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넉해져도 각박하게 느끼는 건 욕심 때문” 혼탁한 세상에 한줄기 맑은 바람 / 마지막 선비를 찾아서
안동=이한수 기자 hslee@chosun.com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나자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이란 대형 입간판이 눈에 크게 들어왔다. ‘선비의 고장’ 안동에서 마지막 선비로 꼽힌 사람은 3~4명이 있었다. 그중에서 지역의 성균관(成均館)이라 할 수 있는 안동향교(鄕校)와 안동대 한문학 전공 교수들은 배승환(裵昇煥·82)씨를 첫손가락으로 꼽았다. 그는 “몇 년 전 돌아가신 용헌(庸軒) 이용구(李龍九) 선생과 하은(霞隱) 김일대(金日大) 선생은 선비라 할 만하지만, 이제는 도맥(道脈)이 끊어졌다. 선비 고장의 유습(遺習)을 지켜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큰선비들이 이어져 도학(道學)을 전수해 왔습니다. 학봉(鶴峰) 김성일(1538~1593), 서애(西厓) 유성룡(1542~1607), 갈암(葛庵) 이현일(1627~1704), 밀암(密庵) 이재(1657~1730), 대산(大山) 이상정(1711~1781), 정재(定齋) 유치명(1777~1861), 서산(西山) 김흥락(1827~1899), 서파(西坡) 유필영(1841~1924) 등입니다. 나의 13대조인 임연재(臨淵齋·배삼익)가 퇴계 문하였고, 취헌(翠軒)이라 호를 한 아버지(배하식)가 서파 선생의 문인이었습니다.”
―선비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까. 몇 년 전 종중(흥해 배씨) 회장을 지내고, 요즘은 집이나 지키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대부분 직장을 퇴직한 사람들입니다. 안동대학에서도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집에서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 어른을 공경하는 것 같은, 자기 할 일을 다한 후에 힘이 남아 있으면 공부하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자기 본분을 다하는 사람이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 할지라도 배운 사람이라 할 것이다 (수왈미학 오필위지학의·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는 말이 나옵니다. 요즘은 배운다는 게 자기 출세를 위한 것이지, 자기 몸을 닦으려고 배우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글을 배우면 실천해야 하는데 지금은 겉껍데기만 배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차례나 제사를 지내는 유교 예절이 좀 복잡한 것 같습니다. 술잔을 올릴 때 초헌(初獻·첫 번째 술잔)은 아들의 대표인 종손이 합니다. 아헌(亞獻·두 번째 술잔)은 여자의 대표인 주부(主婦)가 합니다. 종헌(終獻·마지막 술잔)은 친척 중 연장자나 절친했던 사람이 합니다. 아들들이 모두 술잔을 올리고, 여자들이 모두 술잔을 올리면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단축해서 만든 것입니다. 요즘은 아들이 다섯이면 모두 술잔을 올리기도 하는데, 이건 예(禮)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말할 바가 못 됩니다.” 덕을 가지고 있으면 뭇별들이 북극성을 에워싸듯 옹립할 것인데 지금은 저 잘한다고만 떠듭니다. 세상이 또 그렇습니다. 저 잘났다고 해야 추앙하고, 겸손하면 오히려 멸시합니다. 우리네 생각에는 가당치도 않습니다.” 도의심(道義心)이 추락한 까닭에 자기 생활이 불만스러운 것입니다. 도덕과 윤리가 문란해지니까 더 잘살아야 하고, 더 돈 벌어야 하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회복될 가능성이 없는 것 같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녀를 한 명만 낳는 요즘 세태도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 낳아서 잘 키운다고 하는데, 어떻게 잘 키웁니까? 낳을 수 있는 대로 낳고 자연적으로 육성을 해야 합니다. 퇴계는 여섯째인데 (하나씩만 낳으면) 앞으로는 퇴계 같은 인물이 안 나올 것 아닙니까.”
“지금은 정신보다 물질, 남자보다 여자가 앞서는…” “陰의 시대”
이한수 기자(글) hslee@chosun.com
지금까지 그에게 주역을 배운 제자는 6000명을 헤아린다. 주역을 배우고 호를 받은 유명 기업가와 법조인도 많다. 가히 국내 최대 ‘주역 학파’다. 대전 유성구의 신도시 고층 아파트에 사는 그는 단정히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한복을 벗고 양복을 입듯) 수시변역(隨時變易·때에 따라 바꾸는 것)이 주역의 본 뜻”이라고 말했다.
―글은 누구에게 배우셨나요. 동네 친구들이 학교 가는 게 부러워서 논산 가야곡면 심상소학교를 6년 다녔어요. 상급학교에 진학하려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인기아취(人棄我取·다른 사람이 버리는 것을 나는 갖는다)라. 한문이 천해지는데, 천하면 귀해지고 귀하면 천해지는 법이다. 나중에 글자 한 자에 천냥짜리가 될 거다. 한문 공부를 계속해라’ 하셨습니다.” 대둔산 석천암에 주역의 대가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야산(也山)이라 호를 한 분인데 그 분을 따라 13년을 배웠습니다.” ‘이주역’으로 불린 그는 5남1녀 자식이름을 진(震)·감(坎)·간(艮)·이(離)·태(兌)·손(巽) 등 주역의 팔괘(八卦)를 따서 지었다. 역사학자 이이화(李離和·70)씨는 그의 넷째 아들이다.
발가락이 ‘내 코끼리다’ 할 수는 없는 것이요. 사주·관상·풍수처럼 주역에서 파생되어 조각조각 나간 것을 주역이라 할 수는 없지요. 주역은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학문입니다.” ―하지만 옛 유학자들도 주역을 위험하게 여기고 경계했잖습니까. 신비주의 때문 아니겠습니까. 대학(大學)은 ‘선(善)’의 학문입니다. 중용(中庸)은 요약하면 ‘성(誠)’이지요. 두 책을 통해 수양이 쌓이면 표현력을 키우라고 의(義)의 학문인 맹자(孟子)를 배웁니다. 그 다음 말만 앞세우면 안 되기 때문에 인(仁)의 학문인 논어(論語)를 배웁니다. 행동이 점잖고 어질어도 흥을 모르면 안 되기 때문에 시경(詩經)을 배웁니다. 나라 일에 관심 없는 풍류객에 그치지 않고 정치를 잘하기 위해 서경(書經)을 배웁니다.
주역은 미래를 멀리 내다보면서 정치를 하고, 천지 변화와 인생의 변화를 알기 위해 배우는 동양 경전의 최고봉입니다. 사서삼경 중 맨 으뜸이고, 만학(萬學)의 제왕입니다.” “배워서는 안 되는 글이라고 한다면 공자와 주자를 무시하는 소리”라고 말했다. “옛 선비들이 과거 공부하느라 주역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유배를 가거나 깊은 산중에 은둔한 선비들이 주로 공부했기 때문에 주역이 침체됐습니다.” 점학은 정신 수양이 된 뒤 공부하는 것입니다. 나는 매일 아침 점을 칩니다. 하루라도 안 하면 께름칙하지요. 점에서 좋다고 하면 더 근신하고, 점에서 나쁘다고 하면 더 조심합니다.” 그는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이회창 노무현 두 후보의 점괘, 이번 한나라당 경선에서 이명박 박근혜 두 후보의 점괘를 통해 결과를 예측했다고 했다. 주역 공부를 안 했으면 그런 약속은 없지만, 주역을 공부했기 때문에 그런 약속이 전개됩니다. 나는 우연이니 신비니 그런 얘기는 안 합니다.” ‘부부자자형형제제부부부부이가도정’ (父父子子兄兄弟弟夫夫婦婦而家道正·가족 구성원이 각자 제 역할을 해야 가정이 바로 된다)이니
‘정가이천하정의(正家而天下定矣· 집안을 바르게 해야 세상이 바로잡힌다)란 말입니다.” 지금은 정신보다 물질, 동양보다 서양, 남자보다 여자, 아버지보다 자식이 앞서는 음의 시대입니다. 양(陽)과 음(陰)이 반복하는 게 이치입니다. 음이 극에 달하면 다시 양이 됩니다.” “세상일은 욕심부려서 되는 게 아니라 욕심을 안 부리는데 저절로 되고,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는 묘한 것이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죄인 만드는 법치는 안돼, 덕치가 사람을 착하게 만들지” 혼탁한 세상에 한줄기 맑은 바람 / 마지막 선비를 찾아서
이한수 기자(봉화) hslee@chosun.com
가을이다. 한 줄기 맑은 바람이 기다려진다. 날로 혼탁하고 어지러워지는 복잡한 세상 한편에는 아직도 초야(草野)에서 삶의 원칙을 오롯이 지니며 살아 가고 있는 꼿꼿한 유학자들이 있다. 그들을 찾아가 물통 속의 샘물 한 방울과도 같은 지혜를 들어본다. 경북 봉화에서 300여 년 동안 집안 대대로 선비 정신을 지켜오고 있는 권헌조(權憲祖·80) 옹을 시작으로 광주 이백순 옹 그리고 서울, 안동, 대전, 임실, 남원, 장수, 함양…에 있는 ‘어른들’을 차례로 뵙고 올 계획이다. 듣는 자세를 바르게 하여 2007년 가을에 꼭 유용할 말씀 한마디씩을 전달할 것이다.
그는 유학을 전공한 교수들이 몇 손가락 안에 꼽은 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서원(書院)의 원장으로 위촉하는 서한인 ‘망기(望記)’를 60여통 받기도 했다. ‘망기’는 덕망과 학문, 집안 내력을 고려해 최고라고 판단되는 유학자에게 보낸다. 그는 “나보다 망기를 많이 받은 사람은 몇 없을 것”이라고 했다.
권헌조옹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 36세손
촌수(寸數)와 항렬(行列)은 무엇인가?
촌수란 겨레붙이 사이의 멀고 가까운 관계를 나타내는 칫수로서 우리나라에서 생긴 낱말입니다. 중국에서도 이러한 개념은 우리처럼 발달하지 않아서 촌수라는 한자어(漢字語)가 없습니다.
항렬은 혈족(血族)의 방계간(傍系間)에서의 대수(代數)를 말하는 것이고 항렬자(行列字)는 이 항렬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름자 속에 넣어서 쓰는 글자입니다. 항렬을 돌림이라고 하고 항렬자를 돌림자라고도 하는데 이는 성씨의 본관(本貫)과 파계(派系)에 따라 일정합니다. 서양에서도 성씨는 바뀌지 않지만 자기 겨레붙이의 특성 등을 나타내는 미들 네임middle name이라는 것이 더러 있는데 항렬자와 이것은 유사한 취지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촌수를 따지는 법은 이렇습니다. 우선 부부(夫婦), 즉 내외간은 한몸과 같은 일신(一身)이라 해서 무촌(無寸)입니다. 그 다음 부모와 자식 사이가 1촌이고 형제간은 2촌입니다. 조부모와 손자녀 사이도 2촌입니다. 숙백부모(叔伯父母)와 조카 사이가 3촌이고 조카들끼리, 즉 형제의 자식들 사이가 4촌이며, 4촌의 자식과는 5촌이 되고 4촌의 자식들끼리는 6촌이 됩니다.
3촌과 조카를 숙질(叔姪)이라 하고 4촌 사이를 종항(從行)이라 하며 5촌 사이를 당숙질간(堂叔姪間)이라 하고 6촌 사이를 재종(再從)이라 합니다. 재종, 즉 6촌의 자식과는 7촌이 되고 6촌의 자식들끼리는 8촌이 됩니다.
7촌의 아저씨와 조카 사이를 재종숙질간(再從叔姪間)이라 하여 7촌숙은 재종숙이 되고 7촌조카는 재종질이 되며 8촌끼리는 삼종(三從)이 되어 맏이면 삼종형이고 아우이면 삼종제(三從弟)가 됩니다. 여기까지가 당내(堂內)입니다. 당내를 당내간(堂內間)·당내친(堂內親)·당내지친(堂內之親) 등으로 부르는데 한 당(堂), 즉 한 대청 안에 남녀의 내외법(內外法)이 없이 모이는 친족이라는 뜻입니다. 이를 달리 유복지친(有服之親)이라고 합니다. 이는 상복(喪服)을 입는 친족이란 말인데 상대가 죽었을 때 시마(시麻)라는 것 이상의 상복을 입고 애도를 하는 것을 뜻하며, 시마는 석 달에 걸리는 기간을 입는 상복의 이름으로 가장 가벼운 것입니다.
삼종, 즉 8촌이 넘으면 상복이 없어져서 무복친(無服親)이라 합니다. 시마 이하의 간단한 상복 행위에 단문(袒免)이라는 것이 있어서 8촌 이하를 단문친(袒免親)이라고도 합니다.
그렇다고 8촌삼종이 넘으면 촌수 따지기를 그만두는 것은 아닙니다. 삼종의 아들과는 9촌으로 삼종숙질간이 되고 10촌은 사종(四從)이며 그 다음은 사종숙질간, 오종(五從)과 오종숙질간 식으로 수십촌까지의 계촌(計寸)이 가능해집니다.
옛적에 중국에서 성현(聖賢)이 '동성(同姓)은 백대지친(百代之親)'이라 했습니다. 같은 성씨의 혈통은 백대가 내려가도 친족이라는 소리입니다. 우리의 속담에는 사돈의 팔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주 미미한 척분이라는 뜻이지만 거기에는 그만큼 우리 민족이 촌수 따지기를 즐겼다는 정서가 희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상복이 끝나는 8촌이 넘어도 계속 촌수를 따져나가게 되었는데 이것은 친족(親族)에 한해서이지 외가(外家)나 이모(姨母) 또는 고모(姑母)네 집안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개 외척(外戚)의 경우는 4,5촌 정도에서 끝나고 많이 내려가야 6,7촌이며 그 다음에는 서로 내왕도 기억도 끊기는 게 보편이었습니다. 촌수가 8촌을 넘어 10촌에 이르러도 사종숙·사종형제 식으로 호칭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종부터는 그렇게 호칭하는 예가 별로 없습니다. 이로부터는 자기보다 항렬이 높아 아저씨뻘이면 족숙(族叔)이라 하고 할아버지뻘 이상이면 족대부(族大父) 또는 그냥 대부(大父)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입니다. 같은 항렬이면 손위에겐 족형(族兄)이라 하고 손아래에게는 족제(族弟)이지만 아주 친압(親狎)하는 사이에나 '아우님' 정도로 부르고 대개는 어진 종족(宗族)이라는 뜻의 '현종(賢宗)' 이상으로 적절히 예우해 부르게 됩니다. 조카뻘 항렬인 사람에게도 자기보다 연하이고 절친한 사이에나 '조카님'으로 부르고 그렇지 않으면 현종 이상이어야 하며 손자뻘인 사람은, 그쪽에서는 족손(族孫)이라 자칭하지만 이쪽에서는 연하라고 해서 '손주님' 식으로 했다간 망발이므로 최소한이 현종 이상입니다. 현종과 같은 경우에 쓰는 말로는 '일가어른'의 뜻의 족장(族丈)이 있고 서로 항렬이 같아서 평교(平交)하는 처지에서는 족종(族從)과 족체(族체)등의 자칭이 있습니다. 우리 권씨는 단일본에 가까워서 모두가 항렬을 따지고 계촌이 가능한 사이입니다. 특히나 족보의 발달이 다른 성씨에 앞섰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누가 권씨로서 이같은 촌수와 항렬을 무시하고 대거리하면 상대가 매우 언짢아합니다. 지역에 따른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세거지에서는 그런 언행을 용납지 않거나 아예 그런 사람과는 상종(相從)을 아니하고 심하면 문벌(門罰)을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외척과는 6,7촌 이상 계촌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대인들은 타성씨와도 혼반(婚班)과 연혼관계(聯婚關係)를 이루는 일의 빈번한 필요에 따라 그 계대(系代)와 혈통을 따지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민족 모두를 같은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난 형제자매라는 원의의 동포(同胞)라고 밖에는 부를 수가 없게 되었나 봅니다.
인사와 도포, 시도와 고유, 파록과 홀기, 망기와 고목
‘찾아가 묻고(訪問)’, ‘편안한가 묻고(問安)’, ‘병세가 어떤 가 묻고(問病)’, ‘잘 돌아가셨는가 묻고(弔問)’ 등등. 물어보는 일이 인사다.
경중에 따라 위로 정표情表를 하는데 이것이 ‘부 조扶助’이다. ‘물어보는 인사’ 곧 ‘남에 대한 배려’이고 ‘고통분담’이다. 남이 나를 배려하여 근황을 물어오니 나 역시 찾아가 물어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렇게 물을 수는 없다. 정황과 상대를 배려하여 세련되게 ‘잘 물어보는 방법’이 필요한데, 그것이 곧 ‘예禮’다. ‘예의 없는 사람’은 세련된 물음과 배려에 서투른 사람이다.
가령 문상을 가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잘 돌아가셨습니까?’ 그렇게 물을 수는 없다. 그래서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등의 우회적인 말을 한다. 이런 말이 곧 ‘묻는 말’이다.
그러면 상주는, “별로 고통을 느끼지 않고 편안하게 돌아가셨다”는 등의 고인 최후의 안부를 말해야 한다. 어떻게 죽었는지 궁금해 하니 그 답변을 해주어야 한다. 이런 언동이 ‘문상의 상호 예’다.
흥겨움은 배려가 그리 필요하지 않아 ‘물어보는 일’도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예도 그렇게 따지지 않는다. 그런 연유로 안동사람들은 흔히 혼인은 ‘보러가고’, 잔치는 ‘먹으러 가고’, 상주는 ‘물으러 간다’ 고 한다. 혼인은 봐 주면 되는 것이고, 잔치는 먹어주면 되는 것이지만 상주는 ‘꼭 물어봐야 하는 배려’를 잊지 않아야 한다.
안동대 김희곤 교수의 술회에 의하면, 지방학술대회 방청석은 100명이 모이기 어려우며 그것도 관련학과 학생들을 반 정도 채우는 것이 보통이라 하는데, 안동은 행사 때마다 3, 400여명 이상 모여 놀랐다고 했다. 이는 사실이다.
이날 유인물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데 우리 집 행사 는 그 다음날에도 있었는데, 이날 7월 1일, 폭염에도 불구하고 전일 오신 그분들이 거의 그대로 모두 오셨다. 그때 내가 송구스러 운 생각이 들어 김춘대 안동향교전교께 “어떻게 연일 이렇게 오십니까?”하니, 전교어른 말씀이 “이런 행사라면 매일 있어도 매일 참 석해야지”하셨다. 이런 말씀은 ‘그 집 행사는 가 봐야지’하는 안동사람들의 인사예법 때문이다. 안동말로 ‘오품갚음’인데, ‘오품갚 음의 예’를 모르면 안동을 모른다. 그런 경우 ‘도포道袍’라는 예복이 필요하고, 도 포를 입어야만 진정 참여하는 셈이 된다. 나는 그 ‘도포’라는 옷을 몇 해 전 처음 입게 되었다. 아니 이미 입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것인지도 모른다. 알고 보니, 마누라가 시집올 때 ‘도포’라는 옷을 벌써 해왔던 것이다. 처가에서 다른 것은 몰라도 도포는 당연히 해보내야 하는 것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옷을 처음 입을 때 몇 번이나 나 자신의 피부에 다가온 이 옷자락의 냄 새와 의미를 찾으려 했는지 모른다.
“왜 이런 옷을 입는가.” “이 옷이 나의 인생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런 심정은 지금도 이 옷을 입을 때마다 불현듯 일어난다. ‘도포입고 논 썰기’의 속담은 바로 나를 지목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삶에 대한 대안, 또 다른 새롭고 참신한 길이 나타나기 전에는 공범자처럼 따라 갈 것이고, 그럴 때마다 길은 계 속된 하나의 화두로 존재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글을 쓰는 자체가 또 다른 구도의 일환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나만의 고독한 길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걸어갔고, 지금도 걸어가고 있으며, 어쩌면 다음 세대에도 걸어갈 사람이 있을 지도 모 를 일이다. 다른 곳은 몰라도 적어도 안동에서는 그럴 가능성이 있다.
도포로 상징되는 안동의 집회는 정령 안동다운 면이 있다. 그것은 타 지역과 다르게 일반화, 일상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안동에 와 서 이런 전통적 집회에 참석하여 그들의 언, 동을 보고 듣고 그 분위기에 젖어들게 되면 ‘아! 이것이 바로 안동이구나’ 하는 탄식 이 절로 나올 것이며, 안동다움을 피부로 인식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는 타 지역과 뚜렷이 구분되는 현상이며, 살아 호흡하는 안 동문화의 가장 정체성 있는 삶의 빛깔이다. 안동의 전통집회는 이미 훌륭한 ‘집회문화’로서 존재한다. 생경하게 들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전통행사에서 ‘시도’라는 말의 사용은 매우 흔하다. 안동만의 고유용어도 아니다. 그렇지만 나 역시 처음에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래서 사전을 찾아보았는데 놀랍게도, 그 많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내가 찾는 시도는 보 이지 않았다.
그 때 찾은 한 사전에 수록된 ‘시도’를 소개하면, 試圖; 시험 삼아 꽤함 『국어대사전』 ‘민중서관, 이희승 편’
그런데 곧 알게 된 일이지만, 전통집회와 관련된 용어들, 가령 ‘단자單子, ’ ‘망기望記’, ‘파록爬錄’, ‘홀기笏記’, ‘상례相禮’, ‘도집례都執禮’, ‘직일直日’, ‘분정分定’ 등은 어느 국어사전에도 잘 보이지 않았다. 전일 조상들이 그렇게 사용했던 우리고유의 이런 용어는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었다. 그 연유를 나는 아직도 모른다.
‘시도’란 한자로 ‘時到’라고 쓴다. 풀이하면 ‘때에 도착함’이다. ‘등록’의 옛 이름이다. 따라서 ‘시도 했는가’라는 말은 ‘등록 했는가’라는 물음이다.
지금 대부분의 현대식 모임은 ‘등록처’가 있어 ‘등록’을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적어도 안동에서 등록이란 말을 듣기 쉽지 않다. 낙성, 제막, 제례, 장례 등의 모임에서 시도는 그 만큼 일상적 용어이다. 따라서 시도를 위한 ‘시도소時到所’가 설치되기 마련이고, 거기에는 ‘시도용지’가 준비되어 있다. 시도용지에는 주소, 관향, 자字, 생生 등을 쓰는 난이 있다. 여기에 내용을 적어 접수하면 시도는 끝난다. 이 때 부조를 전하기 도 한다. 시도에 참여한 사람이 자신의 신분, 관직, 직책 등을 쓰고자 하여도 그러한 난은 어디에도 없다. 특징이라면 특징일 것이 다.
그리고 모임의 주관자는 훗날 이를 엮어 놓는데, 이를 ‘시도기時到記’라 한다. 시도기는 사후 연락, 답례 등의 자료로 사용된 다. 영남의 고가에서 가장 많이 남아있는 것이 아마 시도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는 그대로 한 시대, 한 사건의 가장 분명한 역사 적 사료이다.
이런 모임은 사실 그 통지서의 양식부터 다르다. ‘○○○낙성식’, ‘○○○제막식’등의 글을 쓰지 않고 ‘고유’라고 쓴다. 그러니 까 ‘○○○落成告由’, ‘○○○先生墓道竪碣告由’등으로 쓴다. 말하자면 낙성식을 낙성식이라 하지 않고 ‘낙성고유’라고 하며, 묘비제 막식을 ‘제막식’이라고 하지 않고 ‘수갈고유竪碣告由’라고 쓰는 것이다.
고유는 한자로 ‘告由’라고 쓴다. 글자대로 해석하면 ‘연유를 고함’이다. 그런 뜻의 말이 관용어로 굳어졌다. 고유에는 ‘고유문告由文’이 있게 마련이다. 고유문이 없는 고유는 생각할 수 없다. 고유문은 집회의 취지, 성격, 연유를 알리는 공적 글이다. 고유문 은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은 아니다. 행사의 성격만큼 학식과 덕망을 갖춘 분에게 의뢰하여 미리 준비한다. 그것은 ‘고유’라고 이름 을 붙여 행하는 행사의 사회성과 역사성을 담보한다. 따라서 고유의 진정한 의미는 조상, 나라, 천지신명 등의 상위개념에 대한 후손 으로서의 자각과 책무와 다짐을 내포한다.
한 예로 몇 해 전, 독도영유권 문제로 일본과 마찰이 빚어졌을 때, 문인들이 집단으로 독도에 가서 고유문을 낭독한 사실을 상기하 기 바란다. 그 때 듣기 어려운 단어 ‘告由’라는 말을 사용했고, 또 고유문을 낭독했다. 이처럼 의식에서 고유문은 의식을 의식답게 하는 핵심적 구실을 한다. 따라서 고유는 그 진행에 있어서 진지함과 엄숙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런 모임을 현대적 감각에 부합(?)하는 획기적 용어로 바꾸고, 내용 역시 축제적 성격을 띠는 모임으로 전환하는 시도도 볼 수 있다. 통지서부터 다르다. 고유양식을 따르지 않는다.
‘남명제’를 총괄하는 ‘남명연구원’ 의 사무국장 김경수씨는 한마디로 ‘남명패스티벌’이라 했다. 남명과 패스티벌? 나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퇴계와 남명이 다르듯이, 좌 도와 우도(조선시대에 낙동강을 좌우로 나누어 경북의 안동일원은 좌도에, 경남의 함양일원은 우도라고 했음)는 분명 그 문화적 성향이 다른 점이 적지 않다. 그 때 김경수 국장은 ‘피해의식도 있겠죠’라 했다. 매우 정확 한 자기진단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또 ‘진산서숙晉山書塾’의 훈장인 이창연씨는 좌도와 우도의 건축물 차이를 “좌도는 오밀조밀한데 우 도는 좀 성글다”고 했는데, 그 ‘성글다’는 표현이 훗날 매우 합당한 말이라 생각되었다.
피해의식이 축제를 이끌어낸 토양인지 모를 일이지만, 내 생각에 안동에서 퇴계 탄신일 날 ‘퇴계제退溪祭’라는 타이틀로 패스티벌을 연출하는 그런 일은, 글쎄? 아직은 힘들 것 같다. ‘제祭’라는 표현자체가 ‘포괄적 축제마당’을 반영하는 현대적 조어造語이지만, 전통이 고스란히 보수되는 안동에서는 쉽사리 이루어질 것 같지 않다. 잔치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집회문화가 적어도 안동에서는 익 숙하지 않다. 지금 말할 수 있다면, 우도가 진보적 계승을 하고 있다면, 좌도는 아직 보수적 계승을 하고 있다고 나 할까? ‘고유문’은 당일 행사책자에 소개된다. 그 책자는 시도를 할 무렵 ‘시도소’에서 답례봉투와 함께 받는데, 봉투 속에는 다음과 같은 물품들이 들어있는 것이 통례이다.
이 4가지 정도가 답례의 기본 품목이다. 보답의 예, ‘답례答禮’에 따른 것이다. ‘과過’와 ‘불급不及’은 모두가 결례이므로 간 명하게 한다. 담배는 ‘행초行草’라고 하고, 돈은 ‘행자行貲 (혹은 ‘회자回貲’)‘라 하여 손님이 떠날 때 주는 인정의 단면이고, 보자기는 도포와 음복 등을 싸기 위한 품목이다. 이미 관습으로 굳어졌다.
3) 파록과 홀기 시도가 끝나면 다음 절차는 어떻게 되는가? ‘파록’이라는 순서가 기다린다. 파록은 한자로 ‘爬錄’이라고 쓴다. 파록은 한마디로 임원선출 의식이다. 임원선출의 어려움을 ‘파爬’라는 한 글자에 집약하여, 그 부담을 줄이려는 조상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국어사전에 는 역시 없으니, 옥편에서 ‘爬’자를 한번 찾아보기 바란다.
파록은 당일 집사자의, “개좌開座 아뢰오”! 하는 한 마디로 시작된다. “개좌 아뢰오”는 “(회의를 시작하니) 모두 앉으시기 바랍니다”라는 뜻이나, 이미 관용어로 굳어졌고, 고유의 실질적 진행을 알리는 선언적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개좌 아뢰오’ 한마디는 그 고전적 뉘앙스와 더불어 분위기를 일시에 정돈시키는 구실을 한다. 아마도 전통집회에서 ‘개좌 아뢰오’ 라는 한 마디는 처음 목격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인상적인 말로 기억될 것이다. 또한 ‘개좌 아뢰오’는 ‘이제 회의를 마치겠습니다’라는 뜻의 ‘파좌罷座 아뢰오’하는 폐회선언과 함께 종료된다. 최근에는 ‘개좌 하겠습니다’로 하는 변화도 목격된다. 파록은 나이, 학식, 인품이 두루 고려되는 사회성을 지니기에 ‘개좌선언’과 함께 아연 참석자의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파록의 선임순서는 그대로 참석자의 인간적 면모와 위치를 규정하는 공개적 문 서가 된다. 참석자의 위상이 그대로 반영된다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흔히 ‘도회道會’라 불리는 대규모의 모임인 경우, 주관하는 단체, 문중에서는 최고 집례자인 ‘도집례都執禮’, ‘상례相禮’등 좌장의 인물은 사전에 배려한다. 특히 도집례는 거의 한 시대의 인물로 인격, 학식, 나이(德, 識, 齒)를 두루 겸비해야 한다. 임원 선정은 그 자격과 더불어 지역사회의 보이지 않는 질서에 깊은 영향을 미치기에 무척 신중하게 결정한다. 이런 이유로 ‘파爬’의 행위, ‘록錄의 기록’은 그 글자만큼 깊이를 가진다.
이런 절차는 또한 개개인의- 사회적 발신과 관계없이- 행동과 학문, 그리고 인격적 성숙을 게을리 할 수 없는 요소로 작용하며, 한편으로는 지역사회를 보다 건강하게 하는 예사롭지 않은 구실을 한다. ‘인다안동人多安東’, ‘문화안동’이 이루어진 원인에 이러한 집회문화의 분위기가 적지 않게 기여해왔음을 굳이 부인할 필요는 없다.
지난해 선친의 상사喪事에 경기도에 사시는 보한재(신숙주) 후손 한 분이 문상을 오셨다. 이 분은 한문에 능하신 60이 넘은 학 자이시다. 그런데 우리 집 처마 끝이 걸려있는 ‘상례파록’을 보고 매우 놀라워 하셨다. 그는 자기 평생에 이런 것을 처음 보았노라 하며, 나에게 “이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왔다.
선악을 떠나서 내가 그의 견문 없음에 놀랐지만, 그 역시 엄청난 문화충격을 받았음이 틀림없었다. 이런 측면은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북북부 일원에 아직 온존하는 전통적 상례문화의 전범을 고스란히 보수하기 때 문이기도 하다.
문중파록은 문중행사인 만큼 문중사람들로 구성되며, 향중파록은 참석한 향중 인사 모두가 파록의 대상이 된다. 문중파록은 사전에 이미 파록이 작성된다. 그러나 향중파록은 그럴 수 없다. 향중파록은 행사전일 이미 집행부의 관계자들이 소집되며, 거기서 임시전형위원인 ‘공사원’과 ‘조사’가 선출되고, 그 전형위원회에서 회의를 거쳐 파록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아주 드문 일이지만- 재미있는 일은 대립하고 있는 두 문중이 동시에 참석한 경우 ‘동지착명同紙着名’의 거부로 파록자체가 무산되는 경우도 있다.
해설: 인사전형위원은 ‘공사원公事員’과 ‘조사曹司’라고 불리는 각10인 이내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인사 전형은 공사원이 전 담하고, 조사는 문서작성위원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들의 구성 역시 공론에 의해 각 향중과 문중을 배려하여 선정된다. ‘시도기’ 가 이 때 사용된다. ‘말조사(末曹司: 가장 어린 조사)’가 ‘그럼 출좌出座 하십시오’ 하고 선언하면 위원들이 모여 이미 내밀하게 선정한 ‘도집례’와 더불어 본격적인 파록에 들어간다. 도집례는 공사원의 추천을 받아 헌관 등 상위임원만을 선정하고, 하위임원은 대게 일임한다. 이 때 도집례는 회의의 명칭, 절차 등 협의사항이 있으면 이를 주재한다.
‘고유파록’은 이러하다.
己卯七月二十一日 際 안동향교 수석장의首席掌議이며 사회교육원장이신 류창훈선생이 기록한 ‘참제기參祭記’(안동향교간행)는 고유의 전 과정이 일기형식으로 소상히 정리되어 있고, 일기 곳곳에 파록에 관한 글이 적혀 있다. 그 중 흥미로운 한 부분을 그대로 옮겨본다.
1999년 7월 18일 曇雨 1999년 7월 21일 火 晴
...先生墓道竪碣時爬錄 都都監 都監 寫石 監校 監刻 掌財 運石 鳩材 董役 都辦 時到 直日 際
그런데 위의 두 문서에서 재미있는 것은 마지막에 외로이 쓰여 있는 ‘際’라는 글자이다. ‘原’이라는 글자도 쓴다. 모두 ‘끝’ 이라는 의미의 글자이다. 다같이 ‘끝’이라는 뜻을 나타내지만 ‘인원물제人原物際’의 규정에 따라 ‘사람은 원原’, ‘사물은 제際’로 구분해 쓴다. 그렇지만 안동지방에서는 ‘際’로 쓰는 경우가 많다. 이는 고성이씨의 현달한 조상 이원李原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 때 문으로 알려져 있다. 파록이 끝나면 의식이 집행된다. 임원들이 예복인 도포를 입고 식장에 대기한다. 이윽고 ‘찬자贊者’(오늘날의 사회자)가 오늘날의 ‘식순’에 해당하는 ‘홀기笏記’라는 문서를 읽기 시작한다. 이를 ‘창홀唱笏’이라 한다. 찬자의 창홀은 전후를 살펴 또렷하고 정중 하게 낭독하는 임무를 지니는데, 행사 진행의 전체적 분위기를 연출하는 역할이 은연중 부여되어 있다. ‘국궁-배-흥-배-흥-평신,’ 이 창홀의 한자 표기는 이렇다. 鞠躬-拜-興-拜-興-平身. 해석하면, “鞠躬: 존경하는 뜻으로 몸을 굽히고, 拜: 절하고, 興: 일어나고, 拜: 절하고, 興: 일어나고, 平身: 몸을 펴다” 이다. 바르고 경건한 자세로 2번 절하는 의식이 이른바 ‘국궁재배鞠躬再拜’이다. 국궁재배는 ‘참배參拜’의 기본이다. 쉽게 설명하면, 국궁은 ‘차려’에 가깝고 ‘재배’는 ‘두 번의 경례’이니, ‘차 려 경례’의 고유 명칭이 바로 ‘국궁재배’인 셈이다. 목례, 거수보다 행위를 보다 크게 엎드려 하는 점이 다르다면 다른 점이다. 해석하면 “알자, 찬인이 각각 헌관을 신위 앞에 인도하여(...神位前),-꿇어 않게 하고(跪),-잔을 올리 고(奠爵),-조금 물러나 꿇어 않고(少退跪),-축을 읽고(讀祝),-절하고 일어나고(伏興), 인도하여 제자리에 가게하고(引降復位)”로 해석된다. 이러한 조목들을 찬자가 천천히 창홀 하면 제관들은 여기에 따라 수행한다. 홀기의 전체문서가 대게 이런 식으로 엮어져 있고, 꽤 장문이다. 소요기간 역시 짧지 않다. 오늘의 집회에 연사, 연설이 많다면, 고유는 침묵이 주조이 다. 추모의 정이 흐르는 마음의 의식, 그래서 과거를 반추하는 침묵의 시간, 이런 분위기가 고유의 맛이고 특징이다. 사진: 홀기 이처럼 전통고유는 시도(회의등록)-파록(임원선출)-창홀(의식집행)과 같은 정연한 순서로 이어지고, 이는 모임을 모임답게 하는 매 커니즘으로 작용한다. 전통을 지키는 사람들은 이를 사람의 일-人事-로 인식하며, 포괄적으로 ‘예禮에 따른다’고 한다.
사진: 망기와 시장의 비교 사진: 분정기-분강서원 98년도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望’이라는 글자이다. 크기가 외형적 특징이라면, ‘망’자는 내용적 특징을 지닌다. 망기 전체가 오직 ‘망望’ 한 글자에 모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望’자는 독립된 난에 따로 올려 써서, 그 글자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부각시켰 다. ‘望’자는 희망, 소망 등에 쓰이는 글자로, 사전적 의미로는 ‘바라다’는 뜻이지만 망기에 쓴 ‘望’은 보다 많은 포괄적 의미 가 함축되어 있다. 즉 위의 ‘望’은 “귀하께서 상기 직책에 임명됨을 인지하시고 동시에 그 직책의 임명을 수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긴 뜻이 압축되어 있다. 하나의 글자에 임명의 모든 것을 담았다. 따라서 ‘망기’란 임명을 명하며, 동시에 수락을 요청하는 문서이다. 그 모든 사연을 ‘望’이라는 하나의 글자에 집약시킨 문서의 양식이 우리를 주목하게 한다. 문서의 간결함과 상대에 대한 예우가 문화적 측면에서 극도로 축소, 상징화되어 나타났다. 어쩌면 과 학적이기까지 하다. 임명장의 양식으로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파격적 격식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조상들은 창안하였고 상용화시켰다. 전통집회와 관련된 고유, 시도, 홀기, 파록 등의 양식이 저마다 특징이 있지만, 그 가운데도 ‘망기’의 양식은 임명문화의 차원에서 그 크기만 줄인다면 오늘에도 재현해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가령 아래처럼.
언젠가 대통령당선자의 임명장을 신문으로 보고 그 양식의 간명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고위직의 임명장을 지금 다시 교지, 교첩으로 복고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수백 년을 이어온 우리 고유의 양식과 제도가 있었다면, 선악을 떠나 그 역사성만으로도 이를 좀 더 품위 있는 방향으로 개선해보고자 노력해보는 일도 무의미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공직자가 그 공직의 책무와 무게, 봉 직자세와 자부심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그런 임명문화의 수립은 필요하다. 우리 고유의 훌륭한 임명문화가 실재했기에 그 시행은 정녕 어렵지 않다고 본다. 태권도, 김치, 불고기가 처음부터 세계적인 것은 아니지 않았던가! 그건 그렇고, 향사의 주제자를 ‘원장院長’이라고 쓰지 않고, ‘도유사都有司’, ‘상유사上有司’등으로도 쓴다. 이런 표현은 최근에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이는 오늘날의 서원 실정에 매우 부합된다. 원생이 없는 오늘날 ‘원장’이라는 표현은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 이는 서원의 고유기능인 교육과 추모의 역할에서 교육부문은 사라지고 추모기능만 남았기 때문이다. 추모라는 단일행사의 주관자 로는 도유사. 상유사라는 표현이 보다 적절하다. 그런데 망기에는 이를 전하는 부속의 글이 삽입되어 있다. 이 부속의 글을 ‘고목告目’이라 한다. 고목은 고직(庫直: 院奴)의 글 이다. 따라서 그 글은 철저하게 고직의 입장에서 쓰여 있다. 고목은 ‘임원선출(薦望)’ 사실을 고직의 입장에서 알리는 글이다. 여 기에는 임명사실과 행사까지의 몇 가지 숙지사항을 언문을 섞어서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까 고목이란, ‘임명 사실과 몇 가지 숙지사항 을 알려 드립니다’라는 내용의 문서로 보면 된다. 고목의 양식은 서원마다 비슷하다. *봉투의 글: 李 院長主 倍下人 開拓 고목-사진 고목은 망기와 비교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망기에 따라오는 부속의 글로써 존재한다. 그러나 고목은 망기를 보완하면서 직책의 무거 움과 책무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엄연한 문서로서의 구실을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직책의 성실하고도 엄숙한 이행을 다시 한 번 숙지 시키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사실 임명이후 향사종료까지 일관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이는 망기를 받은 원장이하 임원 들의 다음 처신방식이 이를 시사한다.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들에겐 두 가지 처신방식이 있다. ‘행공行公’과 ‘단자單子’이 다. 행공은 직책수행의 수락이고, 단자는 고사, 거절이다. 직책수행이 개인적 조건의 제약으로 불가능할 경우 고사를 하게 되는데, 이를 ‘단자’라고 한다. 대부분의 임명이 행공이 전제된 것이기에, 상신喪身이 아니면 단자의 제출은 극히 예외에 한한다. 이런 과정이 완료되면 서원의 제례, 즉 ‘향사’가 거행된다. 행사 당일 심야(새벽 01시 전후)에 거행되는 실질적 진행이 주는 엄숙함과 경건함은 이러한 글 10배 이상의 무게로 우리들에게 뜻밖의 놀라운 문화충격을 줄 것이다.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두 번 정도의 참관은 그렇게 고약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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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eiti 원문보기 글쓴이: 세발까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