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유설교(74)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본문 : 눅 12:13-21 (신 114)
어떤 사람이 돼지를
도축장으로 몰고 갑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돼지는
아무 저항도 없이 꼬리를 흔들면서
도축장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연출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비결을 묻습니다.
"어째서 돼지가 도축장에 즐겁게 들어갑니까?"
그 사람은 그의 손에서 콩을 내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돼지가 가야할 도축장의 길에
콩을 조금씩 떨어뜨리고 앞서가면 ......
돼지는 그 콩을 먹는 맛에
도살장에 제 발로 꼬리를 흔들며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돼지의 모습이 아니라 ......
사람의 모습입니다.
당장의 눈앞에 떨어진 콩 주워 먹는 맛에
죽음의 길을 걷고 있는 줄을 모릅니다.
쾌락과 탐욕에 눈이 멀어 진리에서 멀리 떠나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유산에 대한 논쟁>
오늘 본문에서 탐욕에 눈이 먼
사람의 이야기를 읽게 됩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때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
오늘의 본문 앞에 있는
누가복음 12:1절을 보면 사람들이
‘서로 밟힐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님이 한참 말씀을 가르치시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불쑥 끼어들어
예수님께 말합니다.
13절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가 남겨 놓은
유산이 너무 많으면 자녀들 사이에
문제가 생기는 법입니다.
유산상속을 둘러싸고 형제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다가
결국 법정 소송으로 번지는 것을 종종 보지 않습니까.
이 사람도 기대했던 만큼
자기 몫을 받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그 분쟁을
조정해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유산상속 같은
이런 민사 소송을 유명한 랍비들에게 부탁하여
해결하곤 했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능력 있는 예수님이라면
그저 한마디만 하셔도 자기 문제가
금방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람의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14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예수님이 유산 분배 논쟁의 중재자가 되기를
거절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이 기록되고 있는 배경과
문맥을 주의해보아야 합니다.
눅12장은 예수님께로 몰려드는
수 만 명의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파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날 예수님께서는 대단히 중요한 인간의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들을 내포한 어마어마한
메시지를 선포하셨습니다.
“천국과 지옥...., 하나님의 섭리,....
인간의 영혼의 소중함....., 성령”
등의 영적인 주제가.....
그 날 예수님의 설교의 중요한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러한 가르침이 진행되고 있을 때
그 무리 가운데서 한 사람이 등장해......
“선생님, 저 억울한 일이 있습니다.
제 재산 좀 찾아 주십시오”하고 말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설교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오정과 같은 질문을 던졌던 것입니다.
<탐심에 대한 경계>.....
예수님도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전혀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문제에
매달릴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질문을
통해서도 영적인 교훈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재산을 나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르치시고자 하셨습니다.
15절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예수님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파고 들어가십니다.
재산을 누가 더 많이
갖느냐하는 것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결국 “죄 문제, 탐욕의 문제”입니다.
이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이 없이는
그 어떠한 해결도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이 없이는
결코 삶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존재 문제’가
‘소유 문제’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즉 그가 어떠한 사람이냐 하는 문제가......
그가 무엇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의 문제와
혼돈 될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어느 정도의 물질적 소유가
생명을 위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
그러나 소유의 풍성함이
생명의 풍성함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을 보다 효과적으로
설명하시기 위하여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어느 마을에 많은 농토를
가지고 있는 부자가 있었습니다.
풍년이 들어 그 밭의 소출이 풍성하였습니다.
추수를 앞두고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많은 곡식을 쌓아 둘 것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다가
곡간을 헐고 더 큰 곡간을
새로 짓기로 하였습니다(16-18절).....
그리고 거두어들인 많은 곡식을
새로 지은 곡간 안에
담아 둘 것을 생각하며....
너무 기분이 좋아
스스로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19절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여기까지만 읽으면 참 부럽습니다.
예전 어느 카드회사 광고 문구가 생각납니다.
달리는 고급 승용차 창문으로
예쁜 모델이 머리를 내밀고
바람에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환호를 장면과 함께
이런 멘트가 나옵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
와!
저와 성도님들이 꿈꾸던 모습 아닙니까.
열심히 일해서 크게 성공했으니
이제 편안히 네 인생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성도님들 !
세상적인관점에서
우리는 이 부자에게서
별다른 특별한 문제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 부자가 다른 사람들처럼
무슨 탈세를 한 것도 아니고,
일꾼들의 임금을 착취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정직하게 열심히 농사지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마침 그 해에 풍년이 들어
밭에서 소출을 풍성하게 거둔 것뿐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많이 거둬드린 것이
잘못입니까?
그것을 곡간에 잘 보관하려고
한 것이 잘못입니까?
열심히 일했으니까
이제는 은퇴해서 좀 편하게
지내자는 것이 잘못입니까? ...
열심히 일해서 돈 많이 번 것,
그것 가지고 이제는 좀 쉬면서 즐기자는데,
그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장면 속에 개입하십니다.
그 날 밤 이 부자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0절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비유 속에서 하나님은
이 부자를 향해 “어리석은 자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부르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를
‘어리석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어리석은 부자의 오해>
첫째, 그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을 한 번 더 주의 깊게 살펴보면...
<본문 17-19절 읽어라>
17절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절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절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17절, 18절, 19절의
이 짧은 세 절 안에 이 부자는
'내가'라는 말을 무려 여섯 번이나 반복합니다.
희랍어 원어로 읽어보면
8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부가 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성도님들 !
농사를 아무리 열심히 지었다고 하지만,
농사가 잘 되려면 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우선 때맞추어 비가 와주어야 합니다.
햇볕도 필요합니다.
바람도 적당히 불어주어야 합니다.
그것들은 내가 열심히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해 주셔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의 말 속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하’자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의례적으로 하는 ‘감사’의 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떤 책을 보니 .....
사람들은 물질관을 두 가지로...,
즉.....
- “창을 통해서 물질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고,.....
- 거울을 통해서 물질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거울을 보면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내가 땀을 흘린 것,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가 노력한 것,
투자한 것,
밤일을 하고 시간외의 일을 해서 내가 벌은 것”,
이런 것들이 보입니다.
이런 사람은 인생의 거울 속에서
자기 자신밖에는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또 한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창을 통해서 물질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창을 통해서 보면 자신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그 물질이 어디에서부터
왔는가를 압니다.
주께서 나에게 건강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주께서 나에게 지혜를 주시지 않았더라면.....
주께서 나에게 이러한 환경과 삶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결코 이룰 수 없었을 것을 압니다.
그의 언어 속에는,...
그의 사고 속에는,....
그의 의식 속에는....
하나님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를 보세요..
그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향하여
이렇게 탄식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를
‘어리석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어리석은 부자의 오해>
첫째, 그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둘째, 더불어 살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또, 내가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게 되고
여유가 좀 생겨나면,.....
그것을 가지고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들을
돕고 함께 나누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부자의 말 속에서
이웃에 대한 관심은 찾으려야
찾을 수 없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자기에게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마음으로 생각합니다.
17절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
이 사람은 지금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그의 걱정은 ‘이 곡식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디에 쌓아 둘 것인가’였습니다.
결국 그 고민은 모두 자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에게는 곳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간은 다른 곡식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서 새로운 곡식을
들여놓을 공간이 없었습니다.
이 말은 그의 평생에 먹고
남을 만큼의 재물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그 재물은 그의 아버지에게서
유산으로 받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보다도 더 많은 곡식을
새롭게 얻었으니
이제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안타깝게도 그가 생각해 낸 것은
그 남은 것을 나눌 생각은 하지 않고,......
옛날 곳간을 허물어 버리고
더 큰 곳간을
새롭게 짓자는 것이었습니다.(18절)
아마도 생각건대 그의 부유함에도
불구하고 친구 하나 없이 외로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를 ‘어리석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어리석은 부자의 오해>
첫째, 그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둘째, 더불어 살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셋째, 이 부자가 어리석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영혼의 필요와 육체의 필요를
혼동했다는데 있습니다.
육체를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며,
영혼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를
그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재물의 풍족이,
육신의 배부름과 만족이
곧 영혼의 만족인 것처럼 혼동하였습니다.
19절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예수님이 시험받으실 때 신명기의 말씀으로
대응하셨습니다.
마4:4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
성 어거스틴은
“오! 하나님, 우리의 영혼이
당신의 품 안에 돌아가 쉴 때까지는...
참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에게 평안함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참된 영적인 안식은
물질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육신의 필요를
채우는 것으로....
자기 영혼이 만족함을
얻을 것으로 오해하였습니다.
자기의 영혼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궁핍한 상채에 있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결국 이 어리석은 부자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20절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세상적인 안목으로 볼 때
이 사람은 얼마나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입니까? .....
곡식이 넘칠 것을 대비해서
곡간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철저한 계획과 준비 속에
온갖 사업 구상을 가지고
내일을 준비하며 산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준비는 하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
돌려 드릴 준비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종말론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언제든지 나의 영혼을 하나님께
드릴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안탑깝게도 이 부자는 자기의 영혼을
하나님께 드릴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향하여
이렇게 탄식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맺는 말씀 -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삶>.....
비유를 맺으시면서 거기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이와 같이 결론을 내리십니다.
21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간이든, 물질이든, 재능이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드릴 것이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에게 주신 것을 통하여
이웃과 나누는 삶을 사라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약한 자를 돕는 것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삶입니다.
저와 성도님들이 !
세상에서 부자가 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자가 되는 삶을
살기를 축복합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어
헛되이 낭비하는 인생을 살지 말고......
작은 것이라고 나누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 ........
하나님 나라에 상급을 많이 쌓는
진짜 부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