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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요즘의 친구들
아침에 배를 타려고 기로가 호수로 내려가는데, 옆집 할머니 집 무궁화나무를 타고 뻗어난 나팔꽃이 확! 눈길을 끌었다.
"아!" 하고 탄성을 지를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물론 나팔꽃이 무궁화를 덮어서 무궁화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겠지만, 그 무궁화는 꽃도 시원찮았고 또 벌레까지 껴서 꼴사납기까지 했던 것이라... 나팔꽃이 가려준 게 더 낫기까지 했던 것이다.
'잠깐이면 시들 꽃들......' 하면서도 기로는 카메라를 꺼내 한 컷을 눌렀다.
그런데도, 격이 아무 기척이 없었다.
그래서 마루 밑을 들여다 보니, 멍한 눈동자로...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다.
그런데 기로가 보기엔, 웬일인지... 생을 포기한 듯한 눈동자 같았다.
어제 밤 개 밥그릇에 사료가 조금 남아있기에,
"다 먹어야 먹이를 준다!" 하면서 밥을 주지 않아서였을까? 하면서, 어제의 참치 찌개에다 찬밥을 말아서 밥을 주고 는 배를 타러 나갔다.
그렇게 호수 위 배에 앉아있는데, 멀리서...
"어이!" 하며 박 만석이 불렀다.
그렇잖아도 아직 아무 기척이 없어서, 그 집 쪽으로 시선을 던져보곤 했는데......
그래서 산장 쪽으로 배를 몰고 가보니,
"나, 금방 라면 하나 삶아 먹었어."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어젯밤은 혼자 자고, 일어나 라면으로 아침을 먹었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밥 먹었어?" 하고 물어,
"아니요." 하고 기로가 짧게 대답하자,
"여기서 밥이나 먹고 가." 했다.
"또 밥 타령이시네..." 하면서 기로는, "아니요. 맨날... 무슨, 밥......" 하고 궁시렁댔는데,
"그려도 혼자 사는 사람이, 집에 가서 챙겨먹기도 귀찮을 틴디, 여기서 먹고 가." 하니,
"괜찮습니다!" 하고는,
결국 노를 저어 '夢想?'에 돌아오며 하루는 시작되었다.
구름이 하늘을 점점 덮어대더니, 햇빛을 완전히 감추고 말았다.
'이 놈의 날씨는, 오늘도... 비를 내리겠구나......' 하는 심정이었지만,
점심을 먹은 뒤 기로는 산장집으로 다시 갔다.
오늘, ‘아시아 TV 바둑 선수권’ 이 있어 TV에서 바둑을 중계해 주는데(이 창호), TV가 없기 때문에... 산장집에 가서 보기로 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쪽에 전혀 관심 밖이던 박 만석은, 예초기로 집 주위의 풀을 깎느라 오후 내내 부산했다.
그런 와중에도 기로가 TV를 보던 방문을 열어, 불쑥 깎은 사과 하나를 건네주고 가기도 했다.
그런데, 의외로 한 순간에 무너진 이 창호가 돌을 던져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이 창호도 질 때가 있는 것인가?' 할 정도로 기로에겐 충격이었다.
# 낭만적인 술자리
흐린 날씨이기도 했지만 오후엔 기온마저 높았습니다.
오늘은 오후 내내 산장 집에 가서 TV로 바둑 중계를 봤는데, 한국 기사가 지고 말았답니다.
그래저래 허탈한 기분으로 그 집 방을 나오는데,
"우리집에 이런 서양 술이 들어왔는디, 어떻게 먹는데요?" 하고 산장 아주머니가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보니 프랑스 산 와인이으라구요.
그런데,
"그거, 얘기허믄서 마시는 술 아녀?" 옆에서 산장 아저씨가 한 마디 거들기에,
'어떤 술은 얘기하지 않으면서 마시기도 하나?' 하면서 나는 속으로 웃었는데,
"왜요? 술 한 잔 하시게요?" 하고 물으니,
"기왕에 들어온 거, 맛이라도 한 번 봐야지 않긌어?" 하드라구요.
"화가 선상님은 잘 아실 거 아녀요?" 하고 아주머니도 나서기에,
"아무래도 이건 서양 술이니, 서양 식으로 먹어야겠지요? 우리도 막걸리 마실 때, 순수하게 우리 음식으로 먹어야 하는 것처럼요... " 하면서, "아! 저한테... 지난번에 왔던 스페인 손님들이 가져왔던 '하몬(jamon)'하고 '올리브(olive)'라는 것들이 있는데......" 하다간, "그저께 따갔던 이 집 토마토 두어 개도 남아있는데, 그걸 이용해 샐러드를 만들면... 그럴싸한 안주가 될 것 같기도 하니, 정말... 한 잔 하시겠어요? 제가 준비를 해 올 테니......" 하자,
"그려요?" 하고 활짝 웃던 김 순임은, "뭐, 여기서 도와줄 건 없고요?" 물어,
"그냥, 저에게 맡겨주세요." 하면서 나는 바로 '夢想?'으로 돌아왔습니다.
'허긴, 이런 산골에선... 하몬과 올리브를 곁들여 와인을 마실 자리를 그리 쉽게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이래저래 잘 됐다!' 하면서 나는,
냉장고 안에 남아있던 토마토를 꺼내 후다닥 샐러드를 만든 뒤,
와인 잔 포크 등을 종이 박스 두 개에 담아...
배에 싣고 산장으로 향했답니다.
근데, 웃기지 않습니까? 배에 싣고 가는 풍경이요......
뭔가 멋진 것(?) 같기도 하고, 대단한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산장 집에 도착한 뒤, 우리는 한 원두막에 자리를 잡았고... 어느 정도 스페인 형식을 갖춘 상을 마련해, 와인(스페인 '비노(vino)') 잔을 부딪혔답니다.
물론, 예사로운 자리는 아니었듯이(?)... 그들 부부도 여간 좋아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평소에 술을 많이 들지 않는 산장 아저씨도,
"술이 순혀서 좋다!" 하고 술 맛을 보더니, "이런 것도 먹을만 허고..." 하면서, 어째 하몬과 올리브는 물론... 토마토 샐러드까지 별 무리 없이 드시드라구요. 나름대로 입맛이 까다로운 분인데, 그리고 또... 다른 건 몰라도 올리브는 입에 맞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물론 산장 아주머니도,
"순헌 거 같은디... 그려도, 생각보다는 술 기운이 도는 거 같네요?" 하면서, 싱글벙글이었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소나기까지 내리는 거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니, 오히려 그 분위기가 더 좋아... 우리는 퍼붓는 소나기 속의 원두막에서, 아주 낭만적인(?) 술자리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서 내가 가만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아니, 산장 아저씨! 아까, '얘기허믄서 마시는 술'이라고 하셨잖아요?" 하고, 슬쩍... 그 양반에게 장난을 걸었지요.
"어떠신가요? 서양 술을 마셔 보니?" 하고 물었더니, 서슴치 않고,
"야, 술 맛 좋다!" 하더니, "닐리리 닐리~ ~" 하고 어깨를 둥실거리드라구요.
"하 하 하..."
아무튼 그 양반도 좋기는 했던가 봅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 사이에도 비는 개었다가 다시 내리기를 반복하드라구요.
그렇게 기분 좋은 술자리를 가진 뒤,
내가 '夢想?'으로 돌아오니,
격이가 반갑다고 난리였습니다.
"격, 니 새끼들은 잘 있냐? 니 주인님(나)은, 술을 한 잔 마셨단다..." 하고 나는 와인 기를 빌어 그런 말을 하면서 격을 쓰다듬어 주었는데요,
아, 새끼들에게 젖을 뜯겨서 그런지... 꼬리 치는 격이가 핼쑥해 보이드라구요.
"그래, 엄마 된다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겠지? 우리 격......" 하고 개를 끌어안기까지 했답니다.
9 . 6
다음 날이었다.
아침은 안개비가 내리는 것처럼 우울한 날씨였다.
그런데 아침부터 격이가 짖어, 기로가 문을 열어보니,
"어?"
마당엔 박 만석이 서 있었는데 우뚝 서 있는 것 같았다.
"웬일이십니까?" 깜짝 놀라며 기로가 묻자,
"응, 이런 것 좀 가져오느라고..." 했다.
어제 산장에 놓고 왔던 와인 잔 등을 깨지지 않도록 플라스틱 박스에 넣어온 모양으로, 박스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아, 제가 이따가 가서 가져오려고 했는데요..." 하면서, "일단 앉으세요!" 하고,
둘이는 마루에 나란히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박 만석이 돌아가는 길에 기로도 따라 산장 집으로 갔다.
어제 비가 오는 바람에 놓고 온, 배를 가지러 갔던 것이다.
그런데 배 안의 나무 상자(의자)가 어제 내렸던 비에 젖어 있어서, 엉거주춤 쭈그려 앉은 채... 노를 저어 돌아왔다.
오는 길에 기로는 친구 범상의 동력선에 차 있던 물도 빼 놓았다.
아침나절에, 박 만석의 전화가 왔다.
"장씨, 시간이 있으믄... 임실 경찰서 좀 같이 갔다 오까?" 하는 것이었다.
엊그제 신고한 총기소지자 신청서를 받아야 한다면서.
박 만석이 관공서에 혼자 가는 걸 힘들어한다는 걸 잘 아는 기로는,
"그러지요." 하고는 바로 산장으로 갔다.
그렇게 둘이서 트럭을 타고 임실로 출발했는데,
이제 어떤 논의 벼들은 고개를 숙이고도 있었다.
추석이 가까워지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푸른 논인데도... 어느새 벼가 익어가고도 있었던 것이다.
'아, 저 아름다운 들녘이... 곧 노랑연두로 가는 색을 내며, 가을을 알리리라... 그러고 보니, 정말... 가을이 코앞에 다가온 느낌이다......' 하면서, 기로는 설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총기 허가증'을 받은 박 만석은,
"인자, 이 허가증을 가지고 총포사에 가서... 총을 받아오기만 하면 되야!" 하고 꿈에 부푼 모습이었다.
"꿩도 잡긌지만, 그 놈의 까치허고... 도둑 고양이를 잡어야 혀!" 하고 입을 씰룩대기도 했다.
'이 양반, 그렇게 뭔가를 잡으면... 부리나케 나에게 전화를 걸어, 산장으로 오라고 한 다음에... 자랑을 할 게 분명하다......'
기로는 그런 일을 상상하며 가던 길을 돌아오는데,
아까는 흐렸던 날씨였는데, 어느새 날이 개고 있었다.
'정말 날이 개려나?'
그렇게 점심이 되었는데, 날씨는 청명하게 개었다.
맑은 초가을 날씨였다.
'아, 이런 날이 언제였던가. 이런 날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모처럼 쾌청한 날씨로 바뀌니, 날씨만으로도 기분이 저절로 좋아진 기로였다.
점심밥을 챙겨 먹은 뒤 서둘러 빨래를 하고, 작업 방을 대충 쓸고... 기로는 그물침대에 나가 누웠다.
'아, 정말 맑은 날이로구나......'
호수에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맑은 하늘엔 몇 점의 하얀 구름이 떠가고 있었다.
모처럼 날아갈 것처럼 시원했는데,
"아, 행복하다!" 하고 혼잣말까지 하는 기로였다. 그런데,
'근데, 왜? 이런 상황이 행복이라고 느끼면서도, 나는... 그리 기쁘지가 않은 걸까?' 하면서는, '처음에 이 마을로 오면서 가슴 벅차하면서 행복해 했던 기분은 어디로 사라지고, 나는 그저 무덤덤한 사람이 되어있는 것인가?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상황은 행복에 포함시켜야 하는 거 아닐까? ‘행복’이란 게, 영원한 게 아니니... 웬만하면,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게 좋을 텐데......' 하고도 있었다.
저녁 무렵 해가 서산 쪽으로 넘어가는 틈을 타서, 기로는 배를 타고 호수로 나갔다.
아직은 호수의 한 쪽에 햇살이 남아있었지만, 마을 쪽으로 노를 저어... 정미네 언덕 너머로 갔다.
벌써 어떤 억새풀은 꽃을 피우고 있기도 했다. 아직 가을이 다 온 것도 아닌데......
거기서 하모니카 몇 곡을 불었다. 그러면서도,
'오늘 밤엔, 뭔가... 작업을 해야 할 텐데......' 하고도 있었다.
격에게 저녁밥을 주고났는데도, 아직 한 낮의 뜨거운 열기가 남아 있어서... 기로는 다시 그물침대에 누웠다.
구름 사이에 달빛이 언뜻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기로의 마음은 편하지가 않았다.
'뭔가, 작업을 해야 할 텐데......'
그려면서 얼른 작업 방에 들어와, 음악을 틀어놓고 앉아있었다.
얼마나 앉아있었는지 모른다.
졸기도 했고, 그러다 쓰러져 잠이 들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다시 깨어나곤 했다.
산장 쪽에선 주말의 단체손님이라도 온듯, 오늘따라... 밤 10시가 넘도록 왁자지껄한 상태로 불야성이었다.
그 와중에 풀벌레 소리도 요란했다.
'아, 가을이 오고 있는 것인가......' 하다가 기로는,
바로 스케치북에 선을 긋기 시작했다.
한 시가 넘어서야 겨우 끝을 낼 수 있었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잠은 쉽게 와 주지 않았다.
# 친구 사이
내, 이 마을에서의 생활이라는 것이...
날마다 산장 아저씨와 거의 붙어살다시피 지내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이런 저런 일도 생기고... 거기에 따라 기분이 좋기도 상하기도 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양반이 워낙 순진한 데다가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분이라(다른 사람들 앞에선 엄숙한 척하지만(그 건 나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이따금 나는... 그 양반의 장난기에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는데요,
어떤 때는 그 분 스스로, 내가 조심스럽기만 하다면서도... 금방 돌아서면, 또 애들처럼 장난을 치는 모습이거든요?
그런데 그 양반, 문득,
"인자, 나이가 들어서..." 하시거나, "내가 조금만 더 젊었드라믄 좋긌다." 거나, "장씨는 젊어서 좋겄네!" 하시는 겁니다.
아마, 내 젊음이 조금 부러우신가 봅니다.
그러면 나는,
"누구는 젊은 시절이 없었나요? 아저씨 젊은 시절엔 별 거 별 거 다 하셔놓고서(나는 그 분의 젊은 시절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만, 그냥 지레짐작으로 아니면 넘겨 짚으면서 그런 말을 하면, 순진하신 그 분은... 마치 누군가에게 본인의 들춰내기 싫은 과거를 들킨 모양(?)으로, 조금 당황하는 기색도 보입니다. 그러면, 나는 더 신이 나서... 목소리에 더욱 힘을 주기도 하거든요.), 욕심도 많게... 이제 와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누구는 두 번 사나요? 다 마찬가지겠지요... 저도 곧 산장 아저씨 나이가 될 텐데요..." 하고, 위로 겸...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을 얘기합니다.
게다가 나는, 나 스스로도... 이제 내가 썩 젊은 사람이 아니라고 못 박아놓고 사는 사람이다 보니,
그런 아저씨의 말씀에 어이없기도 하지만,
사실 그 양반과 10여 년의 나이 차이가 나다보니,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은 하게 된답니다.
그러면서는, 나 역시도 나와 그쯤의 나이 차이가 나는... 내 '미술반 제자 녀석들'과 비교도 해 보았는데요,
사실, 나는 산장 아저씨와 큰 나이 차이가 없는 걸로 생각하면서 지내고 있거든요?
그런데, 내 제자들을 떠올리면... 그러니까 아래를 내려다 보면,
상당한 차이가 있게 느껴지거든요?
그러니까, 걔들은 아직 어리고(젊고)... 나는 이제 상당히 나이 들어간 사람 같다는, 생각이 굳어있는 느낌이라라는 겁니다.
근데요, 문제는... 나는 산장 아저씨를 마치 친구처럼 여길 때가 많다는 겁니다.
서너 살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그리 어렵지 않은 선배거나 동료 쯤으로요......
그러다 보니, 쉽게 장난치고 농담도 하고......
근데요, 그 양반도 웃기는 게... 그런 나를 너무 잘 받아주다 못해, 오히려 한 술 더 떠서... 어리광까지 부리니, 나 역시도 헷갈리거든요?
'이렇게 어른 한테 버릇없이 굴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그 분의 장난기에는... 오히려 덤터기까지 씌워 받아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양반, 나와 그렇게 지내는 걸 너무 재미있어 하는 모습이라(?)... 내가 더욱 버릇없이 구는 것 같고, 부담도 덜 느낀다는 겁니다.
이제 겨우 6 개월여를 알고 지내는 사이일 뿐인데, 마치... 평생을 같이 지내온 동네친구처럼 지내고 있으니까요......
허기야 나는, 지금까지도... 그런 식으로 살아오긴 했거든요?
어릴 적(학창시절) 친구들이야 그렇다 쳐도,
그 힘든 군대생활을 할 때도 그랬고,
성인이 되어 직장(교직)생활을 할 때도, 몇몇 동료와 그런 관계를 유지하며 재미있게 지냈었고(물론 지금까지도 그 정이 남아, 그들과의 관계는 유지되고 있고),
허다 못해... 외국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거나, 오히려 현지의 외국인 친구까지도 포함해서 하는 말이랍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을 쉬 사귀지 못하는 난데... 이상하게도, 어디서거나... 꼭, 한두 사람 정도는, 매우 친밀한 관계로 사귀는 특징이 있거든요?
그런 친구 사귀기가, 이 마을에서는... 바로 산장 아저씨가 된 거지요.
그런데, 그 분도... 모두 다는 아니지만, 가만히 보면... 여러 모로 나와 흡사한 특성을 가진 분이라 그런지...
10여 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와 그렇게... 친구처럼(가족처럼) 히히덕거리며 지내는 것일 텐데요...
참, 사람 관계라는 것이... 묘하기도 하지요?
근데요, 나는 약아빠져서... 손해 볼 것 없이 눈치를 봐가며 까불어대지만(젊다는 이유로), 그 분은 늘 나에게 당하면서도 너그럽게 받아주니...
결국은, 내가 한 수 아래겠지요?
9 . 7
날씨가 흐려서 새벽 같은 아침이었는데, 전화가 왔다.
역시 박 만석이었다.
"장씨, '강진장'에 함께 갈 거여?" 하고 물었다.
8 시에 장에 가려고 하니, 가고 싶으면 오라는 것이었다.
컴퓨터를 하고 있던 기로는,
"알았습니다." 하며 부랴부랴 마무리를 하고, 통나무집에 가서 격이 밥을 챙겨나와 주고는... 찬물로 샤워를 하고(늘 그렇지만) 산장으로 갔다.
원래는 8 시 40 분 버스로 가려고 했는데, 트럭 타고 가려고 박 만석의 마음이 바뀐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추석장'이라, 다른 때보다 사람들이 많고 장도 클 것이라서... 기로는 사진이라도 찍어두려고, 어제부터 마음먹고 있었던 것인데,
결국 박 만석과 함께 가게 되었던 것이다.
기로가 조금 일찍 도착해서인지 8 시도 되기 전에 그들은 트럭을 타고 출발했다.
언뜻 해가 나오는 것 같기도 하더니, 다시 흐린 날씨로 이어졌다.
강진에 도착하니, 역시... 오늘은 장이 컸고 사람도 많았다.
비록 날씨가 흐려 기로가 사진을 찍는 데는 좋은 조건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른 때와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였던 것이다.
"아마 1 년 중, 가장 큰 장일 걸?" 하는 박 만석의 말이었다.
"나는 과일 사러 갈 팅게, 남자분들은... 국밥이라도 사 먹으셔요." 하고는 바삐 사라졌다.
둘이는 국밥집에 가서 순대국밥을 시켰다.
기로의 입장에서는 오랜만에 먹어 보는 순대국밥이었지만, 의외로 맛있었다.
특히, 볼품도 없어 보이던 김치가 자연스런 시골 맛이어서... 평소에도 김치를 좋아하는 기로는, 김치 그릇을 혼자 다 비울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이런 일은, 재미있는 일 중의 하나일 거야......'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성질 급한 박 만석은, 기로가 반절쯤 먹었을 때 이미... 밥그릇을 비운 뒤, 먼저 계산을 하더니,
"나, 잠깐 다녀오께." 하면서 나갔다.
그러더니 또 금방(기로가 식사를 다 끝내기도 전에), 흰 고무신 한 켤레를 사가지고 왔다.
"이건 다 떨어져서..." 하는데 보니,
아닌 게 아니라, 뒤꿈치가 다 떨어진 모습이었다.
그렇게 산장집 부부는 추석장을 다 보았는데,
기로는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어야만 해서,
"두 분 먼저 돌아가세요."(이미 올 때부터 그런 얘기는 했던 지라) 하고, 혼자만 남았다.
그리고 카메라를 꺼내 들고 시장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재미있는 풍경들도 눈에 띄었지만, 순간순간 차들이 지나가거나... 불쑥불쑥 사람들이 튀어 나오는 번잡스러운 분위기여서, 사진을 찍기도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추석장의 사진을 찍고는,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그런 뒤 점심을 해 먹고 났는데, 정미가 왔다.
정미는 요즘 부쩍 '夢想?'에 자주 나타나는데, 물론... 격이가 새끼를 낳고 난 뒤부터였다.
반장네(정미 아빠)도 고추장을 도둑맞은 뒤부터 개를 세 마리나 키우고 있는데, 그리고 어느새 조금 큰 하얀 강아지를 끌고 다니기도 하는 앤데... 정미는, 격이 새끼들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겨... 툭하면 '夢想?'의 마당에 와 있곤 하는 것이었다.
기로가 산장에 있을 때도 '夢想?' 쪽을 바라 보면,
마당에 움직이는 물체가 있다 하면, 정미였던 것이다.
"정미는 개를 참 좋아하는구나." 기로가 말하자,
"제가 개띠거든요." 하는 것이었다.
"그래? 그러면 너를, ‘개미’로 불러야겠다. 왜냐면... ‘개띠의 정미’를 줄여서..." 기로가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을 얘기 하자,
"헤-" 하고 정미가 웃었다.
그러면서 기로가 노트북을 가지고 평상에 가니, 정미는 기로를 조르르 따라 평상으로 왔다.
그리고 기로가 노트북을 폈는데, 정미가 바짝 다가와 노트북을 주시하는 것이었다.
기로가 노트북에 뭘 하는지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자 기로는 또 순간적으로 장난기가 발동하여, 노트북 모니터에 이렇게 썼다(자판을 두드렸다).
정미가 왔다.
그러자 아이는 눈이 동그래져서 화면을 주시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나는 정미를 ‘개미’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러자 모니터를 주시하던 정미가, 자신의 얘기가 글로 적혀 나오자... 깜짝 놀라는 듯하더니, 멋쩍게 웃었다.
그런데도 기로는 계속 자판을 두드렸다. 정미는 글짜가 늘어가는 걸 계속 읽고......
그런데, 정미는 싫다고 한다.
싫어도 하는 수 없지...
그러자 아이는 쑥쓰러워 하면서 주먹으로 그물 침대를 치는 것이었다. 그래도 기로는 멈추지 않고, 그 걸 그대로 적어 내려갔다.
정미는 내가 쓰는 글을 보더니, 화가 나는지... 그물침대를 주먹으로 치는데... 그래봤자, 나이롱 줄의 그물침댄데 어디 깨지길 하나?
(정미는 계속 모니터의 글을 읽고 있었다.)
그저 혼자서 어쩔 줄 모르고 하는 행동인 것이다.
"어휴! 어휴!" 하면서...
기로는 그 애의 동태를 글로 쓰면서 계속 애의 표정을 살폈다.('이건 생중계를 하는 기분인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다가 결국,
"하 하 하..." 기로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자 정미는 뾰로퉁해서, 저 쪽으로 가 앉는 것이었다.
그러자 기로는 덧 붙여 한 줄을 더 썼다.(물론 이 글은 정미가 읽지 않았지만.)
이 아이가, 나중에 커서... 이런 순간을 기억이나 할까? 만약 기억을 한다면, 날 어떤 사람으로 여길까?
하 하 하...
웃긴다...
기로 역시 보통 장난기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정미가 이따금 그를 찾아와... 자신이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생뚱맞은 '장난질 경험'(?)을 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뒤,
"정미야, 아저씨 배 타고 산장에나 놀러 갈까?" 하자,
"정말요?" 하고 좋아 했다.
그래서 기로는 정미를 배에 태우고 산장에 갔다.
일요일이라 제법 많은 손님이 있었고, 또 전주에 사는 산장집 애들도 와 있어서... 집안 분위기가 왁자지껄 했다.
산장집 김 순임의 말로는,
"우리 아들(종혁)은, 왜 그런지... 정미를 자꾸만 피혀요." 했었다.
그래선지, 조금 전에 기로에게 인사를 했던 종혁이... 금방 보이질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기로는,
'여기 원두막에 앉아 식사를 하는 손님들은, 노를 저어오는 우리를 보고는... 어쩌면 부녀지간으로 보았을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아버지가 딸애를 배에 태워 마실가는 것쯤으로 비춰질 수도 있었겠다는......
묘한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기로는,
'그런 일은 나에겐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시, 얼른 정미와 함께 배를 타고 돌아왔다.
그러면서 기로는 '夢想?' 마당 쉼터 학돌에서 자라는 ‘물 상추’ 한 뭉치를 떼어주면서,
"정미야, 이거... 니네 집에 갖다가 키워 봐!" 하자,
"예!" 하고 뛰어서 돌아갔다.
그러고는 방에 누워 잠을 청했다.
어젯밤 잠을 잘 못잤기 때문에, 컨디션이 좋질 않아서였다.
밤이 되어도 아직 집 안은 열기가 있어서, 기로는 밖에 나가 있었다.
역시 그물침대에 누워있었는데, 일찍 밤을 맞은 마을은 조용하기만 했다.
어제 보다 조금 커진 달이 더 빛나고, 그래도 밖은 호수에서 시원한 바람도 불어와 쾌적한 기분이었다.
한 시간 여를 그렇게 누워있었다.
이따금 격이가 기로에게 다가오면(격이는 기로가 집안에 있을 때면 잘 안 나가는데, 평상에 있으면... 꼭 밖으로 나와 길에 엎드려있거나 기로 주위를 맴돌다가 곤충을 잡는 둥... 여유를 부리곤 했다.), 머리와 귀를 뭉뚱거려 잡아 쓰다듬어주면서... 밤 시간을 즐겼다.
'오늘 밤도 너무 좋구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으라더니, 정말 좋은 기후로구나. 이대로 세상이 멈춘다 해도, 기꺼이 받아들일 만큼... 좋은 밤이구나......' 하고 있었다.
# "너 죽을래?"
낮에 방문을 열어놓은 채로 잠을 자고 있는데, 토방을 오르는 친구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집 주인인 친구가 온 것이었습니다.
"어디 아프냐?" 그가 물었습니다.
"아니, 조금 피곤해서..."
"어젯밤에 뭐 했기에?.."
"응, 작업하다가 늦게 잤어. 두 시쯤엔가 잠이 들어... 네 시 반에 일어났으니까..."
"나, 할 일이 있어서 왔다."
"응..."
그는 연장을 챙기며 왔다갔다 하더니, 나를 부르더라구요. 거들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통나무집 외부 벽에 스피커를 단다는 것이었습니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음악을 듣기 위함이라나요?
지가 폼내고 싶고 또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뭐 굳이 그럴 것 까지 있나?' 하는 생각은 했습니다.
그 일을 끝냈던 친구는, 또 통나무집 마당에 무성히 자란 풀을 깎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초기를 꺼내 기름을 붓고, 그런 일을 하던 중에... 산장 아저씨가 반장과 평상 쪽에 앉아서 무슨 얘기를 하는 것 같더니, 마당에 올라왔습니다.
그렇게 내 친구와 셋이서, 또 뭔가 얘기를 하는데... 산장아저씨의 나에게 하는 갑작스런 장난기(나는 친구 쪽을 보고 있었는데, 내 뒤에 있던 아저씨가 나에게 뭔가 장난을 친 것 같습니다.)에, 내 친구는 의아한가 보았습니다.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친구가 산장아저씨를 보며 묻드라구요.
"무슨 말이야?" 하며 아무 것도 모르던 내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는데,
몸을 움찔하던 산장 아저씨는, 뭐가 재밌는지... 제풀에 얼굴이 붉어지도록 웃습디다.
"무슨 일인데?" 하고, 내가 친구에게 거듭 묻자,
"아, 젊게 사시려고 그런 모양이야..." 하고 친구가 활짝 웃드라구요.
그 상황을 대충 짐작을 한(틀림없이 산장 아저씨가 내 뒤에서 나에게 뭔가 장난을 치려고 했을 거거든요?) 나는,
"그렇다니까. 요즘... 저 양반, 완전히 장난꾸러기가 되셨다니까. 애 같으셔..." 했는데,
멋쩍었는지, 혼자서 슬금슬금 도망치듯 물러나더니, 이번에는 또 나에게 보라는 듯,
코스모스 가지 하나를 꺾는 시늉까지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내가 또 가만 있나요?
"만약에, 코스모스가 털끝 만치라도 다치기만 하면... 안 참을 겁니다." 하고 눈과 입에 힘을 주고 말하니,
산장아저씨는 코스모스 줄기를 풀어놓고는,
"헤 헤 헤..." 웃으며 도망치듯 산장으로 돌아갔습니다.
"야, 근데... 저 양반, 왜 그렇게 장난치셔?" 재밌다는 듯 친구가 묻더라구요.
"그래 말이다. 요즘 부쩍 장난을 치시네? 참내, 요즘 나한테 장난치는 재미로 사시는 것 같아..." 하다가 나는 또, "그래서 어떨 때는, 나도 마구 장난 쳐버려... 한 술 더 떠서......" 하자,
"그래? 웃긴다, 야. 그래도 재밌고 좋아보이는데?" 하던 친구는, "근데, 여기서 얼마나 살았다고, 너는 어느새... 산장 아저씨와 그렇게 친해졌냐?" 하고 웃드라구요.
"글쎄, 그렇게 됐어. 완전히 친구가 돼 버렸어. 맨날 붙어사는데 뭘... 허긴, 동네에 사람이 있어야지... 시골에 사람들이 없다보니, 평균연령이 높아진 반면... 또 정신연령은 그만큼 낮아지는 건지... 어른들이 애들처럼 까불면서 장난이나 치고...... 여기 완전히 어린이 놀이터 같어, 참내! 너도 알다시피, 나 또한... 한 장난꾼 아니냐? 그런 나한테 장난을 쳐오니, 내가 가만있나? 어떤 때는 내가 오히려 한 술 더 뜨지... 근데, 가끔 너무 심하게 장난을 치며 나를 약 올리면, ...... 확! 그 양반 한테, 그런 말을 하고 싶어..." 하자,
"무슨 말?" 하고 친구가 바짝 대들면서 물었습니다.
"아무래도 산장 아저씨하고 나이 차이가 나서, 차마... 너무 심한 것 같아, 못하긴 하는데... 정말, 목구멍까지 나오는 걸... 꾹 참느라, 내가 고생하는 중이다. 본인한테 직접 할 수는 없으니까......" 하자,
친구는,
"뭔데에?" 하고 정말 궁금해 죽겠다는 겁니다.
"그래도 어른 한테 그러면 못 쓸 것 같아..." 하고 말을 계속 질질 끌자,
"야, 우리 둘인데... 한 번 해 봐! 내가 산장 아저씨라고 생각 하고..." 하면서 사정을 해와서야,
"그래볼까?"
"아이, 그러라니까!"
"그래, 좋다. 이런 자리에서나... 속 시원히 해 봐야지!" 하고 나는 잠깐 뜸을 들인 뒤,
"너 죽을래? 그 말이야. 하 하 하..."
"그래? 와 하 - 하 - 하 ..."
친구와 나는 웃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온 동네가 시끄럽게, 친구의 풀깎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친구, 가끔 한 번씩 '夢想?'엘 오면, 온 동네가 시끄럽다니까요.
요란하게 예초기로 풀을 깎지를 않나, 호수에 모터 보트를 띄워놓고...
"부-앙!" 달리지를 않나......
아무리 지 멋에 산다지만, 어떤 때는 내가 옆에서..
"왜 그리 난리야? 좀, 조용히 지내면 안 돼?" 하고 공박을 하기도 하지만,
이 친구는 그게 재미라니...
친구지간인데도 달라도 참 많이 다르거든요......
그런데......
그를 거들어주다가, 내가 잠깐 통나무집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어?"
언뜻 보니,
아니! 내가 애지중지 가꾸어 놓았던 들국화 몇 포기(반절 정도)가 싹뚝 잘려나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아니! 이럴 수가...' 하면서 나는,
"야! 이 거 왜 이런 거야?"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거, 니가 자른 거야?"
"응?"
"이 거 말야!"
"왜? 그 게, 뭔데?"
"몰라? 이 거, 들국화."
"그래에?.."
"야, 내가 얼마나 애지중지 하며 키웠는지 알어? 봄에, 정읍 김 선생님 집에서 몇 포기 뽑아 와서 여태까지... 게다가, 요즘에 꽃봉오리를 내 보이고 있는데... 이렇게 잘라 놓았어?"
"그래? 난 모르고 했는데..."
"뭐야? 너."
"모르고 한 일이라니까."
"야! 너 죽을래?"
나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말았습니다.
"어휴, 미치겠네! 넌, 손만 갖다대면... 다 파괴야!" 하고 악을 썼고, 그것도 모자라, "너, 이 거 물어내!" 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나, 일 안 해!" 하면서 거기 잘린 들국화를 집어, 친구 앞에 확! 내던지면서... '夢想?' 쪽으로 와 버렸습니다.
아이, 그 놈의 들국화는... 왜 이리 탈도 많은지......
쑥으로 오인되어 뽑히지를 않나(지난번 친구 처갓집 식구들이 풀을 뽑으러 왔다가, 풀인 줄 알고 뽑아서... 내가 조용히 다시 심어놓았었거든요.), 풀이라고 농약을 뿌려놓아 꼬부라지기를 않나(이것 역시 친구의 소행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우 살려놓았더니, 결국은 그 친구의 예초기로 싹뚝 잘려나가버렸으니......
"아니, 한 번 주의를 주었으면 알아서 해야지... 날마다 올 때마다 이런 사고가 발생하니, 돌대가린지......" 하고 나는 친구에게 욕을 박박 해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화가 식지가 않아 어쩌지를 못하고 있다가, 다시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면서도,
"야! 나 화났으니까, 건들지 마!" 큰 소리를 치면서 계단 아래로 걸어 내려왔는데,
"알았어. 안 건들 께..." 뒤에서 그러드라구요.
홧김에 나는 배를 타고 호수로 나갔습니다.
다른 때는 천천히 노를 젓는 나도, 오늘은 힘을 주어 저어 배가 빠르게 나가고 있었습니다.
분을 삭힐 수가 있어야지요......
그런데 호수에 떠 있다 보니, 치밀었던 화가 조금 가라앉는 기분이긴 했습니다.
그래서 젓던 노를 놓고 한참을 멀거니 앉아있었습니다.
물결인가 부는 바람을 따라선가 배는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서서히 날은 저물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夢想?'에 돌아왔던 내가,
"너, 저녁 밥은 어떻게 할 거야?" 하고 친구에게 물으니,
"집에 가서 먹지 뭐." 대답하드라구요.
개밥을 주고 났던 내가,
"야, 그럼 우리... 비빔국수 해 먹을까?" 물으니,
"좋지!" 합디다.
그렇게 나는, 내 특기 중의 하나인... 열무김치를 넣은 담백한 비빔국수를 후다닥 해서 친구와 평상에 앉았는데요,
물병 하나에 국수그릇이 전부라 너무 간단했던, 그래서 처음에 시큰둥하게 바라보던 친구는,
한 번 먹어보더니... 후룩후룩 정신없이 먹더라구요.
그리고, 자기 몫은 다 먹고도... 더 덜어먹는 게걸스러움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배가 고팠던 모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야, 정말 맛있다."
"......"
"근데, 어떻게 이렇게 맛있게 했냐?"
"오버 하지마! 그렇다고 내가 화가 풀린 줄 아냐?"
"정말야... 어떻게 하는 거야?"
"뭐, 김치하고... 뭐, 들기름인가?.. 근데, 고추장은 안 넣고..."
"이렇게 맛있는 비빔국수는 처음 먹어보네..."
"야, 웃기지 좀 마! 무슨..."
"정말 맛있었다니까, 야..."
"배고프면 뭐든 맛있는 거야. '시장이 반찬'이라잖아?"
"정말이야. 근데.. 너, 또 그 말 안 할 거냐?"
"무슨?.."
"... 히히히..."
"왜 그러는데, 뭐어?"
"너 죽을래?"
"와 하 하 하..."
우리는 다시 웃었습니다.
9 . 8
드디어 산장집 박 만석이 전주 총포사에 가서 총을 받아왔다.
그런 뒤 바로, 기로에게 전화가 왔다.
그러자 김 순임이,
"또, 보고를 하는구만..." 했나 보았다.
전화를 받는 기로에게, "또 보고를 한다고?..." 하는, 박 만석의 혼잣말이 들렸던 것이다.
그렇지만 전화를 받자마자 기로도 바로 산장으로 달려갔다.
총은 말끔한 케이스 안에 들어있었는데, 생각보다는 작은 모습이었다.
그러면서 둘은 우선, 시험에 들어갔다.
실탄은 어떻게 장진하고, 자물쇠는 어떻게 풀고......
처음에는 기로가, 사정거리가 30 m 정도 되는 곳에 종이컵을 올려놓았고,
박 만석은 발사 연습을 해 보는데,
"어?"
잘 안 되는 것이었다.
"어? 왜 이려?" 박 만석이 놀라움 반 짜증 반으로 소리를 질렀다.
"처음이라 그럴 겁니다. 총도 충분한 연습을 하신 뒤, 영점을 잡는 등... 본인의 것으로 만드셔야 될 걸요?" 하고 기로가 말하자,
"그려?" 하더니 박 만석이 다시 시도했다.
그런데 발사는 되었는데, 종이컵은 미동도 않는 것이었다.
"발사허믄서 숨이 고르지 못혔나?" 하면서 박 만석이 다시 해 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지난번 개 장수 총으로 연습할 때는 백발백중이었는데, 아마 총의 조준점이 틀린 것일 텐데도... 성질 급한 박 만석은 여간 낙심하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둘이는 아예 달력 한 장을 뜯어다, 기로가 그 뒤에다 먹물로 종이 과녁을 그려 넣어 조준점을 조절하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결국 가운데 명중시키긴 했는데, 그래서 박 만석의 얼굴이 환하게 돌아왔는데... 웬일인지 또 갑자기, 발사가 안 되는 것이었다.
다시 실탄을 장진하고 발사해도,
"픽!"
김빠지는 소리만 날뿐 발사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대 여섯 개의 실탄이 총구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상태로 이어졌다.
급기야 박 만석은, 총포사에 전화를 걸었고... 내일 총을 가지고 전주로 나오라는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투덜투덜......
"에이, 괜히 총을 샀나벼!" 하는 박 만석의 얼굴이 어둡기 짝이 없었다.
그러자 기로가,
"아직은 처음이고 서툴러서 그렇지, 익숙해지시면... 잘 쏘실 겁니다. 지난번에 보니, 워낙 사격 솜씨가 있으신 분이라... 군대에서였다면, 포상휴가를 나오고도 남을 실력이었거든요." 하고 위로를 하고, 돌아왔다.
# 복잡한 세상
아무리 내가 이런 산골에 쳐박혀 TV도 없이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인터넷을 통해 이런저런 뉴스는 접하긴 합니다.
그런데 요즘 시국이 어수선하기만 합니다.
정치판도 분당이네 당파싸움이네 하며 시끄럽고, 주민들이 군수를 집단폭행하여 피투성이가 되었다는 뉴스도 나옵니다. 사회 정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파업에 경제가 안 돌아간다는 말도 안타깝긴 마찬가집니다. 일자리는 없고 평생직장이라는 개념마저 사라진다는, 그래서 가능하면 젊을 때 한 탕(?) 할 수 있는 곳으로 향하는 세태.. 그리고, 해외 이민과 유학 박람회는 2-30 대 젊은이들이 대 성황을 이루고 이 나라를 떠날 생각만 하고 있다고 합니다. 미래가 없다는 겁니다.
생할고에 시달려 가족이 동반자살하는 사건도 심심찮게 벌어지고.. 크고 작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별 해괴한 사건들이 난무합니다..
비단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닙니다만, 조그만 나라에서 참으로 별별 일들이 다 벌어지고 있습니다.
허기야, 좁은 땅덩어리에 그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으니(그 많은 사람들이 다 잘 살아보겠다고 아우성을 쳐 대니) 시끄럽지 않을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올 해는 무슨 놈의 비가 그렇게 내려, 논 밭 할 것 없이 농사가 흉년이라고 농부들이 울상을 짓고 있다고 합니다. 일조량이 부족하여, 작물들이 제대로 여물지도 못하고 쭉정이로 남거나 크지 못해 수확을 하느니(인건비가 더 비싸..) 차라니 포기하는 게 낫다고들 하는군요.
그런데 그런 일은 보도를 통해서만 듣는 게 아니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있어서, 더욱 실감이 나기도 합니다. 이 마을에서도 고추들이 다 죽어갔고, 그 뽑아내 버린 고추 밭에 가을배추를 심었는데, 그 배추들마저 잦은 비 때문에 물러 썩어가고 있는 모습이거든요. 땅에 뒹굴던 호박들도 꼭지에 힘이 없어 떨어져서 썩어 들어가고, 깨며 콩이며.. 알맹이가 빈 쭉정이만 남아있는 모습이랍니다.
과일도 예년만 못한 건 물론이라는군요.
대추도 예년에 비해선 어림없고, 감이며 배등.. 이 마을에서 흔한 과일도 그 크기가 빈약하고 또 저절로 떨어져버려,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한숨 쉬는 소리만 들려옵니다. 민심이 흉흉할 수밖에요.
나요?
나도 뭐, 그렇습니다. 늘 그 타령에 기분마저 가라앉은 상태로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아무리 내 개인적으론 그렇다고 해도, 나는 다른 사람들이라도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사람입니다. 나라가 잘 되길 바라지요.
그런데, 온 나라가 어째, 나쁜 쪽으로만 시끌벅적한 것 같아.. 착잡하기만 합니다.
무관심하다고 남 일로만 남는 것도 아니고 또 해결되는 것도 아닌 찝찝한 일들.. 나도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이라, 생각도 없이 모른 척 할 수만은 없는 겁니다.
그렇다고 그런 일 다 뜯어고치자고 나설 수도 없는 일이니..
어찌한다지요?
아, 왜 세상은 이리도 복잡하기만 한 건지..
9 . 8
축축한 새벽이었다. 호수에 안개가 자욱하고 또 이미 비가 왔는지 마당도 젖어있었다.
기로가 컴퓨터를 하고 나가니, 산장 할머니 집 쪽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할머니가 쓰레기를 태우고 있나 보았다.
기로가 그 쪽으로 슬슬 걸어가니, 역시 그랬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예, 어서 와요. 오늘은 날씨가 어떻다고 혀?"
요즘 할머니는 기로에게 날마다 날씨를 물으시는 추세였다.
기로가 알려주는 날씨가 정확하다고 하면서, 기로를 보통 신뢰하는 게 아니었다.
물론 모든 게 정확할 수는 없지만, 이렇듯... 기로는 날마다 인터넷에서 날씨를 확인하는 버릇이 들어 있었다.
"오늘도 비가 온다나 봅니다."
"그려? 이놈의 비 때문에 못 살긌네..."
할머니와 그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아닌 게 아니라... 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기로는 배추 한 주먹(할머니는 배추를 솎아다가 된장 넣고 국이나 끓여먹으라며 뽑아주었다.)을 쥐고 '夢想?'으로 돌아왔다.
비. 비... 날마다 비다.
된장국을 끓이면서 기로는 다시 오디오의 음악을 틀어놓고 창밖을 내다보고 앉아있었다.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신 영조의 목소리가 아름다웠다.
'산노을'이란 곡이 나오고 있었던 것인데,
격의 새끼들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엊그제부터 조금씩 눈이 벌어지는 것 같아서 기로가 오늘은 자세히 관찬했더니, 네 마리 모두가 눈을 웬만큼은 뜨고 있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재들 눈에도, 뭐가 보이긴 할까?' 하면서,
"쪼쪼쪼..." 소리를 내며 불러봤는데, 강아지들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눈을 뜬 건 분명한데......' 하면서 보니, 처음보다 제법 커 있기도 했다.
아침에 기로가 산장 집에 가보니, 박 만석의 표정이 좋질 않았다.
어제 가져온 총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일 것이 분명했다. 아마, 잠도 설쳤는지도 모를 일이어서 기로가 장난으로,
“어제는, 밤잠도 못 주무시고 고민하셨겠네요?” 했더니, 그 말에 부정을 하지는 않는 것이었다. 그러니,
‘오죽했으랴? 자린고비가......’ 하기는 했지만,
박 만석의 요청으로 오후에 둘이서 전주 총포사에 가기로 했다.
아니, 기로의 입장에선... 가 주기로 했던 것이다.
박 만석은 그런 데일수록 혼자 가는 걸 극도로 꺼리는 사람이기에 기로는,
‘내가 데리고 가야 하겠지......’ 하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원래는 ‘막은 댐’에 트럭을 세워놓고 전주까지는 버스로 가려고 했는데, 가는 도중에 박 만석의 마음을 바꿨다.
그 급한 성격에, 언제 올지도 모르는 버스를... 전주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따라 표정이 많이 굳은 박 만석이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기로는 옆에서, 박 만석에게 농담을 해대기도 했다.
“거금을 들여서 산 총인데, 그래서 어쩐답니까?” 하고 슬쩍 장난의 시동을 걸으니,
“그려서 내 맴이 맴이 아녀...” 하고, 뾰로통한 아이처럼 말하는 박 만석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다시 (돈으로)물러오고 싶지만, 그렇게는 안 될 터여서... 최악의 경우엔 5연발총을 단발로 바꾸는 방향도 생각해 보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복잡한 시내 운전을 꺼려하는 박 만석은, 옆에서 기로가 하는 방향 지시대로... 잘 따라 큰 무리 없이 목적지에 닿을 수는 있었다.
어쨌거나 둘이는 이제, 그런 것마저도... 한 팀을 이뤄 해내는 것 같아 보일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기로는,
‘근데, 이 양반이 나 없을 땐 어떻게 살았다지?’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오늘 따라 박 만석은 바짝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보니, 기로는 하고 싶은 농담도 자제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뿐만 아니라 박 만석은 운전도 평소와는 달리 불안하게 하고 있어서(뭔가에 쫓기는 것 같기도 했고, 또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살피기까지 하기에) 기로가,
“근데, 산장 아저씨, 왜 그러세요? 누가 쫓아옵니까?” 하고 반절은 걱정스럽게 또 반절은 약간 비꼬는 투로 말을 하자,
“그 게 아녀!”하긴 했는데, 웃음기도 없이 바짝 긴장한 모습이다 보니,
‘이 양반이 왜 이러지?’ 하면서도,
“운전 좀 잘 하세요. 다른 땐... 노래를 불러가면서 하시면서......” 하고, ‘긴장을 풀라는 듯’ 말하자,
“장씨는 내 맘을 몰라...” 하고 낮고도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을 하니, 기로는, 속으로만,
‘모르긴 뭘 모릅니까? 지금, 그 피 같던... 총을 샀던 돈이 아까워서 죽겠다는 거겠지요......’ 하고 큰 의미를 두지도 않았다.
그렇게 전주천 둔치에 박 만석은 차를 주차시켜 놓았다.
그런데 기로가 보니, 전주 천의 흐르는 물이 맑았다.
얼마 전에 인터넷이었던가? ‘전주천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징검다리를 건너는 사람들도 보였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왜가리 한 마리가 앉아 있는 모습만 봐도, 뭔가 그런 느낌이 강하게 와 닿는 것이었다.
더구나 요즘에 비가 많이 와서, 내려가는 물의 양도 상당히 많아... 보기에도 썩 좋았던 것이다.
그렇게 둘이서 총포사에 가서 얻게 된 결론은,
어제는 박 만석이 공기총에 에어가 없는 상태에서 총을 쏘았기 때문에, 총알이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것과,
아무리 박 만석이 어제 받아간 새총이라지만, 그 총은 이미 경찰서에 등록이 되어있는 데다가(전국 어디서거나 컴퓨터 조회를 하면 바로 나온다고 함) 이미 총을 쏘아본 뒤라... ‘중고’로 취급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단발로 바꾸기를 원한다면, 바꿔주긴 하겠지만... 웃돈 20만원을 더 내라고도 했다.
그러다 보니, 애당초 총포사에 갈 때까지만 해도, 총의 부실함과 사용하기 불편함 등을 들며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다시 돈으로 물리기라도 하려고 했었는데,
어차피 사용자의 총기 조작미숙에서 발생했던 일이라, 이래저래 박 만석은... 그 총을 다시 사용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그들은 2 만원 하는 ‘꽂을대’ 하나를 더 사는 것으로 총포사에서의 일을 끝내고 나왔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의 박 만석은 표정이 한층 밝아져 있었다.
늘 그러 듯, 카셋 음악을 틀어놓더니...
“이 노래 가락이 멋지잖여?” 라고 묻기도 하면서,
“미스 고~” 하기에,
기로는,
“그 놈의 도둑고양이나 빨리 잡읍시다!” 하고 큰 소리로 웃어버렸다.
요즘 둔터니엔 개 만한, 큰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온통 마을을 휘젓고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돌아오는 길에 ‘구의’ 농협을 들러 닭 사료 다섯 포대를 사서 싣고 오는데,
기다렸다는 듯...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돌풍을 동반한 굉장한 소나기였다.
그러다 보니 트럭 뒤 칸에 실었던 닭 사료가 문제였다. 어딘가에 멈춰서, 단속을 하며 옮겨 실을 수도 없게끔... 비는 앞이 안 보이도록 쏟아지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겨우 한 나들목 굴다리에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에 차를 세워놓고...
바깥에 실려 있던 사료를 좌석 뒷칸으로 옮겨 실을 수 있었다.
다행히, 생각보다는 많이 젖어있지 않았다.
그렇게 둔터니에 돌아오니 오후 네 시경이었는데, 저녁 같이 어두웠다.
그래서 총 사격 연습은 내일 하기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박 만석은 또 당연히(?) 기로에게 저녁을 먹고 가라고 잡았지만, 너무 이른 시각이어서... 사양하고는 돌아왔다.
그런데 기로가 ‘夢想?’에 막 돌아왔는데,
“빵!” 하고, 총 소리 한 발이 울렸다.
‘무슨 일인가? 그 양반, 그 새를 못 참고 또 총을 쏜 것인가? 아무튼 못 말리는 양반이다......’ 하면서 기로는 다시 웃고 말았다.
그렇게 내렸던 소나기와 센 바람에, 코스모스는 많이 쓰러져있었다.
‘그나마 이제야, 여기저기 꽃망울을 맺고 있었는데... 아, 다시 일으켜 세울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랬다간 다 부러져버릴 테니까......’ 하고 한숨까지를 쉬다가, 기로는 개에게 밥을 챙겨주었다.
날씨가 쌀쌀한 게 작업하긴 좋은 기온이어서, 기로도 저녁을 일찍 먹고 자기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런데 7 시 경에 박 만석의 전화가 왔다.
저녁밥을 먹으러 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저는 이미 저녁을 먹어서, 안 가겠습니다.” 하자,
“와서 또 먹으믄 되잖여?” 하고 난리였다.
‘좌우지간 이 양반을 어찌해야 옳담?...’ 하다가 기로는,
“어쨌든 오늘은 안 가겠습니다.” 하다가, “근데, 아까 난 총소리는 뭐였지요?”하고 물으니,
“응, 그 도둑고양이를 쐈는디, 안 맞은 거 같여...” 하는 것이었다.
‘허기야 그 총은, 아직 정확한 본인의 영점이 잡혀있는 게 아니라서...’하고 있는데,
박 만석은,
“겨울에 흰 눈이 오믄, 장씨허고 이 근방의 산에 올라... 꿩을 잡아 볶아서... 소주도 한 잔 혀야지?” 하는 말로는,
아마 머릿속에 그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
허기야 기로 역시 박 만석의 말에 따라, 그런 그림이... 그려지고도 있었다. 그래서 기로는 다시 큰소리로 웃었다.
“그럼 내일 봐, 잉?”하고, 기로의 반응 같은 건 관심에도 없다는 듯 전화를 끊는 박 만석이었다.
‘아이고, 이 양반을 어쩐다냐?..’ 하고 혼자 웃을 수밖에 없었다.
흐린 하늘에 날씨는 쌀랑했다.
기로는 작업 방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 쓰러져 잠이 들었다가, 다시 일어나 앉았다.
그러기를 두세 차례 반복하다 보니, 머릿속이 몽롱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상태로 무슨 작업을 한다고?’ 짜증까지 내는데, 순간... 기로의 머릿속을 스치는 게 있었다.
그래서 바로 스케치북에 형상을 옮기고 붓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