킥킥, 유채꽃
열여덟 이른 나이에 사내를 알아버린 누이는 툭하면 집
을 나가기 일쑤였다.
바람난 딸년을 집구석에 들여앉히기 위해 아버지는 누이
의 머리끄덩이에 석유를 붓고 불을 싸질렀다.
머리에 꽃불을 이고, 미친년처럼 온 들판을 뛰어다니던
누이를 누렁개들이 쫗아라 쫓아다녔다.
그 몰골에 차마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나는 그만 킥킥,
봄날이 가기 전에 누이는 결국 시집을 갔지만 배부른 신
부를 보고 나는 또 그만 킥킥,
누이가 떠난 후 들판에 핀 유채꽃에서 진한 석유냄새가
났다.
삼겹살에 대한 명상
여러 겹의 상징을 가진 적 있었지요
언감생심, 일곱 빛깔 무지개를 꿈꾼 적 있었지요
불판 위에서 한 떨기 붉은 꽃으로 피어나기를
간절히 바란 적 있었지요
흰 머리띠를 상징으로 삼았지요
피둥피둥 살 바에는 차라리
불판 위에 올라 분신자살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지요
육질이 선명할수록 사상도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거든요
달아오른 불판이 멀리 쏘아 올리는 기름은
발가벗은 내 탄식이었지요
몸 뒤틀리고 몇 번쯤 뒤집혀지고 나면
(제발, 세 번 이상을 뒤집지 마세요)
내 사명도 끝난 줄 알았지요
노릿하게 그을린 얼굴들이 참기름을 두르고 앉아
마늘처럼 맵게 미소를 주고받을 때
소원할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은
저 말라비틀어진 살점들을 어찌할까요
어쩌다 간혹 안부나 물어봐주세요
그러면 나는 그냥
무지개를 꿈꾸다 죽은 한 마리 돼지의 어쩔 수 없는 옆구
리였다고,
불판 위의 폭죽이었다고,
웃기는 돼지였다고 웃으며 말할 날 있겠지요
평발
1
허공을 타고 내려온 거미 한 마리가
맨발로 땅 위를 걷고 있다
공중에서보다 발걸음이 느리다
꽁무니 거미줄에 걸려 세계가 질질 끌려간다
일사불란한 여덟 개의 발로
지구를 끌고 있다
자세히 보니 거미의 발바닥은
어떤 표면이든 흡착시키기에 적당한 구조를 가졌다
저 발판의 힘으로 거미는
나방을 감아올리고 자작나무를 들어올리고
기와집을 끌어올린다
거미는 힘이 좋다
지구력도 좋다
2
그는 평발이었다
마음보다 늘 조금씩 늦어서 그의 발바닥은 슬펐다
아무리 빨리 걸어도 땅이 따라주지 않았다
어떤 보이지 않는 흉측한 손이
자꾸 땅 속에서 잡아끄는 것 같았다
지긋지긋한 손아귀를 피해 그는 점점 높은 곳으로 기어
올랐다
나락은 지천에 널려 있었다
담장 위에도, 지붕 위에도, 전봇대 위에도
생문은 보이지 않았다 세상은 그에게
허공에 집 짓는 일을 시켰다 집을 지으면 지을수록 이상
하게
발걸음은 가벼워졌다 철근을 들어올리고
덤프를 들어올리고 아파트를 들어올릴 만큼
그는 힘에 세졌다 허공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자
지천에 널려 있던 나락들이
마침내 낙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3
평평한 허공의 집으로 올라간 거미가
지구를 거꾸로 매달아 놓고 공기놀이를 한다
황야의 건달
어쩌다가, 어쩌다가 몇 달에 한 번꼴로 들어가는 집. 대
문이 높다.
용케 잊지 않고 찾아온 것이 대견스럽다는 듯
쇠줄에 묶인 진돗개조차 꼬리를 흔들며 아는 체를 한다.
짜식, 아직 살아 있었냐?
장모는 반야심경과 놀고 장인은 티브이랑 놀고
아내는 성경 속의 사내랑 놀고
아들놈은 리니지와 놀고
딸내미는
딸내미는,
처음 몸에 핀 꽃잎이 부끄러운지 코빼기 한 번 삐죽 보이
곤 방에서 나올 생각을 않는다.
그나마 아빠를 사내로 봐주는 건 너뿐이로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맙고 황송하구나. 예쁜 나의 아
가야.
아무도 놀아주지 않는 식탁에 앉아 소주잔이나 기울이
다가
혼자 적막하다가
문득,
수족관 앞으로 다가가 큰소리로 인사를 한다.
블루그라스야, 안녕! 엔젤피시야, 안녕!
너희들도 한 잔 하랠?
소주를 붓는다.
토종닭집 감나무
늙은 감나무 한 그루에
얹혀사는 것들이 왜 저리 많은가
금대계곡 입구 토종닭집
가로등 전깃줄이
감나무 숨통을 조르고 있다
밑둥에 쌓인 까만 비닐봉지 속
목 잘린 닭대가리들이
몸을 찾아 아우성치고 있다
감나무 꼭대기에 걸린
다 익은 감들마저 떠나지 않고
단물을 울궈먹고 있다
도무지 말을 들어먹지 않는,
삭정이들을 끌고 굽어가는 감나무에
새들도 날아와 앉지 않는다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
너......라는 말 속에는 슬픔도 따뜻해지는 밥상이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눈곱 낀 그믐달도 살고 너......라
는 말 속에는 밤마다 새 떼를 불러 모으는 창호지문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물구나무 선 채 창밖을 몰래 기웃거
리는 나팔꽃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스스로 등 떠밀
어 희미해지는 바람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진즉에
버렸어야 아름다웠을 추억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약속 그래서 더욱 외로운 촛불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죽음도 두렵지 않은 불멸의 그리움
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평생 돌이킬 수 없는 슬픔을
안고 괴로워하는 상처도 살고
너.....라는 벼락을 맞은 뼈만 남은 그림자도 살고
폭낭*
폭낭 그늘에 초가 한 채 짓고
그대와 단둘이 누웠으면 좋겠네.
남들이야 눈꼴이 시든 말든
하르방 몸뚱어리가 달아오르든 말든
그대와 오롯이
배꼽이나 들여다보면서
여린 그대 배꼽 그늘 위에
우악스런 내 배꼽 그늘을 포개면
묵정밭 유채꽃은 더욱 노랗게 피고
돌문 밖 바다물결 간질이는
그대 숨비소리,
숨비소리
딱 하루만이라도 그렇게
물허벅 지듯 그대를 들쳐 엄고
뒹굴었으면 좋겠네.
*팽나무의 제주 방언
고영 시인의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중에서
문학세계사
오전에 취재가 있어 나갔다가
점심 사 주겠다는걸 다이어트 중이라고 핑계대고 도망쳐서
계룡문고에 들렀지요
거기서 또 계룡문고 사장님한테 잡혀서
점심 사 주겠다는걸 겨우 겨우 뿌리치고
새로 나온 시집들이 몇권 있어 사 들고 집에 왔네요.
서점에 앉아서 읽을때는 그렇게도 잘 읽히던 시집이
왜 이상하게 집에만 오면 안 읽히는지
그래서 한편 한편 타이핑을 해야겠다 마음을 먹었지요.
우선 몇편만 먼저 올립니다.
첫댓글 선배님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