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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하남대원수 금영월이 직접 이끄는 대군은 벌써 보름간 천수교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천수교에 도착하면 곧바로 호도(好都)로 진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1만 5천의 반란 진토인들이 밀림에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천수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5천의 선발대가 그들의 매복에 걸려 돌아온 자가 열 몇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금 대장군, 이대로 여기서 시간을 보낼 수만은 없습니다. 다소간의 피해를 각오하더라도 대군을 몰아쳐 호도를 탈환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호도를 치고 주변을 정리하면 기반을 잃은 반란 진토인들은 지리멸렬할 겁니다.”
“….”
금영월은 제장들의 재촉에도 별 말 없이 라혼 참장이 주고 간 지도를 뚫어져라 노려보기만 했다. 제장들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듯하지만 라혼 참장이 보고한 대로 후선의 강무세가가 반란 진토인 뒤에 있다면 밀림을 집으로 생각하는 진토인들은 두고두고 우환거리가 될 것이 뻔했다. 금영월이 생각하기에는 호도를 공략하는 것보다 1만 5천이나 되는 진토인 무리를 토벌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만약 그들을 그대로 두고 호도를 공략한다면 호도에서 봉수성으로 가는 길이 끊기는 최악의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였다.
“대장군, 강무세가가 진토인들에게 얼마간 지원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계속 유지될 리 없습니다. 원주 조정은 물론 갑주와 임주, 경주에서도 대군이 모병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적 강무세가는 주력은 앙신성에 묶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밀림에 숨어 있는 반란 진토인들은 그 수가 너무 많습니다. 1만이 넘는 대군을 먹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으음….”
부관 정령(正領) 작도인(鵲途認)과 정령 상초(狀初)의 지속적인 설득에 금영월도 어떻게든 움직여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러나 천수교에서 호도까지 이어진 다소 좁은 관도가 마음에 걸렸다.
“대장군, 정찰병이 돌아왔습니다.”
“들라 해라!”
금영월의 고민이 계속되는 가운데 마침 정찰병이 돌아왔다고 하자 반가운 마음으로 그를 불렀다.
“충! 대장군, 적의 대군이 열네 마리의 코끼리와 수만 대군을 이끌고 이라이 초지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이라이 초지?”
금영월은 이라이 초지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지도에 눈길을 주며 이라이 초지의 지형을 살폈다. 이라이 초지는 천수교와 호도 사이에 있는 거대한 평원이었다. 그러나 그 평원에는 사나운 맹수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어 사람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군이 회전(會戰)을 벌이기에는 그만한 곳이 없었으며, 또 거의 유일한 곳이었다. 수만 대군이 맹수를 무서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대장군!”
“천수교에 1만을 두고, 전군을 몰아 이라이 초지로 간다. 걸어온 싸움을 피할 이유는 없겠지.”
“존명!”
금영월의 명이 떨어지자 4만 대군이 천수교를 떠났다. 숨어 있는 진토인들은 무섭지만 드러난 진토인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천수교 동안(東岸)에서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대군을 멀리서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머리는 새의 깃으로 장식하고 붉고 검은 물감으로 얼굴에 줄을 그린 열지족 전사는 천수교에서 더 이상 대열이 빠져나오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 더 이상 문밖으로 나오는 군사가 없자 몸을 움직여 밀림 안으로 스며들었다. 빠른 속도로 밀림을 달리던 열지족 전사는 서너 명의 열지족 전사들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했다.
“초가님 말대로 4만에서 5만 대군이 천수교를 빠져나왔습니다.”
“천수교에 남아 있는 관군은 얼마나 되나?”
“그것은 알 수 없지만 천수교 다리를 끊는 데는 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곧 마지막 우기(雨期)가 시작되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포로로 잡혔던 치욕을 반드시 갚아주리라!”
***
“검은 곰과 회색 늑대의 후예들이여… 이제 긴 잠에서 깨어날 때다.”
―와아와아~!
―크앙~!
―아우우우~!
끝없이 펼쳐진 대초원을 가득 메운 곰 인간과 늑대 인간들… 그리고 그들의 가죽을 몸에 두른 곰 숭배자들과 늑대 숭배자들이 바로 흑막을 지배하는 웅랑교(熊狼敎)의 교도들이었다.
“들어라! 저기 중원에 들어가면서 초원을, 바람을 잊은 무리들은 타락하고 또 타락했다. 이제는 우리 진한 붉은 피를 지닌 곰과 늑대가 천하의 주인이 될 때가 왔도다.”
―와아와아~!
―크앙~!
―아우우우~!
“들어라! 신룡 앙(殃)이 우리와 함께 있어 이것은 곧 천명(天命)이니 곰과 늑대의 시대가 오리라!”
―카오~!
웅랑교 대종사(大宗師) 낭재천(狼在天)은 드넓은 초원 너머까지 울리는 대낭후(大狼吼)를 터뜨렸다. 그렇게 출정식을 마친 웅랑교 3만 교도들은 흑막 제일 성시(黑幕第一盛市) 제평(齊平)을 향해 일제히 진군을 개시했다.
***
불새의 무녀 가니아는 스스로 토지신 마을에 남길 원했다. 만약 자신이 세상에 나선다면 세상이 그로 인해 더욱 시끄러워질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평생을 동굴이나 집 안에서 활동하거나 명상, 사색을 즐기던 가니아였기에 불편함은 없었다. 게다가 말로만 들었던 불새의 깃털은 가니아의 호기심을 자극했기에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가니아를 라혼이 찾아오자 가니아는 자신의 평정이 깨질까 두려웠다.
“오셨습니까? 라혼.”
“오랜만이오. 지내기엔 괜찮소?”
“예, 이곳 토지신들이 제가 불새의 무녀인 것을 알고 이것저것 챙겨주어 불편함은 없습니다.”
라혼은 여전히 고아하고 정결한 분위기의 가니아를 보고 남례성의 진토인들이나 드워프들이 그녀를 함부로 못하는 것을 이해했다. 아마도 그녀를 가장 함부로 다루는 자는 라혼 자신이 유일할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카쿤!”
“예! 아이쿠!”
드래곤이 가니아를 찾아오자 카쿤은 드래곤의 시야에서 벗어나 둘의 대화를 엿듣고 있다가 드래곤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허겁지겁 나오다 돌로 만든 탁자에 부딪혀 무릎에 상처가 생겼다.
“저런, 조심하지 않구.”
“가니아.”
가니아가 쓰러진 카쿤에게 다가가 상처가 나서 피가 배어나오는 곳에 두 손을 모았다. 그러자 그렇게 밝지 않은 온유로운 하얀빛이 카쿤의 상처를 감싸더니 이내 상처와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고맙습니다, 가니아.”
“카쿤!”
“예, 위대한 분이시여….”
“햇볕이 음습한 지하는 사람에게 좋지 않다. 가니아가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곳이 없나?”
카쿤은 라혼의 질문에 뭔가 궁리하는 듯하더니 라혼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적당한 곳이 있기는 한데 그곳은 트롤 왕이 사는 곳이라.”
“트롤 왕?”
“예, 원주민들이 귀매왕(鬼魅王)이라고 부르는 엄청난 거인(巨人)이에요. 그곳의 외부로 통하는 입구가 좁아 덩치 큰 트롤 왕이 빠져나가지 못해 귀왕곡(鬼王谷)에 갇혀 있어요.”
“좋다. 안내해라!”
“예? 제가요?”
카쿤은 드래곤에게 그 계곡에 대한 것을 가르쳐준 것에 대해 후회했다. 하지만 당장은 눈앞에 있는 드래곤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 무서웠으니 어쩔 수 없이 안내해야만 했다. 드워프 마을은 그린 드래곤 드라오디프가 이곳에 둥지를 틀면서 그가 지슈인드 고원에서 잡아온 드워프들이 모여 만든 마을이었다. 드라오디프는 드워프뿐만 아니라 트롤들을 잡아다 자신의 레어 주변에 풀어놓고 그중 몇을 골라 마법을 걸어 훨씬 크고 훨씬 수명이 길며 강한 트롤을 만들어 가디언으로 삼았다. 귀왕은 마지막으로 남은 그 거대화된 트롤들의 후손이었다. 즉, 카쿤이 말한 귀왕곡은 다름 아닌 드라오디프의 레어가 있던 바로 그곳이었다.
“이곳인가?”
“예.”
귀왕곡은 숲과 나무를 좋아하는 그린 드래곤의 둥지답게 거대한 나무숲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게다가 솜씨 좋은 정원사가 손질을 계속한 듯 무성하지 않고 나무의 생장에 방해되는 모든 것이 제거되어 있었다. 그리고 숲의 중심이 귀왕곡 내부로 갈수록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나무들이 있었는데 둘레가 족히 10장(丈 : 1장은 대략 어른 키 한 길)은 되어 보이고 키 또한 40장(丈)이 되는 거대한 나무들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그것은 라혼과 카쿤이 숲의 내부로 들어오자 더욱 확실했다. 나무와 나무 사이는 상당히 넓게 떨어져 있어 하늘을 찌를 듯한 나무들이 있는 숲인데도 햇볕이 잘 들었다.
“이곳이 귀왕림(鬼王林)인가?”
“예? 어떻게 아셨어요?”
“그럴 것 같더군. 그런데 정작 트롤 왕은 보이지 않는데?”
―꾸어어어어어어~!
바로 그때 숲 전체를 울리는 괴성이 들려왔다. 거대한 포효가 소용돌이치자 카쿤은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며 떨기 시작했다.
“미약하기는 하지만 피어 크라이(Fear cry)로군.”
라혼은 카쿤을 떨게 한 괴성에 드래곤 특유의 피어가 섞여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라혼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았다.
―나와랏!
―쿠릉~!
―샤사사사사사 샤아~!
라혼이 피어 크라이(Fear cry)에 맞서 대사자후(大獅子吼)에 피어(fear)을 섞어 외치자 숲 전체가 요동치며 울부짖는 듯했다.
―꾸어어어어어어~!
라혼의 말(?)에 답이라도 하듯 괴성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미약하게 지축이 흔들렸다.
―꾸어어어어어어~!
―쿵쾅, 쿵쾅, 쿵쾅, 쿵쾅, 쿵쾅….
그리고 라혼 앞에 나타난 것은 키가 5장(丈) 정도 되어 보이는 커다란 집채만한 트롤로, 자기 덩치보다 더 큰 곤봉을 든 위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꾸어어어어어어~!
―훙~!
엄청난 풍압을 동반한 거대한 곤봉이 바람을 가르며 라혼과 카쿤이 있는 자리를 내리 찍어왔다. 카쿤은 엄청난 귀왕의 모습에 넋이 나가 꼼짝하지 못했고, 라혼은 곤봉이 만들어낸 풍압을 느끼며 끝까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쿵!
귀왕이 휘두른 자기 머리통보다 큰 곤봉의 머리가 반이나 땅에 박히고 그 충격에 주변의 거대한 나무가 흔들렸다. 그러나 귀왕은 흉포한 괴성을 다시 내지르며 땅에 박힌 곤봉을 잡아 뺐다. 곤봉 아래에서 피떡이 되어 형체도 없이 부서져야 할 침입자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난쟁이 꼬마를 옆구리에 끼고 땅에 박힌 곤봉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꾸어어어어어어~!
―훙~!
라혼은 귀왕이 곤봉을 거칠게 들어올리자 몸을 허공에 띄우며 카쿤를 나무 위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동시에 아라한 격투술 강격(强擊)을 내질렀다.
―파캉!
대기가 찢기는 강격 특유의 소리가 나면서 귀왕의 복부에 작렬했지만 귀왕은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거대한 곤봉으로 허공에 떠 있는 라혼을 후려쳐왔다.
―꾸어어어어어어~!
―훙~!
“블링크Blink!”
거대한 곤봉은 허공을 가르며 지나갔고, 라혼은 다시 귀왕의 등뼈 급소에 해당하는 부분에 다시
한 번 강격을 시전했다.
“강격!”
―파캉!
―크아아아~!
성기력(聖氣力)이 충만한 강격은 귀왕의 등뼈에 작렬하고 귀왕은 다시금 엄청난 충격이 등을 때리자 참지 못하고 푸른 피를 토해냈다. 그러나 귀왕의 동작은 전혀 굼뜨지 않았다. 바로 뒤로 돌아서며 곤봉을 휘몰아쳤던 것이다. 카쿤은 까마득한 높이의 나무에 매달려 거인과 싸우는 라혼의 모습을 구경했다. 그 드래곤이 본신으로 화하지도 않은 채 거인 귀왕을 맨손으로 때려잡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처지를 잊고 싸움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만천유성권(滿天流星拳)!”
―휘루루루룽….
―우르릉~!
―빠바바바바바바….
금강만천유성권(金剛滿天流星拳), 뇌정지기(雷霆之氣)의 다른 이름인 금강의 공력이 깃든 라혼의 권력이 선풍신법(颴風身法)가 함께 펼쳐지자 귀왕을 중심으로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일며 웅혼한 뇌성(雷聲)과 거친 바람이 사위를 휩쓰는 가운데 마치 콩 볶는 듯한 소리가 섞여 들여왔다.
―뀌에엑~!
귀왕은 침입자가 전신을 난타하자 고통에 겨운 괴성을 지르면서도 거대한 곤봉을 휘두르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는 곤봉이 미치지 않는, 너무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그것은 고통에 겨운 몸부림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라혼은 체술(體術)만으로 귀왕이란 거대한 트롤 거인을 상대하는 것을 포기하고 마법을 시전했다.
“매스 매직 미사일Mass Magic missile!”
―파바바바바바….
[매직 미사일Magic missile]에 대량 주문 [매스Mass]를 조합한 조합 마법 [매스 매직 미사일Mass Magic missile : 대량 매직 미사일]이 [매직 미사일Magic missile] 특유의 하얀 빛살을 타고 귀왕을 난타하기 시작했다. 라혼이 이렇게 약한(?) 기술을 사용하는 이유는 귀왕을 죽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라혼에게는 영인(靈刃) 소울 블레이드(Soul blade)도 있었고, 에텔 스페이스를 이용한 궁극기(窮極技)인 무한(無限)의 검(劍), 인피니티 소드(Infinite sword)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 제어가 확실히 되지 않는 그런 큰 기술을 쓰면 트롤 왕이 견디지 못할 것이고, 대단위 마법을 사용하면 숲이 다칠까 싶어 되도록 자제했다. 하지만 이런 약한(?) 공격으론 귀왕을 제압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필요는 언제나 발명과 발견의 어머니다. 라혼은 퍼뜩 떠오른 생각을 실천했다.
“마음속의 검이 있고 영혼의 검이 영혼을 치리니, 그것이 영인(靈刃)의 오의(奧義)다.”
라혼은 마음의 검(心劍)으로 귀왕의 마음을 베어갔다.
―꾸웍?
귀왕의 전신을 난타하는 [매직 미사일Magic missile]이 멎고, 광분하던 귀왕도 넋이 빠진 듯 칠공에서 푸른 피를 흘리며 곤봉을 휘두르는 것을 잊었다.
―사아아아아~!
나무 위에 있던 카쿤은 아까까지 들려오던 귀왕의 괴성과 콩 볶는 소리가 멎고 숲을 휘감는 바람 소리만 들려오자 숨을 멈추며 질식할 것 같은 침묵에 가위눌렸다. 그리고 거대한 귀왕이 무너지듯 스러졌다.
―쿵! 촤아아아~!
“성공이다. 후후후, 이거야! 나는 또다시 새로운 경지를 보았다. 하하하하하하하하….”
그리고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은 희열에 찬 라혼의 웃음소리가 거대한 나무숲 사이로 넓게 퍼져나갔다. 라혼의 약점은 깨달음의 순서가 뒤죽박죽이란 것이었다. 차근차근 역량을 쌓아올린 것이 아니라 힘을 먼저 얻고 그 힘을 다루는 법을 뒤에 배웠다. 그러나 칸 대륙에 와서 깨달은 것은 같은 힘이라 할지라도 훨씬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무예이고 무공이었다. 그러나 라혼의 경우는 엄청난 힘을 주체하지 못해 제어하는 데 급급해 힘이 낭비되는 요소가 많았다. 그러나 많은 기술과 무공도 라혼에게 있어 참고는 될지언정 진정 필요한 것은 없었다. 효과적으로 다루는 힘의 크기가 작아 라혼이 그대로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른 것이었다. 작은 내가 흙만으로 막을 수 있다고 큰 강이 똑같이 생각하면 흙으로 만든 둑은 금세 무너질 것이 뻔하듯…. 그러나 이제 라혼은 심검(心劍)의 한 부분을 깨닫고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말은 힘의 제어가 더욱 용이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라혼으로서는 더욱 강해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한동안 그렇게 시원스레 크게 웃던 라혼은 격공흡인(隔空吸引)의 능공섭물(綾空攝物) 수법으로 수십 장 위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카쿤을 내려주고 귀왕의 머리꼭대기 백회혈(百會穴)에 장심(掌心)을 붙인 다음 진기(眞氣)를 주입했다.
―크르르르르르….
그러자 귀왕의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이내 눈을 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갑자기 몸을 일으켜 옆에서 라혼이 하는 양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카쿤의 쪼그라든 간을 떨어지게 하지는 않았다.
“소울 토크Saul talk!”
“….”
라혼은 [소울 토크Saul talk : 영혼의 대화] 주문으로 귀왕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전해지는 것은 극도의 두려움뿐이었다. 라혼은 영혼으로 전해지는 깊은 두려움과 외로움 그리고 혼란을 느끼다가 자신이 발휘한 새로운 심검 영인(靈刃) 소울 블레이드에 흉험한 살기가 짖게 배어 있음을 알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아직 라혼이 미숙하다는 증거였기 때문이었다. 라혼은 귀왕에게 자신이 그를 해칠 의도가 없음을 전하고 이곳에 온 목적을 전했다. 부드럽기 그지없는 기운에 다소간의 두려움을 거둔 귀왕은 자신이 태어나 지금까지 기억하는 모든 것을 전해주었다.
트롤, 귀매의 왕이라 불린 거대한 트롤은 그린 드래곤 드라오디프가 잡아 그의 레어를 지키는 열두 마리 거대화한 트롤의 마지막 남은 후예였다. 트롤들은 그린 드래곤 드라오디프의 명령에 따라 숲을 가꾸고 침입자를 막는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원래 드래곤이 죽으면 그 드래곤에 속한 족속들은 해방되지만 미숙한 그린 드래곤 드라오디프는 가디언들을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자기 피의 일부를 이식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 때문에 가디언 트롤들은 드라오디프의 레어였던 이곳을 떠나지 않고 숲과 나무들을 가꾸며 지켜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거대화된 트롤들은 그 종(種)을 번성시키지 못해 결국 귀왕 홀로 남게 된 것이다.
라혼은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없었지만 귀왕의 고독과 두려움, 신념 등을 읽고 이내 [소울 토크Saul talk] 주문을 거두었다.
“휴우~! 이 주문은 쓸 것이 못 되는군. 다른 존재의 두려움이나 괴로움을 함께 느끼게 하면서 정신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라니….”
라혼은 처음 사용한 [소울 토크Saul talk]의 부작용에 한껏 들뜨던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자 고개를 저었다. 다른 영혼이 느끼는 그대로 느끼는 것은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그리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어느 정도 지능이 있는 것 같지만 야성이 있으니 안전장치를 해두어야겠지.”
라혼은 귀왕곡에 가니아의 거처를 마련해주기로 했다. 그리고 귀왕으로 하여금 가니아를 보호하게 하기 위해 그의 야성을 일부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라혼에게는 아주 유용한 방법이 있었다.
“은섬충은 되도록 사용하지 않으려 했는데 어쩔 수 없군.”
라혼이 에텔 스페이스에서 동면하듯 자고 있던 은섬충(銀蟾蟲)을 꺼내 귀왕의 납작한 코 부근에 놓자 잠에서 깨어나 꿈틀거리던 은섬충은 귀왕의 콧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라혼은 귀왕에게 명령했다.
“일어서라!”
“꾸워?”
잠깐 라혼의 명령을 알아듣지 못하던 귀왕은 이내 라혼이 뭘 원하는지 깨닫고 거대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흐엑~!”
귀왕이 몸을 일으켜 세우자 이때까지 라혼이 하는 양을 구경하던 카쿤은 크게 놀라 자신도 모르게 라혼 뒤에 서서 더 무시무시한 드래곤의 옷자락을 잡았다.
“숙여라!”
“꾸워.”
라혼은 [토크 몬스터Talk monster] 마법으로 바로 의사를 전달하여 귀왕을 숙이게 하고 카쿤을 데리고 귀왕의 어깨에 올라섰다.
“드래곤의 레어로 가자!”
“꾸워?”
라혼은 귀왕이 자신의 명령과 이곳의 본 주인이었던 드래곤의 명이 상충되자 무척 혼란스러워했다. 라혼은 그런 귀왕에게 다시금 심검으로 자신의 명령이 다른 무엇보다 최우선적이 되도록 각인(刻印)시켰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명령했다.
“드래곤의 레어로 가자!”
“꾸워.”
―쿵, 쿵, 쿵, 쿵….
라혼의 명령에 이번엔 아무런 혼란 없이 육중하기 그지없는 발걸음을 떼어 거대한 나무숲 사이를 걸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거대한 동굴이었다. 바로 그린 드래곤 드라오디프가 생전에 사용하던 레어였다. 라혼은 거침없이 주인이 없는 레어가 있는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은 의외로 깊지 않았다. 사실 이 귀왕림 전체가 레어나 다름없으므로 이곳은 단순히 거대한 드래곤의 몸을 누이는 곳이리라.
“희엑~! 드래곤이다.”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라혼을 따르던 카쿤은 거대한 지하 광장을 연상시키는 레어 한쪽에 누워 있는 거대한 도마뱀을 발견하고 기겁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드래곤의 사체(死體)였다. 모르긴 몰라도 충성스런 가디언인 귀왕의 선조가 옮겨다 놓았을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어찌 되었든 라혼의 입장에선 횡재나 다름없었다.
“체액은 모두 대기로 흩어졌지만 본(bone)은 거의 그대로잖아. 이게 뜻밖의 횡재인걸.”
라혼은 귀왕의 어깨에서 내려와 드래곤 본(Dragon bone)을 둘러보며 혹시나 하는 생각에 목 부분을 뒤져보았다.
“역시 있다. 드래곤 하트(Dragon heart)다.”
본래 크기보다 훨씬 작았지만 틀림없는 드래곤 하트였다. 그리고 라혼의 신나는 드래곤 레어 탐험이 시작되었다. 드래곤 본과 드래곤 하트가 그대로 있다면 드래곤이 생전에 모아두었을 마법 아이템이나 보물들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라혼은 상당한 양의 금(金)과 보석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황금으로만 2백만 관(貫)에 양(量)으로 따지만 2천만 냥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에 보석은 그보다 훨씬 적었지만 보석의 가치를 생각해볼 때 대략 황금과 비슷한 수준일 것이다. 라혼은 모든 황금과 드래곤 본을 에텔 스페이스에 집어넣고는 귀왕에게 물었다.
“마법이 걸린 물건이 없는데, 그것이 있는 곳을 아나?”
“꾸워? 꾸워.”
처음에는 라혼이 무얼 묻는지 알아듣지 못한 귀왕은 다른 드래곤의 재산이 있는 곳을 묻는 것으로 해석하여 레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귀왕이 도착한 곳은 작은 통나무집이었다. 그곳은 그린 드래곤 드라오디프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 머물던 집으로 1천여 년이 흐른 지금도 바로 몇 해 전 지은 것처럼 깨끗했다. 라혼은 집 안을 둘러보며 가니아를 이곳에 머물게 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집 안에는 공간 왜곡 주문이 걸려 있어 겉보기보다 내부가 열 배는 넓어 보였다. 그리고 상당수의 마법 아이템이 쏟아져 나왔다. 드래곤이 만든 물건이라 하나같이 훌륭하기 그지없었지만 라혼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물건은 없었다. 이미 라혼의 수준은 이곳의 주인이었던 그린 드래곤 드라오디프를 훨씬 초월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마법 속성이 걸린 무기는 무공을 수련하는 무인에게는 전혀 도움될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마나나 기(氣)가 약한 일반 병사들이 사용하기에는 무구에 걸린 마법이 너무 위력적이었다. 주문이 걸린 무기는 주문을 시전하는 데 사용되는 마나나 기를 사용자에게서 강제로 끌어다 쓰게 되어 있었다. 라혼은 그것을 마나석에서 끌어다 쓰게끔 할 수 있지만 마나석이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보다 다른 데 이용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흐음, 쓰레기들(?)이지만 마나 메탈로 만들어졌으니 녹여서 다른 것을 만들면 되겠군. 이건 또 뭐야. 무한 주머니잖아?”
여러 가지 조잡한(?) 물건들을 뒤적이던 라혼은 가니아를 데려오기 위해 다시 드워프 마을로 갔다. 그리고 드워프들에게 드래곤 본과 마법 물질로 만들어진 무구들이나 아이템을 건네주었다. 드워프들은 라혼이 건네준 물건들을 보고 크게 놀랐으나 카쿤의 말을 듣고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드워프들은 그동안 비어 있던 곳에 새로운 주인이 생겼다는 식으로 인식을 새로 하고 라혼을 영주(領主)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가니아! 귀왕은 이 숲을 가꾸며 이곳을 지키는 존재요. 그대의 명령을 따르게 해놓았소.”
“배려에 감사합니다.”
“아내의 선조일지도 모르니까, 당신은 내 가족이오. 이것은 나에게 연락할 수 있는 물건이오.”
라혼은 가니아를 귀왕림의 통나무집에 데리고 와 이것저것 챙겨준 다음 마지막으로 전환(傳環)을 주고 사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사흘간 가니아 곁에서 머물던 라혼은 써도 써도 넘치는 두둑한 자금을 확보하여 봉수성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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