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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2013 실크로드 동창회 원문보기 글쓴이: 청계산인(홍석경)
오늘은 터키의 아르테미스 여신상에서 본 사자랑 우리 불교의 사자상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먼저 서론으로 불교에 등장하는 사자상의 유래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려고 한다. 본론보다 서론부가 너무 길지만... ^^;;
고대로부터 사자는 용맹함과 권력의 상징이었다.
고대에 서아시아 지역의 바빌론, 그리스 로마시대의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나 석관에는 사자상이 많았다.
바빌론의 행진거리에 있던 사자 타일 (기원전 604-562년),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터키
단순히 색깔을 칠하고 유약을 바른 평면 타일이 아니라 입체감이 있는 부조라서 사자의 모습이 리얼하였다.
석관 상단부에 새겨진 사자상. 사슴사냥을 하는 사자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기원후 2-3세기 로마시대 석관,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터키
남전(대장경?) <대반열반경> 제5송품에 보면, 80세 노구의 붓다는 그를 따르는 비구(제자)를 이끌고 고향땅으로 향하던 중 병을 얻어 히란냐바티강 맞은편 언덕 쿠시나가르 외곽의 사라나무숲으로 가서 침상을 준비하고 죽음의 채비를 차린다. 이 때 한쌍의 사라나무가 아직 꽃필 때가 아닌데도 갑작스럽게 온통 꽃을 피워 여래의 전신 위로 하늘하늘 흩날리며 내려와 여래를 공양하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장면이 그려지고 있다.
이때 아난다가 슬픈 눈빛으로 숨을 거두려하는 붓다를 쳐다본다. 그때 붓다는 다음과 같이 훈시한다.
“아난다여! 절대 하늘에서 꽃잎이 떨어지는 이런 일만이 여래를 경애하는 일은 아니다. 아난다여! 비구와 비구니, 우바색과 우바이 이들은 반드시 진리를 몸에 지니고 진리에 따라 진리에 바르게 이르고, 진리에 따라 행동할 때만이 여래를 깊이 경애하는 것이 되느니라!”
붓다의 이 유명한 설법은 제자들에게 인간 싯달타라고 하는 육신의 유무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그가 설법한 진리에 따라 행동하며 또 그 진리를 구현하는 길만이 싯달타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일임을 역설한 것이다. 스러져가는 자신의 육체에 집착치 말라는 하나의 위로의 말이었다.
* 기원후 2-3세기 간다라 시대 부조: 붓다의 죽음을 그린 대반 열반상 (침상 아래 등을 보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펑펑 우는 이는 붓다의 애제자 아난일 것이다. 왼쪽 침상 옆에 서있는 이는 붓다의 수호신 바즈라파니 (헤라클레스 간다라 버전)이다. 그의 손에 들고 있는 도끼날처럼 생긴 것은 제우스신과 인드라신의 상징인 벼락(바즈라)이다.
"아난다여! 나의 죽음을 한탄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아난다여! 내가 항상 말하지 않았더냐? 아무리 사랑하고 마음에 맞는 사람일지라도 마침내는 달라지는 상태, 별리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찾아오는 것이라고.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 아난다여! 태어나고 만들어지고 무너지는 것, 그 무너져 가는 것에 대해서 아무리 무너지지 말라고 만류해도 그것은 순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럼 비구들이여! 이제 마지막으로 너희들에게 고하노라! 만들어지는 것은 모두 변해가는 법이리라. 게으름 피우지 말라. 나는 오직 게으르지 않음으로써만 홀로 바른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방일치 말고 정진하여라.” 이것이 여래께서 이 세상에 남기신 최후의 말씀이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오르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 기원후 2-3세기 간다라 시대 부조 (대영 박물관 소장: 인물상을 보다 뚜렷하게 보이기 위해 컴퓨터로 사진에 색을 입힌 것이다): 붓다의 죽음을 그린 대반 열반상 (침상 아래 쓰러져 슬피 우는 이는 붓다의 애제자 아난이다. 침상 왼쪽에 한사람 건너 웃통을 벗고 서있는 이는 붓다의 수호신 바즈라파니 (헤라클레스 간다라 버전)이다. 그의 손에 들고 있는 도끼날처럼 생긴 것은 벼락(바즈라)이다.
그러나 아난다는 세존께서 어이하여 이리도 급히 열반에 드시나이까, 원만한 분께서 무슨 까닭에 이리도 빨리 모습을 감추려하시나이까? 하고 비탄해 한다. 그러면서 세존께서 입멸하시면 배울 스승이 없어지고 또 받들어 모실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기준이 없어지기에 너무도 허무해진다고 말한다. 그러한 것이 너무도 서슬프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이에 붓다는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이 타이른다.
아난다여! 그다지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 나의 사후에도 신앙심이 두터운 양가의 자제들은 다음과 같이 여래를 기념할 만한 네 곳을 보면서, 여래를 생각하고 세상을 무상하게 여기면서 종교심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니라. 그것은 어떤 장소이겠는가?
아난다여! 여래의 탄생지에서, 여래가 정각을 얻은 땅에서, 여래의 최초 설법지에서, 그리고 여래의 입멸지에서 신앙심이 두터운 양가의 아들들은 이곳을 보면서 여래를 생각하고 세상을 무상히 여기면서 깊은 종교심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아난다여! 이미 불제자가 된 비구.비구니.우바색.우바이들도 또한 “이곳에서 여래께서 태어나셨다,” “이곳에서 여래께서 위없이 바른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다.” “이곳에서 여래는 위없는 가르침의 바퀴를 굴리셨다.” “ 이곳에서 여래는 남김없는 완전한 열반의 세계에 드셨다”고 말하면서 이들 지방을 찾아올 것이니라.
이렇게 하여 불교의 4성지(聖地)가 탄생하였다. 이것은 원시불교시대부터 이미 경전의 근거를 가지고 그 의미가 부여된 장소였다. 탄생지는 룸비니(Lumbini)이고, 대각지는 보드가야(Bodhgaya)고, 초전설법지는 사르나트(Sarnath)의 녹야원이며, 입멸지는 쿠시나가르(Kushinagar)이다. 이 4성지는 불타의 입멸 직후부터 이미 승단에서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탑을 세워 기념하기 시작했던 곳이다. 탑(塔)이란 인도말로 스투파(Stupa: ‘무덤’이란 뜻)를 중국어로 음역한 것이다.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스투파(stupa)는 솔탑파(率塔婆)로 음역되었고 이것을 보다 단순하게 탑파(塔婆)로 불렀다가 더 간략하게 탑(塔)으로 불렀다. 즉, 탑(塔)이란 부처님을 화장하고 나서 뼛조각을 담은 함을 안치한 돌무덤을 일컫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시고 수백년이 지난 후 (AD 1세기 무렵)에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가 하나의 분파로 갈라지면서 불상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불상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탑 그 자체가 부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 이상의 내용은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제 2권에서 인용한 것이고, 사진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구한 것이다.
탑이 붓다를 상징한다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강원도 월정사 8각9층 석탑과 범천상이 있다. <마하박가>라는 불경에 소개된 내용을 형상화한 것으로 불법의 수호신인 사파주 범천 (사함파티 브라흐마)이 붓다(탑)을 향해서 한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꿇고 중생의 구제를 위해 부처님께 설법을 간청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 월정사의 8각9층탑과 범천상: 모든 미술사 교과서에 석조보살좌상으로 잘못 소개되어 있는데, 이는 석조범천권청설법상(石造梵天勸請說法像) 또는 석조범천권청전법륜상(石造梵天勸請轉法輪像)으로 바꿔 불러야 한다.
인도대륙 최초의 대제국을 이루었던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대왕 (기원전 304-232)은 고맙게도 붓다의 중요 성지에 명문이 새겨진 석주를 세웠는데 아쇼카 석주 (Ashoka Pillar)가 바로 그것이다. 붓다의 초전설법지인 사르나트에 있는 4마리 사자석두는 1950년 마하트마 간디에 의해서 새로 탄생된 인도공화국의 상징 (state emblem)으로 채택되었다. 4마리의 사자 밑에는 4개의 법륜이 있고 그 사이사이에 황소, 말, 사자, 코끼리가 새겨져 있다. - 인용 출처: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제2권
* 아쇼카 석주: 사르나트 박물관 (Ashoka pillar at Sarnath Museum, India)
이게 불교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사자상이 아닐까 싶다.
인도에도 사자가 살아서 그런지 아니면 헬레니즘 문명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사자의 모습이 사실적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의 결과, 그리스 헬레니즘 문명이 인도 아대륙 북쪽, 파키스탄 지역에까지 전파되었다. 이 지역에서 A.D 1세기경 간다라 미술이 창조되기 이전에는 불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기원전 3세기에 세워진 아쇼카 석주의 사자상 밑에 수레바퀴(법륜)은 붓다의 설법을 상징하는 ‘진리의 수레바퀴’를 뜻한다. 불상이 등장하기 전에는 부처님의 형상을 이렇게 수레바퀴로 표현하기도 했다.
* 바이샬리의 아쇼카 석주 (높이 14.6 m) (Ashoka pillar at Vaishali, India)
* 부처님의 뼈를 모신 스투파와 사자상 석주를 나타낸 부조 (인도)
인도의 불교는 중국의 후한이 멸망하고 들어선 위.진시대 (魏晉時代, 220년-420년)에 한반도로 건너왔다. 4-5세기(실제로는 이보다 더 훨씬 이른 시기)에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전래된 불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국교가 되면서 매우 다양하고 풍성한 불교문화가 창조되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신라에서 제작된 사자상 다리 향로이다. 이 사자상은 중국 당나라 불교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이겠지만 아쇼카 석주에 있는 사자상과 제법 비슷하다. ^^
1. 아쇼카 석주의 사자상 (사자 숫자: 4마리)
2. 익산 미륵사지 출토 사자상 다리 향로 (사자 숫자: 4마리); 하대신라 때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 인도 아쇼카 석주의 사자상
2. 경주 불국사 다보탑의 사자 석상 (복제품)
3. 경주 괘릉의 사자 석상
4. 경주 안압지 출토 사자상 향로 뚜껑 (곱돌로 만든 것)
신라 사자의 고향은 인도일까?
아주 다양한 사자상이 불교 전래이후 만들어져 석상이나 향로뚜껑, 승탑(부도)이나 탑의 기단부에 부조로 새겨졌지만, 내가 꼽는 최고의 사자상은 다름 아닌 법주사 쌍사자 석등 (국보 제5호)과 청자 사자장식 뚜껑 향로 (국보 제60호) 이다. 청자 사자장식 뚜껑 향로는 고려청자 전성기인 12세기에 만들어 진 것이다. (서론이 무척 길었는데 오늘 진짜 하고 싶은 얘기는 바로 이 향로뚜껑의 사자에 관한 것이다. ^^;;)
미술사 책에서 이 작품을 소개하는 내용을 보면 (좀 지루하더라도 한번 읽어 보면), “ 높이 21.2㎝, 지름 16.3㎝이다. 향을 피우는 부분인 몸체와 사자 모양의 뚜껑으로 구성되어 있다. 몸체는 3개의 짐승모양을 한 다리가 떠받치고 있는데, 전면에 구름무늬가 가늘게 새겨져 있다. 몸체 윗면 가장자리에도 세 곳에 구름무늬를 배치하였다. 뚜껑은 대좌에 앉아있는 사자의 형상이며, 대좌에는 꽃무늬를 시문하였다. 사자의 자세는 뚜껑의 왼쪽에 치우쳐 있어 시각적인 변화에서 오는 조형효과를 노린 것으로 해석된다. 사자는 입을 벌린 채 한쪽 무릎을 구부린 상태에서 앞을 보고 있는 자세이며, 두 눈에 검은 점을 찍어서 눈동자를 표현했다. 사자의 목 뒤쪽과 엉덩이 부분에는 소용돌이 모양의 털이 표현되었고, 꼬리는 위로 치켜 올려 등에 붙인 모습을 하고 있다. 유약의 색은 엷은 녹청색으로 광택이 은은하다. 구조적으로 보면 몸체에서 피워진 향의 연기가 사자의 몸을 통하여 벌려진 입으로 내뿜도록 되어있는데, 아름답고 단정하여 이 시기 청자향로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12세기 전반기에 비취색의 청자가 절정에 달하였을 때 이와 같이 상서로운 동물이나 식물을 본뜬 상형청자가 많이 만들어졌다. 특별히 사자향로는 중국 송나라 사람들이 극찬을 하였을 정도로 작품성이 뛰어나다.” - 위키피디아 (한국어 판). 거의 대부분의 미술사 책에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몇몇 미술사 책을 읽어봐도, 저 사자상을 봤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자세인 동그란 골프공처럼 생긴 것에 오른쪽 다리를 살며시 올려놓은 이 동적 자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나는 이 사자장식 청자향로에서 가장 멋지고 다른 작품과 차별화된 독창적인 부분이 저 동그란 공이랑 여기에 살짝 올려놓은 오른쪽 다리에 있다고 생각한다. 골프공처럼 생긴 것은 수국(绣球: 수놓은 공 모양의 장식물)이라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것 같다. 왜 미술사 책에서는 이런 내용을 언급하지 않고 두리뭉실하게 넘어가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2013년도엔가 강우방 교수가 이 향로뚜껑의 사자에 대해서 용이라 주장한 바가 있으며, 그 주장의 근거로써 영기싹이니, 위에 언급한 골프공에 용의 상징인 보주 문양이 있다느니 얘기한 바 있으나 나는 주장의 타당성을 논하기 전에 연구의 방법론에 많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주장을 하려면 적어도 중국이나 일본의 비슷한 유물에 대해서 연구되어 기존에 보고된 논문이나 참고문헌을 조사하고 다른 외국의 학자들은 어떤 주장을 했는지 살펴보고, 외국의 유물도 직접 보고나서 종합적인 판단을 해야한다고 본다. 부디 미술사학을 전공하는 후학들은 우물안 개구리가 되지 않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중국에서 이런 형상의 사자상이 제작된 적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구글 검색을 열심히 해봤더니 북송시절에 비슷한 형상의 사자상 사진이 하나 검색되었다. 북송 (서기 960년-1127년)은 북방 유목민족(거란족의 요나라)에게 쫓겨서 양자강 남쪽으로 피신하기 전의 송나라이므로 12세기에 제작된 고려 사자장식 뚜껑 향로와 비슷한 시기거나 조금 앞선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서 본격적으로 이런 모양의 사자상이 암.수 한쌍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명나라 때부터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고려의 사자장식 뚜껑 향로도 혹시 암.수 한쌍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1. 당(唐, 618년 ~ 907년)나라 때 제작된 사자상
2. 북송(北宋, 960년 ~ 1127년)시절 제작된 청자 사자상 (용맹스런 개, 핏불처럼 생겼다. ^^;;)
3. 명(明朝, 1368년 ~ 1644년)시절 제작된 사자 석상
나는 이번 터키 여행에서 에페소스 박물관에 전시된 아르테미스 여신상에서 한 쌍의 사자가 여신의 왼쪽, 오른쪽 어깨 부분에 올라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에페스에서 풍요의 여신(Goddess of fertility)으로 숭배되었던 아르테미스 신상의 모습은 아마도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다산과 풍요의 여신으로 숭배되었던 신비한 키벨레 (Cybele) 여신에 얽힌 신화와 연관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고양이과 동물인 사자의 특징적인 자세, 즉 앉은 자세에서 앞다리를 살짝 들고 있는 모습을 잘 묘사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나는 이 사자상을 보는 순간, 좀 생뚱맞을지 모르겠지만 고려 사자장식 뚜껑 향로의 사자랑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
아르테미스 여신상, 에페수스 박물관 (터키)
첫댓글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