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군 개천면 북평리 연화산중 깊숙한 중턱에 자리잡은 옥천사는 신라 문무왕 36년(서기 676년) 의상국사가 창건한 사찰로서 그 역사는 아주 오래다.
임진난 때 병화를 입어 소실된 것을 조선조때 학명, 의오, 양사가 중건하였다.
우리고장에서는 제일 큰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으로 문화공보부에 등록되어 조계종 제13교구 본산인 하동 쌍계사의 관할에 속하여 있다.
창건유래는 의상국사가 문무왕 1년(서기 661년)에 당나라 사신과 함께 건너가 종남산 지상사에서 지엄(중국 화엄종의 시조)의 문하에서 현수(현수-법경)와 같이 화엄학을 배워 깊은 이치를 깨달았다.
현수는 지엄의 뒤를 이어 중국 화엄종의 제3조(조)가 되고 의상은 문무왕 10년(서기 670년)에 귀국하여 관음굴(관음굴-낙산사) 비슬산 지금의 연화산에 옥천사를 창건하고 화엄을 강술하여 화엄종의 시조가 되었다.
그후 현수는 승전이 귀국할때 효소왕 1년(서기 692년)그가 저술한 화엄경탐현기의 비판을 구하는 서신을 의상에게 보냈는데 (그 친필 서신이 오늘까지 전하고 있다) 의상은 문화생에게 저술한 책을 나누어 강술하면서 전교하였다.
문인으로 10대덕과 전교한 10대찰은 다음과 같다.
10대덕은 = 오진, 지통, 표훈, 진정, 도융, 낭원, 상원, 능인의 대덕들이다.
10대찰은 = 부석사, 옥천사, 화엄사, 해인사, 갑사, 범어사, 미리사, 보광사, 보원사, 청담사 등이 있다.
옥천사에서는 능인이이 화엄을 전교하였다.
옥천사 이름은 대웅전 뒤의 샘물의 유래에 따른 이름인데 절이 세워지기 전부터 천연정이 있었다.
이 옥천은 출유가 다른 우물과 달라서 서쪽에서 솟아 동쪽으로 흐르는 물이며 약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의상국사의 창건이후 고려 직각국사가 중건한 것을 비룻하여, 혼응화상, 지원화상, 조선조때는 원호선사와 학명의 오선사, 묘욱선사, 조선조 말기의 농성화상 등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절의 보물로는 고려 고종 36년(서기 1252년)에 만든 보물 495호 임자명반자와 7차 중건때인 조선조 17년(서기 1639년)에 창건된 지방유형문화재 53호 자방루와 지방유형문화재 59호 은향료는 조선조 26년(서기 1816년)때에 만든것이며 조선조 영조 52년(서기 1776년)신도들이 시주한 것으로 전해지는 도지정유형문화재 60호인 대종등이 있다. 그리고 목식통을 비룻한 119점의 불교 소장품이 일괄하여 도지정유형문화재 299호로 지정되어 있다.
특산물로는 연화산의 명물인 송이버섯 여름철의 복분자를 들 수 있고 이절에 따른 암자로는 백연암, 청연암, 연대암 등이 있다.
절에서 십리쯤에 선유, 옥여, 만선등 세 봉이 있어 마치 선녀가 거문고를 타는것 같기 때문에 산 이름을 비파라고 했다가 중건 할 때에 옥정에 연꽃이 있다고 해서 다시 연화라 했다.
계미년에 롱성사가 또 중수하고 사재를 보호하니 고승이나 사승이 이따금 살고 사절이나 관원이 종종 다녀가서 마침내 산간 승지로 되었다.
① 임자명반자
개천면 북평리의 옥천사에 소장되어 있다. 임자명반자는 고려 고종 36년(1249년)에 제 작된 동제의 편면인 일반형의 반자로 양면은 폭 6.59cm 서면을 이루고 있는데 둘레에 명문이 새겨져 있으며 1968년 12월 19일 보물 제495호 지정되었다.
② 자방루
개천면 북평리 408번지에 소재하는 옥천사의 한 건물로서 대웅전의 앞에 위치하고 있으 며 현재의 자방루 건물은 조선시대 영조 40년(1764년)에 중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단층 팔각지붕의 목조와가로 정면 7간, 측면 2간의 주심포 건물로서 단청이 이루어져 있다. 1972년 2월 12일 지방 유형문화재로 제53호로 지정 되었다.
③ 향로
개천읍 북평리의 옥천사에 소장되어 있는 향로는 주록부를 합한 지름 8cm, 높이 23cm의 크기로 향로의 둘레에 4개의 화문원전이 그려져 있으며 그안에는 봉황문을 새겨 놓고 있 다.
그 사이사이와 언저리에는 당초문이 빈틈없이 은상감되었으며 주록의 이면에는 점선으 로 "의령수도사"의 명문을 새겼고, 받침대의 형태가 향로의 몸체와 균형이 잡히지 않은 점과 은선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받침대 부분은 당초의 원형이 아니고 뒤늦게 보수 한 것으로 보인다. 또 향로 목부분의 은입사는 밀양의 표충사나 양산 통도사의 향로와 같은 수법을 보여주는 우수한 작품으로 고려말 또는 조선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1972년 2월 13일 지방유형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었다.
④ 대종
개천면 북평리의 옥천사에 소장되어 있는 대종은 1776년에 신도들이 시주한 거승로 전 해지고 있다.
⑤ 명부전
개천읍 북평리 408번지에 소재하는 옥천사의 한 건물로서 옛 궁선당터에 새로세운것으 로서 지옥중생을 제도하는 지장보살을 모셔놓은 전각으로 측면 34간이며 1985년 11월 14 일 지정문화재 자료 제146호로 지정되었다.
⑥ 대웅전
개천읍 북평리 408번지에 소재한 옥천사 대웅전의 현재 건물은 조선조 효종 5년(1745 년)에 중건되고 고종 2년(1865년)에 다시 중건되었다. 팔각지붕의 목조와가로서 정면 3 간 측면 2간의 외삼출목 다포집의 단청으로 되어 있으며 대웅전내에는 삼존불이모셔져 있고 정면에는 당간지루의 장대석이 남아있다.
1974년 12월 28일 지방 유형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2. 석마
마암편 석마리에 있는 석마는 화강암으로 만든 마형상 석물 2구로서 제작년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구전에 의하면 상고시대 이 마을에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피해를 입게 되자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석마를 만들어 세웠다고 하며 마을의 수호신 격으로 추앙받고 있다. 내면 정월 대보름에 마을의 태평을 비는 동제를 지내고 있으며, 마암면과 석마리의 명칭도 이 석마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여지고 도지정 민족자료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3. 장산 숲(기념물)
마암면 장산 마을의 집단거목림은 약 2백년전에 심은 울창한 5,934m에 숲이 있는데 이를 장산숲이라 한다.
조선조 성종때 이퇴계선생의 제자였던 천산제 허천수가 로산정을 지어 연못을 파서 주위에 나무를 심어 고기잡이와 산놀이를 즐거던 곳이다. 당시에는 연못에 조대가 있었으나 세월의 흐름에 유실 되버렸다가 후손들이 연못과 조대를 다시 복원하여 1천여평의 연못과 숲을 조성하여, 매년 봄이면 후손인 참사 허선과 그 아들 홍도가 지방 유지들을 초빙하여 고기를 낚고 시를 읊으며 풍유를 즐겼던 곳이다.
1987년 5월 19일 지방기념물 제86호로 지정되었다.
4. 허씨고가
고성군 마암면 장산리 184번지 3,243m2대지에 허태래 소유의 6동의 건조되어 있다. 이 고가의 사당은 1865년에 건립되고 구조는 구화목조로서 건평 10평에 사대선조의 위패를 모셨고 대문 양쪽에 방이 있어 과객을 접대하던 곳이였는데 지금은 활용하지 않고 있다. 평거는 1912년에 건립하여 확석목조로 건평 30평으로 귀빈접대와 서제로 사용하였고 2층건물은 1912년엔 건립하여 건평은 10평이다. 평거와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이 고가의 구조는 사당 5.44평, 내삼문 0.58평, 집무실 11.10평, 서재 34.36평, 본채 17.89평, 대문 14.37평으로 구조되어 있으며 1985년 1월 14일 도지정 문화재 자료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5. 동외리 패총
고성읍 동외리 당산에 있는 동외리 패총은 고성만의 해안선을 중심으로 형성된 여러 패총 중의 하나이다. 이곳은 소가야국 중심지인 고성평야의 남서 구릉지로 이 야산을 가리켜 마을 사람들은 당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1974년 동아대학교에서 패총 일부분을 발굴 조사한 바 당시 조사에서 야철지가 발견되었고, 또한 일부분은 발굴 조사한 바 당시 조사에서 야철지가 발견되었고, 또한 토광묘, 석광묘, 옹관묘 등과 함께 탄화미 청동관모 동검파식 한경편과 회청색 계통의 각종 토기와 적갈색 계통의 각종 토기 철기 골각기 등으로 보아 초기 철기시대의 유물로서 이곳에서 생산된 철이 해상을 통하여 일본으로 전래된 것으로 보여지며, 또한 탄화미의 발견은 농경문화가 발달한 것을 추측할 수 있다. 현재 이 패총은 동아대학교 사학과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도지정 문화재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되어 있다.
7. 고성 성지
소가야를 세운 말로왕이 도읍지에 쌓았다고 전하는 이 돌로 된 성터는 처음 구조는 둘레가 3,525척이고 이는 약 15척이었다 하며 성안에 네개의 우물과 한개의 못이 있어싿고 고성지와 김해읍지에는 " 城郭......邑城石築周三千五百二十五尺, 高十五尺, 內有四井 一池見勝覽 " 의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소가야 고도의 성곽은 약 2천년전 백성을 동원하여 성을 쌓는데 7년이나 걸려도 이루어지지 못하자 백성들이 잠자는 틈에 신령이 그 남은 부분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다.
이 성은 동 서 남 수로 출입문이 있어 임란에는 왜적 방비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택지로 변하여 민가의 담장으로 이용되어 모두 멸실되어 그 흔적만이 겨우 남아 있다.
1983년 12월 2일에 지방문화재자료 제89호로 지정되었다.
8. 송학리 고분군(제1)
고성읍 송학리 473-5번지 무학부락에 독뫼로(구육 해발 38.1m) 불리우는 고분군은 소가야의 부족장들의 무덤이라 전해지고 있는 대형고분군으로 칠묘가 있다.
고성읍 주변의 작은 그능들에도 크고 작은 고분들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져 분포되어 있는데 이들을 행정구역상 송학리, 기월리, 율대리 고분군이라 구별하고 있는데 사실상 하나의 고분군이라 지칭해도 될 것이다.
송학리 고분의 자리한 곳은 무학산 또는 무기산이라는 지명도 고성읍지 내천조의 " 俗塼昔固州剌使, 携妓歌舞於比 故因名之 "라고만 해놓고 고분에 대한 언급은 없다.
고분군의 현황은 정상부에 위치한, 2기의 대형분을 비롯하여 그 서쪽으로 분포하고 있는 4기는 동 서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서쪽의 것이 크나 모두 윗부분을 도굴당하였으므로 서쪽의 것은 개석의 일부가 노출되고 동쪽 것은 평평하게 원형이 대지를 이루고 있다.
이 두 고분은 본디 산정상부를 절개해서 유구를 배치한 것이 아니고 현재보다 낮은 산 정상부에 유구를 설치하고 그 위는 높게 성토한 것이라고 느껴지며, 노출된 개석의 위치로 보아서는 봉토속의 유구는 다곽식일 가능성이 많다. 두 고분 모두 주위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봉토 정상부는 많이 깍여져 훼손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서쪽 대형분 바로 아래 소형의 고분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도굴되어 봉토마저 없어지고 겨우 그 가장자리만 남아 있다. 또 서쪽으로 소형분이 위치하고 있으나 주위 경작지 개간때 부분적으로 파손되어 그 형태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변형시켜 버렸다.
나머지 2기는 역시 서쪽으로 윗, 아래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주변개간과 봉토 정상부의 도굴등으로 현재는 방형분처럼 보이는데 처음에는 비교적 대형에 속한 원분이었다고 짐작된다.
전기한 바와 같이 송학리 고분군은 일제시대에 모두 도굴 되었으므로 당시 출토된 유물과 유구의 내용은 전혀 알 길이 없으나 제1호 고분군을 둘러싸고 전방후원분에 대하여 한일하계간에 많은 논쟁이 계속되어 온 바도 있었다.
한편 일본인 로이료구라의 자료에 의하면 1914년에 이 고분군을 발굴하여 출토된 유물은 철제의 장도, 족, 창모편, 리선형, 겸구, 행엽형, 주갑편 등을 발굴하였다고 밝히고 있고 별첨 : 사진화보로서 그를 증명해 주고 있다.
이밖에 이 고분군 부근에서 1986년 1월에 채집된 토기류는 대형기태 1개, 장경대 4개, 라팔형광대 1개, 손잡이 달린 광구배 1개등이다.
이와 같은 자료는 1986년 10월 6일 천리대학에서 개최된 제35회 조선대학회에서 공개강연으로 처음 공개되었으며 조선학회 제11집에 실려있다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1987년 1월 3일 발간한 무기산과 장기산 조사보고서에서 밝혀 놓고 있다.
이외에도 이 고분 밑 반공호에서 황동제인이 출토되었는데 고 4.6cm, 인면직경 2.8cm, 형태와 특징은 극락조는(가능비가)형의 서두부에 착대공이 있고 인면에는 범어의 " 음 "자가 인각되어 있다.
특히 무학산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고분은 고성지방에서 가장 큰 봉토를 갖고 있어서 주목되고 있으며 이를 표본삼아 1960년 3월 2일 사적 제119호로 지정되었다.
°제1호분 : 직경 26.6m, 높이 2.0m
°제2호분 : 직경 20.1m, 높이 1.1m
°제3호분 : 직경 20.7m, 높이 1.1m
°제4호분 : 직경 14.2m, 높이 1.6m
°제5호분 : 직경 23.3m, 높이 2.5m
°제6호분 : 직경 13.7m, 높이 1.7m
°제7호분 : 직경 10.2m, 높이 0.9m
9. 송학리 고분군(제2)
이 고분군은 제1 고분군의동쪽에 이어져 있는 칠기의 소가야고분이다.
비교적 봉분이 큰 것으로 모두 파손되어 원형을 알아 보기는 힘들 정도이다. 그 성격은 송학리 제1고분군과 동일하다고 보아진다.
고분군의 현황은 현재 송학리 민가사이와 고성여자중학교내로 분포되어 있는데 일제시대에 도굴 당하여 정상부위는 대부분 밭으로 경작되어 버렸다.
이 고분군이 밭으로 변하게 된 것은 도굴 당시 원형 봉토 정상부위부터 절개되어 내려오면서 파들어가 유물을 채집하였기 때문에 후일에 이곳을 평평하게 메꾸어져 곧장 경작지로 변하게 하였던 것이다.
주위에서 수집된 토기편에 의하여 송학리 제1고분군과 함께 소가야시대 후반에 형성된 고분으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개별적인 규모는 다음과 같다.
°소유지 : 고성군 고성읍 송학리 238의 102, 103
°관리자 : 제1호분 정정수, 제2호분 고성여자중학교, 제3호분 조정제, 김상단, 제4호분 조연희, 제5,6,7호분 김이택으로 이 고분군도 기념물 제49호로 지정되었다.
10. 교사리 석불
고성읍 교사리에 소재한 석불암에 있다. 두부가 파손된 석불 2구와 금강력사 1구로 이루어져 있어 일명 교사리 삼존석불이라고도 부른다. 원래는 이곳의 밭둑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42년 유보성 화상이 석불암을 지어 안치 하였으며, 그중 중앙의 석불은 좌불인데 두부 및 수인부분이 파손되어 석고로 복원하였기 때문에 확실한 형태를 알 수 없고, 좌측에 위치한 보살상은 입상으로 지장보살상이나 역시 수족부와 두부가 파손되어 복원한 것이며, 우측의 관세음보살은 보살상이 아니고 금강력사상인데 역시 두부가 파손된 것을 석고로 복원하면서 관세음보살 상으로 만들었다. 가슴위에 얹힌 억센 오른 주먹과 내려잡은 왼손, 팔다리의 근육 등은 이것이 보살이 아니고 금강력사상임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주변에 흩어져 있는 광배석과석사자상, 기와파편으로 미루어 보아 이곳 일대가 옛 절터임을 알 수 있으며 이 석불은 도지정유형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다.
11. 고성향교
고성향교의 경우 태조 1년(1392년) 7월에 향교를 완공하고 그해 8월에는 신축된 문묘에서 석전을 올렸으니 이향교도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어 각 고을에 향교는 완공되었으나 그 계획과 규모와 강학은 이미 앞서부터 계속 되어 온 것이다.
고성향교 (철성)는 태조 2년(1393)년 계유 2월 국호를 조선으로 고친 무렵인 다이 태수 신처강때 창건을 보게 되었다하나 이에 대한 문헌이나 현판기문에 아무런 근거를 찾아 볼수 없어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선조 25년(1592 - 1599) 당시의 현령 조응도, 원전 이대수였다는데 임진병화로 인하여 향교가 회진됨으로서 그 이전의 사기들은 더욱 밝힐 수 없다.
다만 명륜당에 걸어 있는 기문에는 뒤늦게나마 이건중수록의 기문이 남아 있다.
만력 35년 선조 40년(1607년) 정미년에 와용공 이현이 도감으로 행현령 정여린과 같이 이향교를 이건중수 하였는데 이와용은 주부병희의 아들이다. 일찌기 유견암희춘의 문하에서 유학하여 성리학을 배웠다. 와룡동에 살면서 두어칸 청사를 짓고 벼슬을 하지않고 자연에 뜻을 두어 재당질 규와 휴옹 심광세와 함께 노닐며 시로서 주고 받으면서 자락하였다. 임진란 뒤에 향교를 중수하여 유학을 되살림에 큰공을 세워 수로써 통정대부가 되었다.
철종 11년(1860년)에 고성향교는 지금의 통영군 광도면 죽립리로 이전하였다. 당시의 고성현령은 김이성이 였는데 이때 고성치소는 호적분규의 민요 수습으로 통제영관 내인 춘원면으로 일시 옮길 무렵이다.
고종 12년(1875년)에 치소가 고성으로 복읍됨으로서 향교도 옛터인 고성읍 교사리 270의 1번지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성전은 오성과 송조이성을 봉안하고 동서무는 우리나라 십팔현을 봉향하고 있으며 대성전은 정면 3간, 측면 2간의 단층 맛배지봉이며 팔각이층 봉화루와 명륜당을 비롯한 서무, 동무, 전사당, 동제, 서제, 내삼문, 동문, 관리사 등 십이동의 건물이 남쪽으로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지방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맞배지붕에 풍판 겹처마 익토식건물로 이루어진 향교건물은 가히 고색적인 분위기를 보여주면서 현대문명속에서 우리 고유전통의 유지계승에 유생들의 노력으로 명백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중국오성과 우리나라 선현의 위패를 배향하는 문묘와 유학을 강론하는 명륜당으로 그 유래를 말해주면서 공자탄항 2545년의 오늘까지 춘기석전, 추기석전을 봉향하고 현대문명속에 잠식되어가는 인의예지를 회복하고 나아갈 유학 발전의 초석이될 전통회복의 획기적 발전의 선비정신 함양과 막킴없는 운영에 최선의 노력을 관계자들은 힘을 다하고 있다.
대성전의 향위는 문선왕을 주향으로 서주종노에 주자, 동주노에 정자(주나라유학자) 배향에는 안자, 회자, 자사, 맹자의 사성이고 동서에 신라 유현인 설총, 최치원의 이현과 고려유현인 안유 정몽주의 이현 그리고 조선조 유현인 김굉필,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김집, 송준길, 정여창, 이언적, 김린후, 성흔, 조헌, 송시열, 박세채 등 십사현을 합하여 이십오현을 향사하고 있다.
명륜당과 풍화루에 삼십여종의 기문이 현판에 계판되어 있으나 철해되거나 막각되 글씨가 흐트려저 알아볼 수 없게되어 있어 이를 판독할 수 잇게 정립해 놓아야 할 것이다.
전통정신문화 계승의 원년으로서 향교에서는 사회교화사업에 중점을 두어 청소년과 학생들에게 도의 정신 함양에 솔선하는 의표가되어 그 실천에 앞장서고 있다.
1975년 2월 5일 지방문화재외 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되었다.
12. 학림리 지석묘
하일면 학림리 들판에 5기의 지석묘가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해안지대에까지 일열로 분포되어 있으며 일명 칠성바위라고 불리워진다. 이곳은 하일면사무소가 있는 주위 들판으로 비교적 규모가 큰 기반식 지석묘로서 도지정기념물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다.
13. 육영재
하일면 학림리 학동에 있는 전주 최씨의 서재. 이곳은 약 3백년전 전주최씨들이 정착하여 자연촌락을 이룬 집성촌으로 1723년(경종3년) 최씨문중에서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이 서재를 세웠다고 전한다. 건물규모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목조와가이며 근년에 중건되었다. 현재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으며 당시 학동들이 사용하던 고서 3백여권이 소장되어 있다.
14. 덕명리 공룡발자욱화석(경상남도 기념물 제71호)
고성의 덕명리 해안의 등대로부터 딱밭골까지에서 산출되는 공룡발자국의 개수는 1842개에 달한다. 아래 7개 지점의 개수는 1376개, 나머지 해안일대의 개수는 466개이다. 이들 중 대부분은 이구아노돈류의 공룡이고, 2족보행의 육식공룡과 4족보행의 공룡이 포함된다. 4족보행의 초대형 및 소형공룡은 용반목 용각류에 속한다.
쌍족일대 - 쌍족에 산출되는 240여개의 공룡발자국으로부터 약 34필의 공룡이 확인 된다. 이 곳의 공룡은 2족보행의 이구아나용과 4족보행 용각류 단 2종류의 공룡이 인정된다. 전자는 후자보다 개체수가 풍부하여 약 20필, 후자는 약 10필정도이다. 후자의 뒷발자국은 코끼리 발자국에 준한다.
이구아나 공룡(Koseongosauripus)의 발자국 족장은 300~370mm, 족폭이 250~410mm의 범위에 있는 것은 용각류(Elephanto-sauripus), 발자국의 뒷발 족장은 230~430mm의 범위에 놓인다.
이곳의 발자국들은 대체적인 윤곽을 파악할 정도로 보존되어 있고, 근본적인 기재를 할 정도로 보존이 양호한 것은 아니나 예외적으로 이곳에서 보존이 가장 좋은 것은 쌍족의 계단길에 있는 발자국으로서 이 화석은 Koseongosauripus의 Paratype이다.
선착장 일대 - 148개의 발자국중 14개의 2족보행의 이구아나 공룡과, 뒷발자국 44개, 앞발자국 44개, 도합 88개의 4족보행 용각류 공룡 발자국이 뚜렷하다. 전자는 석고 복제품 제작에 양호한 상태에 있다.
덕명국민학교 동측 도로면 (Ultrasauripus ungulatus KIM 기재장소) 이 지점에는 초대형 공룡과 이구아나 공룡의 발자국이 공존한다. 후자는 정서쪽 방향으로 보행방향을 취하여 쌍족의 산출지와 마찬가지로 이들 공룡이 단체로 이주하였음을 시사해준다. 전자는 남동방향을 향하여 도보하였으므로 후자와 공동보조를 취하지 않은 것은 쌍족의 현상과 같다. 전자가
지나간 다음 후자 공룡들이 단체 이동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지점의 용각류 공룡 발자국은 Ultrasauripus unglatus KIM의 Holotype 및 Generritype으로 기재된 바 있다. 종소명 metacarpus(발목뼈)는 자국에 앞발가락이 없고 발굽자국만 있기 때문에 그 특징을 표시한 것이다.
Ultrasauripus의 특징은 그 뒷발자국이 코끼리 발자국 모양을 취한다. 따라서 앞(manus) 및 뒤발자국(pes)에는 발톱의 구조가 인지되지 않는다. Manus위에 pes의 overlap 정도는 소와 같은 Primary overlap이 아니라 불도마뱀(Salamanders)과 같은 Tertiary overlap으로 생각된다. pes의 직경은 manus의 약 2배 정도로 앞발자국에 비하여 뒷발자국이 훨씬 큰 용각류
인 것이다. 이와 같은 공룡은 Janensch가 1914년에 기재한 세계 최대급 공룡인 Brachiosaurus brancai를 들 수 있다. 이 공룡의 장골은 퇴화하여 없어졌으므로 앞발자국은 뒷발자국에 비하여 작게 나타난 것이다.
이 지점의 초대형 4족보행 공룡 발자국의 manus는 pes에 의해 중첨됨으로써 크게 팽축되어 나타나나 뒷발자국은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발자국 윤곽이 높이 3mm정도의 외륜선으로 뚜렷이 드러나 있고, 미끄러지거나 일그러진 흔적이 전혀 없으므로 Holotype으로서 가치가 있다. 본 발자국 화석의 Paratype은 군바위와 돌끝지점 해안에 산출되어 있다. 본 발자국
의 공룡은 Brachiosauridae의 Brachiosaurus중 규모가 큰것으로 생각되는 Ultrasaurus로 추정된다. 이 초대형 공룡 발자국은 코끼리 발자국형의 것으로서는 기재를 위해서 규모나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므로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하겠다. 즉 상술의 Paratype은 뒷발자국의 직경이 1100mm에 달한다.
이 Ultrasauripus의 산출지점은 자동차가 주행하고 있는 도로이므로 장래에는 결국 파손되어 없어질 운명에 있다. 그러나 다행히 본 화석의 북동측에 있는 높이 약 7m의 암벽 아래에는 이 화석과 동일한 화석이 연장 발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암벽을 절삭하여 연장발달되어 있는 화석의 층리면을 개발함이 중요하게 생각된다. 이들 화석이 새로이 개발된다면 현재의 도로면상에 있는 화석보다 그 보존상태가 훨씬 양호할 것임이 확실시 되었다.
옹기굴 동측(Koseongosauripus onychion KIM의 기재장소) - 이 산출지역에서는 30여개의 발자국에서 12필의 공룡이 확인되며 그 중 2족보행 공룡이 11필이다. 11필의 2족보행 공룡은 대체로 보아 정남방향을 향하여 단체로 떼를 지어 보행한 것으로 나타났으나, 4족보행 공룡은 이들과 정반대 방향으로 보행하여 이것은 쌍족이나 덕명국민학교 동측 도로면 노두의 양상과 동일한 상태에 있다고 하겠다. 즉, 2족보행의 이구아
나 공룡은 단체이동을 했으나 4족보행의 용각류는 개별행동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 산출지의 2족보행공룡인 이구아나 공룡은 발톱 고성용족인(Koseong-osauripus onychion KIM)으로 명명되어 있다. 종소명 onychion은 발자국에 “작은 발톱”자국이 뚜렷한 특징으로부터 딴 것이다. 이곳의 Generitype 및 Holotype 화석은 그 보존이 세계적으로 드물 정도로 보존상태가 완벽에 가깝다. 이 화석의 Paratype은 이 화석으로부터 125m거리의 서쪽에 있다. 본 화석은 척골(Metatarus), 지골(Phalange), 하퇴(Crus) 및 발톱구조가 명백하여 미국이나 유럽의 Iguanodont 보다 명확한 보존을 보여줌이 주요 특징이다. 이 Koseongosauripus의 발톱은 작고 뭉툭한 상태이다. 외국에서 종래에 기재된 Iguanodont 발자국들은 상기 척골, 지골, 하퇴골인 등의 구조가 이처럼 뚜렷하지 않다.
이 Koseongosauripus 발자국은 공룡의 도보상태와 바닥물질의 성질에 따라서 그 모습이 달라질 수 있고 발자국 화석에 대한 수직방향의 수준별 수평 단면의 위치에 따라서 그 형태가 육식공룡이나 Hadrosaur 발자국 등 온갖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사진관찰의 경우는 사진촬영의 방향에 따라서 형태의 차이를 나타낸다. 이러한 제 요소를 감안하여 평가할 때
각지에서 산출되는 2족보행공룡 발자국은 이 공룡에 속함은 거의 예외가 없을 정도이다. 이같은 상태는 첨부된 사진에서도 쉽게 알아 볼 수 있다. 이러한 결론은 이 지점 Holotype의 보존이 극히 양호한 데서 그 원인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군바위와 돌끝 : Paratype이 존재 - 군바위 산지에는 Ultrasauripus의 Paratype이 있다. 이 Paratype의 뒷발자국 직경은 1000mm이다. 인근에는 많은 보존 불량의 Koseongosauripus의 발자국이 있다. 돌끝산지에는 Ultrasauripus의 Paratype이 7개정도 있으며, 이들의 뒷발자국 직경은 대부분 1000mm 이상으로 가장 큰 것이 1200mm이며, 그중 한개는 뒷발자국 직경이 640mm, 다른 한개는 뒷발자국 직경이 280mm이다. 돌끝 서측의 1개 지점에는 2족보행 공룡인 Koseongos-auripus 공룡의 새끼로 생각되는 공룡의 발자국이 확인되었고, 이것은 고성군, 함안군, 창원군등 현재까지 발견된 우리나라 공룡발자국중 가장 작은 것일 것이다. 이발자국의 측정치는 족장 130mm, 족폭 110mm, 편보폭 570mm, 족인심도 20mm이다. 군바위와 돌끝의 Ultrasauripus 공룡은 10여필에 달한다.
딱밭골 - 딱밭골 신출지에는 600여개의 공룡발자국이 확인되는데 이들은 보존상태가 불량하여 종속기재가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 그러나 쌍족지점의 종속 기재에 의하여 이곳 공룡들은 대부분 이구아노돈과의 Koseongosauripus onychion KIM에 속한다. 이들 공룡은 이곳에서도 단체 이동의 증거를 보여준다. 이 공룡이 20여필, Ultrasauripus ungulatus KIM이 10여필 미만 확인된다. 전자의 1필의 개체공룡 발자국이 35개나 연속적으로 산출되기도 한다.
딱밭골 조간대 파식대지의 공룡족인들 외에 이 산출지역 서측의 언덕위에 있는 불규칙한 요철면으로 대표된 거칠은 표면은 공룡발자국이 아니다. 따라서 이곳은 공룡난무장이라 할 수 없다. 공룡난무장은 건천읍 용명리에서 확인된다.
샛골 - 이 지점의 발자국은 일견하여 Hadrosaur 발자국에 유사하나 자세히 검토해 보면 2지와 4지가 평행하고, 하퇴인과 뒷굼치 자국을 보면 Koseongos-auripus onychion KIM으로 확인된다. 이 화석은 발견될 당시에는 발가락 자국마다 석회질 단괴가 충진하여 사진촬영이나 석고 복제본 제작이 용이하다. 기타 지역에서의 공룡은 대부분 직진 보행이나, 이 표본은 우로 만곡의 선회형 도보를 나타냄이 특징이다. 이 화석에는 발톱과 하퇴흔이 뚜렷히 나타나 있다. 본 발자국은 요동형 물결자국과 현저한 건열구조 및 상기 석회질 단괴를 수반하며, 특히 발자국 산출층 수 m상위 층준에는 빗방울 자국이 발달되어 있다. 이곳의 빗방울 자국은 면적 100㎡내의 70~80개 존재하며, 빗방울 자국의 크기는 최대 12mm, 최소 1mm이며, 수직강우의 증거를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고성군 덕명리, 고성군 거류산, 창원군 고현리 및 함안군 외암리에서 발견되는 모든 2족보행 공룡의 발자국은 이 공룡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발톱 고성룡족인은 Contrast가 가장 양호하므로 석고 작업으로 복제품 제작에 적당하고 사진촬영하여 교재용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