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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쌍봉사 |
입력시간 : 2009. 09.15. 00:00 |
건립 1천여년 넘는 유서깊은 고찰
목조탑·철감선사탑·탑비 등 광채
해상왕 장보고 전설도 깃들어 있어
가을 초입, 늦은 오후 쌍봉사 찾아가는 시골길은 너무 조용하다. 들녘엔 알곡들이 무르익어가고 하늘빛도 투명하다. 동화 속 그림 같은 시골 교회당. 담장 사이로 비집고 자란 넝쿨 호박이 탐스럽고 몇몇 인가에서는 굴뚝에 연기가 하늘 하늘 피어오른다.
화순군 이양면 증리 사동마을로 진입해 쌍봉사 주차장에 이르면 코앞이 해탈문이다. 절의 앞과 뒤로 두개의 산봉우리 솟아있어 쌍봉사라 한단다. 절 마당에 들어서면 꽉 차있어야 할 당우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텅 비어있는 마당이 허전하다. 대웅전, 명부전, 극락전과 새로 지은 요사채만 남아있다. 그러나 눈을 돌려 보면 고적함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찬란한 광채는 3층 목조탑(10m)과 철감선사탑(국보 제57호)과 탑비(보물 170호)에서 비롯된다. 법주사 팔상전과 같은 목조탑 양식을 하고 있는 쌍봉사 3층 목조탑을 조선시대에는 삼층전으로 불리었고 근래에는 대웅전이라고 한다.
1962년 해체·복원공사에서 이 목조탑의 원래 형태는 보통 석탑 양식과 같은 사모 지붕이었음이 판명됐다. 각층의 옥신은 4면이 한 칸 벽면을 이루고 그 위로 처마 밑에 받친 공포 들은 1층은 3출목(三出目), 2·3 층은 2출목(二出目), 공간포(空間包)는 초 층과 2층이 2개씩, 3층은 1개를 배치했다. 내부 초 층에는 마루를 깔고 불단(佛壇)을 안치했으며 천장은 우물천장을 가설했다. 복원공사 당시 마루도리에서 1724년(경종 4)에 삼중창(三重創)하였을 때의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현재의 대웅전은 1986년에 복원된 것이다.
쌍봉사는 통일신라 말인 800년대 초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정조 때 보수 기록에 따르면 절 집의 칸수가 400여 칸에 이른다고 해 대찰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허나 1597년 정유재란과 6.25때 대부분 건물이 소실되고 말았으며 1984년 3층 목조탑 대웅전이 소실됐다.
일설에 의하면 조선 말기 이 절에 잠시 머물던 천봉 스님이 제자들에게 “이 대웅전이 세 번 칡덩굴로 덮어야만 법당에 목탁소리가 그치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한다. 큰 난을 세 번 겪어 이 절이 비어버린 다음에야 쌍봉사가 융성하리라는 뜻이다. 스님의 예언처럼 6.25동란까지 세 번이나 이 사찰의 대웅전이 칡덩굴로 덮였다.
지금은 3층 목탑 양식의 대웅전(보물 제 163호)과 극락전, 명부전과 요사채만 남아있어 조금은 초라해 보인다.
철감선사는 사찰을 둘러싼 지형이 범주(帆舟) 형이므로 돛대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으로 대웅전을 부득이 삼층 목조건물로 높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3층 목조탑 앞에 있는 안내문에는 1984년 화재가 났을 때 당시 마을에 살던 할아버지가 불길을 뚫고 들어가서 석가삼존과 현판 글씨를 구해 냈다는 소개 글이 있다.
이 불상은 힘센 사람 몇 명이 합세해도 들어 올리지 못할 만큼 무거웠는데 힘없는 노인네의 팔목에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참으로 아리송하다.
대웅전 뒤 왼편으로 이어진 대숲을 감돌아 오솔길로 오르면 야생 차나무가 여기저기 많이 심어져 있다. 철감선사가 퍼뜨린 텃밭이다.
철감선사탑(국보 제57호), 철감선사탑비(보물 제170호)가 나란히 보인다.
철감선사탑과 탑비는 문양의 조각이 가히 신공(神功)이라 할 수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찬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철감선사의 탑비에서 반드시 보아야할 것이 있다. 기단 부 아래에는 구름과 용, 사자를 양각했고 윗부분에는 연꽃과 가릉빈가를 새겼다. 가릉빈가는 부처의 소리를 전하는 호성조(好聲鳥)·묘음조(妙音鳥)·미음조(美音鳥)로 상반신은 인간, 하반신은 새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불가의 상상의 새다.
철감선사 부도의 가릉빈가는 특히 비파, 나팔, 장구, 바라 등 저마다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어서 음악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지만 원래 의도하는 깊은 뜻은 그 소리가 사방 세계에 두루 미치어 교화에 이르게 한다는 표현을 담고 있다. 비의 몸돌에는 자물통이 달린 문비(門扉)가 새겨져 있고 그 좌우로 배흘림기둥들 사이에 각각 사천왕상과 비천상이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 한 우아한 선으로 새겨져 있다.
이렇듯 장식미의 호화찬란하게 극치를 이룬 것은 신무왕의 외손자이자 문성왕의 생질인 경문왕은 당시 사회적으로 남도의 절대적인 신진세력의 도움을 얻어 태평의 시대를 누리고 있었음은 바로 청해진 장보고와의 관계를 들여다 보아야한다. 장보고는 김우징을 신무왕에 오르게 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신무왕은 그를 감의 군사(感義軍使)로 삼고 식실봉이천호(食實封二千戶)를 봉하였으며 신무왕이 죽은 뒤 문성왕에 의하여 진해장군이 됐다.
840년(문성왕 2) 당나라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를 보내어 교역을 활발히 하였던 장보고의 해상세력과 도윤과의 인연도 중국에서 해상군단의 중국 내 활동거점으로서 신라의 승려 30명이 상주했던 법화원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그 후 자신의 딸을 문성왕의 왕비로 들이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신라조정에서는 이에 불만을 품고 장보고 세력이 반란을 도모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염장을 보내 암살하자(846년), 이를 계기로 장보고와 관계가 깊었던 선사들이 서남지역으로 몰려들어 선문을 개설해 선지(禪旨)를 전파함으로써 서남권의 새로운 산문의 중심축을 형성해가자 조정에서도 이곳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
장보고 암살이후 불붙을지도 모르는 분쟁의 씨앗을 달래기 위한 특별한 배려 조치로 선사들의 각별한 배려에 힘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경문왕 자신도 도윤의 교화에 귀의해 정신적 지도자로 추앙해 왔기에 결코 소홀히 대할 수 없었음을 반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철감선사(798~868)
속성은 박씨. 휘(諱)는 도윤, 법호는 쌍봉(雙峰), 한주(漢州-황해도 봉산) 호족 집안으로 원성왕 14년(798)에 출생했다.
도윤(道允)은 18세에 김제 귀신사에 출가하여 10년 동안 화엄학을 익히고 나서 28세 때인 825년(헌덕왕 17) 사신 행차의 배를 타고 당나라에 가서 지주(池州) 남천 보원( 748∼834년)선사에게 법을 받아 공부를 마친 뒤 문성왕 9년(847) 4월에 50세 나이로 귀국선에 오른다. 귀국 후 금강산 장담사에 머물다가 문성왕 17년(855) 무렵에 법을 펼칠 도량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살피다가 우연히 지금의 이양면 증리 마을에 있는 중조산을 찾게 되었다. 산수를 살펴보니 용이 구름을 타고 하강하는 기상임을 알고 이곳에 사자산파(獅子山派)를 창건하여 신라 선문구산의 하나를 이루었으며 뒷날 그의 제자 절중에 의해 영월 흥녕사에서도 사자산문을 열게 된다.
도윤은 860년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무등산 기슭에 자리한 증심사(신증 동국여지승람에는 징심사로 기록)를 개창하였으므로 이 사찰에서는 오래 주석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도윤은 경문왕 8년(868) 4월18일에 입적했으며 왕은 철감선사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교통안내(승용차 편)
화순읍-화순중앙병원사거리-(오른쪽)―(국도29호)―능주-춘양-이양-보성방면-
-매정리-쌍봉사 표지판-쌍봉사.
사진/ 1.2.3.4.가을 초입 고즈녁한 산곡에 둘러쌓인 쌍봉사 전경과 해탈문.
5.부도전으로 올라가는 산길.
6.7.8철감선사탑과 탑비, 그리고 그 탑비에 새겨진 정교한 문양.
9.10.대웅전 불상과 종각.
무등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