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한국의 기도 도량 / 삼각산 문수사
문수보살이 깨운 보리심, 애끓는 모정 달래다
굴산파 중흥조 탄연국사 개산
명성황후, 문수보살상 시주해
기도처로 유명한 천연 굴법당
▲문수사는 중생이 떨구고 간 세속 때를 비로 씻어 내리고 있었다.
문수보살이 세속 때 비로 씻고 계심이리라. 사진 가운데가 문수굴.
‘몸치장하는 보석 장신구엔 관심조차 없었건만….’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라는 이도 내가 왕비답지 않게 수수하다고 했다.
공식장소가 아니면 목걸이, 팔찌도 안 하고 참석했으니….’
‘왕권회복과 쇄국 정책을 위한 경복궁 중건으로
당백전까지 주조해 이미 국고를 악화시킨 건 시아버진데,
내가 낭비할 국고라도 있었던가.’ ‘다른 여자를 사랑한 왕을 모시기도 참 힘들었구나.’
‘아들도 제 어미 젖 한 번 빨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세상살이 모질기도 하구나.’
앙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 섞인 말이 새 나왔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조선의 국모 아니던가. 눈물이 가당키나 한가.’ 궁녀들 눈치가 보여 울음을 삼켰다.
시아버지가 미웠다. 여자가 권력을 탐한다는 말도 듣기 싫었다.
궁궐 안에서 굿을 벌이고 치성 명분으로 명산대천을 다니며 국고를 낭비한다는 비아냥엔 치가 떨렸다.
민자영은 여덟에 아비 여의고 홀어머니 품에서 자랐던 과거가 떠올랐다.
대원군 부인 부대부인 민씨는 유난히 총명함을 어여삐 여겼다.
부대부인은 아버지 민치록이 집안에 들였던 양자 민승호의 누나였다.
민씨는 아들 고종의 배필로 자영을 적극 추천했다.
궁에 입궐하던 때가 엊그제 같았다. 열여섯이었다.
순간, 생각 하나가 스쳤다. ‘그 때, 아마 시아버지는 외척 없는 가정환경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안동 김씨의 외척 세도정치를 무척 싫어하셨었지.’
머릿속은 번뇌로 들끓었다. 가슴엔 불덩어리가 눌러 앉았다.
삼각산 문수사로 향했다. 대웅전에 시주했던 문수보살은 자신의 마음을 헤아릴 것 같았다.
여인으로서 궁에서 겪는 고초, 혼란스러운 나라. 현실을 내려놓고 싶었는지 모른다.
문수보살의 지혜가 간절했을지도….
문수보살은 용맹한 사자 등 위에 앉아 분별심 등을 물리치는 지혜의 화신 아니었나.
모든 중생이 부처님 가르침을 성취하도록 갖가지 방편으로 불도에 들게 하고,
자신을 비방하고 미워해도 중생 모두 보리심을 내게 한다 들었다.
깨끗한 행을 하거나 나쁜 짓을 해도 보리심 내게 하며
부처님과 가르침, 부처님 제자를 비방하고 교만해도 보리심을 일으킨다 했다.
허공 같이 넓은 마음으로 끊임없이 중생을 제도해 보리를 깨닫고 정각 이루게 하는 게
문수보살이라 들었다.
▲ 명성황후가 문수보살상을 시주했다고 전해지는 문수사 대웅전.
“문수사는 문수성지니 문수보살님이 중전을 보살펴 주실 것이옵니다.”
궁녀가 말씀을 올렸다. 마음 들켜 민망해 대꾸하지 않았다.
듣지 않아도 문수사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던 터였다.
삼각산 문수사는 해발 645m에 자리한 문수성지다.
삼각산 문수봉을 뒤로 두고 동쪽에 보현봉, 서쪽에 비봉이 절을 감쌌으니 그럴 만도 했다.
고려예종(1109) 때 구산선문 중 굴산파 중흥조 탄연국사(1070~1159)가 개산했다.
탄연국사는 당대 대선지식이자, 문장가, 고려제일 명필가였다.
고려불교 중흥조며 태고 보우국사도 잠시 이곳에서 주석했다고 알고 있었다.
고려 의종이 친히 참배했으며 조선조 문종도 이곳을 찾았다.
문종의 딸 연창공주는 이곳에 상주해 문수사를 중창했다.
조선초, 박문수 어사 부친이 이곳에서 기도해 문수를 얻었다고 한다.
‘뜻은 달라도 한자음을 따서 문수라 지었나.’ 어림도 없는 잡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험한 산길 헤치며 문수사에 이르자 숨이 찼다.
그녀를 괴롭히던 번뇌도 숨을 고르는 듯 말이 없었다.
대웅전을 참배하고, 문수보살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누군가 공양한 초의 촛불이 가볍게 일렁이는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렸다.
자신 같아 시선을 거뒀다. 문수보살에게 다시 눈을 옮겼다.
여전히 그 자리에서 자애로운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궁으로 돌아온 그녀는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사사건건 그네의 내정간섭을 물리치니 싫어할 만도 했다.
1895년 10월8일(음력 8월20일), 궁이 시끄러웠다.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낭인과 식자층을 동반해 궁중에 잠입했다.
그네는 ‘여우사냥’이라 했다.
죽음을 예감한 걸까. 삶은 끈질겼다. 비겁하게라도 생을 이어가고 싶었다.
육신은 언젠가 벗어야 할 껍데기일뿐. 조선의 국모답게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었다.
의복 정갈히 차려 입고 앉아 칼을 들고 위협하는 일본인을 노려봤다.
아니, 무력으로 한 나라의 왕비를 살해하려는 제국주의 만행을 침묵으로 경책했다.
일본은 왕비를 끌어냈다. 히젠도가 왕비의 살갗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궁녀들도 칼부림을 피할 수 없었다. 조선의 심장을 찔렀고, 피로 물들였다.
왕비 옷을 발가벗기고 은밀한 곳까지 욕보였다.
왕비는 기름 머금고 불길에 휩싸였고, 향원정 연못에 한줌의 재로 뿌려졌다.
그렇게 왕비는 허공에 먼지로 흩어졌다.
훗날 후쿠오카 구시다 신사에 보관된 히젠도 칼집에는 이런 구절이 새겨졌다.
‘늙은 여우를 단칼에 베다.’
백범 김구선생이 일본인 장교를 때려죽이고 독립운동이란 가시밭길로 뛰어들었다.
안중근 의사는 ‘국모를 죽인 죄’를 이유로 일본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명성황후가 일본에게 살해당한지 100년이 넘었다.
100년도 더 지난 국모의 죽음은 아직도 살풀이를 하지 못했다.
장맛비가 삼각산을 적시던 날, 문수사로 오르며 명성황후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조선의 마지막 비이자 대한제국 최초 황후였던 그녀도 이 길을 오르지 않았을까.
문수사 관련 기록엔 대웅전 문수보살상을 황후가 모셨다고 했다.
당시 상황을 유추했다. 황후는 이런저런 번뇌로 문수보살 지혜에 기대려고 했을 게다.
치성 드렸던 마음이 부족해서일까. 삼각산 대남문과 문수사 갈림길에서 마주한 돌탑,
황후의 마음을 가늠해볼 따름이다. 이 길, 무수히 오르내렸을 우리네 어머니 마음에 고개 숙였다.
▲ 삼각산 문수사 초입. 돌탑이 일주문이다.
무거운 마음을 아는지 비는 멈추지 않았다.
미끄러운 길은 객에게 쉬이 발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보살 한 분이 바지런히 앞장섰다.
큰 아들이 로스쿨 시험을 앞두고 있어 기도하러 가는 길이었다.
보명심(54) 보살은 아들이 고3때 365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문수보살 기도를 거르지 않았다.
오르거나 쉴 때도 쉼 없이 문수보살 명호를 불렀다.
보명심은 “오르는 길 자체가 기도” 랬다. 자신을 위한 기도는 아니라고 했다.
마음 비우고 정근하고 염불하면 집안이 두루 평안해진다고 했다.
기도는 정성이라는 말로 새겨들었다. 지친 걸음에 마른 목은 보살이 내민 얼음 매실차로 달랬다.
문득 목탁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보니 11시였다. 사시예불이었다.
목탁소리 길동무 삼아 문수사에 도착했다.
문수사는 중생이 떨구고 간 세속 때를 비로 씻어 내리고 있었다.
문수굴 문수보살님은 모두를 사랑하신다. 나쁜 짓을 한 이도 보리심을 내게 한다.
중생의 세속 때 비로 씻고 계심이리라.
번뇌 살풀이하고 깨달음 구하려는 마음, 보리심 일으키시는 게다.
보명심은 대웅전에서 지극으로 108배를 올렸다.
참배한 객은 가만히 앉아 흔들리는 촛불을 바라봤다.
흔들흔들 타 들어가는 초가 황후나 객 같아 마음이 울렁였다.
현재 대웅전 문수보살은 10여년전 화재로 소실돼 다시 조성했다고 했다.
형상이 중요하진 않으리라.
문수사 문수보살을 향한 중생의 신심은 천년 넘게 한국불교 면면에,
우리네 어머니 모정에 흘러왔다.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문수굴 앞에 섰다. 향공양 올리는 거사 뒤를 따라 굴법당을 참배했다.
사자 등에 앉은 문수보살들이 한 가운데 계신 문수보살상 광배 같았다.
본래 천연동굴이었단다. 예전 문수굴은 맑은 샘도 있었다.
북학파 이덕무(1741~1793)는 문수사를 찾고 북한산 유람기 ‘기유북한(記遊北漢)’를 남겼다.
“저녁 때 문수사에 이르러 아래를 굽어보니 하늘의 절반쯤 오른 듯하다.
불상을 모신 곳은 큰 석굴로 되어 있는데 석굴을 따라 걸어 들어가니 물방울이 비오듯 옷을 적신다.
끝에는 돌샘이 있는데 물빛이 푸르고 차갑다.
불상 좌우에는 5백 나한을 나란히 앉혀 놓았다.
이 석굴은 보현사라고 하기도 하고, 문수사라고 하기도 한다.
불상이 셋 있는데, 돌로 만든 것은 문수보살이고, 옥으로 만든 것은 지장보살이며,
금으로 도금한 것은 관음보살이다. 때문에 이곳을 삼성굴(三聖窟)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삼성각 뒤에 놓인 동자승들.
지금은 샘에서 흐르는 물을 공양간으로 이어
사찰 대중과 등산객, 기도객에게 요긴하게 쓰이고 있단다.
중생들 목 축이고 밥 먹이니 문수굴 샘이 꼭 문수굴에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닌 듯 싶다.
3배로 참배했다. 주련이 눈에 띄었다.
“확주사계성가람(廓周沙界聖伽藍) 모래 같은 세계를 에워 성스러운 가람 삼아
만목문수접화담(萬目文殊接話談) 눈길 닿는 곳마다 문수보살 말씀 나퉜네.
언하부지개활안(言下不知開活眼) 문수보살 말씀마다 눈 열어줌 헤아리지 못하니
회두지견구산암(回頭只見舊山庵) 고개 돌려도 사방엔 오직 옛 산 암자만 보일뿐이네.”
범부인 객 눈에도 암자만 보일 뿐이다. 치성으로 기도하는 보살만 보일 뿐이다.
응진전에 계신 5백 나한만 보일 뿐이다. 삼성각 뒤 동자승들에 걸린 중생의 신심만 보일 뿐이다.
▲응진전의 5백 나한.
문수사 나서 도심으로 돌아가는 길목서 산고양이를 만났다.
늦은 점심하는 식당 주인내외 옆에 누워 울었다. 숲속에 새끼 세 마리가 있단다.
배고파 우는 거란다. 주린 배 움켜잡고 어미만 기다리는 새끼 걱정으로 우는 건 아닐까.
낯선 사람 손길에도 도망가지 못했다. 새끼 걱정이 어미 고양이를 눌러 앉힌 모양이다.
운다. 자식 걱정으로 빗길 산행에도 문수사 올랐던 보살님도 문수보살 명호를 부르짖었다.
절절했다. 울음이다.
하늘이 먹구름 잠시 걷고 햇살 드리운다.
짐승이나 사람이나 어미의 자식 걱정은 꼭 같다.
문수보살의 중생 걱정도 다르지 않다. 번뇌 구름 속 뚫고 보리심 한 뼘 얼굴 내민다.
환희로 운다.
2012. 07. 25
최호승 기자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