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 순교자기념관
개신교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린지
1백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으로 세워진 것
이다. 1983년 당시 개신교 20개 교단들은
'한국기독교1백주년기념사업회'를 결성,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2천여 명의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기념
관 건립을 추진했다. 그러나 처음 계획과
는 달리 기념관 완공에는 여러 장애가 있
었다. 부지도 그렇고 당시 12억 원대에
달하는 막대한 건설비용도 문제였다.
그러나 영락교회 정이숙 권사가 1986년
용인시 추계리에 10만여 평의 부지를 헌
납했고, 1989년에는 이 사업을 위하여 재
미실업가인 한규빈씨가 1백만 달러(당시
7억여 원)를 선뜻 내놓다. 이 자금이 기
념관 건립의 초석이 되었고, 부족한 자금
은 국내 많은 교회와 신도들의 헌금으로
충당되어, 순교자기념관은 1988년 8월
진입로 공사를 끝내고 기념관 기공식을
가진 뒤,
1989년 11월18일 준공기념 예배를 드리고 문을 열면서 기독교의 성지로 자리를 잡게 잡았다.
기념관은 건평 3백66평의 3층 건물로.전체 직사각형에 가운데 원통형 모양을 넣어 유선을 강조했다.
양측에 원추기둥 두개가 받치고 있는 출입구를 들어서면 로비에 대형그림이 있다.
또 1866년 제너럴셔어먼호를 타고 국내에 들어와 선교하다 순교한 토머스목사가 성경앞에 무릎을 꿇고 참수 직전에 있는 모습을 그린 대형그림도 있다. 혜초 김학수 화백이 기증한 40점의 역사화들 중 하나다.
그림 옆 나선형 계단을 오르면 관람이 시작된다. 2층은 우측 회의실과 좌측 예배실로 이루어져 있다.
예배실에는 30년대 이전 개화기 교회들과 우리 사회 모습을 담은 사진 1백20점이 걸려 있다.
초가 교회 앞에 색동저고리를 입은 아이들.댕기머리에 야구방망이를 들고 야구를 하는 교회 어린이들.
갖가지 사진 속에서 보는 개화기 성도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좌·우 전시실이 연결된 3층은 순교자의 선영들과 성경, 편지 등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일제와 6·25전쟁 등을 거치며 목숨을 바쳐 기독교 탄압에 항거했던 2백2명의 순교자들이 사용하던 것들이다.
선영과 유리탁자 속에는 손때 묻은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당신도 순교자가 될 수 있다'고 적힌 거울은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게 한다.
기념관에는 이밖에도 회의실에 마련된 서가에 교계 관련 서적 8백60여권이 비치되어 있고,
성서의 변천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20년대부터 최근까지 발행된 성서 40여권이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 입구의 순교비
올라가는길 좌우에 있는 순교기념비
기념관에 이르는 길의 양 옆에는 유족들이 세운 높이 50㎝의 자연석으로 된 '순교자기념비'들이 서있다.
여기에는 순교자들의 이름과 그 밑에 성구들이 적혀 있다.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디모데후서 1:8).
이들 중에는 한국 최초의 세례교인으로 혹세무민(惑世誣民) 죄로 2년 간의 옥고 끝에 1893년 순교한 백홍준 장로,
천황숭배를 거부하다 7년간 옥고를 치루고 1944년 순교한 주기철 목사,
6·25 당시 교회당을 비우라는 공산당에 맞서다 총살당한 박영근 목사 등,
조선조 말엽인 1884년 이 땅에 기독교 씨앗이 처음 뿌려진 이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전도하다 숨진 순교자수는 2천 6백여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순교자 기념비
토마스 선교사 부부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 그가 바로 한국 개신교의 첫 순교의 피를 흘린 주인공입니다.
1840년, 영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토마스. 어려서부터 선교사에 대한 소망이 남달랐던 그는 드디어,
1863년 24살의 나이에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꿈에도 그리던 중국에 도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곧이은 부인의 죽음과 선임 선교사와의 갈등으로 한때 선교사역을 포기하기도 했는데...
하지만 세관에서 통역일을 하던 그에게 조선 선교라는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다시금 복음 사역의 열정에 사로잡힌 그는 같은해 9월 백령도 근처의 작은 섬에 도착해
주민들에게 성경책 200여권을 전하며 전도했습니다.
베이징으로 되돌아간 그는 런던으로부터 정식으로 조선 선교를 허락받았고 다시 조선에 갈 배편을 찾던 그 앞에
제너럴셔먼호가 나타났습니다. 중국을 떠난 셔먼호는 일주일후 평양근처 대동강변에 도착했고
역시 우려하던 대로 조선군과 무력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대동강변에 좌초하게된 셔먼호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되는데.
한편 불바다가 된 셔먼호 위에서는 백기를 들고 화염속을 헤치며 사력을 다해 강가로 책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토마스 선교사였습니다.
단 한권이라고 더 조선인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십시오.
그는 마지막 남은 한권의 성경책을 품안에 넣고 강물로 뛰어들었고 곧 조선군에게 생포되었습니다.
그의 처단은 즉시 집행됬고 그 임무를 맡은 조선 군사가 바로 박춘권 이라는 자였습니다.
박춘권이 칼을 뽑아들자 토마스는 급히 자기품에 들렸던 성경책을 꺼내어 웃으며서 그에게 내밀었고
그리고 두손을 모아 마지막 기도를 올렸습니다.
오..하나님... 이 사람이 자기의 하는일을 모르오니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조선땅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과연 토마스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에게 성경을 받은 이들 중에 훗날 평양에 유력한 신앙 가문을 일으킨 이들이 많은데
박춘권은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석호정 만경대의 최취량은 평양교회를 창설한 인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가 준 성경을 뜯어 벽지를 바른 영문주사 박영식의 집은 널다리교회의 예배처소가 되었다고 합니다.
비록 정식으로 조선땅을 밞아보지도 못한채 27살의 꽃다운 나이로 죽음을 당한 로버트 토마스선교사.
하지만 그의 죽음 뒤에야 비로소 조선땅에도 복음의 문이 열리게 되는데.
서툰 한국말 실력에 가진 것이라곤 한문으로 된 성경책 한권 뿐이었지만,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은 이 땅에 복음의 부흥을 위한 실로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 이후 1884년에 돌아가신 토마스 선교사의 아버지의 18년간의 기도제목은,
'토마스의 죽음으로 한국이란 나라에 복음의 씨았이 전해지게 해 주세요' 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백년 후에 이 한국땅에는 부흥이 일어났고 토마스 선교사는 한국의 복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아! 어떻게 아들이 죽임을 당한 나라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할 수가 있었을까..
1984년도 여의도 선교대회
주기철 목사 토마스 목사
손양원 목사
최인규 권사
정원의 십자가
주기철목사님의 마지막 설교 내용..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용인의 한 산자락에 땅 10만평을 무명의 여성도가 기증하여 한국 기독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착공 3년 만에 개관하였다고 하며, 이곳에서 한국 기독교를 계승한 역사의 발자취를 돌아볼 수 있었다.
전통적인 유교사상위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가 쉬운 일도 아니었고,
더구나 열매를 맺기 위하여는 목숨까지도 내놓아야 했던 초창기의 상황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됨을 느껴본다.
초대교인들 뿐만이 아니라 미국 선교사들의 고귀한 피가 선명하게 보인다.
사진이나 글귀 하나하나가 우리 모두를 숙연케 하여 경건함을 갖게 했다.
순교자들을 돌아보고 느낀 것은 지금 나는 너무나도 편안하게 예수를 믿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숨까지는 몰라도 어려운 일에서는 멀리 하려는 믿음생활이 부끄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