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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옥전가족 원문보기 글쓴이: 전병태
< 시조가 있는 여행기 >
판문점 안보관광
전 병 태
지난여름 가평과 포천을 여행하고, 철원에서 안보관광으로 휴가를 보내면서 언젠가는 내가 군대생활을 하던 장단반도와 판문점부근을 돌아봐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기회가 빨리 왔다. 부산시조문학회 강신구 회장께서 고령화로 침체되어 가는 회원들의 사기를 돋우고 친목을 다지면서 창작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오래전부터 준비한 판문점안보관광을 실행하게 된 것이다.
2009년 5월 22일 06시. 서면 영광도서 앞에서 가지가지 차림으로 모양을 낸 회원들이 부부 동반하여 28인승 관광버스에 타고 북으로 북으로 달렸다. 1시까지 JRS입구에 도착하여야 하기 때문에 서둘려 출발한 버스에는 7명의 회원과 부인들, 여행을 좋아하는 회원의 친지들이 모였는데 배시인의 딸 자경이와 또 한 어린이도 있었다. 뭇 단체여행과는 다르게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기나 취미 등을 소개하면서 거침없는 입담으로 긴 여로를 지루하지 않게 하였고, 차창 밖으로 전개되는 풍경에서 익어가는 신록을 실감할 수 있어서 좋았다.
차가 김포를 지나서 임진강 하천선 경계철책을 따라 오를 때는 건너편이 내가 젊음을 바쳐 청춘을 불태우며 국가를 위하여 군대생활을 하던 곳이라 감회에 젖었다. 사람이 살지 않은 지역이라 절구통에 치마만 둘려도 절색미인으로 보이는 곳에서 50kg도 안되는 작은 몸으로 81mm포판을 들고 뛰어야 하였던 조포훈련과 살을 에는 추위와 배고픔을 참아야 하였던 매복과 수색정찰 등 …. 그 시련들이 지금의 나를 키웠다고 생각할 때 차는 임진각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안내판을 통과하고 있었다.
건너편을 보니 11수색대에서 혹한기훈련을 받을 때 수상한 흔적이 발견되어 섣달그믐의 싸늘한 달빛아래 추위와 싸우며 처음으로 매복을 선 곳이 보였다. 달은 너무 밝아서 푸른빛이 감돌았고 쌓인 눈은 바람에 날려 얼굴을 따갑게 때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흐르던 밤으로, 노루를 잡으려고 강을 헤엄쳐 건너온 밀렵꾼을 체포한 실전과 같았던 추억을 되새겨 보며 영표가 입대할 때 부산역에서 지은‘입영열차’라는 시조가 생각나서 외워 보았다.
짧게 깍은 머리가 찬바람에 시릴까봐
내일이면 벗어버릴 옷깃을 여며줄 때
승차를 재촉만 하는 야속한 안내방송.
마지막 잡은 손에 아비 마음 전해주니
내 마음을 아는가? 따라 우는 기적소리
목메어 못 다한 말이 입안에서 맴도네.
뿌리치고 떠나가는 깜깜한 어둠속엔
품에서 빠져나간 철부지 막내아들
속울음 몰래 삼키며 빈 하늘 달을 본다.
부딪쳐서 아픈 만큼 성숙하여 돌아오길
두 가닥 선로 따라 너를 쫓아 당부할 때
손안에 남아있는 건 너와 바꾼 입장권.
11:00. 임진각에 도착하였다. 내가 군대생활을 하던 때의 임진각은 들 가운데 동그맣게 있었다.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 발표 직후 다목적 건물로 세워졌으며 지금은 공원화 되어 있었다. 한국전쟁과 그 이후 민족대립으로 인한 슬픔이 아로새겨져 있는 이곳은 서울에서 민통선이 가장 가까워 실향민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 남북 분단 전 한반도 북쪽 끝 신의주까지 달리던 철길에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아쉬운 팻말을 달고 멈추어 전시되고 있었다.
임진각을 돌아보면서 강회장님은 “이곳은 한국전쟁의 한이 서려있는 곳으로 6.25때 사용되었던 탱크와 비행기 등 전투장비 12종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한반도가 남한과 북한이라는 이름으로 분단된 현재, 통일이라는 단어는 세계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매우 큰 위치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남한의 북쪽 끝 휴전선 가까이 이런 실향민을 위해 세워진 곳이 임진각이고, 이 임진각은 현재 통일과 평화를 기원하는 사람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분단된 조국의 넘을 수 없는 금지선이라는 서글픈 이름표를 달고, 평화관광지라는 타이틀로 인식되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문화관광지입니다.”라고 인터넷에서 뽑아온 메모를 읽어 주셨다.
미군참전비 등 전적비와 1983년 미얀마 아웅산묘소에서 북괴의 폭탄테러로 사망한 17명의 외교사절을 추모하는 위령탑, 1987년 김포국제공항 폭발사고 희생자 추모비가 있었다. 실향민들이 제사를 드리는 망배단과 자유의 다리를 배경으로 우리는 ‘김치’를 합창하며 다녀간 증명사진을 찍었다.
자유의 다리는 문산읍 마정리 임진각 광장 앞 망배단 뒤편에 있는 다리인데 1953년 한국전쟁 포로 12,773명이 자유를 찾아 귀환하였기 때문에 명명된 이름으로 원래 경의선 철교로 상 ․ 하행 두 개의 교량이 있었으나 폭격으로 교각만 남은 것을 포로들을 통과시키기 위하여 서쪽 교각위에 철교를 복구했고, 그 남쪽 끝에 임시교량을 가설하여 포로들이 차량으로 경의선 철교까지 와서 걸어서 자유의 다리를 건너왔다고 한다.
자유의 다리는 6경간(經間) 목조평교형식으로 길이는 83m, 폭은 4.5~7m, 높이는 8m로 순수한 목구조는 아니고, 인장력을 많이 받는 부분에 철재를 병용하여 만든 혼합구조로 통나무가 4개씩 4열로 세워진 교각 위에 사각 받침목과 I형강(鋼)으로 만든 철제를 井자형으로 짜올리고 그 위에 장선(長線)이 놓은 후 나무로 만든 상판이 올려져 마감되었다는데 자유의 다리는 임시로 가설한 교량이므로 건축으로는 뛰어난 점은 없으나 ‘자유로의 귀환’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어서 한국전쟁의 대표적인 유산이라 할 수 있다. GOP 부대와 판문점, 통일촌과 대성동으로 가는 통로로 이용되었는데 휴가에서 귀대를 할 때는 ‘이제 건너가면 6개월 후에야 나온다.’는 절망으로 정말 건너고 싶지 않은 다리었다.
새로 만들어진 자유로에서 통일대교를 건너 검문을 받고 5분 후 통일촌에 도착하였다. 통일촌은 일등병 때 만들어진 마을로 장기복무를 한 전역자 중에서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농토를 주어 농사를 지으며 살게 한 곳으로 알고 있다. 가까운 곳에 근무하면서도 사병으로서는 개인행동이 철저하게 통제되는 지역이라 가보지 못한 곳을 36년이 지난 지금에야 찾아보니 감회가 새롭다.
통일촌 부녀회관에서 두부찌개로 점심을 먹으며 강회장님은“1970년대 초 황무지로 방치된 땅을 개간하여 식량을 생산하고, 17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자들은 향토 예비군을 편성하여 국방의 일면을 담당하게 하는 등 이스라엘의 전략촌인 '키부츠'를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정착마을로 일반인 출입 제한으로 자연 그대로의 환경이 잘 보전되어, 도시민들에게 양질의 청청 농산물을 생산 공급하는데 특산물로는 콩이 유명하고 또 유엔에서 자연환경 보전권으로 지정이 예정될 만큼 천혜의 자연환경은 우리 후세에 물려줄 소중한 지역이다. ”라고 설명하여 주셨다.
12:30 판문점으로 들어가는 입구 JAS(Joint Security Area)에 도착하였다. 케이트 위병이 출입 인가여부를 확인하는 동안 사무국장 배시인은 지금까지 출입인가 과정을 설명하여 주었다.“2개월 전에 국정원으로부터 신원조회를 신청하였으며 주민등록증이나 여권을 반드시 휴대해야 하고, 만 10세 이하의 어린이는 견학이 불허되며, 찢어진 청바지나 반바지, 민소매셔츠와 샌달, 군용복장, 미니스커트나 노출이 심한 여성복, 기타 유엔사에서 제한하는 복장은 관광이 불허되고, 견학이 진행되는 중에도 갑자기 일어나는 긴급회담, 또는 군사작전 등 사정에 의하여 판문점견학이 불가 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이 지역은 1972년 봄, 사단본부에서 리비교를 통하여 중화기중대에 배치되었다가 이등병 때 파견을 나온 막사에서 가까운 곳이며, 1973년 수색대에서 매월 한번 있은 휴양소를 이용할 때 오가던 길목으로 그때는 미군과 카투사(KATUSA)가 근무하였는데 삼종동생 인태의 친구 성병장이 여기서 근무하여 무척 부러워하였다.
부산이 고향이라는 안내원 김상병은 10세 이하인 자경이와 남자어린이를 남겨두고 우리를 군용버스로 갈아 태워 안보관으로 가면서“판문점이라는 지명은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과 공산군간의 휴전회담에서 유래 되었습니다. 당시 휴전회담이 열렸던 원래의 장소는 현재 공동경비구역에서 1Km정도 북쪽, 제3초소에서 보이는 북한군 박물관이고, 이곳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된 장소이기도 합니다.
휴전회담을 하기 전 이곳은 주막집을 포함한 네 채의 초가집이 있었으며 서울에서 신의주로 가는 길손들의 휴식처였습니다. 당시 지명은 ‘널문리’였는데 널문리의 지명도 임금이 이곳 강을 건널 때 다리가 없어 건너지 못하자 백성들이 집집마다 대문을 뜯어다가 임시로 다리를 놓아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도록 하여 ‘널문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판문점이라는 명칭은 당시 개성에서 이루어지던 휴전회담이 널문리로 옮겨지면서 회담에 참석하는 중공군 대표들이 이곳을 쉽게 표현하기 위해 널을‘판(板)’으로, 문은‘문(門)’으로, 회담장 부근에 있던 주막을 한자로 ‘점(店)’으로 표기한 것에서 유래합니다.
이곳에서 진행된 휴전회담은 예비회담이 시작된 이후 2년 19일 동안 무려 1,076회에 걸친 회합 끝에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공산군(북한군, 중공군)간에 휴전협정이 조인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곳 판문점은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공식적으로 유엔군과 북한군이 공동 관할하는 공동경비구역(JAS:Joint Security Area)이라고 불리면서 남북한 쌍방간의 행정관할권 밖에 있는 특수한 지역이 된 것입니다.“라고 길게 설명하여 주었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당시의 배경 그리고 현재를 상세하게 알 수 있는 안보관 영상교육실을 나와 버스를 타고 판문점으로 이동하면서 김상병은 이곳에서의 금지사항으로 북한 병사들에게 대화를 시도 하거나 손을 흔드는 행동 등 불필요한 동작은 절대로 금지되어 있으니 각별히 조심하고 작은 개인행동도 용납되지 않으니 안내자의 지시에 꼭 따르라고 거듭 강조하였다.
1998년 7월 9일 건립되어 각종 남북회담, 접촉, 교류를 지원하고 남북간의 연락업무를 수행한다는 자유의 집에 도착하여 두 줄로 열을 지어 팔각정으로 이동하여 공동경비구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다른 관광지에서처럼 ‘기- 임 치이∼’ 하면서 웃음을 끌어내는 말들이 쉽게 나오지 않고 모두들 겁먹은 표정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작은 건물로 된 회담장 막사 건너편 북한지역의 건물에는 간혹 북한군 1명이 나왔다가 들어 갈뿐 적막하기만 하였는데 북한에서도 견학을 오는 때가 있느냐고 물으니 김상병은 간혹 유치원생들이 온다고 하였다.
공동경비구역의 본회담장 안으로 들어갔다. TV 뉴스에서나 본 본회담장에는 평범한 탁자가 두 줄로 배치되어 마주보고 앉을 수 있게 되어 있는데 본회담장내의 군사분계선은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 내에 놓여있는 마이크선과 이 탁자 위에 놓인 유엔기와 북한의 깃발로 상징된다고 한다. 짙은 색안경을 끼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MP헌병 철모를 쓴 우리 병사가 늠름한 자세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어서 스며드는 긴장감에 “걱정 마십시오. 우리가 있잖아요.”라고 하는 것 같았다.
김상병은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상에 있는 공동경비구역은 군사정전위원회 유엔사측과 공산측(북한,중국)이 군사정전위원회 회의를 원만히 운영하기 위해 1953년 10월 군사정전위원회 본부구역 군사분계선상(MDL)에 설치한 동서 800m, 남북 400m 장방형의 지대로 북한 행정구역상으로는 개성직할시 판문군 판문점리에 해당하고, 서울에서 서북방으로 62Km,북한의 평양에서 남쪽으로 215Km, 개성시로부터는 10Km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또 “평화의 집은 자유의 집으로부터 남서쪽으로 130여m 떨어졌는데 지난 1980년 6월에 남북간 총리회담을 대비해 지어졌다가 1989년 12월 지금의 장소에 새로 건립되어 남북간의 군사회담을 제외한 민간부문의 회담이 개최되고 있다 한다. 통일각은 북한이 관리하는 시설물로서 한국측의 평화의 집과 같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므로 남북간 민간회담은 남측의 평화의 집과 북측의 통일각을 오가며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였고 북한의 판문각은 자유의 집 북쪽 80m 지점에 1969년 9월에 2층 건물로 지어져 북측 경비병 사무실로 사용되며, 군사정전회담이나 남북회담의 대표 대기실로도 쓰이고 매년 8월 15일을 기해 북한의 8.15 범민족대회 개최 등 대남선전 선동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하였다.
개성공단과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보이는 전망대(3초소)에 서니 군사분계선이 바로 발아래 작은 팻말로 이어져 있어서 똘이엄마에게 “군사분계선은 1953년 7월 27일에 성립한 '한국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휴전의 경계선을 말하며, 이것이 이른바 휴전선으로 길이는 모두 155마일(약 250km)로, 동해안의 간성(杆城) 북방에서 서해안의 강화(江華) 북방에 이른다. 그러므로 38선과는 다르다”고 알려주면서‘판문점에서’라는 제목으로 시조를 메모하여 두었다.
금하나 그어 놓고 지뢰심고 철망치고
눈알이 빨갛도록 총검을 움켜진 손
아무도 오갈 수 없는 굳어버린 점선들.
달콤한 고향냄새 바람에 묻어오면
아바이는 북쪽 보고 병사는 남쪽 향해
오늘도 부르는 노래 대답 없는 메아리.
감추고 속인 세월 와르르 무너지면
서로가 손잡고 갈 끝이 아닌 시작인데
오가는 저 철새 따라 달려가는 그리움.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 도착하였으나 버스에서 내리지는 못하고 김상병의 설명만 들었다.“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공동경비구역 북서쪽 끝부분으로, 군사분계선 한가운데를 지나는 남과 북의 연결교량인데, 이 다리가 ‘돌아오지 않는 다리’로 명명된 것은 1953년 휴전 후 여기서 포로교환이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이때 포로들이 이 다리 위에서 일단 방향을 선택하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시멘트로 된 작은 ‘돌아오지 않는 다리’ 바로 앞부분에는 북한군에 의해 무참히 자행된 도끼만행사건의 현장으로 표지석이 있었다. 표지석과 3초소를 손짓하며 김상병은 “도끼만행사건은 1976년 8월 18일 오전 11시 유엔군 측이 초소의 시야를 가로막은 미루나무를 자르려하자 북한군이 이를 가로막으며 보니파스 대위와 바렛 중위를 도끼로 살해한 사건으로 미군 4명과 한국군 4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도끼만행 사건 후 유엔군은 ‘폴 버니언 작전’을 수립, 문제의 미루나무를 베어냈습니다. 또 큰 사건으로는 1984년 공동경비구역에서 처음으로 양측 경비병간에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피해 규모로만 봐서는 최대의 사건으로 구소련인의 갑작스러운 월남으로 인한 ‘마쓰작 판문점 망명사건’입니다. 11월 23일 11시 30분 경 소련인 기자가 군사정전위원회 회담장면을 찍고 있다가 갑자기 건물과 건물사이의 군사분계선을 넘어오며 살려달라고 요청하여 한국군 경비병들은 그를 대피시켰는데 당황한 북한군이 월남을 저지하고자 권총을 발사하며 경고하였으나 실패하자 곧바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 150m까지 침범, 자유의 집 연못(현재는 정원)까지 내려왔는데 이때 군사분계선을 침범한 북한 경비병은 총 17명이었으며 연못을 중심으로 30여 분간의 총격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총격전으로 한국군 병사 장명기 일병이 사망하고 미군 1명이 부상하는 희생이 뒤따랐으며 북한군도 3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당한 사건으로 마쓰작은 정치적 망명자격을 얻어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라고 길게 말했다.
녹음이 짙어가는 틈 사이로 모내기를 하기 위하여 물을 잡아놓은 무논에 개구리들이 남북의 긴장감 따위는 아랑곳없이 뛰놀고 있는 정경을 차창 밖으로 보라는 듯이 천천히 달리는 버스에서 김상병은 “북괴의 도끼만행 사건으로 희생된 유엔군사령부 경비대 중대장 보니파스 대위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경비대를‘캠프 보니파스’라고 하고, ‘마쓰작 망명사건’에서 교전 중 순직한 고 장명기 상병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캠프 보니파스 내 거주했던 막사를 ‘장막사’로 명명하여 부르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대성동 마을 입구를 지나면서‘자유의 마을’쪽을 손짓하며 “전쟁 이전부터 이곳에서 살았던 원주민들 마을로 현재 230여 명이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는 유일의 최북단 비무장지대 마을이자 영화 공동경비구역으로 유명해진 특수한 마을입니다. 대성동 건너편에는 북한의 최남단 선전마을인 기정동이 있는데, 이 두 마을사이의 거리는 불과 1800m 정도이며, 기정동의 인공기와 대성동의 태극기가 양쪽에서 대립하고 있는 모습을 함께 볼 수 있어서 분단의 아픔을 가장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기정동 마을에는 3~5층 건물 40여 채가 있으나 정찰병력 이외는 한명도 살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 마을 입구에는 높이 160m의 게양대에 세계에서 제일 커다는 130평의 북한기가 걸려 있으나 너무 커서 바람에 펄럭이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자경이가 기다리는 관광버스 주차장 가까이 왔을 때 어느 부인이 대성동 어린이들의 학교생활을 궁금해 하자 김상병은 이곳 초등학교에는 학생이 20명 정도인데 영어나 무슬 등 자격증이 있는 경비대 대원들이 방과 후 지도를 하여 학생 한명에 선생님도 한사람이라고 하였고, 중학교부터는 밖으로 통학을 한다고 하였다.
기념품을 파는 가게에서 이제 걸음걸이가 의젓해진 손자 찬후에게 아주 어울릴 것 같은 군복을 튼튼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선물로 사고, 버스에 올라 게이트를 빠져 나오며 김상병이 안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제3땅굴은 내가 상병 때 귀순한 김부성의 제보로 1978년 아군에게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내가 전역을 하기 위하여 대대를 출발하던 날(1974년 11월), 땅굴 뉴스가 처음으로 발표되었기에 전역이 취소될까봐 무척 걱정하였던 기억이 난다. 내가 근무하던 수색대 제2 SRP가 있던 자리보다 더 북쪽인 것 같은데 문산까지는 12km, 서울까지는 52km지점으로 폭 2m, 높이 2m, 총길이는 1,635m로 시간당 무장군인 1만 명의 병력 이동이 가능하다는 안내문을 읽고, 안전모를 쓰고 들어갔는데 낮은 부분이 많아서 안전모가 천장에 부딪치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리고, 습기가 너무 많아서 숨쉬기가 곤란할 정도였다.
발견된 땅굴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당시 북한의 남침야욕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서울과 지척인 이곳으로 두더지처럼 파고 들어온 야욕에 치가 떨려서 주먹을 불끈 쥐고 나왔다. 2002년 5월 31부터는 셔틀 엘리베이터, 최첨단 시스템을 갖춘 DMZ 영상관, 상징조형물, 화장실, 기념품판매장등의 시설이 설치되어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도라산 전망대는 내가 근무하던 중화기중대 행정반이 있었던 송악OP가 폐쇄되고 대체 신설되었다는데 내가 DMZ에서 마지막으로 근무한 000GP 었다. 이 GP에서는 1974년 봄을 보냈는데 우물이 멀어 산 아래로 500m는 내려가야 하였다. 펌프를 박은 우물에서 스페어깡 한통을 길러 오는 것과 체력단련, 신병들은 호롱불 그을음을 닦는 것, 밤이면 경계근무를 서는 것이 일과였는데 지금은 북한을 볼 수 있는 남측의 최북단 전망대가 되어 있었다.
개성의 송학산, 김일성 동상, 기정동, 개성공단, 기차화통, 협동농장 등을 망원경을 통해 찾아보고 내가 가장 오랫동안 근무한 서쪽 장단반도의 끝 000GP도 찾아보았으나 너무 낮은 곳이라 찾을 수가 없었다. 떨어진 군복을 기워서 계급장과 명찰을 ‘민정경찰’과 호랑이 마크로 대신하고, 태극기가 그려진 팔에는 ‘MP헌병’ 완장을 차고, 무겁게 누르는 철모와 방탄복에 땀을 흘리며 멜빵도 없는 M16을 들고, 어깨에 대각선으로 두른 실탄과 주렁주렁 매달은 수류탄과 조명탄, 항상 구부린 사격자세로 적과 지뢰에 긴장을 하던 수색정찰과 매복, DMZ를 쏘다니던 그 때가 내가 가장 명석하였기에‘부라보 육군’이라는 군가를‘육탄수색가’로 개사하여 하급병 이름으로 상을 타게 하였다고 생각한다. 행군 간에 목이 터져라 부르던‘육탄수색가’를 지금도 불러지고 있는지 궁금하여 기억을 더듬으며 불러보았다.
부라보 육군 ☞ 육탄수색가
우리는 피 끓는 젊은 사자들 나가자 우리들은 육군의 왕자
내일의 조국은 우리들의 것 산천을 울린다 11수색대
적진 향해 돌진할 땐 노도 같지만 불의를 꺾고 정의를 심는 장한 용사여
이쁜 처녀 앞에서는 수줍은 총각 육탄용사 정기 받은 젊은 화랑들
야야 부라보 육군 야야 부라보 육군 야-야 브라보 수색 야-야 브라보 수색
산천을 주름잡는 지상의 왕자 산천을 주름잡는 11수색대
우리는 희망찬 젊은 기수들 뭉쳤다 우리들은 통일의 기수
내일의 건설은 우리의 사명 산천도 진동한다 11수색대
산야를 누빌 때면 사자 같지만 적진을 향해 돌진을 할 땐 호랑이지만
고향마을 순희에겐 다정한 애인 애인편지 받았을 땐 수줍은 총각
야야 부라보 육군 야야 부라보 육군 야-야 브라보 수색 야-야 브라보 수색
산천을 주름잡는 지상의 왕자 필승을 다짐하는 육탄수색대
한명회와·권람이 모의하여 왕위를 빼앗은 후 단종을 영월로 유배를 보내고, 1455년 세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세조비 정희왕후(파평윤씨)의 고향 원평도호부를 목(牧)으로 승격하면서, 파평윤씨의 파(坡)자를 딴 파주(坡州), 이번 판문점견학은 영원히 풀지 못한 숙제를 푼 것 같아서 마음이 가볍다.
그러나 파주에서도 율곡 이이의 고향에 있는 화석정(花石亭) 현판은 박정희 전대통령의 친필이라 하여 궁금하고, 한국전쟁 때 북한군을 막기 위해 미2사단 공병대 리비중사가 장파리로 건너오는 다리의 북단을 폭파하여 남하를 저지시킨‘리비교’도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처음 GOP로 건넌 간 곳이라 보고 싶고, 일등병 때 사람이 사는 곳에서 1개월을 지내다 수색대로 차출된 늘노리와 제대 특명을 받은 운천3리답사는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하기에 발걸음이 무거웠다.
<현대시조 106 2010년 가을 겨울 합병호 194-207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