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 4. 25. 17:54
이성남『李星男, 1578년(선조 11)~1642년(인조 20) / 향년 6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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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부사이공묘표(鐵原府使李公墓表)
약천 남구만 찬(藥泉南九萬撰)
공은 휘(諱)는 성남(星男)이고 자(字)는 명숙(明叔)이고 성(姓)은 이씨(李氏)이니, 영의정을 지낸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문충공(文忠公) 휘 항복(恒福)의 장자이다. 선계(先系)와 세덕(世德)은 문충공의 묘소에 있는 비석에 자세히 나와 있다.
선비 안동권씨(安東權氏)는 도원수(都元帥)를 지낸 장렬공(莊烈公) 율(慄)의 따님인데, 공은 만력 무인년(1578, 선조 11)에 출생하였다. 공은 나이 30세(歲)에 천거로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제수되고 임기가 차자 사헌부 감찰로 승진하였으며, 양구현감(楊口縣監)으로 나갔다가 체직되어 돌아와 문충공의 상을 받들고 북청(北靑)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장례하였다.
상(喪)을 마치고도 오히려 여러해 동안 은둔하였는데, 인조(仁祖)가 반정한 후 즉시 부여현감(扶餘縣監)에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등급을 뛰어넘어 한산군수(韓山郡守)에 제수되었다가 체직되어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 익위사 익찬(翊衛司翊贊), 광흥창 수(廣興倉守), 중추부 경력(中樞府經歷), 사섬시부정 겸 내승(司贍寺副正兼內乘),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을 역임하였으며, 남한산성에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한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승진하여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이천부사(利川府使)로 나갔다가 다시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내승을 겸하였으며, 철원부사로 나갔다가 임기가 차서 돌아왔다.
임오년(1642, 인조 20) 서울 자택에서 별세하여 포천현(抱川縣) 추곡(楸谷)에 있는 문충공의 묘소 왼쪽 묘좌(卯坐)의 산에 장례하였으며, 원종공신(原從功臣)의 공훈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오흥군(鰲興君)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공은 선조의 광채를 배태(胚胎)하여 진실로 배우지 않고도 잘하였다. 집안에 있을 때에는 효도와 공경으로 알려졌고 관청에 있을 때에는 청렴함과 근신함으로 유명하였다. 공의 기국과 도량을 살펴보고 말소리를 들어보면 정돈되고 엄숙하면서도 공손하여 물어보지 않아도 대갓집 자제임을 알 수 있었으며, 공의 조행을 살펴보고 다스린 것을 관찰하면 강직하고 방정하면서도 자애로워 물어보지 않아도 전수 받은 바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외의 관직을 지낼 적에 혹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당일로 사직하고 떠나가 일찍이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르는 곳마다 어긋남이 많았으나 끝내 후회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이른바 꿋꿋하게 서서 되돌아서지 않는다는 자일 것이다.
선조를 받드는 예에 더욱 그 효성을 지극히 하여 제수를 장만하는 것을 부부가 반드시 직접 하였으며, 시절(時節)에 맞추어 성묘할 때에도 반드시 곡하고 눈물을 흘려 슬픔을 다하였는바 노년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젊을 때와 똑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마도 이른바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한 자일 것이다.
초취부인 권씨(權氏)는 병조판서 징(徵)의 따님인데, 어질고 부인의 도리를 지켜 친척들이 칭찬하였다. 병자년(1576. 선조 9)에 출생하여 임인년(1602 선조 35)에 별세하였다. 재취(再娶)부인 김씨(金氏)는 상의원판관(尙衣院判官) 계남(季男)의 따님이다.
병자호란 때 바위틈 사이에서 적을 만나자 칼날을 무릅쓰고 적을 꾸짖으니, 적은 입술을 찢고 팔을 부러뜨려 바위 밑의 쌓여 있는 시체 속으로 떨어뜨렸다. 적이 물러가자 집안 식구들이 부축하여 구원해서 다행히 소생하였다. 기축년(1589 선조 22)에 출생하여 병술년(1646 인조 24)에 별세하였다.
두 부인을 모두 차례로 공의 묘소 왼쪽에 부장하였다.
아들 군수 시중(時中)과 부사(府使) 최욱(崔煜)의 아내가 된 딸은 권씨부인의 소생이고, 아들 진사 시정(時挺), 목사 시현(時顯), 학생 시망(時望)과 생원 이정환(李廷煥), 별좌 남두상(南斗相), 현령 유방(兪枋)의 아내가 된 딸은 김씨부인의 소생이다.
장손 세장(世章)은 세습하여 오천군(鰲川君)에 봉해졌으며, 내외의 여러 손자와 증손과 현손의 남녀가 모두 80여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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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鐵原府使李公墓表 - 약천 남구만
公諱星男字明叔。姓李氏。領議政鰲城府院君文忠公諱恒福之長子。先系世德。具文忠公墓刻。妣安東權氏。都元師莊烈公慄之女也。公以萬曆戊寅歲生。年三十以任拜繕工監役。仕滿陞司憲府監察。出楊口縣監。遞歸奉文忠公喪。自北靑返葬。外除猶屛迹有年。仁廟中興。卽拜扶餘縣監不赴。超拜韓山郡守。遞拜忠勳府都事,翊衛司翊贊,廣興倉守,中樞府經歷,司贍寺副正,兼內乘,宗親府典籤。以扈從南漢勞加通政。陞拜僉知中樞府事。出利川府使。復拜僉知兼內乘。出鐵原府使。秩滿還。壬午卒于京第。葬于抱川縣楸谷文忠公墓左坐卯之原。以從勳贈嘉善大夫兵曹參判鰲興君兼同知義禁府事。公肧胎前光。固有不學而能者。在家以孝敬聞。在官以淸謹著。觀其器度。接其辭氣。則整肅而恭巽。不問可知其爲大家子。察其操持。審其治理。則剛方而慈惠。不問可知其爲有所受。歷職內外。或有不合意則輒卽日自免去。未嘗少屈。坐此所至多齟齬。終不悔。殆所謂強立而不反者歟。奉先之禮。尤致其誠。鼎爼烹割。夫婦必親。而時節省墓。亦必哭泣盡哀。至暮年猶如初。殆所謂終身慕者歟。前夫人權氏。兵曹判書徵之女。賢有婦道。宗黨稱之。生以丙子。卒於壬寅。後夫人金氏。尙衣院判官季男之女。丙子之難。遇賊巖穴間。冒刃罵賊。賊裂吻斫臂。落巖下積屍中。賊退家人扶救。幸而復蘇。生以己丑。卒於丙戌。並以次祔葬于公墓左。男郡守時中。女府使崔煜室。權出。男進士時挺,牧使時顯,學生時望。女生員李廷煥,別坐南斗相,縣令兪枋室。金出。長孫世章襲封鰲川君。內外諸孫及曾玄男女八十餘人。<끝>
藥泉集第二十一 / 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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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原府使贈兵曹參判鼇興君李公墓誌銘 - 백헌 이경석
公諱星男。字明淑。羅祖宗臣李公謁平之後。領議政鼇城府院君諡文忠公諱恒福之冢子也。李本大姓。遠有代序。麗之最顯者曰翮。太僕射。國朝有曰延孫。工曹參判。諱成茂。安東判官。贈吏曹判書。高祖也。諱禮臣。成均進士。贈議政府左贊成。曾祖也。諱夢亮。議政府右參贊。贈議政府領議政。祖也。皆以文忠公追榮。妣貞敬夫人安東權氏。都元帥莊烈公諱慄之女。領議政諱轍之孫也。以萬曆戊寅生公。鞠于外家。莊烈公甚愛之。而戎事方殷。不暇提誨。莊烈卒。始受書于文忠公。讀史未幾。能通大義。文忠公歎惜其遭難不早斅也。丁未。用文忠公任監繕工役。庚戌。轉殿中。出監楊口縣。癸丑。昏朝政亂。文忠公屛處蘆原。時黃謹中按關東。有陵轢意。公卽解紱歸。文忠公駁廢論遷北靑。戊午。卒于謫所。返葬故山。居憂以禮。沒喪。斂迹不與人還往者有年。癸亥仁祖中興。初授扶餘縣監。有色憂不赴。尋超守韓山郡。奉養大夫人。居二年。忤兵使賦歸。已而敍拜忠勳都事。轉翊衛司翊贊,廣興倉守。丁卯之變。扈入江都。遭內艱。制畢。拜中樞府經歷。頃之辭遞。乙亥。授司贍寺副正兼內乘。丙子之變。車駕入南漢。公扈駕。病甚辭遞。丁丑回鑾。拜宗親府典籤。用扈從勞。陞通政階。爲僉知中樞府事。戊寅。出利川府使。未幾棄印歸。己卯。拜僉知中樞府事兼內乘。庚辰。爲鐵原府使。官滿而歸。新經喪亂。連哭二子。感疾添劇。壬午十二月十八日。卒于終南之第。壽六十五。葬于抱川楸谷先塋下文忠公墓左坐卯之原。贈嘉善大夫兵曹參判鼇興君兼同知義禁府事。公器宇宏豁。談論通達。性且嚴毅。子弟有過。不假以色。屢歷郡邑。吏人慴伏不敢欺。淸簡節費。治務寧謐。凡有疵瘼。亡不蠲祛。民懷其惠。去輒追思。行己處事無所苟。未嘗屈意仰人眉睫。由是所至多不見容。而不少變焉。奉先追遠。尤加敬謹。凡百器用。供薦之具。靡不致潔。鼎俎烹割。悉令婦人躬執。展墓。哭必盡哀。老而不衰。蓋生長於大家賢相之庭。聞見自有別也。公前聘安東權氏。贈貞夫人。資憲大夫兵曹判書諱徵之女。有婦德。手女紅分燈光。勸公讀書。公之曉暢文義。夫人有助云。生於丙子。卒於壬寅。得年二十七。後聘光州金氏。贈貞夫人。通訓大夫行尙衣院判官諱季男之女。年十六歸于公。事尊章誠。愛前夫人之出猶己出。公世素淸貧。而夫人勤劬主饋。撥匱爲贍。不令公知其艱也。丙子江都之陷也。夫人隱於摩尼山巖穴間。遇賊而罵。被賊刃墜落巖下。幾殊僅甦。卒於丙戌。距己丑生年。五十八歲。二夫人。以次祔公墓之左。公生男女各四。女長適崔煜。文科府使。男長時中。郡守。權夫人出也。男時挺。進士早卒。時顯參奉。時望。士人夭折。女生員完山李廷煥,別坐南斗相,監役兪枋之妻。金夫人出也。府使男二。泰齊,泰隆。郡守初娶全州李氏。戶曹判書贈右議政諡孝敏公諱景稷之女。不育子。再娶庶尹尹熻之女。男二。世章別提。世萬士人。三娶學生洪淑女。男一。世馨士人。生員男三。基慶,基定。武科經歷。季基亨。女閔致重。別坐無子。監役男四。命觀,命鼎,命賁,命謙。進士娶淸寧君韓德及女。男一世冕。參奉娶生員申惕女。男一世龜。女三幼。時望娶廣州李氏都事象乾女。以世萬後。銘曰。
是爲鼇城賢相公之胄子。藏于相公之墓之左。人稱其有大家之風。斯可以垂於後。<끝>
白軒先生集卷之四十九○文稿 / 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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僉樞贈參判李公墓表 - 우암 송시열
白沙李文忠公諱恒福。葬在抱川之楸谷。其左十五步酉向之墓。卽其男僉知中樞府事贈兵曹參判鰲興君同知義禁府事諱星男字某之所藏也。文忠公在光海朝。謂母后不可讎。遂謫居北塞而卒。公以喪返葬。仍杜門不出。公年蓋三十。仕爲繕工監監役。由殿中爲楊口縣監。時文忠公已去位郊居矣。方伯乘時沮僇公。公卽棄歸。蓋公持身不苟已如此。天啓癸亥。仁廟改玉。卽除縣宰。以私故不赴。俄超拜韓山郡守。時大夫人尙無恙食其俸。二年遞歸。歷忠勳府都事,翊衛司翊贊,廣興倉守。憂吉。又歷中樞府經歷,司贍寺副正兼內乘。以宗親府典籤。陞通政僉知中樞府事。蓋用丙子扈從勞也。爲利川府使。旋遞歸復舊踐。復出爲鐵原府使。壬午。遞歸而歿。享年六十五。公賦性嚴毅。器度卓犖。祭祀以禮。墟墓必哭。其孝性然也。居官淸謹節用。治民以惠養不擾爲本。雖以骯髒齟齬於世。而亦無悔色。前配權氏。判書徵之女。有婦道。其繼金氏。判官季男女。皆贈貞夫人。金氏常執慬。丙子江都陷。夫人匿巖穴間。遇賊奮罵。賊亂斫之落巖下。久而得蘇。年五十八。而歿於丙戌。男郡守時中。女爲府使崔煜妻。權氏出也。進士時挺,牧使時顯,學生時望。三女爲生員李廷煥,別坐南斗相,縣令兪枋妻者金氏出也。進士與郡守妻尹氏並命於江都。尹氏罵賊。與金夫人同云。郡守男世章,世萬,世馨。世章郡守。進士男世冕。牧使男世龜。其繼時望者世萬也。其餘不能盡錄。公先系俱載大墓刻。銘曰。
維玆楸谷之原。維水瀰瀰。維嶽崇崇。維文忠公衣履將百世而安寧。維公墓亦無艱於無窮。<끝>
宋子大全卷一百九十六 / 墓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