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섬'에서 '필론의 돼지'로, 인터넷의 바다까지

[차가운유혹]

'익명의 섬'에서 '필론의 돼지'로, 인터넷의 바다까지
중앙선관위의 시대역행적 법적용을 규탄하며


임흥재 [belotien@msn.com]



http://jabo.co.kr



중앙선관위가 지난 20일 대선후보들의 사조직이라 하여 몇 개의 모임을 적발하고 해당되는 인터넷 사이트에 폐쇄명령을 내렸다. 그 중에는 우리 정치사 아니 사회문화적으로도 획기적인 변화를 몰고온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도 끼어있다. 함께 폐쇄명령을 받은 다른 사이트들이 워낙에 체면치레 생색내기용으로 만들어진 까닭에, 또한 자발적 능동적 참여의 정도에서 아예 비교가 되지 않기에 그 충격의 여파는 거의 대부분이 노사모에 집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고 시간적인 지체현상이 가장 심한 것이 정치권임을 누차 강조해온 나로서는 이번 선관위의 헤프닝이 이해되기도 한다. 우선은 시대에 뒤떨어진 법의 미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디지틀 시대에 여전히 아나로그적인 법규범과 그 적용을 고집하는 세상에서는 어쩌면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언제부터 논의한 선거법 개정인가?

선거법 개정안이 당리당략과 정치적 이해득실에 밀려 상정도 되지 못하고 책상서랍에 쳐박혀 있는 현실에서 엄격한 법적용(공정한 선거관리)을 내세워 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극심한 '레임 덕(lame duck)'의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이 정권이나 유력한 대선주자에게 미리 눈도장을 찍는 것으로 출세가도를 달렸던 이 땅의 공직사회의 풍토로 봐서는 너무나 분명하게 예고되었던 사건이다.

그 ‘엄격한 법적용’이 실상은 ‘엄격한 의미에서 무식한 법적용’이었음을 밝히려는 것이 오늘 내가 할 일이다. 딱딱한 주제에 부드러운 사유를 견지하는 나의 친절함으로 오늘은 이 시대 문단의 ‘뉴스 메이커’ 혹은 ‘트러블 메이커’인 이문열 홍위병 사단장의 단편을 하나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자. 혹 희한한 책장례식에 참여하였거나 책의 관을 보내었거나 슬피 울었던 독자들은 ‘삐뚤어진 정신에 현란한 문장을 준’ 것에는 인간사회에 경각심을 심어주려는 조물주의 깊은 뜻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해 주길 바란다. 나 역시 그러하니까.

‘익명의 섬’과 ‘필론의 돼지’

이문열의 소설 중에 ‘익명의 섬’이란 단편이 있다. 거의 20여년 전에 출간된 소설이니 젊은 독자들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을 것이나 ‘깨철이’가 나오고 ‘나’(여선생)이 나오고 그와 여교사가 어두운 폐가에서 성애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 영화는 혹시 보았을 지도 모르겠다. 여주인공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깨철이란 인물로 분한 배우는 국민배우 안성기였던 것 같다. 소설은 깊은 오지의 동족부락(同族部落)의 초등학교 분교에 새로운 여선생이 부임해오면서 시작된다.(이미지를 찾는과정에서 영화의 제목이 ‘안개마을’인 것과 여주인공을 연기한 배우가 정윤희이고 임권택 감독의 작품임을 알았다)

혈연이나 인척으로 속속들이 기명화(記名化)된 작은 촌락에서, 자의반 타의반 서로를 감시하고 이웃 사정이 훤히 드러나는 마을에, 그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운 ‘깨철이’라는 걸인(부랑자)이 있다. 그는 그 마을의 폐쇄되고 억압된 성(性)을 해소시켜 주는 존재이며 그 마을 아낙네들의 잠재적 성파트너이자 소설의 제목처럼 그 마을을 떠도는 ‘익명(匿名)의 섬’이다. 한 번 동침한 여자와 절대 다시 성관계를 맺지 않는 자기 절제와 공공연한 비밀을 끝까지 지키는 영악한 침묵의 대가로 그는 마을사람들의 암묵적 동의 하에 끼니를 해결하고 어떤 면에서는 마을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로 대접 받는다.

깨철은 마을 아낙네들과 은밀한 성애를 나누는 존재다. 물론 마을의 남자들도 그것을 눈치채고 있지만 모른척하며 사실상 묵인한다. 이유는 두 가지다. 깨철이 같이 못난 놈한테 부인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 그 하나다. 그래서 ‘깨철이는 병신(성불구자)이다’ 라고 자위하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사돈간 혈연간에 상피(相避) 붙어 곤란해지는 것보다 차라리 어떤 소문도 내지 않는, 다시 말해 뒤 끝이 깨끗한 깨철이를 인정함으로써 동족부락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을 남정네들의 그런 관습적 심리적 체념을 교묘히 이용하여 자신의 존재를 마을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 깨철이에게서는 일종의 악마미(惡魔美)까지 풍긴다.

소설 속의 화자 ‘나’(여교사) 역시 공간적 제약(오지 마을)과 심리적 문제들로 인하여 성이 억압된 상태다. 오겠다는 ‘나’의 남자는 오지 않고 오히려 우연한 기회에 깨철이와 성관계를 맺음으로해서 그 녀의 억압된 성은 해소되고 비로서 깨철이란 존재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것이다. 그 녀 역시 병신 소리 듣는 부랑자 깨철이를 통해 심리적인 안정을 찾게 되는 것이고 그의 존재는 그 기명화된 동족부락의 흔들리는 긴장(동족부락의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는)을 깨지지 않게 유지시켜 주는 떠도는 '익명의 섬'임을 확연히 깨닫는 것이다.

전근대와 근대를 가르는 기준의 하나가 익명성(匿名性;anonymity)이라 나는 생각한다. 익명성이란 대중사회의 출현과 깊은 관계가 있는 개념으로 산업사회 이후 대도시가 형성됨에 따라, 대중은 혈연, 계급, 신분, 종교와 같은 규제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따라서 개인의 존엄성과 권리가 강조 되었고 좀 더 평등한 사회가 이루어짐으로써 사회집단에서의 개인이 자신만의 개성을 상실하고 평균화되어 간다. 즉 현대인은 거대한 집단 속의 하나의 분자로서, 획일적 행동양식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개인은 불특정 다수인의 일원이 되어 개인의 행동은 감추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익명성이란 것을 좁게 폭력의 범주에 끌어들이면 20세기와 21세기를 가르는 중요한 잣대가 ‘기명의 폭력’과 ‘익명의 폭력’으로 구분할 수가 있다. 물론 이것은 필자의 의도적이고 좁은 분석일 뿐이나 인터넷이 사회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군중 속의 고독’이라 일컬어지는 개인화 분업화 또는 도시화 속에서 사람 상호간에 직접 대면하여 행해지는 물리적 폭력보다 사이버 공간의 가장 부정적 모습인 온라인상에서의 익명의 폭력이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을 생각하면 아주 틀린 분석은 아닐 것이다.

글의 성격상 기명화 된 폭력의 양태(예를 들면 전쟁이나 독재정권의 민중학살 등)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다. 논의의 집중을 위하여 기명화된 폭력의 일례를 억지로라도 이문열에게 찾아보면 ‘필론의 돼지’가 떠오른다. 주인공은 삼년의 군복무를 마치고 우여곡절 끝에 귀향을 위해 군용열차를 탄다. 기차가 출발하고 얼마지나지 않아 제대병들이 탄 열차칸에 ‘검은 각반’으로 상징되는 특수부대원(현역)들이 나타나고 그들은 제대병들을 위협하여 돈을 각출한다. 그들의 서슬에 놀란 제대병들은 돈을 빼앗기고 간혹 저항하던 제대병 몇은 그들의 상스런 폭력에 무참히 얻어 터진다. 검은 각반이 상징하는 기명화된 폭력의 위세에 희생되고 마는 것이다.

물론 그 폭력집단은 끝내 제대병들의 공분을 사고 오히려 다수의 힘 앞에 굴복하고 말지만은 중요한 것은 주인공 이병장이 그 폭력에 대응하는 태도다. 그는 검은 각반을 응징하는 제대병의 무리에도 끼지 못하고 어수선한 그 열차칸을 빠져나와 다른 칸으로 이동하는 것이 그가 폭력에 대응하는 방식이다. 그러면서 그는 한 일화를 떠올린다. 소설 원문을 인용하면

“.... 필론이 한번은 배를 타고 여행을 했다. 배가 한가운데에서 큰 폭풍우를 만나자 사람들은 우왕좌왕 배 안은 곧 수라장이 됐다. 울부짖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뗏목을 엮는 사람.... 필론은 현자인 자기가 거기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해보았다. 도무지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배 선창에는 돼지 한 마리가 사람들의 소동에는 아랑곳없이 편안하게 잠자고 있었다. 결국 필론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돼지의 흉내를 내는 것뿐이었다.”

우리는 ‘깨철이’도 ‘필론의 돼지’도 아니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이문열의 한계를 그대로 예정하고 있는 이 소설에서 보여지듯이 우리들 대다수는 지난 시절 우리의 삶을 억압하고 강제한 폭력(권력)에 대하여 ‘필론의 돼지’로 살았다. 유신으로 상징되는 박통의 독재를 끝장내는 데 18년의 세월을 견디어야 했고 광주민중항쟁은 또 다시 신군부의 총칼에 난자 당하고 말았다. 87년의 6.10 항쟁도 양 김의 분열로 실패하고 김영삼의 문민쿠테타(3당합당)는 절망의 나락으로 우리를 밀어 넣었다. 사람으로 살고자 하던 이들도 하나 둘 필론의 돼지가 되어 갔다. 정권교체의 미명하에 유신잔당과 손잡은 국민의 정부는 오늘의 이 파국을 수태하고 있었던 부정한 산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인터넷 혁명이라 불리는 정보화 시대의 총아는 ‘필론의 돼지’로 살던 우리들에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주었다. 슬쩍 자리를 피하는 것으로 폭력을 수긍하고 자신의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감추던 우리는 인터넷의 바다에서는 필론의 돼지로 잠자지 않아도 되었다. 익명성에 기초하여, 상호작용이 역동적으로 일어나는 사이버 공간의 특성에 의지하여, 시공간적 제약을 뛰어 넘을 수 있고 획일화시킬 수 없는 다양성에 힘입어 우리들은 적극적인 의사표현자가 될 수 있었다. 즉 긍정적 측면으로서의 익명성에 의하여 용기를 가지고 소극적이었던 현실에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때로는 그 현실까지도 초월한 세계에 다다를 수도 있었다.


지난 국민경선의 노풍은 바로 이런 (익명의 섬이 아닌) 익명의 바다에서 헤엄치며 놀던 네티즌들이 만들어낸 민의(民意)의 해일이었고 변화의 폭풍이었다. 그러나 이런 순기능과 역행하는 익명성의 폐해가 엄존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인터넷이 급속도로 보급되고 인터넷 인구가 급증하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이런 익명성의 역기능인 언어의 폭력 또는 사이버 테러일 것이다.

<사진설명>인터넷과 노사모:선관위 방침에 강경대응을 천명하는 기자회견 모습

그 폐해의 심각성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흔히 사이버 공간에서의 익명성은 양날을 가진 검에 비유되곤 한다. 좋게 쓰이면 자신의 긍정적 자아를 찾아내기도 하고 국가나 거대자본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없는 사람들의 무기가 되지만 나쁘게 쓰이면 현실에서 할 수 없는 일들을 함부로 저지르고 마는 지경에 이른다.

이러한 익명성의 역기능을 순화시키며 떠도는 익명의 섬을 기명의 바다로 건져올린 것이 노사모다. 온(on)상의 익명에 오프(off)상의 기명이 더해지면서 비단 정치의 영역에서뿐만이 아니라 폭력에 복종하며 필론의 돼지로 살던 우리들이 ‘사람다움’과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쳐 보여주는 네티즌 혁명의 모범이 노사모인 것이다. 물론 나는 노사모내에서도 이름없고 가끔씩 노사모답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 심기가 불편한 회원 중의 한 명인 까닭으로 모든 것이 아름답다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노사모는 시민운동의 혁명적인 모범을 제시하였고 자발적인 참여민주주의의 가능성 실험을 성공리에 수행하였으며 혐오와 원성의 대상이었던 정치라는 것이 사실은 국민들의 생활과 아주 밀접하게 관계맺고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정치를 재미난 일상의 것으로 끌어들였다.

깨철이가 동족부락의 성적 균형을 유지해준다하여, 그 때문에 자칫 비극적으로 허물어질지도 모를 그 세계의 구조적 버팀목으로 기능하는 필요악이라 하여 그의 존재가 긍정적일 수는 없다. 그의 존재는 단지 동족부락의 부조리와 부정과 빗나간 성의 해소를 위해 존재하는 악화(惡貨)일 뿐이다. '악화(깨철)가 양화(전통부락의 유지)를 구축'하고 있는 꼴이다. 그렇다고 그 양화가 올바른 것도 아니다. 다만 기성의 관습과 체면을 겨우 지탱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익명의 섬’에 나오는 사람들(특히 남자들)은 전부가 ‘필론의 돼지’다.

수구혈통의 동족부락, 기득권 특권의 씨족부락을 해체하길 원치 않는 이 땅의 권력도착증 환자들은 여전히 이 세상에 수많은 ‘깨철’이를 풀어 놓고 더럽고 은밀한 욕망의 배설을 부추긴다. 우리들을 필론의 돼지로 살도록 억압하고 강요하며 위협한다. 그러나 우리는 깨철이가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깨철이가 없어서, 즉 떠도는 익명의 섬이 없어서 모든 것이 투명하게 드러나고 떳떳하게 행해질 수 있도록 동네가 변하고 사람이 변하고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깨철이가 필요없는 세상을 위해, 돼지를 따라한 필론이 되지 않기 위해 인터넷의 바다를 항해하며 거짓과 협잡의 파도를 헤친다.

중앙선관위에 묻는다. 이런 우리의 진실한 노력과 드높은 의지가 어찌하여 불법이란 말인가? 상무식한 법적용이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한테 깨철이처럼 음습한 ‘익명의 섬’으로 떠돌란 말인가, ‘필론의 돼지’로 잠이나 자란 말인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