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
부모가 일찍 돌아가서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본다. 여기저기 얹혀 힘들게 지내거나 걸식으로 나날을 보낸다. 거제도에 있을 때 천주교 고아원에서 원생들을 학교에 보냈다. 교복도 입히고 도시락도 싸줬는데 늘 기가 죽어 쓸쓸해 보이는 학생들이었다. 어울리지 않고 교실이나 운동장 그늘진 곳에 앉아서 지난날 부모와 가족생각에 잠긴 듯하다.
자식이 없거나 있어도 소원해서 혼자 사는 늙은이를 본다. 채소나 생선을 노전에서 팔거나 골판지를 주어 한 푼씩 만들어 살아가는 분들도 있다. 그동안 알뜰히 모아둔 것을 자식 위해 쓰고 그들이 일찍 죽거나 떠나버린 것이다. 또 기운 사업에 다 대주고 여러 해 소식도 없다며 하는 수 없이 산속 생활을 하는 -나는 자연인이다-의 사람도 있다.
남편이 일찍 병사하자 아들 둘을 키우느라 이 장사 저 일을 하며 애쓰는 모습을 봤다. 같이 일했던 직원들이 조금씩 가끔 들러 도와도 그건 소용없는 일이다. 초등학교 때 625사변으로 전사한 아버지가 많았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는 친구들이다. 팔을 걷어붙이고 남자들처럼 농사와 온갖 허드렛일을 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어련하다.
아내 없이 혼자 사는 친구가 몇이 있다. 잔소리 안 듣고 잘 살 줄 알았는데 사는 게 형편없다. 바깥일을 하면서 집안일을 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돌아서면 닥치는 세 끼니와 빨래 청소가 애먹인다. 잔잔한 집안 일이 이리 수다스러울 줄 몰랐단다. 그냥 되는 대로 사니 이건 외양간 우리와 같다.
무엇보다 늙어 의지할 데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여러 가지 병에 시달리며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지내야 하는데 도움도 하루 이틀이지 무슨 수로 만날 이웃이 도우며 살겠나. 별 수 없이 그냥 무심히 지나는데 남자들이 더 어렵다. 여자들은 그럭저럭 잔잔한 집안일을 하지만 남자는 그렇지 못하다. 환(鰥)이 이런 남자들을 말한다. 정말 늙바탕에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병을 얻어 아프다 슬프다 하며 사는 사람이 많다. 병원에 웬 사람이 그리 북적이는가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간다. 마을 정형외과에 늙어 뼈마디가 안 아픈 데가 없다며 사흘이 멀다 하고 찾아온다. 모진 암에 걸리거나 정신이 흐려져서 기억을 못하는 일도 잦다. 요즘은 다들 오래 살다보니 양로 시설로 들어가 지내는 일이 늘어난다.
부모가 오래 건강하게 살았고 아들딸이 결혼해서 잘 있으니 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부지런한 아내가 저리 잘 살림을 살아주니 어딜 다녀도 하나도 걱정이 없다. 종심을 넘겼으니 온전할 수 있겠나 어디가 아파도 나이 들면 탈이 난다. 점점 발전하는 의약품으로 쉬 진정되는 세상을 만나 행복하다.
어지러울 땐 머리에 이상이 오나 했다. 이제 좋아하는 당구, 탁구도 그만 두고 소사나무 그늘이 있는 꽃밭같은 텃밭도 할 수 없는가. 수십 년 몸담았던 문학 활동도 접고 질병과 함께 지날 줄 알았다. 잠시 뿐 꿈결같이 지나가니 고맙다.
수월케 어렵잖게 죽는 사람이 있다. 자고 일어나니 남편이 죽어있고 낮에 교회에서 만나 악수하며 잘 지났는데 저녁에 부음을 받았다. 홍시를 후루루 들이켰는데 그만 기도로 들어가 막혀 부엌에 있는 아내에게 죽는다는 말도 못하고 어이없게 떠난 사람도 있다.
이래 살아 있고 대명천지를 볼 수 있음이 참으로 감사하다. 누가 저승에 가 봤는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하지 않는가. 빨리 죽어야지 저승사자는 뭣하나 하지만 다 노인들 거짓말이다. 수부강령유호덕고종명(壽 富 康寧 攸好德 考終命)에 오래 사는 게 인간의 희망이다. 오복 중에 첫 번째이다.
부부가 살아도 티격태격 부질없는 집안이 있다. 어느 친구는 결혼하고 처가에 인사를 갔는데 장인이 무슨 말을 하니 -시끄럽소- 하는 장모를 보고 큰일 났다. 내 아내가 저러면 어쩌나 했는데 걱정대로 평생 남편에게 군림하며 살았단다. 지난날 여자를 억압하고 순종시키며 살았으니 주고받는 고드랫돌처럼 길쌈 북처럼 오뉴월 품앗이처럼 돌려받을 때가 된 것이다.
주식을 해서 잡비를 모아 여기저기 잘 쓴다고 자랑이다. 옆 동료들이 같이 매달려 좀 따면 음식을 배달해 종목 선정의 얘기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얼마를 땄는가 퇴직 무렵 물어보니 깡통으로 고향 선산도 팔고 대추가 주렁주렁 열리는 연못 정원의 단독도 팔아 치웠으며 적게 잃어도 고급차 한 대는 다 날렸다고 야단들이다. 어찌 노름처럼 잃었다는 사람들 뿐이다.
인터넷 카지노를 하다가 많이 날려 저축은행의 고리를 빌려 메우려다가 더 낭패를 봐 좋은 직장에서도 쫓겨나고 때 끼니 걱정을 해야 된다는 어느 문인의 얘기가 남의 일 같지 않다. 힘들여 번 많은 돈을 몽땅 날리고 실의에 잠겨 그 돈만 있으면 하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진단다.
화재로 집이 타고 수재로 논밭 작물이 떠내려가며 사고로 자식이 죽으면 그 자리에서 허허 하고 웃고 있단다. 노름이나 사기로 잃어버린 돈은 두고두고 찡하게 마음을 아프게 한다니 잊지 못할 그 일이 지워지지 않는다. 장구를 배우던 친구가 보증 잘 못 서서 그 옛날 슈퍼를 날리고 타던 이태리 승용차도 넘겨주고 단칸 셋방에서 산단다.
한번 휘어진 허리는 펴지질 않는가 술 취해 북치고 노래하며 사는 떠돌이 그는 지금 벌써 세상 사람이 아닐지 모른다. 내가 산 주식은 왜 관리종목에 있다가 사라지는가 큰 회사인데도 죽어진다. 지금 보니 다 살아있는데 내 주식만 삼켰다. 선산과 집, 고급 자동차를 날리지 않았고 다시는 종목이며 시세니 인터넷 카지노니 하는 말을 내지 않는다.
눈알이 빠져도 그만 하길 다행이다 하듯이 쳐다보지도 아니 한다. 자본주의 꽃이라는 주식시장의 활성화에 바쳤다 생각하자. 주차, 신호, 속도위반으로 어떨 땐 여러 장 날아온다. 야속하다 싶어도 나라 살림에 도움을 주자 맘먹는다. 그거이 세금만치나 많이 걷히는 큰 수입이다.
연간 교통사고로 만 명이나 죽고 수십만 명이 장애자로 살아간다니 여태껏 차 몰고 큰 사고 없이 지난 일이 고맙다. 어디 운전 잘 해서 그랬나. 갑자기 골목에서 뛰어 들어오는 아이를 무슨 수로 피하겠나. 장거리 운전 때 잠깐 졸았던 일을 생각하면- 그저 감사 감사하다.
스승의 날 초청을 받아 거제리 부산지방법원에 간 적이 있다. 하루에 수천 명이 찾아와서 북새통을 이룬단다. 그곳에 갈 일이 없었으니 이 또한 고마운 일이다. 잘못이 있어 경찰서에서 검찰로 지하통로를 지나 법정에 들어서야 하는 재판이 얼마나 괴로운가.
직장 없어 헤매는 청년이 요즘 많다. 가르치는 일로 평생을 보냈으니 군자삼락이 아닌가. 부모도 벌써 돌아가시고 형제도 여럿 떠났다 돌아보면 부끄러운 일도 많지만 은혜의 강이 유유히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