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 최초의 공립 대안 ‘송강’고등학교의
개명을 요청합니다.
광주·전남 지역 첫 공립 대안 고등학교의 개교를 축하하오며 우리의 미래를 짊어 질 인재 양성을 위한 선생님들과 교직원 여러분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논어에 ‘무릇 정치는 정명(正名)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하였습니다. 교육행정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학교의 이름인 송강(松江)은 공모와 여론 수렴을 거쳐 결정하였고, ‘소나무처럼 곧고 푸르기를 바란다는 송(松)과 강물처럼 자유로운 사고를 가지기를 희망하는 강(江)을 의미한다’는 전라남도 교육청 관계자의 설명대로 공립 대안 고등학교다운 더 없이 훌륭한 이름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송강(松江)’은 정치인(政治人)으로서 행한 악행(惡行)이 알려지지 않은 반면(反面), ‘가사문학의 대가’로 널리, 깊게 알려진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 ‘송강 정철(松江 鄭澈)’을 먼저 떠오르게 합니다.
송강 정철은 호남(湖南)지역에서 수많은 인재(人才)가 참혹한 화(禍)를 당해 ‘글 읽는 소리가 줄어 들었다’할 정도의 심각한 후유증을 겪게 한, 기축옥사(己丑獄事, 조선 선조22년) 당시에 위관(委官)으로서 정치적 악행(惡行)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입니다.
송강 정철이 지은 가사(歌辭) 사미인곡(思美人曲) 등이 가사문학(歌辭文學)의 백미(白眉)로 평가(評價)를 받아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습니다. 더구나 ‘송강고등학교’가 담양에 위치하여 송강 정철과 관련된, 이미 담양의 관광자원이 되어 있는 가사문학관 등과 연상이 됩니다. 그래서 ‘송강’하면 ‘곧고 푸른 소나무와 자유롭게 흐르는 강물’이 아닌 ‘송강 정철’, ‘가사문학의 대가’가 먼저 떠오르고 ‘송강 고등학교’하면 ‘정철(鄭澈) 호(號)인 ‘송강(松江)’을 학교의 이름으로 했구나’라는 생각을 먼저 할 정도로 우리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는 인물이 ‘송강 정철(松江 鄭澈)’입니다.
송강 정철의 호남의 수많은 인재에게 혹독한 피해를 입힌 정치적 악행(惡行)이 이미 높게 평가되어 있는, 지속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그의 문학적 재능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송강 정철이 조선 선조22년(1589년) 10월에 일어난, 지금도 그 진위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연구가 정립되지 아니 한 ‘정여립의 모역(鄭汝立의 謀逆)’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 위관(委官)의 교체를 주장하고 스스로 위관이 되어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1000여명의 인사가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파직(流配·罷職)되었고, 금고(禁錮)에 처해지는 화(禍)를 입게 한,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중심에 있었던 사실이 여러 역사학자들의 연구로 확인이 되었습니다.
어느 학자는 기축옥사를 우리 정치·사회계에 존재하는 호남에 대한 지역차별(地域差別)의 연원(淵源)의 하나라고 지적하고 있기도 합니다.
조선의 최악의 임금으로 평가되는 조선의 14대 임금 선조가 왕권(王權) 유지를 위해 서인계(西人系)인 송강 정철을 이용했다는 설과 송강 정철이 위관이 아니었다는 설도 있지만, ‘송강 정철’이 ‘정여립의 모역’ 사건을 기회로 삼아, 자신이 속한 서인계와 정치적인 대립 관계에 있던 동인계의 인사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까지 정치에 투영(投影)시켜 수 많은 인사가 억울하게 화를 당하게 한 역사적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 등은 ‘임금에 대한 그리운 마음, 충절(忠節)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고 합니다만, 이를 송강 정철의 정치적인 행위에 비추어 보면, 어렸을 때부터 궁궐(宮闕)에 자유롭게 출입하면서 보고 느낀 권력에 한 동경(憧憬), 중앙으로 복귀하여 권력을 잡고자 하는 ‘송강 정철’ 개인의 정치적 욕망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송강 정철이 음주를 즐기고 시를 쓰는 호방(豪放)한 성격이고, 강직(剛直)하고 청렴(淸廉)한 성품이었다고도 하지만, 그는 파직(罷職)되거나 지방의 관리로 임명되었을 때 중앙에 복귀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음주로 달래고 그 심정을 글로 표현한, 끊임없이 중앙으로 복귀해 권력을 잡고자 한 ‘정치적 욕망의 화신(政治的 欲望의 化神)’이라 평함이 타당할 것입니다.
현재도 일부 공직자와 정치인들이 본분을 망각하고 축재(蓄財)를 위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함에 부끄러움이 없으며, 정권을 잡기 위해 지속적인 대립과 비방만을 일삼고 있어, 이에 혐오감을 느낀 청년세대 정치·사회적인 상황에 무관심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공직자와 정치인들의 마음과 행실의 기본은 자신의 욕망을 성취할 목적으로 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의 미래를 이끌고 갈 청년을 교육하는 공립 대안 고등학교의 이름을 문학적인 재능에 가려져 알려지지 않고 있는,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성취하고 권력을 얻기 위해, 수 많은 호남의 지식인이 죽임과 귀양·파직을 당하고 금고에 처해진, 기축옥사 당시에 정치적 악행의 중심에 있었던 ‘송강 정철’을 연상하게 하는 ‘송강’으로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에 곤재 정개청(困齋 鄭介淸) 선생의 후손인 고성정씨(固城 鄭氏) 문중 종친회는 ‘송강(松江) 정철(鄭澈)’을 연상하게 하는 ‘송강(松江)’고등학교의 개명을 간곡히 요청하오며, 개명이 될 때까지 육문모목회(六門慕睦會)와 함께 개명을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기축옥사(己丑獄事) 당시에 무고(誣告)로 화(禍)를 당한, 곤재 정개청(困齋 鄭介淸, 1529~1590) 선생의 본관(本貫)은 고성(固城, 옛 철성(鐵城))으로, 전라도(全羅道) 나주(羅州)에 최초로 건립(建立)된 서원(書院)인 경현서원(景賢書院)의 초대원장(初代院長)을 지냈고, 선조가 ”만일 왜란이 있다 하면 누가 장수가 될만 한고 ?” 하니 영의정이었던 박순(朴淳)이 8도(八道) 도원수(都元帥)로 천거(薦擧)하는 등, 여러 차례 관직(官職)에 천거(薦擧)되고 임명(任命)되었으나 숙배(肅拜)만 하고 고사(固辭)하거나, 단기간(短期間) 재직(在職)하고 돌아와 함평군 엄다면 제동(옛 무안의 엄담(嚴潭))에 윤암정사(輪巖精舍)를 지어 오로지 후학(後學) 양성(養成)에 전념(專念)한 학자(學者)입니다.
곤재 정개청(困齋 鄭介淸) 선생의 ‘의리(義理)와 원칙(原則)이 문란(紊亂)해져 가는 세태(世態)에게 좀 더 엄정(嚴正)한 절의(節義)의 실천(實踐)을 시대정신(時代精神)으로 요구(要求)한 절의론(節義論)’에 ‘배(排)’자를 첨가(添加)하여 ‘절의(節義)를 배척(排斥)한다는 배절의론(排節義論)’으로 왜곡(歪曲)한 당시의 위관(委官)인 ‘송강 정철(松江 鄭澈)’ 등의 모함(謀陷)으로 혹독(酷毒)한 장형(杖刑)을 받았고, 그 후유증(後遺症)으로 인해 유배지(流配地)인 아산보(阿山堡, 함경북도)에서 절명(絶命)하였습니다.
호남의 선비 중 곤재 정개청(困齋 鄭介淸) 선생을 추종하였다 하여 옥에 가둔자가 50여명, 귀양 보낸자가 20여명, 금고 된 자가 400여명에 이른니다
곤재 정개청 선생께서는 당인(黨人)이 아닌 당인(黨人)이 되어 1589년(선조22년) 동·서 양당(東·西 兩黨)의 당쟁(黨爭)을 시작으로 250여년의 세월(歲月) 속에 영욕(榮辱)을 거듭한 것은 자산서원(紫山書院, 1679년 숙종5년 사액(賜額))이 5번의 건립(建立)과 훼철(毁撤)을 겪은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1965년 5월 문교부(文敎部)의 복설허가(復設許可)에 이어 1985년 함평군 향토문화연구회(鄕土文化硏究會)와 대학교수(大學敎授) 200여명, 사회 저명인사(社會 著名人士) 50여명이 자산서원(紫山書院)의 복설발의(復設發議)를 하였으며, 1988년 유물관(遺物館)을 착공하여 1999년, 10여년의 공기로 토지는 고성정씨 문중이 매입하고 건축공사비는 국비 50%, 지방비 50%의 재정으로 복설이 완료 되었습니다.
곤재 정개청 선생의 저서(著書)는 우득록(愚得錄), 수수기(隨手記)가 있습니다. 수수기는 기축옥사 때에 분실되었고, 우득록은 그 목판본(木版本)을 1987년에 전라남도 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 146호로 지정(指定)하여, 자산서원의 유물관에 보관·관리(保管·管理)하고 있으며, 함평군에서 자산서원을 ‘향토문화유산(鄕土文化遺産)’으로 지정하였습니다.
2021년 2월 28일
고성정씨 종친회 회장 정명환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