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자유, 해방, 내 맘대로’ 와 같은 단어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결혼해서 아이 낳아 키우고, 직장인으로 살며 작은 무엇하나 내 맘대로 할 수 없다고 느껴질 때가 많았는데, 아마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성실을 큰 미덕으로 여기고 그저 순리대로, 눈앞에 놓인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왔던 나는 언젠가부터 사육장 코끼리처럼 발목 한쪽에 늘 족쇄가 채워진 느낌이었다. 그러다 가끔 스트레스가 턱까지 차오를 땐 집에 허락받고 혼자 여행을 떠나곤 했는데, 여행이 주는 짧고 굵은 해방감은 당분간을 살아가기에 충분한 힘이 되어줬다. 근데 그것으로는 부족했을까. 결국 내가 좋아하는 제주에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저지르다시피 현실로 옮겼고, 그러자 그 끝을 알 수 없는 해방감이란, 다른 소소한 어려움은 별거 아닌 게 되었다. 나의 해방은 ‘저지름’ 에서 오는 것 같다.
작년에 시간이 많아지면서 여러 드라마를 정주행했다. 그중 하나가 ‘나의 해방일지’ 였는데, 주인공들이 답답한 자신의 삶에서 해방되기로 마음먹고 행복을 찾아 나서는 스토리였다. 명대사와 따뜻하고 스토리 다 좋았지만 무엇보다 정신없이 살던 때에 한때 사치처럼 느껴졌던 그 드라마를, 밤도 아닌 한낮에 혼맥하며 본다는 그 자체가 너무 좋았다. 남들은 이 시간에 열심히 일하고 있을테지 생각하면서.
이 책 <아버지의 해방일지> 역시 딱 그즈음 출간되었던 것 같다. 한때 제주 책방 투어에 빠져 이곳 저곳 다녔는데 들어간 책방마다 눈에 띄였던 이 책을 어쩐지 나는 늘 내려놓고는 다른 책을 골랐던 것 같다. ‘빨치산’이라는 단어가 조금 부담스러웠거나, 아니면 그때는 아버지보다 당장 나의 해방이 더 필요한 시기라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제주 올레길과 오름을 걸으며 눈 앞에 펼쳐진 멋진 풍광을 카메라와 눈에 담기 바쁘다. 일만 했으면 좀처럼 만나지 못했을 다양한 사람들과 인연을 맺으며 그들의 삶을 엿보니 그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며 인생 뭐 있나, 역시 저지르길 잘했단 생각을 늘 한다. 물론 그런 즐거운 생활 가운데서도 종종 아이들 문제로 고민이 많고, 가까운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방법을 찾아본다. 근데 신기하게도 아이들의 이야기는 늘 나의 이야기로, 또 어느새 부모님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건 다름 아닌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와 지금 우리의 모습이, 우리 어린 시절의 그 무엇으로 계속해서 영향을 받고 있었던 탓이었다.
소통 전문가인 김창옥 강사가 어느 강연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공항으로 가는데 그 어색함이 외국인과 같이 길 걷는 것보다도 어색했다는 이야기에 얼마나 웃프던지, 나 역시 가끔 부모님과 단둘이 한공간에 있을 때면 어색한 정적이 흐를 때가 많다. 특히 아빠와는 더 그렇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면 어려서 부모님이 너무 바쁘셨고, 커서는 타지에서 직장 생활하다 보니 가끔 만나 어떤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엔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고민거리는 대체로 스스로 고민하거나 오빠나 친구와 상의했지, 부모님과 상의할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신경 안 쓰이게 알아서 잘해야지 하는 마음뿐이었다.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부모님 역시 참 고단한 삶을 사셨다. 아니 그런 줄로 아는데, 실제 아주 속속들이는 또 잘 모른다. 예전엔 굳이 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언젠가 들을 기회가 있겠지 생각했는데, 수년 전 아빠가 큰 수술을 하시면서 문득 ‘아 이렇게 갑자기 당신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없어지기도 하겠구나’ 라는 생각에 두려웠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가능한 부모님과 좀 더 시간을 가지고 사진도 많이 남기려 하지만, 여전히 바쁜 내 삶을 살아가느라 당신들과의 대화는 충분치 않았고, 여전히 당신들의 인생 스토리에 내가 모르는 빈칸이 너무나 많다.
“아버지는 혁명가였고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그전에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고 연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남편이고 나의 아버지였으며, 친구이고 이웃이었다.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 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 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p.249)”
요즘엔 예전보다 더 자주, 오래 친정에 머무른다. 그러다보면 가끔 아부지가 술 한잔 하시고는 종종 당신이 살아 온 이야기를 꺼내신다. 주로 가슴 아픈 일이 대부분이지만 가끔 영웅담도 곁들이시는데, 그때마다 엄마가 옆에서 아빠는 뻥이 심하니 걸러 들으라고 하면서 은근슬쩍 엄마 이야기도 하신다. 듣다 보면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가도 재미있고 또 존경스럽다. 내 아이들이 나의 여러 모습을 조금씩 나눠 가지고 있듯이, 부모님을 이야기를 들으며 부모님과 나의 닮은 구석을 찾아본다. 그러며 부모님의 가졌지만 나는 몰랐던 여러 얼굴도 찾아보려 한다.
요즘 내 발목의 족쇄가 스르륵 풀어지는 느낌이 든다. 아니 다시 채워지더라도 다시 풀 수 있는 방법을 조금 알게 된 것 같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그건 다름 아닌 몸과 마음의 휴식이 가져다준 여유 덕분이다. 그러며 문득 우리 부모님으로 생각이 옮겨진다. 우리 부모님의 삶은 어쩐지 여전히 고단해 보인다. 우리 부모님은 무엇을 하며 그 삶을 버텨왔을까, 해방 통로는 과연 있기나 했을까 궁금하다. 물어봐야겠다. 그러며 이제 더 미루지 말고 ‘부모님의 자서전, 해방일지’도 써봐야겠다. 한 편의 드라마 같은 당신들의 인생 스토리를 더 많이 듣고 기억하며 남기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나의 아이들에게도 들려주고 싶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사걱세 #기자단 #부모님
첫댓글 유미 샘, 해방감을 맞보셨기 때문일까요? 글에서 여유로움이 느껴지네요~ 부모님을 알아가려는 마음은 너무 따뜻하고요~~
처음과 마지막에 족쇄 비유한 표현들도 너무 멋져요👍
'정신없이 살던 때에 한때 사치처럼 느껴졌던 그 드라마를, 밤도 아닌 한낮에 혼맥하며 본다는 그 자체가 너무 좋았다.'
-> 이 문장 기가 맥힙니다. 너무 부럽고요. >.< 이어지는 이 문장이 더 재밌네요. '남들은 이 시간에 열심히 일하고 있을테지 생각하면서.'
사육장의 코끼리 비유, 부모의 인생엔 내가 모르는 빈 칸이 너무나 많다, 그리고 아버지는 뻥이 심하니 걸러 들으라고 하면서 넌지시 시작되는 엄마의 이야기 등 좋은 표현, 공감가는 대목, 웃음 짓는 장면이 좋아요.
근데, 이 글은 한 편 안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는 듯 해요. '설명하지 말고 보여줘라' 글쓰기의 원칙 단 하나만 꼽는다면 이 말을 꼽는다고 하거든요. 처음엔 '해방'이 주제인가 싶다가, 제주 이야기가 나오고, 김창옥의 이야기는 단락 중간으로 들어가는 게 나으려나 싶을 만큼 좀 튄다 싶고요. 아이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에서 부모님의 이야기로 전개된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되는데, 그 전개를 다 싣다 보니 인상적인 대목이 없어진 건가 싶어요. 촘촘하고 정성스럽게 쓰신 글이니만큼 선택과 집중을 해보시라고 권해드려요😉
술술술 이란 표현은 선생님 글에 딱 맞는 말일 것 같아요. 채송아 선생님 말씀에도 공감하지만 많은 이야기를 매끄럽게 연결하는 것도 힘이라 생각합니다. 너무 부드러워 그냥 잔잔히 읽히는 게 아쉽다는 말씀일 거 같아요.
코끼리 이야기를 들으며 저도 그 심정이 생동감있게 느껴져서 헉 했어요. 잘했네, 잘했어. 그런 마음이 저까지 드는 거 있죠? ㅋㅋ
유미쌤은 늘 최선을 다해 글을 쓰시는 것 같아요^^ 조용조용 곁에서 이야기하듯 글이 읽혀서 참 좋아요. 한 편 안에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는 송아쌤 말씀에 공감을 하면서 구성을 조금 다르게 하면 그 이야기가 조금 더 자연스럽게 흘러가지 않을까 싶어요. 책을 만나게 된 이야기, 나의 해방 이야기, 아버지의 해방 이야기가 뒤섞인 느낌이 있어요;
부모님의 해방을 생각하는 딸이라니... 청상 바른생활 모범생 효녀의 피가 흐르시는 거 같아요. 선생님의 성실한 글쓰기 응원합니다.
네 여러 샘들 말씀 모두 너무 감사합니다. 지난번 모임 때도 나눈 이야기인데, 아직 저는 공적인 글을 쓰는 요령이 부족한 것 같아요.
떠오르는 복잡한 생각들을 이리 늘어 놓으니..^^;; 지나친 성실보다는 선택과 집중, 제 글과 제 인생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분명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