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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妻가 부르는 노래
1절
어제 남편의 팔순 생일 날, 저녁 6시. 예약된 방으로 가족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식사는 6시 반이라야 가능하다고 지배인이 말하자, 삼삼오오 수인사를 나누며 자리를 찾아간다. 모두 좌석에 앉자 큰아들이 일어나서 인사말을 했다.
주말 저녁 시간인데 이렇게 자리를 같이해 주어서 고맙다고 서두를 꺼낸다.
그러더니 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는 것이다..
자랄 때 아빠라면 아이들이 머리를 흔들었다.
큰아이는 송곳 같이 날카롭고, 둘째는 망치처럼 우직한 성품이다.
성정은 달랐지만 공통점이 있었는데, 위인전을 많이 읽은 탓인지 매사에 상식선을 너무 높게 잡고 부모도 그 선상에서 객관화 하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충실한 아빠인데 아빠를 좋아하지 않았다.
요즘 말하는 "소통에 먹통 같은" 사람이 자기들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유치원에 다니고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아이들이 늦잠을 자면, 아이들을 깨우는 아버지의 방법이 "찬물질"이었다. 겨울이라도 수건을 찬물에 적셔서 아이들의 귀와 목을 문질러 댔다. 아이들이 진절이를 쳤다. 나도 항의를 했다. 그의 대답은 언제나 "몸에 좋다"는 것이다. "잠도 깨고 찬물 맛사지도 되고, 좀 좋아?"
몸에 좋은 것, 유익한 것이라면 상황이나 기분 같은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으니,
아주 어린시절부터 애들은 아빠를 피했다. 개와 고양이가 옹추가 된 것은 서로의 싸인이 안 맞아서라고 전해진다. 개는 반가우면 꼬리를 흔드는데, 고양이는 반가우면 꼬리를 내리니, 어떻게 감정이 소통 되겠는가?서로 으르렁 거릴 수 밖에....
아버지는 아들들이 괘씸하고, 아들들은 아버지에 대한 심정적 거부감을 떨쳐 내지 못했다. 밑으로 두 아이는 그렇지 않았는데, 위로 두 녀석이 그랬다.
그러면서 이십대를 맞이했다.
아들이 마이크 없이 말을 한다.
"나이 먹어가면서 정말 아버지가 대단하시다고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부부가 맞벌이를 하며 남매를 키울 뿐인데도 힘든 일이 한둘이 아닌데 아버지는 아들 넷을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었는지 세월이 지나갈수록 경외스럽습니다“
아들의 말이 하도 진지하고 정성스러워서 숙연해 지기까지 했다.
내가 일어났다.
"나도 한마디 할까? 팔십 년 세월을 살아낸다는 것, 참 장한 일이다. 더구나 아버지가 살아낸 80년은 식민시대, 2차 세계대전, 해방, 6.25전쟁, 4.19, 5.16 제5공화국... 참으로 숱한 소용돌이 역사의 한 가운데 있던 80년이다. 육이오 전쟁이 났던 때가 대학교 1학년, 길을 가다가 잡혀서 의용군으로 끌려 가다가 은인을 만나 탈출할 수 있었고, 1980년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며 명분으로 삼았던, 과외 추방과 공직자 추방 때의 해직...그 물결을 다 헤치고 오늘 80회 생신이니, 진심으로 치하하고 싶다" 대충 이런 말을 했다. 자식들, 손주들이 생신 당사자를 포옹했다.
21층 식당에서 남산이 정면으로 보였다. 나는 바깥 경치와, 자손들에 둘려 쌓여 행복해 하는 팔십 노인을 번갈아보면서 한 생각에 잠긴다.
2절
내가 이 남자를 만난 것은 내 나이 스물여섯살이 끝나가는 11월이었다.
아버지께는 절친한 친구 몇 분이 계셨다. 청년시절 직장에서부터 친분을 맺어오신 분들이다. 집안 끼리도 왕래를 하여 우리들도 "아저씨, 아주머니.."하며 친근하게 지냈다.
서로 자식들의 혼사에 내 일처럼 관심을 가지셨다. 내가 스물여섯이 다 가니 아저씨들도 신랑감을 물색하셨다. 아버지의 성품과 신조를 잘 아시는 분들이기에 아무리 괜찮은 신랑감이 있어도 집안에 早死의 내력이 있거거나, 側室의 자식이거나, 아무튼 몇몇 금기사항을 염두에 두고 신랑감을 찾았고, 절친한 친구 세 분 (閔, 劉, 李) 아저씨의 합동작전으로 추천한 신랑감이 별 하자가 없자, 맞선 자리가 마련되었다.
1961년에 나는 스물여섯 살이었는데, 당시 스물여섯이면 혼기가 늦어지는 관문이었다. 그런데 또 일년이 지나가려고 한다. 나이는 더 먹어 가고, 나 자신 내 세울만한 인물도 못 되니, 상대만 높여 고를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편한 마음으로 선 자리에 나섰다.
신랑감은 다섯 살 위인 서른 한 살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신랑의 조건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우선 학벌과 전공이 괜찮았다. 또 태생이 서울이라 그 점도 합격. 부모님도 교육자이시니 아버지 마음에 들었다. 본인만 이상하지 않으면 사돈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서른 한살이라고 알고 나갔는데, 신랑은 마치 대학교 일학년 같이 앳되었다. 피부가 희고 곱고, 자세는 완전히 일본 사람이었다.너무 예의가 바라서 오히려 내가 거칠기가 선머슴 같았다. 그렇게 첫날 인사만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사람을 만났는데, 그 것도 결혼할 사람으로 맞선을 보고 왔는데, 아무 느낌이 없는 것, 싫다든가, 좋다든가, 절대 아니올시다도 아니고, 다시 만나야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없이 微動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 내가 이 남자를 만난 첫 날의 내 마음이었다.
그런데 며칠 후, 아저씨 댁 아주머니를 앞세우고, 인품이 좋아 보이는 뚱뚱한 한 부인이 아현동 우리 집을 찾아 오셨다. 신랑감의 어머니셨다
맞선을 보고 온 날로부터 사흘이 지난 어느 날
신당동 劉아저씨댁 아주머니를 앞세우고 남자의 어머니가 찾아오신 것은
신부 감 네 집안을 탐색하러 오신 거였다.
맏아들의 혼사인데 바깥어른들끼리 중매가 오고가서 맞선까지 봤으니
행여 혼사가 이루어지면 황당스러운 일이라도 벌어질까 보아,
학부모 관계로 안면을 트고 계신 劉아저씨댁 아주머니를 대동하고 오신 거였다.
그 때 우리 집은 대식구였다.
큰오빠 네와 같이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 어머니, 동생과 나. 그리고 큰오빠내외와 오 남매, 안양에서 작은오빠까지 올라와서 앓고 있었고, 작은오빠를 전담하고 있는 일가 아주머니, 또 고대에 재학중인 외삼촌의 아들도 우리 집에서 숙식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밥해주는 아주머니 등 열다섯 식구였다.
이 많은 식구가 살고 있는 대 가족인 것이 남자의 어머니 마음에 우선 흡족했다. 이런 집에서 자란 딸이라면 맏며느리 감으로 합격이라는 생각이 드신 거였다.
두 번 째는 며느리인 우리 새언니의 모습이었다. 나보다 12살 위인 새언니는
자태가 곱기로 대소 일가를 통틀어 겨눌 사람이 없을 정도인 분이다.
남자의 어머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저렇게 공손하고 차분한 올케를 보며 자란 신부감이라면 더 볼 것이 없다는 마음이신 것 같았다. 그냥 사는 모양세나 보려고 왔던 남자의 어머니는 마치 친한 친구네 집에 놀러온 분처럼 안방에 편하게 앉아서 이야기 보따리를 펴시는데, 백년지기가 따로 없었다.
어머니는 정성껏 점심상까지 차려 내셨다.
어머니의 밥상 차리는 솜씨는 열여섯 살, 지엄하신 시부모의 진지상을 차릴 때부터 칭찬을 받으신 솜씨였고, 구한말에 대궐을 장악한 일본이 궁인들을 궁 밖으로 내보낼 때 소주방 궁녀 한분이 유씨댁 후처로 들어오셨는데 그 때 잠시 어머니 곁에 머물러 계시면서 젊은 새댁인 어머니에게 수라간 음식을 가르치셨던 터라 점심상을 받으신 손님께선 오직 놀라실 따름이었다.
당사자들끼리의 생각은 뒷전으로 돌리고 남자의 어머니는 아주 혼인을 작정하신 태도였다. 어머니도 손님이 마음에 드셨다. 저런 분이 딸의 시어머니가 되신다면 과히 딸의 맘고생을 시키지 않을 것 같은 넉넉함을 보신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한번 맞선을 본 것뿐인데 혼사는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어 갔다.
오히려 당황한 것은 본인들이었다.
3절
"그만하면 괜찮을성 싶구나. 몇 년을 시귀어 봐도 사람은 다 모른다.
가정을 아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을 더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착실해 보이니 허망한 짓은 하지 않을 것 같다"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산다는 것은 다 나 하기 나름이다. 누구와 살든 쾌청한 날만 있지 않은 것이 인생이다. 어떤 어려움, 환경에서도 숨통 티는 곳은 있기 마련이다. 그 숨통 틔는 곳을 찾아낼 줄 아는 것이 지혜다. 어디에 가든 너는 잘 해낼 것이다."
나는 결혼이란 것에 핑크빛 꿈을 걸고 있지 않았었다. 신델레라가 되는 기대는 추호도 없었다. 그 때는 독신주의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못하던 시절이고, 내가 무엇이 된다는 것, 내 개인의 발전 같은 것은 엄두도 못 냈으니 대학 졸업후의 결혼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는 별 갈등 없이 양가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맞선보고 4개월 후, 1962년 2월 25일 명동에 있는 은행집회소에서 약혼식을 거행하였다. 중매를 서신 분들이 모두 금융계 인사이시고 아버지도 새로 발족한 중소기업 은행의 운영위원으로 계셨기 때문에 은행집회소 연회실로 장소를 잡았다.
신랑의 아버지, 우리 넷째 아버지, 우리 사촌오빠들, 약혼식에 참석한 남자분들이 대부분 경성제일고보 동문들이라 동창회에라도 오신듯 양가가 화기애애 했고,
특별히 부유하지도, 특별히 쳐지지도 않는, 평범하면서도 화목한 두 집안은
사돈으로서 걸맞아, 보기에 편안했다.
4절
결혼 날이 음력으로 이월 스무 엿세. 양력으로 4월 1일 일요일이었다.
택일은 만세력을 보시며 큰아버지께서 길일을 뽑으신 거였다.
그런데 지금보다도 그 때는 만우절의 열풍(?)이 대단했었다.
낯선 서양 풍습이 처음 알려졌기 때문인지 4월 1일에는 선의의 거짓말은 물론,
악의의 거짓말도 난무했었다.
나의 모교 영문과 교수님 중에 이석곤 선생님이 계셨는데, 아버지께서 일부러 교수님을 찾아가서 자문을 구하셨다. 이 교수님과 아버지는 친분이 있는 사이셨다.
"여식의 혼인 날자가 만우절로 잡혔는데, 서양에서는 어떻습니까?'
"만우절에 혼인 안한다는 기록은 없군요 하하"
문제는 결혼식장이었다.
시댁에서는 큰며느리를 보는 일이고, 28살 약관의 나이 때부터 제자를 키워 내신 분이라 하객이 많았다. 우리 집은 일단 일가 권속이 번성한 집이고, 큰언니의 혼사이후 15년만의 일이었다. 일반 예식장으로는 비좁았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것이 경기여고 대 강당이었다.
경기여고 강당에서는 이따금씩 결혼식이 열렸다. 평일이 아니고 공휴일 학교에 수업이 없는 날이다. 졸업생이 원하면 승낙을 했다. 그리고 학교 화원의 나무와 꽃들을 강당으로 옮겨 장식하는 것도 허락했다. 당시 서울예식장의 아드님인 신한목씨가 신랑의 대학 동기이고, 사장이 아버지와도 지인이셨다. 서울예식장에서 강당을 식장으로 꾸미는 것을 도와주었다.
나는 이렇게 진행되는 일련의 일들이 남의 일 같았다. 다 아버지가 맡아서 하셨다.
그 때는 하객 답례품으로 제과점에서 카스테라를 주문하여 한 상자씩 드리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어머니는 혼수 준비로 바쁘신데, 우선 침구에 쓰일 솜은 딸이 스무 살이 넘으면 미리 남쪽의 목화밭에 가서 제일 실하고 질 좋은 목화를 사다가 기계로 껍질을 벗겼다. 당태솜이라는 것이다. 기계로 껍질을 벗겨도 씨와 껍질이 솜에 붙어 있기 마련이다. 어머니는 저녁밥을 다 먹은 밤에 한 소쿠리씩 덜어 와서 손으로 일일이 아주 작은 껍질 조각이나 씨를 골라내셨다.
이 작업을 사오년 하여 말끔하게 정리된 솜을 혼인이 정해지자 솜틀집에 가서 트는데, 이부자리 용, 솜저고리 용, 솜바지 용, 버선 용, 방석용, 이렇게 용도대로 두께를 조절하여 틀어오셨다.
그리고 광목을 하얗게 바래 놓는 일이다.
광목을 들고 정능 냇가로 간다. 볕 좋은 날을 고르는데 당일만 볕이 좋아도 안된다.
사흘전 부터 뙤약볕이라야 한다.
우선 화덕 솥에 양잿물을 넣고 나뭇가지를 줏어다가 불을 붙여서 펄펄 삶는다.
황토물이 될 때까지 삶아진 광목을 냇물에 담아 말끔히 행구고 그 것을 바위에 널고 말린다. 다 마르면 다시 한번 삶는다. 그리고 말리고 행구고 삶는 작업을 하루 종일하면 누런 광복이 하얗게 된다. 저녁 어스름에 거둬 가지고 돌아온다.
집으로 와서는 풀을 먹이고 꾹꾹 밟다가 윤이 반지를 하게 날 때까지 다듬이질을 한다. 처음에는 다듬이돌에 놓고 다듬다가 나중에는 홍두깨에 둘둘 말아서 두 사람이 다듬이질을 하고 조무래기들이 양쪽에서 홍두깨를 잡는다. 요와 이불의 호청으로 쓰일 것들이다.
버선도 이 것으로 만든다.
이렇게 어머니가 제일 공들이시는 것이 이부자리였다.
이불 한번 하기는 어려우니 평생 덮을 이불을 하시는데, 이불을 하는 날이 잔치날이다. 고모, 이모, 숙모, 사촌올케들, 그날은 열명도 넘게 모여서 이불을 한다.
넓은 대청에서는 솜 두는 일을 하고, 안방에서는 솜을 다 둔 요와 이불에 호청을 입히고, 건너방에서는 재봉틀 돌리는 소리로 부산하다. 요는 큰요와 작은 요 이렇게 두개만 하는데 이불은 아홉 체를 하셨다. 짝수로 하는 게 아니라고 아홉체를 하신 것이다.
깊은 한 겨울용 이불 두 채, 차렵이불 두채, 안팍 뉴똥으로 싼 보드라운 이불, 누비이불, 여름용 겹이불, 모시와 삼베를 겹으로 해서 만든 여름이불, 그리고 아랫목에 깔아 놓고 낮잠을 자는 편하고 예쁜 이불, 버선도 50켜레. 방석 열개.
이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제일 큰일이었다.
사철 저고리는 바느질 집에다 맡기셨다. 그러나 치마와 속고쟁이, 속치마는 다 손수하셨다. 거기에 장농과 화장대, 재봉틀. 다리미. 인두. 인두 판. 반짓고리...안성 유기로 만든 놋대야. 놋주발 대접, 놋 요강, 은수저 두 벌, 밥상과 교자상.
이것이 딸을 시집 보내는 당시 서울 중류 가정의 혼수 품목이었다.
지금 같은 예단의 풍습은 없었다. 어머니는 칠첩반상의 그릇과 장독대를 치장해 주셨다.
아들을 가진 댁에서는 청, 홍, 치마감을 넣은 함을 보냈고, 폐백을 드릴 때 입을 관례 옷 한 벌, 그리고 저고리 삼작 (노랑, 분홍 연두)를 신부에게 내리고 금비녀나 노리개등 형편에 맞는 폐물을 절을 받으면서 주었다. 살림집을 마련하는 것도 남자측 몫이다.
나는 원래 결혼이란 것에 별다른 꿈이 없었다는 말을 한바 있다.
신분상승의 기회로 삼지 않은 것은 물론,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신분 비하의 걱정도 하지 않았다. 물론 위의 열거한 혼수 때문에 시댁의 눈총도 받지 않았고,
양가 어머니들께서는 과분하게 애쓰셨다고 서로 노고를 치하 하셨다.
당시 이 땅의 며느리는 죄목 없는 죄인으로 죄악시가 되었던 조선조의 남존여비의 잔해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래서 딸을 시집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때였다. 어머니는 속보, 겉보에 술을 달며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하셨지만, 분에 넘치는 겉치례를 하지 않으셨다. 대신 딸을 기르면서 "된시집"을 살게 했다.
잘 가르친 딸 이상의 혼수는 없다는 생각이셨던가?
정말 딸들에게 무서운 엄마였다.
그래서 나는 어떤 시댁을 만나도 겁나지 않았다.
우리 새언니가 며느리 노릇 하는 것을 계속 옆에서 봤었고, 큰댁의 종부 언니도 곁에서 살았기 때문에, 결혼에 대한 기대도 없었지만 두려움도 없었다. 요즘 신부들이 들으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다.
이렇게 준비된 (?) 며느리 감인데 너그럽고 친구 같은 신식 시어머니에, 신혼 첫날부터 시댁에서 묵지 않고 바로 내가 살 새집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나는 결혼에 대해 더욱 불안하지 않았다.
혼인날은 쾌청하였다.
그런데 그 밤에 천지에 눈이 내려 마치 한 겨울 같이 세상이 하얗게 눈으로 덮여 있었다. 호텔 유리창으로 발자국 하나 나지 않는 새하얀 세상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말했다.
이렇게 백지 같은 도화지 위에 내가 그림 그리기에 따라 내게 펼쳐지는 생활이 달라지겠구나. 시작이 이렇게 하얀 길이니 나는 어떤 색, 어떤 발자욱을 이 도화지에 남겨야 되나?
스물 일곱살에 이미 애늙은이처럼 철이 꽉 들은 早老한 신부는
준엄한 계시 하나를 가슴에 묻었다.
삶을 바라보는 내 생각, 삶을 살아내는 내 태도가 내 인생의 그림이 될 것이라는....
5절
내 생일은 음력으로 삼월 보름. 이월 그믐날 내 집으로 들어가, 새살림 차리고 16일째 되는 날이 내 생일이었다. 솜씨 좋은 친정에서 시댁어른들에게 대접하라고 음식을 잔뜩 해 보내셨다. 어머니는 새언니를 딸려 보내어 직접 생일상을 차려 주도록 하셨다.
시부모님, 시동생 셋, 시뉘 셋, 출가한 시누의 남편. 이렇게 초대하여 첫생일을 치뤘다. 모두들 음식 칭찬을 하였다.
그러더니 시어머니께서 '음식은 훌륭한데 빠진 게 있다. 며느리의 노래가 빠졌어" 하시는 거다.
나는 난감했지만 손님들을 기쁘게 해드릴 의무가 있으니 어쩌랴.
당시에 유행하던 노란샤쓰 입은 사나이를 불렀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어머, 어머, 우리 새며느리는 카수네~ 며늘애야, 너, 닐리리아~도 부를 줄 아니?"
하시는 게 아닌가?
못한다고 할 수는 없고, 옛날 어머니 친구분들이 모여서 노실 때 부르던 민요가 생각이 나서, 내 마음대로 창작(?)을 하여 불렀다. 학교 문전에도 가보지 못한 어머니가 생전 처음 친구를 갖게 되셨는데 1952년 아직 피난시절, 그 곳 피난지의 기관장 부인들의 봉사활동 모임에 소집되어 나가시더니 그만 친구가 되시고 말았다. 생신 때면 집집으로 다니시며 시름을 달래셨는데 그 중에 아주 노래 잘하는 아주머니가 계셨다.
나도 그 노래에 홀려서 듣곤 했는데, 급한 김에 그 노래를 흉내내어 불렀더니
시어머님께서 "옴마. 옴마. 정말 카수네~" 하시며 정말 놀라시는 거였다.
솔직히 노래를 잘못 부르는데 이 어른께서 그러시는 거였다.
그 때부터 나는 카수 며느리가 되었고, 어머님은 어디든지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그리고 노래를 시키셨다. 여간 무안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내가 받은 가정교육은 시부모님 말씀은 무조건 순종하라 였으니 나는 가자고 하시는 데마다 모시고 갔고, 노래를 하라면 넙죽 노래를 불렀다. 나는 시어머님의 기쁨 조였다.
시댁은 이렇게 자유롭고 따뜻했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분들이었다.
나는 친정에서는 칭찬 한번 못 듣고, 늘 꾸지람만 들었는데 시댁에서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 그러나 남편을 하나씩 알아가면서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내적 갈등을 겪어야 했다.
우선 그는 종이 조각 하나라도 버리면 큰 일이 나는 사람이다.
약 박스에 동봉된 설명서를 버렸다가 쓰레기통을 뒤지는 법석을 떨어야 했다.
이미 그 약은 다 먹은 후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는 새것에 대해 아르레기성 반응의 기질이다. 그는 낯선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새로운 물건을, 부엌에서 쓰는 바가지까지라도 새 것으로 바꾸는 일이 내게는 두려움이 되었다.
무엇이라도 버리지 않고, 무엇이라도 새로 사지 않고...설명을 해서 무엇하랴. 그 살림살이가 얼마나 초라할지는...?
그러나 살림살이의 구차는 둘째였다. 이 독특한 성품은 사회성에 연계되니 어찌하랴.
나는 거의 절망의 수준이 되었다. 그렇다고 결혼생활을 파기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어떤 상황에서도 숨 쉴 틈은 있는 법이다.
막힌 곳에 코를 대고 숨을 쉬려다가 질식하지 말고, 틈새를 찾아 호흡을 하거라. "
아버지가 하시던 말씀을 떠올렸다.
나는 버리지 않는 것, 새로 사지 않는 것의 장점을 찾아보았다.
그 것은 " 낭비 하지 않는 알뜰함" 이었다.
그래, 내다 버리는 것보다 낫겠지. 새 것만을 추구하는 소비적인 성품보다 낫겠지..
거기에 나를 맞추자.
배우자에게 나를 맞추는 것이 결혼생활이라고 배워온 나는
남편의 독특한 성정을 놓고 맞출 곳을 찾다가 그의 "비상식적인 절약"에
나를 맞추는 길을 택했다.
우선 "쓰지 않는 것"을 첫 번째 신조로 삼았다.
시댁은 걸어서 십오분의 거리이다. 남편이 출근을 하고 나면 나는 시댁으로 직행했다.
그 때는 모든 주부들이 집에 있는 시절이었다.
더러 찬거리를 사러 시장을 가는 것 이외에는 언제나 집에 있었다.
모든 것이 수작업시대이라 여인들의 일거리도 많았다.
점심을 시댁에서 먹고, 남편이 시댁으로 퇴근하면, 같이 저녁을 먹고,
다음날 아침거리도 챙겨서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1962년 6월 10일 군사정부는 하루아침에 화폐개혁을 선포했다.
10단위 평가절하였다. 어제의 천환이 백원이 되었다.
6월 21일 남편이 5300원의 월급봉투를 건네 주었다.
당시 남편은 건축기사로서 모 금융기관 영선과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그 해 12월 25일, 나는 5만원이 입금된 저금통장을 남편과 시부모님 앞에 내보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월급을 한푼도 쓰지 않았고, 거의 두 달마다 나오는 상여금에도 손을 대지 않았고,
영선과는 출장이 잦아서 남편이 이등기차 값으로 여비를 받아 3등 입석으로 가며 남겨온 돈도 모조리 저축했고, "집에 과일 있니? 과일이나 사거라" 시모께서 주시는 돈도 과일 대신 통장으로 들어갔고, 막말로 뜯어(?)가는 사람 하나 없는 내 환경을 감사해 하며
모은 돈이었다
.
나는 친정 행도 일년에 세 번으로 국한했다
설날은 시댁에서 보내야 했으니까 정월 초이틀, 그리고 부모님 생신 이외에는 외출을 안 했으니 친구인들 만났으랴.
주식시장이 요동을 쳐도 곁눈 한번 돌리지 않았고, 일획천금의 기회라는 유혹에 두 귀를 막고, 오로지 한 푼이 생겨도 두 푼이 생겨도 저축을 하였으니 8장 부피의 저금통장은 쉽게 채워져, 작은 서랍에 가득했다. 저축의 날에 은행장 상을 타기도 했다.
"저축 액수 때문이 아니라 매일 저축하는 그 생활 때문입니다" 은행측의 말이었다.
8년 동안에 아이를 넷을 낳았다.
세상에서 가장 신명나는 일이 무엇인가?
제 자식 커나가는 모습과 곡간에 쌀가마가 쟁이는 일이라 하지 않던가.
여인인 나는 가슴에서 노상 찬바람이 불었지만 어미로서는 더할 수 없이 행복했던,
23년간의 충신동시절이었다.
올해로 결혼생활 48년이 된다. 서른 한 살이었던 때 만난 이 남자는 팔십 할아버지다.
지금 내 가슴에서는 더 이상 찬바람이 불지 않는다. 늙고. 아프고, 무력한 부부가 되면서 밖이 추워도 내 가슴에서는 항상 따뜻한 바람이 분다. 그리고 깨닫는다
나보다 남편이 나를 더 많이 참아주었다는 것을....
늘 상처 입고, 피 흘리고, 꾸덕꾸덕 말라가노라면 그 위에 다시 상처 입고 보낸 것이 나의 젊은 시절이라면, 상처를 보듬어 가는 것이 노년이지 싶다.
비관하고 절망하고 분노한 것이 젊은 날이라면, 서로 이해하고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이 노후라고 말하고 싶다.
한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기까지, 그래서 그의 약함을 따뜻하게 감싸기까지,
그 약함 때문에 오히려 더 안쓰럽고 가슴이 저려오는 것.
이것이 부부인가 하고 전율한다.
(2010년 6월 24일. 남편의 팔 십세 생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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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느새 조회수가 362나 되었구려.
언니의 결혼 스토리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도 있지만
새롭게 알게 된 것이 많네요.
약대생이었던 나는 여유가 없는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었기에
집에서 돌아가는 일들을 세세하게 알지 못하며 지냈지만
1960년대 그 시절, 부모님을 비롯해 그리운 분들이
살아계셨던 그때로돌아갈 수 있게 해주어 고마워요.
고모의 기억력
이야기꾼 같은 문장력
그때 그시절 이 눈에선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