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만 달란트의 빚 탕감 받은 자의 마땅한 삶
<마18:23~35>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여기서 빚이란 죄를 지었다는 말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알든 모르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자들이기에 영적인 사망 상태이다. 이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고 육신이 살아있었지만 영이 죽어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당장 육신의 목숨을 끊지 않고 에덴동산 밖으로 추방한 것은 거기서 자신의 마음 밭을 농사(회개하며) 지으며 돌이키라고 기회를 주신 것이다.
이것이 모든 인류의 현주소이다. 모태로부터 죄악 가운데 태어난 인간은 모두 에덴동산 밖으로 추방당한 범죄한 아담의 모습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권 밖에서 죽은 채로 살아가는 인생들은 복음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와 그 죄를 탕감 받아야 살아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그 죄를 사함(탕감)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 어떠한 노력으로도, 어떠한 행위로도 스스로 그 죄를 속할 수가 없다. 본성이 죄이고, 태생이 죄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생각 감정 의지 모두가 죄로부터 나온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마치 돌감나무에 아무리 거름을 주고 해충을 막아주고 돌보아 줄지라도 참 감을 맺지 못하는 경우와 같다. 돌감나무는 운명적으로 돌감만을 맺게 된다.
방법은 한가지뿐이다. 돌감나무를 베어내고 참감나무에 접붙이면 된다. 영적인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첫 아담인 죄인을 십자가에서 죽여서 그를 둘째 아담인 예수그리스도께 접붙여야 한다. 뿌리인 운명을 바꾸는 것이다. 본질은 교체하는 것이다. 주님은 이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이라고 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물에서 나와 성령으로 다시 낳아짐'이다. 물은 사람의 정신 사상이다. 옛사람의 정신사상을 잘라내고 위로부터 다시 낳아지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옛 사람이 죽는 것도, 성령의 임재하심도 모두 사람의 능력 밖의 일이다.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만 가능하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가치이기에 이를 '일만 달란트'로 비유한다. 일만 달란트를 돈으로 환산한다면 천문학적인 숫자가 될 것이다. 어느 신학자의 계산에 따르면 약 1600년 동안의 노동의 액수 만큼이라고도 한다. 수천 조를 넘어서 몇 경에 해당되는 액수일 것이다.
죽은 영이 다시 살리심을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를 선물로 받은 것이다. 이것이 일만 달란트라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가 끝이 아니다. 사람들은 종종 거듭남을 구원의 완성으로 오해를 한다. 그러나 다음의 과정이 분명히 남아있음을 숙지해야 한다. 혼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마음의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마귀의 본성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쳐서 다스리는 삶이 뒤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일백 데나리온 빚을 탕감해주는 것으로 비유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일백 데나리온에 대한 해석을 많은 사람들은 문자대로 이해하려고 한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으니, 자신에게 잘못한 자의 작은 죄들을 용서해주어야 함으로 해석한다. 물론 소극적인 면에서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지극히 육적인 접근이다. 이 관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실제의 일들을 대입해 보자. 무슨 일들이 작은 죄들일까?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친구 간에 빌린 작은 액수의 돈일까? 돈을 빌렸으면 당연히 갚아야지 하나님의 사랑을 핑계로 입을 씻는다면 도적이다. 그러나 만일 돈의 액수를 불문하고 빌려간 자가 망하게 되어서 채무 능력이 없다면 어찌하겠는가? 그렇다고 능력이 없는 사람을 감옥에 넣겠는가? 마음이 아프지만 포기하는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일만 달란트 탕감이 없는 이방인들도 그리한다.
다음은 돈이 아니라 마음의 짐, 감정적인 면에서의 미움, 시기, 질투, 등이다. 친구 사이의 대인관계나 고부간의 갈등, 혹은 부부관계에서의 갈등을 등인데, 이런 것 또한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아야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각종 종교가 가르치는 대로 '착한 사람, 좋은 사람'되라는 것은 성경이 아니다.
대인 관계에서의 잘잘못은 통상 쌍방의 원인에서 기인한다. 자신이 절대 선이 아닌데 상대를 정죄해 놓고,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을 원인으로 해서 용서한다는 말도 자가당착이다. 하여간 이런 육적인 것들은 굳이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빙자해서 해결하지 않아도 자신의 깨달음이나, 종교들의 가르침이나, 세상의 심리학적인 교육을 통해서 얼마든지 해결해 갈 수가 있다. 성경에서 언급하는 사랑이나 용서는 세상의 관점과는 전혀 다른 차원임을 알아야 한다.
다시 빚을 성경의 관점에서 조명해 보자. 사도 바울은 예수 믿던 자들을 핍박하다가 부활하신 주를 만나서 '증인'이 된 후에 자신이 사랑의 빚진 자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빚을 탕감 받은 감격을 삶으로 표현하며 살았는데, 바로 전도자의 삶이었다.
<롬1:14~15>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이야말로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자이다. 이를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삶이 증거한다. 죽음에서 다시 산자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본이다. 비단 바울만의 외길이 아닌 것이다. 덤으로 사는 자는, 자신을 위해 대신 죽으신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자신 안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살아서 표현되도록 그분의 남은 고난을 짊어지고 사는 것이다.
주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오셨다. 그리고 그 대업을 일만 달란트 탕감 을 해준 우리에게 맡기고 떠나셨다. 주님의 예언과 원함처럼, 이제 우리는 주님 보다 더 큰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복음전파이다. 이것을 일백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하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각자의 삶속에서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복음을 전할 빚을 졌다. 구령사업 보다 큰 일이 우주에 어디 또 있겠는가?
마귀에게 탈취당한 영혼들은 본래 하나님의 것이었다. 이들이 필요한 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일백 데나리온이다. 우리가 그것을 거져 주라는 말이다. 그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주었다는 말이다. 만일 안주고 침묵한다면 자신이 착복한 것이 된다. 하나님이 아무리 큰 은혜를 가졌어도 복음이라는 빛을 비쳐주지 않으면, 하나님도 힘을 못쓰신다. 그들에게 이것이 없다면 영영히 마귀의 밥이 된다. 일백 데나리온이라는 작고 작아서 겨자씨 같지만 전하여 커지면 큰 나무가 되고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리스도가 주렁주렁 열린다.
이것이 성경적 사랑이다. 이것이 주님의 긍휼을 덧입은 용서함이다. 주께서 영혼을 사랑하심처럼, 그들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는 것처럼 일만 달란트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복음의 씨를 뿌려야 한다. 그것이 본업이다. 호구지책을 위해 하는 일은 부업이다. 혹시 우리는 순서가 바뀐 삶을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경을 잘못 해석해서 오는 폐단일 것이다.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미치리라고 고백했던 바울의 말은, 우리 모두의 말이다. 예외는 없다. 왜냐하면 일백 데나리온을 탕감해 주지 않은 자 역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으니까 말이다. 거듭남이 취소되었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거짓된 거듭남이었음이 들어난 것일 것이다. 이러한 중차대한 비밀을 일만 달란트와 일백 데나리온의 비유로 감추어 두셨다.
전도의 일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다. 증인은 삶으로 보여 줌으로 증인이 된다. 무엇에 대한 증인인가? 부활생명에 대한 증인이다. 이를 삶으로 구현해서 본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의 사모하는 본향인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여기서 죄와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초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것과 복음 전파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백 데나리온에 감추인 비밀은 하나님의 경륜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타를 위함인 것 같으나 실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안배하신 하나님의 계획인 것이다. 누구든지 온전한 구원을 원하는 자는 삶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러한 삶을 부활 생명이라고 한다. 부활된 자는 이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이다.
그러나 정말 일만 달란트를 받은 자라면, 기실 하지 말라고 해도 한다. 그것은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와 계신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을 온전자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전도는 방편이고 실제는 이를 통한, 사람 농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