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홍경모(洪敬謨, 1774년~1851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경수(敬修), 호는 관암(冠巖), 운석일민(耘石逸民).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조부는 이조판서를 지낸 홍양호(洪良浩)이고, 부는 홍낙원(洪樂源)이며, 모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사간원정언 이존원(李存遠)의 딸이다. 그는 정조(正祖) 때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경연에서 효경(孝經)을 강론하였고, 5언시를 지어 정조로부터 서책과 패향(佩香)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1805년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이 되었고, 181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1816년 시독관(侍讀官)으로서 홍문관(弘文館)에 장서가 없음을 개탄하고 계청(啓請)하여 『예기(禮記)』, 『주역(周易)』, 『퇴계집(退溪集)』 등을 간행하게 하였다. 그 뒤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이조 참의(吏曹參議)가 되었으나 관리등용의 실책으로 한때 법성첨절제사(法聖僉節制使)로 좌천되기도 하였다가, 1830년 중용되어 사은부사(謝恩副使)로, 1834년 진하사(進賀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헌종(憲宗) 때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예조(禮曹)·호조(戶曹)·병조(兵曹)의 판서(判書)를,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역임하였다. 그는 독서를 즐겨 장서(藏書)가 많았으며,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뛰어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