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선동과 권면
“마음을 돌이키지 않은 유대 사람들이 이방 사람들을 선동해서, 믿는 형제들에게 나쁜 감정을 품게 하였다.”(2절)
이방인들을 향한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 여정에 아주 열정적인(?) 훼방꾼들이 등장합니다. 유대 사람들이죠. 그들은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임한다고 주장하는 급진적 세력들에 대항하여 진리를 수호해야한다는 일념으로 안디옥, 이고디온에이어 루스드라와 더베 지역까지 뒤쫒아가 훼방을 놓습니다. (성소수자, 이주민들을 교회 밖으로 몰아내려는 교단의 모습과 비슷하네요) 그들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폭력과 이간질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정치에 능한 그들은 영악한 두뇌로 지도세력과 경건한 중산층, 군중들까지 선동하지요.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 예수를 믿는 자에 대한 나쁜 감정을 퍼뜨리는 것입니다. 왜? 이들은 무슨 동기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일까요?
바로 ‘시기심’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반드시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 더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때 우리에게는 ‘시기’하는 마음을 생기기도 하죠.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시기’하여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시기는 ‘나보다 남이 잘되는 것을 탐내고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도, 모세를 시기했던 아론과 미리암도, 다윗을 죽이려 했던 사울도 모두 ‘시기심’을 품었습니다.
시기심에 휩싸인 사람의 감정과 생각은 타인에게 메여있기 때문에 결코 자유하지 못합니다. 시기심의 이면에는 “내가 저사람보다 더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가 숨겨져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욕구는 지속적으로 남과 나를 비교하게 만들고, 존재에 대한 우열의식을 내재화하게 만듭니다. 특히, 자본주의는 1등이 되지 못하면 도태될 것이라는 불안을 심어주는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우열의식은 성장/경쟁을 위한 동력으로 합리화 되기도 합니다.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을 굳세게 해주고, 믿음을 지키라고 권하였다…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맡겼다.“(22-23절)
반면 바울과 바나바는 돌을 쳐맞으면서도 자유롭고 담대하기 그지 없습니다. 어느 지역에도 메이지 않고, 어떠한 공로의식도 없이 애써 양육한 제자들과 정든 교회공동체를 떠납니다. 믿을 만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죠. 그들은 교회와 제자공동체를 주님께 의탁합니다. 때문에 그들의 전도에는 조급함이 없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의 태도 때문인지 마음을 굳세게 하라는 말에도 힘이 실립니다.
오늘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유대 사람들을 움직였던 시기심인가요? 사도들이 누렸던 믿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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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나눔]
# 너와 나의 한몸살이
지난달 금요일 휴가를 쓰고 모둠(교회 소그룹) 지체들을 만났어요. 1:1로 만나면 다른 기운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지 하는 바람도 있었고, 한몸살이를 결단한 계기에 대해 물어보고 싶기도 했거든요. 상희누나와 맨발걷기로 운길산 수종사에오르면서 이런저런 얘기 나누었어요. 항상 상희누나의 전투적인(?) 믿음과 자발적 헌신이 신기했었는데 살아온 이야기를들어보니 고개가 끄덕여졌어요. 상원이형한테는 평소에도 자극을 가장 많이 받아왔었는데, 직접 대화해보니 좀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어요. 어떻게 한몸살이를 선택했냐는 물음에, ‘선택’이 아니라 ‘태도’를 달리한 거라는 말이 기억에 남네요.
# 관계의 전환점
없이있는마을 이레 청년부가 서로를 향한 관계성을 한 차원 끌어올리는 시점인 것 같아요. 비슷한 고민과 질문도 있지만, 20여년 가까이 살아온 배경와 습이 다르니 그 차이를 알아가는 것이 아직은 신기하기만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또래들에게는 마음을 여는 것이 더 쉬운 것 같아요. 나무날 저녁에 고맙집(저의 집)에 모여 대화를 나누다가 스스로도 애써 외면하고있던 한몸살이에 대한 생각들, 감정들을 꺼내게 되었는데… 은경누나와 유림이가 있는 그대로 보아주고 들어주어 참 고마웠어요. 더 솔직하게 나누고 배우고 기도해봐야겠구나 생각이 전환되었던 것 같아요.
# 배움과 의문
더불어 배움 완전 재미있어요. 저는 외부에 ‘거악’을 제거하려는 태도보다 내 안의 ‘악의 평범성’을 자각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있어요. 때문에 어떤 신념과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거부하거나, 지나치게 확신을 갖는 것에 대한 경계심이 있는데…(나중에 인생길 나눌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부분은 하나님의 대학을 표방하는 한동대학교의 위선적 모습에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발제에서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인식하고 트랙(구조) 밖으로 나와야한다는 부분에서 자본주의 교환경제도 하나님의 창조영역 안에 있다면 무작정 벗어나고 구별되려는 태도로만 대안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