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럭키맨
자식 군대 보내며~
여러분!
2010.01.05 오늘 우리집 둘째 아들이 입대 했습니다. 제가 몇 년 전까지 살았던 전주 송천동에 있는 35사단으로 입대했는데 훈련도, 자대생활도 전북을 떠나지 않는다고 하네요. 운전병으로 레바논 파병까지 했던 저희 형이 지난해 전역했는데 그 영향 받았는지 이 녀석도 운전병 지원입대했답니다. 어제밤에 식구 다 모여 입대파티를 저녁 먹는 걸로 했습니다. 아들 두 녀석이나 있다 보니 이번에는 별 느낌 없습니다. 그나저나 돈 뜯길 걱정이~ 뻑 하면 집에 올 것 아닙니까? 그때마다 그냥 보내지 못할 거고 말입니다. 오늘 점심까지 사 먹이고 부대까지 데려다 주고 왔습니다.
다음은 16년 전 두뇌충격부상으로 끊긴 필름 회복 위해 10년 전에 썼던 군대얘기입니다. 길더라도 인내심 가지고 살펴보십시오.
신고합니다.(단결-상승 열쇠부대)
오늘밤('01.1.29) 방영된 신고합니다의 출연부대는 상승5사단 열쇠부대였다. 얼핏보기에 촬영 장소는 내가 GP에서 근무할 할 때 주둔해 있던 부대, 다시 말해 36연대 3대대가 예비대대로 주둔하고 있던 부대의 연병장 같았다. 다음 글은 지난해 썼던 글이다.
2000년 2월 21일, 월
매주 월요일 밤7:30분에 KBS1에서 방영되는 '신고합니다'를 시청하고 있다. 지난주에 광고하기를 오늘은 '열쇠부대'가 출연한다고 해서 일부러 관심 있게 시청한 것이다. 열쇠부대는 보병 제5사단으로 5214부대이고 전곡에 사단 본부가 있으며 그 밑에 포병여단과 27연대, 35연대, 36년대, 수색대가 있었으며, 나는 36연대(7895부대) 3대대 본부중대 탄약소대 요원이었으나 부대 내에 있는 교회에 파견되어 군종병으로 복무했다.
'군인은 졸아도 국방부 시계는 돈다'라는 말이 군 세계에서 회자되는 것처럼 33개월을 채우고 만기 전역했던 것이다. 기억력 회복에는 오늘 TV시청이 참 좋았던 것 같다. 달아난 과거회복을 위해 군대생활을 피력해 보겠다.
하나, 의정부 101보충대 입소
79.8.14일에 입대하여 82.5.19일에 전역했다. 오늘 TV에 출연한 예비역들이 77년에서 79년까지 군대생활을 했던 예비역들이었으니 나에게는 5사단 직속 고참들이었던 것이다. 79년8.14일 장성국민학교(전남 영광, 장성의 소집병력)에 집결하여 장성역에서 기차에 태워져 끌려간 곳이 의정부에 있는 101보충대였다.
그때부터 그 힘들다는 군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1주일을 대기하며 입고간 사복을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보냈고 국방색 군복 및 군수품2,4종을 지급 받아 더블 백에 채웠고 '군발이' 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1주일을 대기하며 여기저기 끌려 다니며 신체검사를 받았고 현역으로 재판정 받아 23008939라는 군번을 수여 받았다.
주특기는 일공사(104)를 부여받았다. 주특기가 일빵빵(100)인 소총수보다는 좋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 104는 M60이라는 기관총을 다루는 군인의 주특기이다. 월남전을 무대로 하는 전쟁영화에서 영화 속의 주인공 람보가 어깨에 걸쳐 메고 드르륵 쏘아대는 총이 M60이라는 기관총이다. 그때까지도 구식 기관총인 LMG가 있었고 가끔 본 것 같다.
둘, 5사단 입대, 활동무대 대광리
101보충대로 입소한 장정들은 경기도 지역으로 팔리고 103보충대로 입소한 장정들은 강원도 지역으로 팔린다는데, 그래서 그 험하다는 강원도 산골짜기로 끌려가며 한다는 말,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죽겠네! 라는 말이 회자되곤 했다. 나는 101보충대로 입소했으니 경기도 지역 다시 말해 휴전선으로는 중부전선에 있다는 5사단으로 팔려 군용 트럭에 실렸던 것이다.
기억에는 아련하지만 야월산이라는 최전방 고지가 있고 거기에는 그때까지 레이더를 취급하는 미군이 주둔해 있었다. 그 앞의 휴전선 북쪽 지역에는 유명한 김일성고지가 있고 그 앞으로는 철원평야가 있는데 휴전선 철조망이 철원평야를 동서로 가로질러 남과 북을 만들고 있으며, 그 지역은 6.25동란 때는 철의 삼각지대(철원, 평강, 김화)로 유명했던 지역으로 알고 있다.
원산이 종점이라는 경원선의 종단역 '신탄리'라는 역이 철원평야 입구에 있고, 각종 화보에 많이 나오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리는 그 유명한 표지가 있으며 그곳에 나도 몇 번 놀러 가본 것 같다.
5사단은 원래 경기도 양평에 주둔하고 있던 교육사단이었으나 20사단과 임무교체가 되어 최전방 철책사단으로 투입되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20사단 병력 중에 월북한 사건들이 잦아 (연대장이 월북)당시 후방에서는 전군 최우수 부대로 평가받고 있던 5사단과 임무교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복무중일 때 고참들로부터 교육사단으로 양평에 있을 때 받았던 고된 훈련에 대해서 종종 들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 공수부대 중에 5공수라는 부대는 없지만 훈련이 공수부대를 뺨치게 혹독했으며 그래서 5사단을 일명 5공수라고 불렀다고 한다. 유격훈련은 말할 것도 없고 공수훈련까지 받았다는데 그때 지급 받았다는 공수부대 부품을 2,4종 창고에서 더러 봤던 것 같다. 그 5공수의 실세가 36연대였다는데 내가 그 36연대에 떨어진 것이다. 양평에 주둔해 있을 때는 밥 먹고 하는 일이 그 고된 훈련, 훈련이었다는 말을 고참들에게 귀에 익게 들었던 것 같다.
셋, 입대전후 시끄러웠던 나라사정
부대가 교체된 후 얼마 안되어 79년 10.26사건(박정희 대통령 피살)이 터졌고, 그때 나는 신병훈련을 마치고 막 자대에 배치(36연대 3대대) 받았는데 바로 비상이 걸려 최전방 고지 참호 속에서 벌벌 떨며 그 날 밤을 보냈던 기억이 새롭다. 그 이듬해 80년 5.18광주민주화 항쟁 이 일어났고 전군에 데프콘Ⅱ라는 비상이 걸려 다시 고지에 투입되었으며 이 나라의 장래와 불투명한 내 인생의 행로에 대해서 고민했던 기억도 새롭다. 그때 광주에 투입된 진압부대가 바로 20사단이었는데 만일 5사단이 그대로 양평에 있었더라면 우리가 광주에 진압부대로 투입되었지 않았겠는가.
그러니까 나는 암울했던 그 시기 -80년대 초- 다시 말해 민주화 바람이 세찼던 시기에는 군에 몸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넷, 5사단 신병교육대와 자대 배치
말이 옆으로 흘렀지만 다시 신병교육대로 가보자. 의정부 101보충 대를 떠나 비포장 도로를 달리고 달려 경원선 철길을 보며 전곡, 연 천을 지나 대광리에 있는 5사단 신병교육대에 입소했다.
대광리 역은 신탄리 역 바로 밑의 역이다. 대광리는 훈련이 끝나고 자대에 배치 받아 근무하면서 뻑 하면 외출하여 일을 본다며 소일했던 지역이고, 그때 내가 연락본부로 삼고 드나들었던 집은 역전 사거리 밑에 있던 '수성사'라는 잡화점이었는데 그 가게 주인 아저씨와 아줌마는 안녕하신지 궁금하다. 빨빨거리며 뒤집고 다니던 대광리 시가지가 눈에 선하다.
대광리에 소재하고 있는 신병교육대에서 훈련받을 때 야외 훈련장을 가로질러 달리는 기차를 바라보며 눈물 깨나 흘렸고, 나는 언제 저 기차를 타고 '고향 앞으로 가'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한탄 깨나 했던 것이다. 6주간간의 신병교육, 4주는 군인의 기초교육으로 그야말로 피눈물나는 전반기 교육을 받았고 후반기 2주는 주특기 교육으로 M60을 다루는 기관총 사수의 교육을 받았다.
훈련을 마치고 전곡에 있는 5사단 휴양소에서 3,4일 휴양하며 대기하다 팔린 곳이 연천 신망리에 본부가 있는 36연대였다. 거기서부터 내 인생의 행로가 확실하게 바뀐 것이다.
다섯, 주특기 군종보직과 자대 생활
연대본부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연대 군종병이 나타나 신원을 파악하는데 그때 나는 전북신학을 1학기 마치고 입대했던 터라 신학교 출신임을 밝혔고 그러자 곧바로 차출되어 주특기104와는 상관없이 3대대 군종병으로 팔렸던 것이다. 보직이 좋았던지라 군종 보직을 받기 위해 대가리가 터졌으며 사회의 인맥까지 동원하는 상황에서 나는 스므스하게 물 흐르듯 군종 보직을 받았던 것이다.
당시 36연대 3대대의 활동무대는 대광리였고 그래서 다시 대광리에 가게 된 것이다. 우리부대의 정확한 민간주소는 연천군 신서면 도신4리였던 것 같다. 그 동네는 대광리 옆 동네였으며 민간인 동네로서는 최북단이었다.
GOP지역은 민간이 출입통제 지역이고 그 밑 훼바지역은 민간인도 같이 살았는데 우리 부대는 그 훼바지역과 GOP지역의 통문이있던 3초소가 바로 옆에 있는 부대였다. 참고로 GP라는 지역도 있는데 GP는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2Km씩, 그러니까 4Km의 군사분계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3대대는 특이하게 일반부대처럼 대대병력이 전부 집합되어 있지 않았고 중대별로 산 계곡에 편재되어 있었다. 그 지역은 미군들이 주둔해 있었던 지역이라는데 그래서 그런지 대대본부가 있던 부대 내에는 20년 전 그때부터 아스팔트가 깔려 있을 정도로 깨끗했다.
그러니까 우리부대는 미군들이 주둔해 있었고 미군들이 철수하고 한국군이 접수했는데, 그래서 내가 근무했던 교회는 미군들이 보일러 실로 쓰던 창고건물을 교회로 개조하여 사용했던 것이다.
여섯, 군종병 생활과 그로 인한 인간 관계
내가 처음 만난 대대장은 배문환 중령님이었고 그분은 육사21기였으며 신앙이 깊은 기독교인이었다. 후에 진급하여 사단 작전참모도 지내셨고 21사단 사단장까지 지내신 걸로 알고 있다. 슬하에 자녀는 딸만 3명이었던 것 같다.
당시 서울 영락교회 특수전도부에 속해있었던 이소애 전도사라는 분이 연결되어 대대 보일러실을 개조해 '시온교회'라는 이름으로 헌당했으며 헌당예배 때는 한경직 목사님까지 오셨던 것이다. 그때 시온교회 앞에서 찍었던 기념사진이 앨범 어디에 지금도 있다.
한경직 목사님, 배문환 대대장님, 이소애 전도사님, 기독교인 군인가족, 부대의 각 중대 군종병들…
사진에 나와있는 예배당 지붕머리에 붙어있던 시온교회라는 간판도 내가 작업해서 만들었던 것 같다. 그 부대의 군종병으로 내가 팔렸으며 대대급에는 군목이 파송되지 않았으므로 연대 군목의 지휘감독 하에 군목이 하는 일을 내가 하게 되었던 것이다. 군종활동이 이유가 되어 자금을 끌어 모으기 위해 서울은 뻔질나게 드나들었으며 그때 내 동생들이 피해(?) 깨나 받았던 것으로 안다. 영락교회 이소애 전도사님도 몇 차례 찾아갔던 것 같다.
그때 모셨던 연대 군목 중 한 분이 지금 내수동 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는 김병선 목사님이시고 같은 교단이어서 나에게는 퍽 잘대해 주셨던 것 같다. 그분은 대위로 예편하셨고 인도네시아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사역하신 것으로 안다. 특별히 그 목사님은 1주에 한번씩 연대본부 군종과에 각 부대 군종병들을 불러모아 IVF 성경공부를 체계적으로 시키셨다.
그때 만났던 4대대 군종병이 '기종서'였는데 수원신학 출신이고 총신을 거쳐 목사가 되었으며, 가끔 기독신문을 통하여 부흥사들의 활동이 소개될 때 사진과 이름을 보곤 하는데 나에게는 '쫄따구'였으며 신학도 후배인 것이다. 김병선 목사님은 강원대학출신이시고 재학 중 IVF간사를 지내셨으며 총신을 나오셨고 사모님도 강원대학출신으로 영어과 교편을 잡았던 것으로 안다, 따님의 이름도 생각이 나는데 '리나'라고 했으며 그 목사님은 대학 때부터 인도네시아 선교에 사명을 받았다고 하셨으며 아이가 태어나자 아예 아이 이름을 인도네시아어로 작명했다고 하신 말씀이 새롭다.
일곱, 비교적 보람 있었던 군대생활
비교적 재미있고 알차게 군 생활을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일병에 진급되어 내 밑에 졸병이 생길 때까지는 엄청나게 힘든 군 생활을 했다. 식기 세척, 내무반 청소 및 정리정돈, 고참들 군화 윤내기 등의 괴로운 졸병 생활을 충분히 경험했던 것이다.
군 졸병들 세계에서는 '군인은 졸아도 국방부 시계는 돈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었는데, 나는 안 해 봤지만 철책근무를 서면서 또 한밤중에 부대 외곽 경비나 내무반 불침번 근무를 하면서 졸음을 이겨내며 생긴 말인 것이다.
나는 근무 대신 '사랑의 차'를 가지고 철책, 위병소, 경계 근무지, 각 내무반 등을 돌며 한밤중에 그들이 외로울 때 말벗이 되어주고 기도를 해주었던 것이다. 그럴 때 가끔은 눈물을 글썽이던 순정파 군발이들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가끔 낮에 철책을 돌면서 우릴 보고 손을 흔들던 '리북 아바이 자슥들'도 봤던 것 같다.
어디 그 뿐이랴! 훼바에 주둔해 있을 때는 각종 훈련, ATT(대대훈련) RCT(연대훈련), 20Kg 완전군장 100Km행군, 유격훈련 등을 따라다니며 동참했으나 나는 군종활동을 하느라 열외였고 비교적 편했다고 볼 수 있겠다.
군종은 평상시 부대에서 종교의식을 책임질 뿐 아니라 훈련으로 힘든 병들을 찾아가 정신교육을 하며 휴식 및 입가심으로 먹을거리를 제공해주는 일이 활동이었으니까 병들에게는 제법 인기 있는 보직이었다.
내무반에 졸병이 생긴 후에는 아예 교회에 비파(비공식파견)되어 홀로 지내게 되었으며, 그러니까 일병에 진급하고부터는 비교적 편하게 보냈다.
여덟, 말년병장 내무반장 시절
전역을 몇 개월 앞두고 대대의 중화기중대인 12중대에서 우리교단 대구신학 출신 하영일 일병을 차출해와 조수로 앉혀 놓았으며, 이 하영일이 얼마 전에 경북지방 어느 교회에서 목사위임식을 한다는 광고를 기독신문에서 봤다.
그러니까 나는 그때부터 영호남의 화합을 부르짖었고 그래서 조수를 영남출신을 썼던 것이다. 군대 갔다온 사람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것도 군인이냐고… 그만큼 군대에서는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주특기도 960으로 제일 비싼(?)줄로 안다.
그런데도 조수를 전라도 사람이 그렇게 싫어하는 영남출신을 뽑아 놨으니 이 몸은 그때부터 영호남의 화합을 부르짖었던 것이다.
군대사회 만큼 전라도와 경상도의 앙숙은 없는 것 같다. 경상도 출신이 고참이 되면 전라도 출신은 죽었고 반대로 전라도 출신이 고참이 되면 경상도의 출신의 졸병 생활은 말할 것도 없던 시기에 말이다.
오죽하면 전라도 출신 군인을 일컬어 따블백이란 별명을 썼겠는가. 여기서 따블백이란 권투선수들이 주먹의 정권을 단련하기 위하며 글러브를 끼고 내리치며 운동하는 기구를 말한다. 그만큼 전라도 출신들을 쥐어 팼기 때문이며 그것도 남도 출신을 A급, 북도 출신을 B급으로 구분해 부르고 있었다.
말년병장이 되어 보직도 조수에게 넘겨버리고 이제 할 일이 뭐 있겠는가. 그래 농땡이 피우지 않고 자진해서 본부중대 탄약소대에 복귀하니 소대원들이 모두 날더러 내무반장을 해달라고 하여, 병장이 신참 '말둑하사'를 제치고 전역할 때까지 몇 개월 간 양어깨에 푸른 견장을 달고 내무반장을 했던 것이다.
내무반장 하면서도 일화가 많았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아련할 뿐 생각이 안 난다. 생각나는 것은 흐트러져있던 군기를 우리 소대 뿐 아니라 본부중대 전체 요원들까지 제대로 잡아 상하 위계질서는 확실히 잡아놨던 것 같다.
그렇다고 무식한 방법은 안 썼고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인격을 존중해가며 말이다. 군종병 출신이 어떻게 주먹이나 '빠다'를 휘둘렀겠는가. 그래도 가끔은 내 성질에 '조인터'는 깠던 것 같고 화날 때는 졸병들 집합시켜 놓고 '열차'(열중쉬어, 차려)는 했으며 '꼴아 박아'까지는 했던 것 같다.
내무반장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감당했으며 소대뿐 아니라 대대의 본부중대 전체를 화기애애하게 이끌었던 것 같다. 중대장이나 간부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말이다.
아홉, 전역 특명
82.5.19일자로 전역 특명을 받아 예비군복을 입게 되었으며 사단본부에서 전역하여 경원선 열차에 몸을 싣고 돌아오니 꿈에 그리던 33개월의 군 생활을 마치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