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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야43 원문보기 글쓴이: 고야
제 2일의 일정은
7시부터 시작하는 호텔 조식(朝食)으로부터 출발한다.
평소 호텔 조식은 먹을 만한 게 빵밖에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 조그마한 호텔의 조식은 생각 밖이었다.
생선구이, 젖갈류 등 밥을 먹을 수 있는 반찬들이 마음에 들었다.
외국여행에서의 아침식사로 모처럼 밥(ご飯)을 먹었다.
♣ 교토(京都)
8시에 짐을 꾸린 일행이
신사이바시역(心斎橋駅)→신오사카역(新大阪駅)→교토역(京都駅)로 이동한다.
신오사카와 교토 사이는 보통전차로 70여분 소요되었다.
교토역 도착 9시 40분.
역 개찰구를 나오니 지하부터 어마어마한 상점들이 줄을 서 있고,
간신히 중앙로를 나와 지상에 오르니
교토역 건물이 맘모스로 다가온다.
역을 등지고 서니 앞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교토의 상징인
교토타워가 우뚝 솟아있다.
교토 숙소인 도미인 프리미엄호텔(ドーミーインPREMIUMホテル)은 역에서 3분 거리,
쉽게 찾을 수 있어서 숙소 찾기 고생은 없었다.
호텔에 짐 맡기고 니죠죠로 향한다.
♣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
니조죠까지는 걸어가기로 하고 호텔을 나와 시내 길을 걷다가
잠시 들린 곳이 동본원사이다.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와 니시혼간지(西本願寺)는
일본에서 가장 큰 불교종파인 정토진종(淨土眞宗)의 본산지로
교토역 앞 부근에 동서로 나란히 있다.
우리가 들어간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는
1895년에 재건한 절인데 한 쪽에서는 다시 공사를 하고 있었다.
나라(奈良)의 다이부쓰텐(大仏殿) 다음으로 큰 목조건물인
본당 고에이도(御影堂)로 유명하다.
<나 혼자 가슴 조였던 이야기>
동본원사 정문으로 들어가자 마자 사진 촬영하느라 일행을 놓쳤다,
잠시 후 본당 안에 일행이 보여 급히 뒤 따라갔다.
신발 벗는 곳에서 비닐주머니 두 장을 급히 덧신처럼 신고
살금살금 빠른 걸음으로 일행을 쫓아가는데
제단(祭壇) 앞으로 가던 참배객의 무서운 시선과 마주쳤다.
우리 일행을 자세히 보니 모두 신발을 비닐봉투에 넣어 들고 다녔다.
그 때 비로소 내 잘못을 깨닫고 재빨리 밖으로 나왔다.
“내 정신이 아니었나 봐! 신발을 넣어야 할 비닐주머니를 신고 다니다니…..쯧쯧. “
* 동본원사를 나와 니조죠로 가는 길의 담 쪽에 이러한 글이 있다.
信心というものは若返るものである。死ぬ準備ではない。
(신심이란 젊어지는 것이지 죽을 준비가 아니다.)
니죠죠 가는 길은 도심의 반듯한 도로를 따라 걷는다.
그런데 큰 길 교차로에만 신호등이 있는 게 아니고,
큰 길에서 들고 나는 좁은 골목길에도 신호등이 있어 그도 지켜야 한다.
한 블럭에 최소 3개의 골목길이 있는 듯 하다.
천천히 간다고 누가 뭐라 할 일도 아니어서 느긋하게 가는데
선두는 자꾸 멀어지고 목적지는 가도가도 보이지 않는다.
너그럽던 마음에 살짝 짜증이 묻어난다.
길거리 카페의 의자만 빌려 물 한 잔 마시며 쉬어 가기도 했다.
나중에 지도를 다시 보고 알았지만
네 블럭 정도를 한 시간 걸려 걸었다.
말하자면 서울 문정동(우리 집)에서 잠실역까지 걸은 셈이다.
골목길로 접어들어서는
일본식 주택과 골목 풍경이 지루함을 덜어 주었다.
문 앞에 꽃 장식을 한 가정식 절(寺) 집도 색다른 풍경이다.
♣ 니죠죠(二条城)
처음의 니죠죠(二条城)는
1603년 도쿠가와이에야스(徳川家康)가
교토고쇼
(京都御所;도쿄 천도까지 천황이 거처하던 궁궐로 니죠죠 근방에 있다.
이곳은 예약을 해야 볼 수 있다.
지금의 천황은 도쿄의 황거(皇居)에서 생활하고 있다)
의 수호(守護)와
장군이 상경할 때의 숙소로 쓰기 위해
축조하기 시작해
그의 손자가 완공(1626년)한 성으로
드넓은 면적과 깊은 해자,
육중한 성벽 등이
막강했던 권력을 느끼게 한다.
* 니조성 가라문의 금박장식
* 니노마루 궁전(二の丸御殿) 문위의 금박장식
공작과 꽃을 새긴 목각이 정교하고 화려하다
* 니노마루 궁전(二の丸御殿)
니죠죠는
니노마루고텐(二の丸御殿 국보),
니노마루정원(二の丸庭園)과 그 내에 있는
혼마루고텐(本丸御殿),
청류원(淸流園)으로 구성되어 있다.
니노마루고텐(二の丸御殿)은 6개 동(棟) 33개의 방이 있고
450m의 긴 복도가 기를 죽인다.
그 크고 많은 방들은 각 지역에서 장군을 알현하러 온
쇼군(将軍)들의 거쳐였다나?
거기에 암살자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새 울음소리가 나게 만든 복도가 특이하다.
그 복도를 우구이스바리노로카(うぐいす張りの廊下 :휘파람새 울음소리 나는 복도)라고 하는데
내가 걸어 보니 새소리 대신 삐꺽 대는 나무끼리의 마찰음만 들린다.
うぐいす(鶯)는 휘파람새를 뜻한다.
니노마루정원(二の丸の庭園)은
일본 특유의 정원의 멋을 볼 수 있다.
3개의 섬과 4개의 다리를 두고
폭포와 많은 암석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정원 안에 혼마루고텐(本丸御殿)이 있다.
니죠죠를 나와 점심 먹을 집을 찾아 골목길을 헤매다가
그럴듯한 라면(ラーメン)집을 발견했다.
내외가 열심히 만들어 준 오늘의 추천 메뉴인 850엔 짜리 라면을 먹었다.
맥주와 함께한 라면!
처음엔 이렇게 맛있는 라면도 있나 싶었다.
킨카쿠지를 가기 위해서
니죠죠 근처의 관광호텔 안내에게 버스 편을 물었다.
길안내를 잘 해주고는 일일 승차권카드를 구입하는 게 유리하다 해서
500엔짜리 카드를 하나씩 샀다.
♣ 킨카쿠지(金閣寺)=로쿠온지(鹿苑寺)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사리전(舍利殿) 킨카쿠(金閣)가
너무 유명하여 킨카쿠지(金閣寺)라 불리고 있지만
원래의 정식 명칭은 로쿠온지(鹿苑寺)이다.
* 킨카쿠지에 들어갈 때는 이런 부적같은 입장권을 준다
킨카쿠를 중심으로 한 정원 및 건축은
극락정토를 이 세상에 표현했다고 하며
1994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킨카쿠는 이층과 삼층은 옻칠을 한 위에
금박을 입히고 지붕은 널지붕으로
위에는 봉황이 빛나고 있다.
일층은 침전 스타일이고
이층은 무가 스타일,
삼층은 중국픙으로
건축양식이 각각 다른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킨카쿠는 금박으로 장식되어 화려한데다
연못에 비치는 황금색까지 더하면 몇 배로 호화롭다.
* 셋카데이 앞에서 본 킨카쿠
석양이었으면 한 건 하는 건데...
킨카쿠를 좌로 하고 돌아 들어가면
셋카테이(夕佳亭)이라는 에도시대의 스키야 스타일의 다실이 있다.
이곳에서 전망하는 저녁노을에 비친 킨카쿠가 특히 멋있다 하여
셋카테이(夕佳亭)라고 명명되었다 한다.
후도도(不動堂)의 본존은
돌부동명왕으로 고보대사가 만들었으며
영검이 뚜렷한 비불로서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오전부터 많이 걸어서인지
후도도를 지나자마자 나타난 매점이 반가웠다.
휴식하면서 맥주 한 캔을 기대했는데
모두 아이스크림으로 만족이다.
아쉬웠지만 잠시 쉬고 다음 코스인
코류지로 간다.
♣ 코류지(廣隆寺)
코류지는 진언종의 사원으로
603년 쇼토쿠태자(聖徳太子)가 건립한
교토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이다.
쇼토쿠태자가 건립한 호류지, 시텐노지 등 7대 사원 중 하나이다.
이곳에는 일본이 가장 아끼는 국보 1호인
목재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있다.
우리 신라의
금동 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흡사하다 해서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런데 정작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킨카쿠지에서 코류지를 가는 버스는
다시 니죠죠 앞을 지나 조금 후 갈아 타야 하는데,
이 때 반대 방향의 차를 잘 못 타고
시내를 돌다가 가는 바람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가 탄 버스는
니죠죠 앞에서 구입했던 일일 승차권카드를
사용할 수 없는 다른 회사의 버스여서
생으로 요금을 지불했다.
어쨌거나 코류지 매표소에 당도하니 4시 50분,
이미 입장불가였다.
4시 30분까지 입장하고 5시에 퇴장해야 한다.
일본에서의 대부분의 문화재 관람 마감 시간이 5시이다.
“미륵보살을 보러 일부러 한국에서 왔는데 어떻게 좀 안돼요”
했더니 들어 가라고 한다.
“아~ 감사하므니다(ありがあとう!)”
하고 몇 번이나 절을 했는데,
그 아가씨 왈
입장료 내고 5시 까지만 보고 나와야 한단다.
“이런 버르장머리하고는!”
그래서 외부 사진만 찍고 나왔다
.어차피 내부는 촬영금지다.
쇼토쿠태자와 관련해서는
[일일일화] 책에서 몇 번 본 터라
무언지 모르는 친근감 같은 게 있다.
그 때 참고자료를 통해 조사한 내용이다.
일본 불교를 중흥시킨 쇼토쿠태자(聖德太子)는 6세기 후반에 용명천황(用明天皇)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본 최초의 절 법흥사(法興寺:593년 창건)에서 고구려승 혜자(惠慈)와 백제승 혜총(惠聰)으로부터 불교를 배웠다. 일본에는 538년 불교가 전래되어 공인되긴 하였으나 토착 종교인 신도(神道)가 성행하였고, 유교도 도입되어 생활규범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특히 성덕태자 시절의 조정은 배불파와 숭불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용명천황이 죽자 두 계파간의 투쟁에서 성덕태자는 숭불파인 소가 씨를 지원하여 마침내 승리하였다. 이로서 일본에 찬란한 불교문화의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 코류지 인근은 노면전차가 다니고 있었다.
내일은 나라(奈良)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