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장승업 일대기 5월 개봉 <취화선>
지난해 7월에 시작해 마지막 하루, 이틀을 남겨 놓은
양수리 오픈세트 촬영 현장은 이제 여유와 느긋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촬영 시작할 때부터 숙제였던 오원
장승업이 사라지는 장면 처리에 대해 “최선의 노력과
정성, 주변의 도움이 모아졌으니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겠느냐”고 답하는 임권택 감독에게서도 느긋함이
느껴진다.
<醉畵仙(취화선)> . 영화는 조선조 말기 기행을 일삼았던 천재화가 오원 장승업의 파란만장한 삶과 작품세계를 그렸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기록이나 전승은 지극히 적다. 왕명으로 궁궐에서 그림을 그리게
되지만 갑갑한 궁궐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궁에서 뛰쳐나갔다, 술과
여자를 좋아했고, 일반인들이 흰옷을 입고 다닐 때도 그는 녹색옷을
입고 다닐 만큼 관습에 구애받지 않았다, 따위 뿐이다. 그것만으로 구성했으니 40여년 영화감독으로 한 길을 걸어온 임 감독의 예술가로서
고뇌가 깊이 배인 작품이라 하겠다.
“장승업을 기이한 행적을 가진 사람으로만 보는 건 옳지 않다. 화가로서 치열한 삶을 살다보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긴세월 오직 한 우물
파고 산 사람들이 겪을 수 있을 얘기로 풀었다. 행방불명된 뒤에 신선이 됐다는 얘기도 전해지지만, 그것도 환쟁이로서 거듭나보고자 고뇌를 안고 살던 끝에 없어졌다고 봐야 한다.”
영화는 양수리에 지어진 오픈세트에서 주로 촬영했지만, 횡계, 서산,
해남, 선암사, 경주, 벌교 등 자연풍광이 아름다운 전국 20여 군데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른봄 매화 꽃망울에서 산의 눈꽃에 이르기까지 사계절의 아름다운 풍경이 장승업의 유랑길을 따라가는 화면에 고스란이 담겨 있다. 임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이 직접 다니면서 헌팅한 장소들이다. 개봉 뒤 “그 장소가 어디냐”는 물음을 꽤나 들을 것같다고 제작진은 자신한다.
오픈 세트는 임 감독이 자랑하듯 “영화사적으로 문화재급”이다. 순제작비 50억원에 세트 제작비만 22억이 들었다. 조선말기 서울 종로거리를 그대로 재현했는데, 문화재 기능보유자들이 참여해 세트의 기본골재를 담당했다. 돌담길은 전라도 토말 수몰 예정지에서 흙돌담
자체를 그대로 걷어왔고, 문짝은 고문짝을 수집했다. 한식기와 26동,
한식초가 35동으로 이뤄진 세트는 한옥의 아름다움은 물론, 방안, 방밖, 거리 어느 곳이건 실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 같다.
영화진흥공사가 세트 건립기금의 30%를 지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금지원이 아니라 영화진흥공사의 시설 이용비로 대체하도록 했다. 앞으로 두편은 더 만들어야 지원금을 모두 받게되는 셈이라고 한다. 제작자인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은 “생색만 내는 영화진흥공사의
지원금 제도”를 꼭 지적해달라고 기자에게 당부했다. <취화선>은 칸
영화제 등 해외로부터 관심을 모으고 있으며 편집을 거쳐 오는 5월경
개봉할 예정이다.
최민식 “그분으로 1년을 살며 사람에 취했습니다”
> 장승업으로 1년 가까이 살아온 배우 최민식씨는 촬영을 거의 끝낸
요즘 그를 떠나 보낼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파온다. “그분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몸짓을 하고, 참 많이도 지지고 볶고 살았는데…. 촬영이 끝나면 보내드려야지요. 만나고
헤어짐이 다 그렇다지만 그분과의 이별은
너무 슬픕니다.”
최씨는 극중 배역과 동화되는 걸 영적인 작업이라고 말한다. 눈에는 안 보이는 인물이지만 그 영혼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을 깍아내고 그가 되는 작업이 바로 최씨가 생각하는 연기다.
“오원 선생은 자기 의지대로, 양심에 따라
철저하게 자유롭게 살았던 분입니다. 부럽지요. 저는 좀생이라서 죽었다 깨나도 그렇게는 못 살거예요. 하지만 작품을 하면서 만난 그분을 통해 제 연기의 매너리즘을 되돌아보고 많은 자극을 받았습니다. 제 배우 인생에서 의미있는 작품이 될 것같습니다.”
최씨는 임권택 감독과의 작업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작품을 택했다. 그리고 장승업을 연기하면서 참 행복했다. 사극이 처음인데다 삼복더위에 수염 붙이고 머리도 붙이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촬영을 하느라 육체적으로 많이 부대끼기는 했지만, 임 감독의 연출세계를 직접
접할 수 있어 좋았다. <취화선>을 만드는데 도움을 준 당대의 예술가들과 만나 술먹고 얘기를 나누며 감동의 순간을 맛볼 수 있었던 것도
잊을 수 없는 경험이다.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오원 선생의 실제 작품을 들고와 악수하라고
말씀하신 일랑 이종상 서울대 박물관장, 저의 그림 그리는 장면을 대역했던 중앙대 김선두 교수, 단소를 가르쳐준 곽태규 국립국악원 정악단 악장 등 <취화선>이 아니었다면 제가 어떻게 그런 분들을 만나
편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었겠습니까.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경험이고 개인적인 복이지요.”
최씨는 지난해 <파이란>의 강재역으로 최민식 연기의 정점을 보여주면서 국내에서 주는 최고의 남자배우상은 거의 휩쓸었다. “지난해는
호랑이 없는 굴에서 토끼가 왕 노릇했던 셈입니다. 하지만 올해는 설경구, 송강호, 한석규 등 선수들이 나오는 해입니다. 중원의 협객들이
진검승부를 펼치는 해라고나 할까요.”
최씨와 인터뷰를 하면서 그가 참 매력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꼴리는 영화를 택했지, 하기 싫은데 흥행이 될 거라는 생각에서 영화를 한 적은 없다” “예전에는, 이건 딱이야. 나야. 내가 할
수 있어, 그랬지만 이제는 내가 정말 제대로 하고 있는지 겁이 난다”
“개판으로 그리는 건 프로세계에선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건 문화범죄다. 제대로 못하면 7000원을 받아서는 안된다”. 이렇게 토하듯 말하는 그에게서 오는 5월 최민식,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이란 낭보를 기대하는 건 좀 지나친 환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