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숨은 글 힘’ 찾기 - 「노을」과 「오세암」

[이오(9기 정은주^^*)]

나무가 단단히 뿌리내리기 전에 

화사한 꽃과 실한 열매를 보려는 마음은 우물에 가 숭늉 찾는 격이다. 

빨리 읽기를 욕심내면 깊이 읽기 어렵다. 

그래서 장편에만 눈독을 들이고 소설을 넘겨다보는 5-6학년에게 단편을 안겨 주고, 

한 문장 한 문장 꼭꼭 씹듯이 읽어 보라고 권한다. 슬로푸드처럼 ‘천천히 읽는 맛’을 알려 주고 싶어서다. 

‘글자를 읽는 즐거움’과 ‘글을 읽는 즐거움’은 엄연히 다르다. 

「노을」에서는 ‘글자로 쓴 그림’을 보고, 노을 셋을 찾을 줄도 안다.

나룻배는 건너편 둑을 출발해서 빨갛게 깔린 비단 같은 노을 위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중략)
밀짚모자를 가리키는 아이의 손을 좇아서 고개를 돌린 여인의 얼굴이 순간 석고처럼 굳어졌다. 그러나 이내 두 뺨에 노을이 번졌다. 
(중략)
호수에 비친 세 사람의 모습을 노을이 환하게 감싸 안고 있었다.(『물에서 나온 새』, 44-45쪽) 

곧이곧대로 드러내지 않고, 에둘러 말하는 글은 힘이 있다. 

눈에 보이는 글자로부터 보이지 않는 뜻까지 읽는 ‘숨은 글 힘 찾기’는 숨은그림찾기만큼이나 즐겁다. 
아이들은 「오세암」에서 
     
흰구름이 우물 속에서 꼼짝하지 않고 낮잠을 자는 오후였다.(『오세암』, 33쪽) 
     
를 곱씹어 읽고 나면, 

일기에 날씨 쓸 때도 자기 글투 찾기에 적극적이다. 

기계적 비유를 뛰어넘어 지극히 주관적 표현에도 망설임이 없다. 
     
2월 27일 햇살이 강해지고 있다. - 김현중
3월 17일 따뜻한 하루, 드디어 봄. - 김동현 
5월 3일 여름 기운이 감돈다. - 심재섭 
9월 19일 심술쟁이 검은 구름이 흰 구름에게 졌다. - 이혜리
11월 7일 낙엽이 계속 떨어지면서 기온도 함께 떨어진다. - 박기범
     
7월 19일 비가 얄밉게 조금씩 내렸다. - 박나연
9월 19일 아주 더워서 잠깐 걸어도 땀이 날 정도였다. - 예재민
11월 29일 어제 비가 와서 기분이 축축하다. - 김현중

아이들이 알맞은 수준의 책을 섭렵할 때,

줄거리만 기억하는 데 급급하지 않고 되새김질하며 읽는 감성적 독서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읽은 책 목록만 평가할지, 내실 있는 독서력 토대 마련에 치중할지 고민해 볼 일이다. 

누구라도 의무적 독서가 아니라 

책 읽는 즐거움을 누리기 바란다. 그러므로 아이 책값을 치를 때, 

만 원짜리 지폐 바탕에 쓰인 용비어천가를 한번쯤 눈여겨보아도 좋으리라. 
     
불휘 기픈 남★ ★★매 아니 뮐★ 곶 됴코 여름 하★니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므로 꽃이 좋고 열매가 많습니다.)

- 어린이책이야기, 2009 봄

[이오(9기 정은주^^*)]

혜화동 성당을 찾는 대신 글 한 편 올립니다. 저도 <노을> 좋아합니다. ^^

[지슬영 (24기)]

정말 글을 읽는 즐거움이 있는 단편이에요. 아이들이 쓴 날씨도 읽는 즐거움이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