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1월 25일...
가요작곡가 나화랑 선생의 창작생활 40주년 기념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모임은 나화랑 선생의 회갑연도 함께 축하하는 모임이었는데, 그 자리에서 나화랑선생은 이렇게 이야기를 하셨다고 합니다.
"소생이 지난 40년동안 우리나라 대중가요 텃밭에 씨뿌린 한평생, 잘한일인지 잘못한일인지는 분간을 못하겠습니다.
나 자신이 미흡하기만 했던 욕심장이 였나봅니다. 저는 이제껏 오직 한길만을 전념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 생명의 심지가 다하는 날까지 가요창작에만 전념할것을 여러 동지들에게 다시한번 다짐해 봅니다..."
위 이야기에서 나화랑선생이 어떤분이신지 조금은 짐작하실것입니다.
1960년대 저음가수로 큰 인기를 한몸에 받았던 가수 남일해는 그의 회고록에서 나화랑 선생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나의 스승인 나화랑 선생은 음악적으로 대단한 실력을 지닌 분이십니다. 특히 편곡에 있어서는 그 당시로선 한발 앞서가셨던 분이셨습니다.
음이 섬세하고 서정성도 풍부하고 솜씨가 꼼꼼해 작품들에 개성이 뚜렸했습니다..." 라고...
나화랑 선생은 가수 조규찬의 아버지가 되시는데 왜 성씨가 "나氏"인지 의아할것입니다만, 선생의 본명은 "조광환"입니다.
1921년에 경북 금릉군 봉산면 인위동에서 태어나 김천읍에 있는 봉재보통학교에 다니셨었는데 그때부터도 이미 음악적 재능이 풍부한 소년이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바이올린을 혼자 배워 연주하기도 했고, 트럼펫도 독습으로 터득해 연주하곤 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큰형의 이름은 "조경환" 이신데, 1930년대에 인기가수 백년설이 불러서 큰 인기를 끌었던 나그네설움이라든지 마상일기, 어머님사랑, 비오는해관
등을 쓰셨던, 작사가이며 극작가셨던 고려성(예명)님의 본명이며 나화랑선생의 형님이셨던 겁니다.
그후 서울에 올라온 나화랑은 형이 몸담고 있었던 태평레코드에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많은 가수들을 만나면서 또다른 꿈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음악공부를 하고 싶다는 희망이었던거죠.
그래서 1940년 일본으로 유학의 길을 나섰고 동경에서 중앙음악학교 기악과에 입학하여 바이올린을 전공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 모두가 그랫듯이 혼자 벌어 공부하는 고학생의 생활은 너무나 힘든것이었습니다.
그는 학비를 벌기위해 4:1의 경쟁률을 뚫고 동경 동보가극단의 전속합창단원이 되기도 했었지만, 일본 유학생활 1년만에 귀국하였습니다.
학비도 문제였지만,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모든 물가 통제가 극심해진게 큰 이유였다고 합니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나화랑은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태평레코드에서 주최하는 신인가수 모집에 응시하게 됩니다.
당시 1등은 군산출신의 남춘역이 차지했고, 2등은 청진출신의 여가수 백난아, 3등이 나화랑 선생이셨습니다.
1등을 한 남춘역은 첫음반을 내 보았으나 인기를 얻지 못했고 그 후 악극단에서 연기자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리하여 50년대후반 조연급 배우로 성장해 성격배우로서 자신의 존재를 확고히 했었습니다.
그리고 2등을 했던 백난아는 아시는바와같이 취입하는 노래마다 힛트를 했었지요.
그러나 나화랑은 첫취입부터 가수로는 실패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가수의 길은 단념하고 가요작곡가로 등장하게 됩니다.
그의 첫번째 작품이 당시 신인가수 태성호가 불렀던 "삼각산 손님(고려성 작사, 나화랑 작곡)" 이었고, 또다른 작품이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을 주제로 한 노래였는데 이때부터 작곡가로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었습니다.
나화랑이 창작가요의 전성시대를 맞이하면서 8.15광복을 맞이하게 되는데, 나화랑은 고향으로 내려가 시골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일만으로는 뭔가 아쉬움이 많았는지 다시 서울로 올라와 서울레코드에 입사하게 됩니다.
당시 서울레코드의 전속가수로는 박경원, 원방현, 금사향과 그당시 신인가수였던 박재홍등이 있었습니다.
위에 언급했던 가수 남일해씨의 말처럼 음악세계에선 늘 남보다 앞섰던 나화랑선생의 작품들이 이때부터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1956년 송민도의 "행복의 일요일", "서울의 지붕밑", "웬일인지", "서귀포사랑", "푸른꿈이여 지금어데"등등 계속해서 인기가요를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또한 가수 도미의 "비의탱고", "청포도사랑", "사도세자"역시 그의 작품이었고, 향토가요라 할수있는 황금심의 "뽕따러가세"가 이색적인 노래로 그 해 최고의 인기 가요로 떠올랐었습니다.
1955년엔 새로운 리듬의 맘보선풍이 밀려왔었는데, 미국의 팝송인 체리핑크맘보가 유행하자 한국가요에도 그와 비슷한 노래들이 선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서도 나화랑 선생의 편곡솜씨를
자랑하는 "도라지맘보", 그리고 "닐리리맘보"가 아주 이색적이면서 사람들에게 크게 인기를 얻었었는데, 특히 닐리리맘보는 당시 거의 대부분의 국민들이 알 정도였지요.
하지만 그 해 1956년엔 형 고려성이 세상을 떠나게 되고, 그 후엔 "탁소현"이란 필명으로 계속 작품을 발표합니다.
즉 나화랑은 작곡가로서의 예명이었고 탁소현은 또다른 필명이었던 것입니다.
그후 송민도의 "해당화 피는마을"과 1958년엔 이미자의 첫취입곡 "열아홉순정"과 59년엔 남인수의 말기 취입곡 "무너진사랑탑", "울리는 경부선"등을 작곡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남일해란 신인가수를 발굴해 냈는데, 남일해의 첫 취입곡은 "비내리는 부두" 였으며 이어서 "이정표"등의 노래를 발표하게 됩니다.
계속해서 저음가수 남일해가 인기가수로서 주가를 올리게되는 노래들이 연이어 만들어지게 되는데, "찾아온산장", "나그네탱고", "종로부르스"등 계속해서
나화랑선생이 만들고 남일해씨가 노랠 부르면 모두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1960년엔 김상희에게 "울산큰애기"라는 노래를 취입시켜서 그 해 최고의 인기가요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나화랑선생은 영화음악분야에도 그의 섬세한 작곡실력을 발휘했는데, 1960년 박성복 감독의 "내마음의 노래",61년 강찬우 감독의 "밤은 통곡한다(최무룡,조미령등 출연)", 이강춘 감독의 "이순간을 위하여", 박성복 감독의 "이정표"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것은 나화랑선생의 독특한 성격가운데 하나가 완벽함을 추구한다는것이었으며, 자신의 작품을 절대 남에게 편곡을 맡기는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정도를 걸어온 작곡가라고 이야기할수도 있는데, 노래의 선율만 만듣고 작품전체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편곡을 제3자에게 편곡을 맡긴다는것은 합작이라고 생각한듯 합니다.
작곡가의 개성을 완벽히 표출하는것은 작곡과 편곡을 한 사람이 모두 완성했을때만이 표출되는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작품에 완벽성을 철두철미하게 지켜왔던 분이셨지만 예정된 일 이외에는 적응력이 없던 성격탓에 주위에 절친한 친구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1983년 11월에 접어들면서 병원에 입원하게된 나화랑선생은 그 달 17일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사랑은 즐거운스윙"등을 불렀던 가수 유성희씨가 그의 부인이셨으며, 그의 아들들도 아버지의 음악성을 이어받았는지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이 많았습니다.
세명의 아들은 "조트리오"를 만들어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며, 특히 3째 즉 막내아들 조규찬은 1989년 10월 제1회 유재하가요제에서 자작곡 "무지개"를 불러 대상을 차지하면서 본격적으로 가수가 되어 활동하게 되었고, 2004년 7월30일 가수 헤이(Hey)와 결혼해 살고 있답니다.
그리고 둘째아들은 전형적인 대기만성형 인기 작곡가 조규만. 그는 록 음악인으로 경력을 시작해, 형제 그룹 조트리오 활동을 통해 이름을 알렸으며, 현재는 최고의 발라드 작곡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본인의 대표곡인 ‘다 줄거야’를 비롯, 김민종의 ‘비원’, 이동건의 ‘나의 바램이 저 하늘에 닿기를’과 같은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냈습니다... -끝-
- 예전에 KBS의 "세월따라 노래따라"에서 들었던 내용을 정리해서 써 보았습니다. 독수리 타법으로 많은내용 일일히 글씨 쓰느라 꽤 힘들군요... ^^;;
첫댓글 탁소연은 나화랑 선생의 부인 이름을 사용한 예명입니다.
고맙습니다. 교수님..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