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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楊州) 칠봉산(506m)&천보산(423m)을 가다.
글 쓴 이 都 寅 高 枓 永
9월27일, 인시(寅時)에 일어나니 주위는 어둑 어둑 하고 하늘에는 별들이 총 총이 빛나고 있다.
일기예보는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 하여 내심으로 긴장을 하였는데... 안도의 숨을 내쉬며 간단히 조반을 들고는 이것 저것 챙겨서 차에 오르니, 빈자리가 절반이다!(32명) 추석(10월3일)이 인박하여 벌초(伐草)다, 대목이다 하여 참석이 많이도 부진하다.
오래간 만에 좌석에 편히 앉아 다가오는 山川들을 바라보니... 어느새 들녘은 황금물결로 일렁 거리고, 연변(沿邊)의 가로수들은 황엽(黃葉)의 기운이 보인다.
기축년(己丑年)의 신춘(新春)이 엊그제 같은데...벌써 가을의 문턱을 오르고 있으니... 옛 글(송 주희의 우성)에 이르기를...
미각지당춘초몽(未覺池塘春草夢)이요 (못둑의 봄풀위에서의 꿈이 아직도 깨지 않았는데)
계전오엽이추성(階前梧葉已秋聲)이라 (섬돌 앞 벽오동 잎이 이미 가을소리 일레라!)
드니... 과연 허언(虛言)이 아니외다!
뒷 좌석에 앉으신 노장(老將) 서부장(서경철)님은 어느새 필자의 넉두리를 짐작하신 듯...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20대는 20Km로, 50대는 50Km로, 70대는 70Km 속력으로 세월이 흐른다”면서... 허~ 허~ 허~ 웃으신다!
아포에서 다시 중부내륙고속국도를 타고 선산 휴게소에서 간단히 조반(朝飯)을 드신후, 줄곧 내달아 양주(楊州)에 이르니... 시계는 벌써 11시를 넘어 있다.
동두천시(東豆川市) 송내동 마을길을 따라 어렵게 어렵게 진입하여 보현사 주위에서 더는 진행하지 못하고, 준비운동 없이 일렬로 걸어 오르니 등산로 주위에는 아람드리 밤나무가 지천이다.
누구라 할 것도 없이 검붉은 알밤들을 주워 들면서 모두들 환호성을 터뜨린다. 옛말에 “한가지 즐거움이 만가지의 시름을 달랜다.” 하드니... 모두들 소년 소녀들처럼 활짝 밝은 모습들이다.
10여 분을 걸어 올라 대도사에 이르니 맞은편 높은곳에 각황전(覺皇殿)이 정면5칸 측면3칸의 다포계팔작지붕으로 날렵하다. 드물게 보는 현판(懸板)이다! 전남 구례 화엄사 각황전(국보제67호) 이외에는 도량의 중심에 대웅전 현판이 보통인데...?
여러 계단아래로 요사채가 보이고 그 옆으로 약왕보살님이 다소곳이 서 계신다. 비교적 단촐하고 전각(殿閣)의 수도 그리 많지않다.
우측으로 난 여러개의 돌계단(등산로)을 따라 올라 능선(청룡에 해당함) 모롱이에는 기이한 바위틈에 산신각(山神閣)이 모셔져 있고, 호랑이 등을 타고 계신 산신령님은 하얀분칠에 빨간 입술을 하고 계셔... 위엄 보다는 앙증스럽고 친근감이 듭니다.
선채로 간단한 예배(禮拜)를 드리고 얼마를 더 오르니 매봉(응봉鷹峰)이라 쓰여진 입간판이 보이고, 그 옆으로 여러개의 바위들이 포개져 신비롭게 보인다. 몇 몇 회원님들은 포즈를 취하며 사진 찍기에 분주하시다.
안내판에 임금님께서 수렵할 때 마다 사냥에 필요한 매(鷹)를 날렸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잠깐동안 한숨을 돌리고 다시 몸을 추슬러 20여 분을 더 오르니, 이번에는 석봉(石峯)이란 이름표를 달고 선 간판이 보인다. 봉우리가 돌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어 그렇게 부른다 하며, 등산로와 석봉(石峯) 주위로는 예비군 훈련 장소로 보여지는 진지(陣地)가 여러곳에 보이고, 어떤 곳에는 그물망으로 씌워져 엄폐(掩蔽)를 해 놓은곳도 여러개가 보인다.
석봉(石峯)에 올라 양주(楊州) 시가지(市街地)를 내려다 보니 칠봉산과 천보산 주위의 산 기슭에는 군사시설로 보이는 막사와 건물들이 수 십만평에 이르고, 넓은 국도(國道) 저 넘어로는 새로지은 아파트들이 마천루(摩天樓) 모양으로 쭈~뼛 쭈~뼛하게 하늘을 떠 받치고 있다.
그 뒤로 펼쳐지는 넓은 들과 조회동, 봉양동, 회암동 부근에는 본래의 촌락(村落)들이 띄~엄 띄~엄 산 기슭에 깃들어 평화로와 보이는데... 새로 들어선 아파트 지역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오늘날 21세기 주거문화(住居文化)라는 것이... 정형화됀 공간으로 스스로를 가두는 문화란 말인가...? 그래서 마음의 여유가 없으며, 그 조급함이 더한 것은 아닐런지요...? 좀 불편 하드래도 여유롭게 살았던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은 필자의 배부른 넋두리인가...?
이런 저런 생각으로 얼마를 더 올랐을까? 투구봉에 도착하니... 안내판에 “그 옛날 임금님께서 쉬시니 군사가 갑옷 투구를 풀어 낫다는 곳이라” 하여 부쳐진 이름이라 한다. 임금님의 행차가 워낙 지엄하여서 예나 지금이나 성스럽기는 마찬가지 인가 봅니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순탄해서 한결 수월하고, 하늘에는 구름이 덮여 있어 예상보다 시원하고 편안 하도다! 야외 행사는 무엇보다 날씨가 가장 큰 부조일터,지금 대구에는 비가 온다는데... 남산님들의 축복이 큼니다 그려!
얼마를 더 걸어 정상에 이르니... 까만돌(烏石오석)에 칠봉산(七峰山 506m)이라 음각된 빗돌이 얌전하게 앉아 있다. 여러회원님들이 함께 모여 기념촬영을 마치고 준비해 온 도시락으로 삼삼 오오 모여 앉아 점심을 드신다.
김광남님, 백문주님, 박번님, 윤진석님, 무량덕보살님, 천여순님, 최대장(산대장)님 등 이 빙 둘러 앉아 함께 드시니... 진수성찬이 따로 없슴니다 그려! 반찬은 그 가지 수를 모르겠고, 입맛 밥맛이 꿀맛 같슴니다! 게다가 식후 디저트로 무량덕보살님의 세련된 솜씨로 깎아 나누어 주시는 배맛은 참으로 향기롭슴니다 그려!
이런 저런 여담으로 얼마간을 쉬다가 정상에 다시 올라 잠시 사방을 둘러 보니, 북으로는 동두천시요, 동으로는 포천시(抱川市), 남서로는 양주시를 아우르고 있으며...
이곳 칠봉산(七峰山 506m)은 한북정맥상의 백석이고개 부근에서 북동방향으로 어야고개, 석문령, 회암령을 거쳐 칠봉산에 이르고, 이어서 해룡산(660m), 왕방산을 지나 신천과 임진강에 그 맥을 떨구고 있으니... 이름하여 왕방지맥이라 한다.
옛날에는 만산홍엽(滿山紅葉)의 단풍이 아름다워 금병산(錦屛山)이라 불리워 졌으며, 세조 임금이 사냥했던 일이 있어 어등산(御登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산자수려(山紫秀麗)한 칠봉산과 천보산은 그 지덕(地德) 또한 빼어나서 오고 간 인걸(人傑)도 많으시다.
회천읍 회암리의 회암사터를 비롯하여 선각왕사비와 부도, 지공선사비와 부도, 무학대사비와 부도 등이 있으며, 근세에는 김삿갓(난고 김병연 1807~1863)의 고향이 이곳이라는 것이 밝혀 졌다. 또한 장흥면 석현리에는 권율 장군이, 심하리에는 이수광 선생이 잠들어 계신다.
산넘어 포천에는 선조때의 명재상 백사 이항복을 모신 화산서원과 인근에 그의 묘소가 있고, 신복면 신평리에는 이덕형과 조경 선생의 위패를 모신 용연서원이 있어 만세에 그 업적과 이름이 찬란히 빛나고 있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없다 하리요!
아울러 근세에는 그들의 후예인 이한동 전 총리가 이곳에서 태어나 한국 정치사에 크다란 족적을 남겼으니... 더 말해 무삼하리요!
백두의 정기가 칠봉산과 천보산에 깃드시니
만고(萬古)에 충신들이 이땅에 나고 자라서
그 업적과 이름이 천추에 찬란히 빛나도다
칠봉산의 지덕과 천보산의 은혜 영원하소서!
칠봉산의 능선길은 대부분 진지(陣地)로 구축되어 있고, 산악자전거도로(MTB : Mountain Training Bicycle)가 잘 정돈되어 있다.
수도권 방어(防禦)와 안보적(安保的)으로도 요충지(要衝地)이니 진지의 구축은 당연할 것이고, 산악자전거도로는 서울시민들의 근교 체력단련장으로 아마도 적합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은 필요에 따라 충족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30여 분을 더 걸어 회암고개에 이르니, 동두천의 장림골 부근에서 양주 회천동으로 새 터널이 뚫리면서 회암고개 구길은 폐허나 다름이 없다.
천보산과 칠봉산을 잇는 지맥이 회암고개(장림고개)에서 끊어져 안타까움을 금할길 없으며, 지세(地勢)는 한번 끊어지면 영원히 회복이 불가능한 법인데... 관계 당국에 호소하노니 도로를 낼 때 최대한 자연환경을 고려하여 대자연의 섭리에 거슬리지 말기를 당부 당부 드립니다.
선두에 최대장은 천보산으로 향하는 남산의 꼬리표를 남기며 먼저 떠나고, 후미에 회원님들을 20여 분 기다리고 있으니... 디카맨 황부회장님, 디카맨 김해진님, 흰머리 이태만 부회장님, 홍총무님, 천가희님 등이 차례로 도착하여 천보산 능선길을 오름니다.
등산로는 MTB 도로와 겹쳐 넓고도 순탄하며, 대부분의 토양이 마사토의 성질이라 소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다.
30여 분을 더 걸어 천보산(423m) 정상에 이르니 회암사로 내려가는 이정표만 보이고 달리 정상표석은 보이지 않는다. 넓적한 바위에 올라서 회암동쪽을 바라보니 회암사지의 넓은터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함께 자리한 이진학님, 최형달님, 김광남님도 한눈에 그지세가 예사롭지 않다고 입을 모아 감탄하신다!
선착한 최대장과 몇 몇 분들은 먼저 내려가고, 후미에서 함께 온 8~9명의 회원님들에게 간단한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는 곧바로 하산길로 접어듬니다.
하산길은 경사도 심하고 마사토의 토양에다 가을 가뭄까지 겹쳐서, 어지간히 미끄러워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회암사(檜岩寺)에 도착하니 좌측 능선(청룡에 해당) 제일 높은 윗자리에 나옹선사(懶翁禪師 1320~1376)의 부도와 석등이 모셔져 있다. 부도는 사각 지대석 위에 8각원당형의 받침대가 놓여 있고 그 위에 몸돌이 있으며, 몸돌 위에 지붕돌 보주 보륜이 얹혀 있고, 바로 앞에 장방형의 제단이 놓여 있다. 또 2~3미터 떨어진 앞에 석등이 세워져 있으며 경기도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는 24세에 회암사(현 폐사지)에 와 4년간 용맹정진 끝에 불법을 깨닫고 법을 폈으나, 스님의 도력이나 명성을 듣고 전국에서 몰려드는 신도들 때문에 농사에 지장이 있다하여 나라에서 밀양 영원사로 떠나라고 하여, 가던 도중 여주 신륵사(神勒寺)에서 57세에 열반에 드는 바람에 두 곳에 부도가 모셔져 있다.
10여 미터 떨어진 그 아래 나옹스님의 스승인 지공선사의 부도와 석등 그리고 부도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가 나란히 서 있다.
지공선사는 인도 마란타사 불교대학의 마지막 졸업생으로 중국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 와 전국을 다니며 불법을 4년 여간 펴시다 고려 충숙왕 15년(1328)에 양주 회암사를 창건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그 이전부터 절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제일 아래 쪽에는 나옹스님의 제자이며 태조 이성계의 왕사로 조선창업에 많은 영향을 끼친 무학대사의 부도와 석등, 부도비가 나란히 진좌하고 있슴니다.
무학대사(1327~1407) 부도(보물 제388호)는 조선시대 부도 中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꼽히며, 8개의 돌기둥을 8각으로 둘러 세우고 그 위에 8각원당형의 부도를 세우는 특별한 형식을 취했다.
부도는 각 층마다 용, 구름, 연꽃을 섬세하게 조각하여 앞선 두 스님의 부도에 비해 화려 하면서도 단아하다.
그 앞에 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은 살이 통통한 두 마리의 사자가 떠 받치고 있어 보기에도 앙증스럽다. 부도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는 쌍사자석등 아래에 있으며, 스님의 부도 등이 위치한 자리가 가장 훌륭 해 보인다.
안내판에 (현)회암사는 순조21년(1821)에 유생 이응준(李膺峻)과 술사 조대진(趙大鎭)에 의해 지공선사, 나옹선사, 무학대사 세분의 부도와 비 등이 훼손된 것을 그로부터 7년뒤인 순조28년(1828)에 경기도 일원의 스님들이 모여 흩어진 부도, 비 등을 복원 하면서 세워진 절이라 한다.
도량내의 전각들은 단촐하여 대웅전을 비롯한 요사채와 산신각, 최근에 지은 듯한 2층 법당이 전부다. 어찌보면 세분 스님의 부도와 석등, 비를 지키고 관리하기 위해 창건된 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러 회원님들과 답사를 마치고 800여 미터를 내려오니 잘 정비된 회암사터가 한눈에 들어 온다.
회암사(檜岩寺:현 폐사지)는 고려 충숙왕15년(1328)에 지공선사가 중창한 이래로, 그의 제자 나옹선사께서 1376년 경에 대 불사를 하였으며, 그 뒤 나옹선사의 제자이신 무학스님이 머물면서 추가 불사를 하여 명실공히 전국사찰의 총 본산으로서 3000여 명의 스님이 상주하는 대찰로 명성을 떨쳤다.
그 후 조선 명종3년(1548) 침체 해 가는 불교 중흥을 위해 불심이 돈독(敦篤)한 중종의 비 문정왕후와 허응당 보우(1509~1565)스님의 노력으로 1551년 선교(禪敎) 양종을 50여 년만에 부활 하였으며, 같은 해 도첩제가 부활되어 승려들이 정전(丁錢) 없이 도첩을 받게 되었다.
보우대사(普雨大師)가 회암사 중창불사를 끝내고 낙성식을 겸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연 것이 명종20년(1565) 음력 4월5일, 그 이틀 뒤인 4월7일에 문정대비가 세상을 떠나시니 기다렸다는 듯이 유생과 관리들이 명종임금께 보우스님을 처형 하라고 거듭 거듭 상소(上疏)를 올렸다.
율곡 이이(李珥)선생도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를 올려 귀양 보낼 것을 주장하매 명종은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보낸다.
제주도로 유배간 보우는 며칠 후 제주목사 변협(邊協)에게 죽임을 당했다. 따라서 회암사의 운명도 그때 불길에 휩싸여 폐사가 된채 오늘에 이르렀다.
더구나 오늘날 까지 보우스님은 요승(妖僧)으로 회자(膾炙)되고 있으며, 서산대사는 보우스님을 일러 “천고에 둘도 없는 지인(至人. 성인)”이라 극찬 하였으니...
옛말에 “입장(立場) 차이(差異)라” 하드니... 인물의 평가란 것이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인가...!
1만 여평의 허허(虛虛)로운 대지(垈地) 위에 축대와 초석들 만이 찬란히 빛나고, 북동편 한켠에 부도(처안 또는 보우스님 추정) 한기와 폐사지 입구에 3기의 당간지주가 무언(無言)의 장광설(長廣舌)을 하고 있슴니다 그려!
천보산 기슭 아래 천축태자 법(法)을 밝혀
염화시중의 미소를 만세에 꽃 피우시니...
오고 간 고승님들의 발자취는 간데 없고
허허로운 들판에 무언의 장광설을 하시네
아~아~불법의 대의가 우주에 충만합니다.
단기 4342년(서기2009년) 9월27일
양주시 칠봉산(506m), 천보산(423m)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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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칠봉산 천보산 산행에서거움은 최고 였으며 회암사지에 숨겨진 역사를 생생하게 기억 되도록 배우고 갑니다.수고 많았습니다..
황까페지기님! 추석은 잘 지내셨는지요? 황부회장님의 숨은 노력으로 남산 까페가 건전하게 잘 운영되고 있으며,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