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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시강좌 67강
이번주 디카시 강좌에는 박해경 시인의 디카시집 <<달을 지고 가는 사람>>을 소개한다.
작은 이야기들의 큰 울림
―박해경 디카시집 『달을 지고 가는 사람』 읽기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명예교수)
I.
박해경의 디카시들은 대부분 일상에서 나온다. 그것들은 관념의 외피를 입지 않는다. 그녀는 스마트폰(디카)으로 일상을 찍고 그것에 문자 기호를 융합하는 디카시의 문법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녀의 사진도 그녀의 문자도 스펙터클spectacle이나 큰 이야기grand narrative를 흉내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진과 이야기가 합쳐질 때, 그것들은 서로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일상의 저변에 있는 크고 깊은 의미를 건드린다. 생각해 보라. 제아무리 큰 이야기도 먼 행성 아니라 지상의 일상에서 벌어진다. 중요한 것은, 표현이다. 미적 표현의 형식을 얻지 못할 때, 모든 일상은 클리셰가 되어 사라진다. 반대로, 미적 표현의 옷을 입을 때, 무의미한 일상이란 없다. 영국 낭만주의 시인인 윌리엄 블레이크W. Blake는 “모래 한 알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떨기 들꽃 속에서 천국을 보며/ 당신의 손바닥에서 무한을 쥐고/ 짧은 시간에서 영원을 본다.”(「순수의 전조Auguries of Innocence」)고 하였다. 블레이크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세계이든, 천국이든, 무한이든, 영원이든, 인간의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세계-내-존재’이고 세계란 결국 일상이다. 일상이야말로 예술의 보고이며 비밀의 저장소이다. 일상을 허투루 여기는 자는 몽상가일지언정 예술가일 수 없다. 시인은 “주인집 대문 앞에서 굶어 죽은 개”에서 “국가의 몰락”을 예견한다(블레이크, 앞의 시). 일상은 세계와 무한과 영원과 천국의 객관 상관물이다. 박해경은 일상이 의미의 충만한 바다임을 잘 안다. 그는 사진 기호와 문자 기호의 촉수로 일상을 포착하고 일상에 녹아 있는 삶의 비밀과 역사를 읽어낸다. 그가 평범한 일상에 디카시라는 미적 형식을 입힐 때, 죽은 일상이 다시 태어나고 평범한 대상이 낯설어진다.
가난해서 늘 비어 있었지만
존재만으로도
할머니의 자존심이었다
―「민얼굴」
옹기 함지박은 지금은 골동품이 되어 버렸지만, 오래전엔 일상의 가장 흔한 사물들 중의 하나였다. 할머니가 사용하던 그것이 “가난해서 늘 비어 있었”다는 구절은 그것만으로도 할머니의 고단했던 삶 전체를 압축한다. 이 간단한 문장 뒤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생략되어 있나. 함지박은 할머니의 얼굴처럼 아무런 장식도 꾸밈도 없다. 그래서인지 시인은 함지박을 “민얼굴”이라 은유한다. 함지박을 가득 메웠던 음식물이 하나둘 동이 날 때마다 할머니의 마음 밭도 가을 들판처럼 썰렁해졌을 것이다. 함지박을 거쳐 갔던 음식들은 그 자체 하나의 계보가 되어서 한 집안과 지역과 민족의 먹거리 문화사를 이루었을 것이다. 할머니가 늙고 문화도 변하여 함지박이 쓸모가 없어진 다음에도 함지박엔 할머니의 헌신과 노고와 불안과 행복의 생애가 고스란히 닮긴 채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는 또한 함지박의 “존재만으로도” 가난하고 험한 세상을 잘 견뎌온 것에 대하여 “자존심”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이젠 할머니와 거의 하나가 되어 버린 함지박을 후손들도 함부로 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두 개의 함지박 뒤편엔 쌀뒤주로 보이는 옹기도 있고, 대나무 바구니들과 곡식의 쭉정이나 티끌을 골라내던 키도 걸려있다. 한눈에 보아도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진 물건들이다. 이렇듯 디카시의 사진 기호엔 문자 기호로 채 설명을 하지 않은 뒷담화가 많이 남아 있다. 디카시를 읽을 땐 이렇게 생략되거나 침묵하고 있는 무수한 이야기까지 잉걸불을 뒤집듯 자꾸 끄집어내 읽으면 좋다.
엄마
아부지
크게 불러 봐도
대답이 없다
쓸쓸하게 돌아섰다
―「허공」
아파트와 연립주택, 개인주택, 상가, 공공건물 등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산동네 사진은 “엄마/ 아부지”가 살았던 ‘복잡다단’했던 생애를 반추하기에 매우 적절한 풍경이다. 사진으로만 봐도 얼마나 많은 사람의 얼마나 다양한 삶이 저 산동네에 거미줄처럼 얽혀 있을지 능히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저기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지금 홀로 울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작은 성취에 환호하고 있을 것이며, 누군가는 분노를 삭이고 있을 것이다. 저기 저 골목에서 누군가는 얼마 전 고단한 생애를 내려놓았을 것이고, 누군가는 아직도 창밖이나 담 너머로 저런 풍경을 바라보며 삶을 지속하고 있을 것이다. 디카시의 재료가 되는 사진은 이렇듯 특별한 예술성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과 감성을 찌르는 다양한 푼크툼punctum을 담고 있는 것이면 좋다. 시인은 사진 안에서 무덤덤하고 평균적인 느낌의 스투디움studium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특한 경험을 찌르고 자극하는 푼크툼을 읽어낸다. 가령, 박해경 시인은 이 사진에서 이제는 세상을 뜨고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읽어낸다. 그들은 사진과 똑같은 곳이 아니었을지라도 그와 유사한 삶의 복잡한 골목들을 평생 오르내리며 시인의 머릿속에 수많은 기억을 새겨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저런 지상의 공간에 이제 더 이상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이 아무리 “크게 불러 봐도/ 대답이 없다”. 독자들은 이 문장을 읽는 순간에 사진의 건물들보다 사진의 “허공”이 더욱 크게 확대됨을 느낄 것이고, 그 확대된 허공 속에 울려 퍼지는 슬픈 메아리를 듣게 될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눈앞에 보이는 저 풍경의 어디에도 없으므로 그 자체 “허공”의 존재이다. 시인은 그들의 부재와 마주하고 있다. 적어도 이 순간 그들이 부재하는 풍경은 화자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화자는 “쓸쓸하게 돌아섰다”. 화자마저 돌아선 허공은 이제 더 큰 공허의 공간이 된다.
II.
박해경 시인은 거대서사를 동원하지 않는다. 큰 울림은 큰 이야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큰 이야기가 큰 울림을 얻으려면 작은 이야기들로 엮어져야 한다. 구조물만 있는 거대서사는 아무런 감흥을 주지 않는다. 박해경은 처음부터 작은 이야기petit narrative로 시작한다. 세상엔 “쓰잘데 없이 고귀한 것들”(도정일 평론가)도 많다. 어찌 보면 너무나 사소해 보여서 쓰잘데 없어 보이는 것들 안에서 고귀한 것들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시인의 임무이다. 블레이크의 말대로 어마어마한 천국도 쓰잘데 없어 보이는 한 떨기 들꽃의 모습으로 온다. 영원은 영원 자체로 오지 않고 짧은 순간으로 온다.
흐트러지지 않게 반듯했고
날아오를 꿈도 가지고
간혹,
오지랖 떨어 산통 깨질까
매사 조심하며 살았다
―「내 나이 계란 한 판일 때」
“계란 한 판”은 너무나도 일상적인 사물이어서 대부분은 그것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낯설게 하기’의 개념으로 유명한 쉬클로프스키V. Shklovsky는 <기법으로의 예술>이라는 에세이에서 톨스토이의 일기를 인용한다. 톨스토이는 이 일기에서 침상의 먼지를 털려다가 그것의 먼지를 앞에서 털었는지 털지 않았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의 상태를 자각한다. 톨스토이가 그것을 지각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너무나 자주 반복되어서 ‘습관화’되고 ‘자동화’된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은 얼마나 많은 ‘반복’으로 습관화, 자동화되어 있는가. 습관화는 우리의 지각을 죽이고 감각을 죽이며, 기억을 죽이고 세계를 죽인다. 쉬클로프스키의 말마따나 “느끼지 못하는 인생은 인생이 아니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 경치는 부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시인은 이렇게 너무나 친숙해서 느끼지 못하는 것을 친숙하지 않게, 새롭게 느끼게, 즉 낯설게 해주는 사람이다. 위 디카시에서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해서 쓰잘데 없어 보이는 계란 한 판에서 시인은 자신의 30대를 회상한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계란 한 판처럼 “흐트러지지 않게 반듯했고” “날아오를 꿈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상력이 자연스러운 이유는, 계란이 (결국은 날지 못하는) 새의 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작은 충격에도 쉽게 깨지는 것이기 때문에 시인은 “오지랖 떨며 산통 깨질까/ 매사 조심하며 살았다”고 회상한다. 시인이 그 흔하디 흔한 계란 한 판에서 이런 푼쿠툼을 읽어낸다면, 독자들 역시 저마다 다른 의미들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디카시는 이렇게 쓰잘데 없는 것에서 고귀한 의미를 끄집어낼 수 있는 특수한 미적 형식이다.
오늘 밤
빨갛게 지새웠다
비가 온다는 내일은
그대 만나지도 못하고
떠날 수 있어
―「花無十日紅」
이 디카시집에서 매우 탁월한 성과 중의 하나인 이 작품은 사진과 문자와 제목의 절묘한 융합이 돋보인다. 사진엔 “花無十日紅”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벚꽃이 화려하게 피어있다. 그러나 이 사진엔 문자 기호로 다 말하지 않고 있는 푼크툼들이 넘쳐나고 그것을 읽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주지하다시피 디카시는 사진 기호와 문자 기호의 융합이다. 사진도 디카시의 절반을 차지하므로 문자 기호가 설명하지 않는 사진 기호의 의미망들도 함께 읽어내야 한다. 자본주의적 소비 욕망을 과시하기라도 하듯이 음식점, 주점, 노래방 등 상가 간판들의 불빛은 벚꽂을 압도할 정도로 화려하고 다양한 색깔을 뽐내고 있다. 게다가 오른편 위쪽 노래방의 이름은 “황진이 노래방”이다. 시인은 벚꽃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욕망 역시 “화무십일홍”의 운명에서 예외가 아님을 문자 기호의 설명이 없이 보여준다. 밤을 “빨갛게 지새웠다”는 표현도 매우 독특하며 ‘화무십일홍’의 삶을 표현하기에 적절하다. 내일은 비가 올 것이고, 비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화자는 “그대 만나지도 못하고/ 떠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렇게 해서 시인은 먹고, 마시고, 만나고, 헤어지는 모든 것을 ‘화무십일홍’의 리스트에 모아놓는다. 꽃과 형형색색의 간판이 어우러진 사진의 풍경과, 그곳의 주로 먹고 마시고 노는 것에 집중된 상점들과, 밤을 빨갛게 지새웠으나 그대를 내일 보지 못하고 떠날 수도 있다는 메시지나, 모든 것이 흐르는 물에 떨어져 정처 없이 흘러가는 꽃잎들처럼 허망하다. 이 시는 지극히 일상적인 사진 기호와 짧은 문자 기호의 만남인 디카시가 이렇게 장편 소설처럼 긴 이야기를 담아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할머니는 등이 굽은 삼촌을 위해
둥근 달만 보면 소원을 빌었다
하지만 삼촌은
달을 등에 지고 할머니보다 먼저
소나무가 우거진 땅 밑으로 떠났다
―「달을 지고 가는 사람」
시인은 굽은 나무와 가로등을 “등이 굽은 삼촌”과 할머니가 그것을 보며 소원을 빌던 “둥근 달”에 은유한다. 사진 기호를 보자마자 순간적으로 이런 문자-은유를 떠올릴 수 있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디카시인의 자질이다. 박해경 시인은 어떤 사진 기호든 문자 기호로 바로 은유화할 수 있는 감수성의 소유자이다. 이질적인 재료들을 이렇게 바로 융합할 수 있는 능력을 엘리엇T. S. Eliot은 ‘통합된 감수성associated sensibility’이라 불렀다. 문자시에서의 은유가 문자 기호를 (다른) 문자 기호로 은유한다면, 디카시에서 시인은 사진 기호를 문자 기호로 은유한다. 그러므로 디카시에서 감수성의 통합은 사진과 문자라는 전혀 다른 질료들 사이의 통합이라는 점에서 더욱 독특하다. 박해경 시인은 은유에만 능한 것이 아니라, 쓰잘 데 없어 보이는 것을 서사화narrativization하는 데에도 탁월한 소질을 가지고 있다. 시인은 나무와 가로등을 삼촌과 둥근 달로 은유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것을 이야기로 발전시킨다. 할머니가 소원을 빌던 “달을 등에 지고 할머니보다 먼저/ 소나무가 우거진 땅 밑으로” 떠난 삼촌의 이야기는 얼마나 슬픈 가계사인가. 박해경 시인에게 ‘쓰잘 데 없는’ 일상은 없다. 그는 모든 일상을 디카시로 만들고 그 안에서 ‘고귀하고도 아름다운’ 의미를 생산할 줄 안다.
III.
박해경이 건드리는 다양한 일상의 풍경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축 사이에 있다. 그것은 바로 생명과 죽음이라는 축이다. 사실 모든 일상은 생명과 죽음 사이의 왕복운동이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 아닌가. 박해경 시인은 생명과 죽음의 풍경 역시 단정하고도 깔끔하게 그려낼 줄 안다.
눈앞이 침침하다
물기를 머금은 희뿌연 구름이
앞서 달린다
누군가
울고 있는가보다
―「바쁜 조문」
이 작품의 사진은 마치 수묵화처럼 단순함이 돋보인다. 검은색의 도로와 그것에 그어진 흰색 선은 그 자체 이미 죽음의 은유로 준비되어 있다. 도로 위로 검은 숲과 잿빛 구름과 그것보다 약간 더 밝은 하늘의 모습은 마치 의도적으로 그려놓은 그림 같다. 제목에서 드러나다시피 누군가가 죽었고 그곳으로 가는 길이 바쁘다. 고속도로엔 차 한 대 없지만 “눈앞이 침침하다”. 그것은 눈물 때문일 수도 있고, “희뿌연 구름” 때문일 수도 있으며,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심리나 영혼 때문일 수도 있다. 구름은 “물기”를 머금고 화자보다도 “앞서 달린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채 화자를 앞질러 달리는 구름을 보고 화자는 울고 있는 “누군가”를 떠올린다. 이 시에서도 독자들은 사진 기호와 문자 기호 사이에 완벽에 가깝게 잘 통합된 감수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마치 깔끔한 단편 소설처럼 깨긋하게 죽음의 서사를 형상화하고 있다.
젖을 빠는 보드라운
저 입술이
가족을 일으켜 세웁니다
―「신생아」
죽음을 다룬 앞의 작품과 대척점에 있는 이 디카시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감칠맛 나게 형상화한다. 줄기에서 막 피어오른 새싹을 시인은 “신생아”라 은유한다. 그 이름에 걸맞게도 어린 새싹은 작고 부드러우며 윤기마저 감도는 연초록이다. 그 앙증맞은 새싹을 시인은 “젖을 빠는 보드라운 저 입술”이라고 한 번 더 은유한다. 문자 기호로 사진 기호를 이렇게 두 겹으로 은유한 것에 멈추지 않고 시인은 또다시 작고도 긴 서사를 만들어낸다. “저 입술이/ 가족을 일으켜 세웁니다”라는 문장이 그것이다. 젖을 빠는 그 어린 것 때문에 부모는 ‘살 이유’가 생긴다.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신생아를 둔 가족이 끝내 일어설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젖을 빠는 그 보드라운 입술 때문이다. 막 태어난 생명이 더 오래된 생명을 살게 하고, 그 생명이 다시 다른 생명을 잉태하면서, 생성과 소멸의 역사가 계속 이어진다. 박해경의 작은 서사들은 이렇게 해서 거대서사로 자연스레 연결되기도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박해경의 디카시들은 일상이 어떻게 예술이 되고, 쓰잘 데 없어 보이는 것들이 어떻게 고귀한 의미들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녀의 작품들은 생명과 죽음의 두 축 사이에 펼쳐진 일상을 왕복 운동하면서 사진 기호와 문자 기호를 융합하고, 그렇게 통합된 감수성의 지평들을 소서사로 발전시키며, 마침내 거대서사로 이어지기도 하는 디카시의 독특한 전략을 보여준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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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디카시에는 이덕희 시인의 <추상화>를 선정했다.
#금주의 디카시
추상화 / 이덕희
화가의 생각 없는 그림
붓 가는 대로 흔들리는 손
표현은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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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생각 없는 그림 / 붓 가는 대로 흔들리는 손 // 표현은 자유''의 시적 문장은 자연현상을 놓치지 않고 미학적으로 되살린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영상기호에 등장하는 소재는 물에 비친 햇살과 그림자, 사물을 유화의 기법처럼 은유화시켜 새로운 이미지로 순간 포착하고 있기에 신비감을 더해 주고 있다.
문자기호에 표현되는 '화가의 생각 없는 그림'의 경우, 빛의 산란을 빗대어서 진술하고 있기에 공감대를 형성했다.
특히 '붓 가는 대로 흔들리는 손//표현은 자유'로 귀결시킨 시적 문장을 통해, 자연현상이 낳은 명작, '추상화'란 디지털 제목으로 명명할 수 있다.
디카시는 SNS의 날개를 타고 디지털 세상을 밝히는 디지털 별이다. 국경, 성별, 나이의 경계를 허물고 빠른 속도로 넘나드는 디지털 멀티언어다.
"스마트폰이 켜져 있을 때 디카시 심장소리 즉, 디카, 디카, 디카 소리가 들리면 디카시를 자신의 심장처럼 여기는 우리 시대 진정한 디카시 철학자이다."
정유지(부산디카시인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