(內中令)을 지냈고, 김예겸의 손자 김의진(金義珍)은 고려 사학(私學) 12공도(公徒)의 하나인 양신공도(良愼公徒)를 육성하였으며 문종 때에는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지공거(知貢擧)를 겸하여 인재등용에 공헌하고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다. 김의진의 증손자 김영고(金永固)는 무신의 난을 일으킨 정중부(鄭仲夫)와 이의방(李義方)을 제거하려 했던 인물이며, 김영고의 아들 김인경(金仁鏡)은 문무를 겸한 명신으로 고종 때 조충(趙沖)과 함께 강동성(江東城)에서 거란군 평정에 공을 세우고 벼슬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시문(詩文)과 예서(隸書)로 명망이 높았다.
대안군파 파조인 김은열은 공부시랑(工部侍郞)을 거쳐 대안군에 봉군되고 그의 후손들이 여러 본관으로 분관되었다. 김은열의 8세손 김봉모(金鳳毛)는 외국어에 능하여 사신이 오면 관반사(館伴使 : 외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하여 임시로 임명한 정3품 벼슬)로 천거되었으며 나라의 큰 일에는 항상 전례(典禮)의 일을 맡아보았다. 김봉모의 아들 김태서(金台瑞)는 고종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고, 특히 그의 아들 김약선(金若先 : 공부시랑), 김기손(金起孫 : 평장사), 김경손(金慶孫 : 추밀원 부사) 3형제가 유명했다.
판도판서공파 파조 김장유는 고려말에 정국이 혼란하자 충청도 보은 땅에 은둔하여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김장유의 후손에서는 정랑(正郞) 김효정(金孝貞)의 아들인 조선 중종 때의 명신 김정(金淨)이 뛰어났다. 그는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중종 때에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실현을 위하여 혁신정치를 시도하다가 기묘사화가 일어나 서른 여섯 살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에 대한 일화가 "당적보(黨籍譜)"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가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정언(正言) 등을 거쳐 순창군수(淳昌郡守)로 나가 있을때 그의 옛 글벗인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 이항(李沆)이 청탁편지를 부쳐왔다. 그 편지는 직함을 갖추어 쓰고 도장을 찍었으며 우정있는 말은 한 마디도 없고 마치 높은 자리서 하명하는 듯한 글투였다. 이에 김정은 거절의 뜻을 밝히고 아래와 같은 시를 써 넣었다. "서당에서 같이 배우고, 옥당에서 같이 있다가 남녘 시골로 흘러내린 병든 이 한 몸이라 천상에서 화려한 직함인 승지 이씨여 편지 쓸 즈음에 옛 벗 생각 을 했는가." 이 시에 앙심을 품은 이항은 후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김정의 죄를 추론하는데 앞장섰다. 그외에도 그가 제주도로 귀양가다가 해남 바닷가 노송 아래서 회포를 달래며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적은 시가 전하며, 36세로 사약을 받을 때 남긴 절명사(絶命詞)가 유명하다.
태사공파 파조 김인관은 고려 예종 때 조산대부(朝散大夫)로 위위시경(衛尉寺卿)을 지내고 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에 올랐다. 김인관의 9세손 김자수(金自粹)는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망국의 한을 안고 안동에 은둔하였다. 그가 사사(賜死)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가 김세필(世弼)이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옥중에서 입던 피묻은 옷을 가지고 나와서 통곡하며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화를 당하여도 오히려 위에 성군(聖君)이 계셨기 때문에 다행히 살게 되었지만, 지금 임금께서는 나이가 겨우 십여 살이고 간신들이 꼭 너를 죽이려 하니, 네가 어찌 죽음을 면할 것이냐"하였다. 한편 김자수(金自粹)의 9세손 김홍익(金弘翼)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의병을 일으켜 전쟁에서 순절하였고, 아우 김홍욱(金弘郁)은 효종 때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있으면서 앞서 인조 때 사사(賜死)된 민희빈 강씨(姜氏)와 그녀의 어린아들의 억울함을 상소하다가 효종의 노여움을 사 친국(親鞠)중에 장사(杖死) 되었다. 김홍욱의 손자 김흥경(金興慶)은 영조 때의 상신(相臣)이었고,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金漢藎)은 영조 때의 부마(駙馬 :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혼인)이면서도 겨우 두 칸 집에 살면서 비단은 걸쳐 본 일도 없고 가마를 타는 법도 없이 청빈하게 살다가 아들이 없어 형의 아들인 이주를 양자로 삼았다. 참찬(參贊) 이주의 손자인 추사 김정희(金正喜)는 학문에 있어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書藝)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켜 특히 예서와 행서에 새로운 경지를 이룩하였다. 그밖의 인물로는 호장(戶長) 위영(魏英)의 증손 김부필(金富弼), 김부일(金富佾 : 수태위를 역임), 김부식(金富軾), 김부의(金富儀 : 지추밀원사를 역임)가 유명했다. 고려 문종과 의종대에 걸쳐 문무를 겸한 명신으로 유명한 김부식(金富軾)은 인종이 즉위하자 왕실외척임을 빙자하여 권세를 쥐고 군신의 예의에 벗어나는 행동을 일삼던 이자겸(李資謙)의 방자함을 충고하여 이를 시정하게 하였고, 42년간 벼슬에 있으면서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1145년(고려 인종 23년) 왕명을 받들어 우리나라 최초의 정사(正史)인 "삼국사기(三國史記)" 50권을 완성하여 바치는 등 이름난 문장가(文章家)로 송나라에까지 명성을 떨쳤다.
대장군파 파조 김순웅은 고려 초에 상장군(上將軍)을 거쳐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하였다.
병판공파 파조 김덕재(金德載)는 김은열의 12세손으로 조선 창업에 공을 세워 보좌공신(補佐功臣)에 책록되고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한 후 함경도 정평에서 은둔하였다.
장사랑공파 파조 김존일(金存一)은 김은열의 16세손으로 고려말에 장사랑(將仕郞)에 올랐다.
이렇게 역사를 수놓은 경주김씨는 한말에 와서도 그 가통을 이어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고종 때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지낸 김영작(金永爵)의 아들 김홍집(金弘集)은 한말 외세와 개화의 틈에서 처참하게 희생당한 인물이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김정집(金鼎集)의 아들 김창희(金昌熙)는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거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올랐으며, 김철희(金喆熙)는 황주 목사(黃州牧使)로 재직중 1885년(고종 22년) 황해도 토산에서 일어난 민란을 진압하여 승녕부 종장(承寧府從長)을 지낸 김춘희(金春熙)와 자산으로 도서관을 설립한 김인정(金仁貞), 중국 원세개(袁世凱 : 중화민국의 초대 대통령)의 옥새를 새겼던 서예고문 김태석(金台錫), 아악부원양성소(雅樂部員養成所)를 개설한 김영제(金寧濟), 청성곡(淸聲曲)의 명수 김계선(金桂善) 등과 함께 명문의 전통을 이었으며, 김용원(金庸源)과 김도태(金道泰)는 조국의 자유수호와 광복을 위하여 몸바쳤다. |
▣ 과거급제자(조선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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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령(金千齡, 1469 己丑生) : 문과(文科) 연산군2년(1496)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정(金淨, 1486 丙午生) : 문과(文科) 중종2년(1507) 증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만균(金萬鈞, 1486 丙午生) : 문과(文科) 중종23년(1528)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경원(金慶元, 1528 戊子生) : 문과(文科) 명종8년(1553)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종일(金宗一, 1597 丁酉生) : 문과(文科) 인조3년(1625)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노영(金魯永, 1747 丁卯生) : 문과(文科) 영조50년(1774)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영삼(金永三, 1784 甲辰生) : 문과(文科) 헌종5년(1839)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작(金綽, 1784 甲辰生) : 문과(文科) 태종14년(1414) 식년시 을과(乙科) 김구(金鉤, 1784 甲辰生) : 문과(文科) 태종16년(1416) 친시 을과(乙科) 김미(金楣, 1784 甲辰生) : 문과(文科) 예종1년(1469) 추장시 을과(乙科) 등 모두 1218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203명, 무과 277명, 사마시 542명, 역과 82명, 의과 36명, 음양과 34명, 율과 6명, 주학 3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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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 연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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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 경주(慶州)는 경상북도 남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기원전 57년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를 형성, 국호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로 하고,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65년(신라 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 시조가 탄생하여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다.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다. 935년(고려 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왕건에 항복하자 경주로 개칭하고 식읍을 주었고, 그를 사심관으로 삼았다. 비로소 처음으로 경주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유수(留守)를 두어 영동도(嶺東道)에 속하게 하였다. 1008년(목종 11) 때 낙랑군(樂浪郡)이라 별칭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편하였다. 1202년(신종 5) 경주 야별초의 반란으로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219년(고종 6) 동경으로 환원되었다. 1413년(태종 13) 계림부를 경주부로 개칭한 이후 1415년 병마절도사영을 두었다가 1417년 울산으로 이전하였다. 1637년(인조 15)에 속현인 자인현이 분리 독립하였다. 1895년(고종 32) 군면 폐합으로 경주군이 되었고, 1955년 경주읍과 내동면 전역, 천북면과 내남면 일부가 통합되어 경주시로 승격했으며, 경주군은 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1989년에는 월성군이 경주군으로 개칭되었다. 1955년에는 경주군과 통합하여 시로 승격하였다. |
▣ 인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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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경주김씨는 1985년에는 총 361,189가구 1,523,469명, 2000년에는 총 542,018가구 1,736,798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