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았던 우리집 이야기(11)
집이 두 채가 되다
우리 집과 북쪽 담을 공유하고 있는 이웃이 있었다. 우리와 비슷한 나이에 3남매를 두었고, 홀어머니를 모신 부부였다. 둘째인 남자 아이는 우리 아들과 한 학년으로 매일 방과 후면 밖에 나가 같이 뛰어 노는 친구 사이였고, 여자 아이는 우리 막내딸과 같은 나이에 같은 유치원을 다녔다. 어머니끼리도 집으로 오고가며 다정하게 지내셨다.
하루는 그 어르신이 말씀하셨다. 우리 보고 자기네 집을 사라는 것이었다. 당신 아들네가 그 집을 사서 왔을 때는 대로변으로 정면이 탁 트인 집이었는데, 나중에 우리 집 자리에 2층 집이 들어서는 바람에 앞을 가리게 되고, 큰길로 나가는 골목길도 막혀버렸다는 것이다. 남쪽으로는 우리 집 때문에 햇빛이 안 들어오고, 북쪽으로도 집이 한 채 붙어 있어 뒷길로도 나갈 수 없으며, 집 앞 골목길은 차 한 대도 드나들 수 없이 좁으니 우리 밖에는 살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듣고 나서 처지가 딱한 건 알았지만 우리도 집을 장만한지가 얼마 안 되어 그냥 웃고 흘려버렸다.
다행히 그 가족은 몇 년 후 작자가 나타나 집을 팔고 이사를 갔다. 집집마다 자동차를 굴리던 시대가 아니어서 그랬는지, 다른 집에 비해 집값이 싸서였는지 그 후로 두어 번 주인이 바뀌었다. 그 때마다 이사 온 집 주인은 우리에게 집을 사 달라고 부탁하였다.
일처리에 꼼꼼하고 완벽한 남편은 직장에서 유능한 직원으로 평판이 나있었고 입사동기보다 승진이 빨랐다. 그러다가 45세 때 이사가 되었다. 공기업에서 그 나이에 임원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회사의 직원은 부장에서 끝나기 때문에 임원 발령을 받으면서 퇴직금을 받게 되었다.
몫 돈이 생겼지만 그 집을 당장 사지는 않았다. ‘남편은 절약, 아내는 저축’이라는 구호가 있을 정도로 저축을 장려하던 시대였고, 저축만이 살 길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던 때였다. 부동산으로 돈 벌 자신이 없는 우리 같은 경우는 더욱 그랬다. 7,80 년도에 은행 금리가 연 20% 내외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살던 집 주인이 우리 집을 찾아와 집을 사달라고 통 사정을 하고 돌아갔다. 한참을 생각하던 남편은 그 집을 사 버리자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두 채의 집, 대지 48평의 기존 집과 대지 30평의 또 하나의 집을 갖게 된 것이었다.
한편, 서쪽 담장 너머에는 우리보다 나이도 위고, 신앙생활에서도 한참 선배인 가족이 살고 있었다. 4남매를 두었는데, 어른들이 안면을 트기도 전에 그 집 아이들과 우리 아들이 밖에서 같이 뛰놀면서 친구가 되었다. 부모는 가톨릭 신자로서 성당에서 활동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영세를 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정말 반가워했고, 그 이후로 서로 간에 친밀감이 생겼다.
남자가 사목회장을 하고 있을 때, 우리 남편이 재정분과위원장으로 그를 도왔다. 남편은 직장에서 인정받는 중견 간부로서 열과 성을 다하면서도, 퇴근하여서는 사목위원으로써 최선을 다해 봉사했다. 성당의 회계체제를 손보고 엄격하게 관리 하였을 뿐 아니라, 본당 증개축 공사가 있었을 때 허투루 새 나가는 돈이 없는지 감독하느라 신경을 많이 썼다.
우리가 뒷집을 샀다는 것을 사목회장이 알고, 스테파노가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 하니까 하느님이 도우시어 직장에서도 승진하고 집까지 사게 됐다고 기뻐해 주었다.
새로 산 집은 1993년에 우리가 두 집을 합해 재건축을 하게 될 때까지 기존 집 주인이 전세로 계속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