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이융기(李隆基).
시호는 명황(明皇)·무황(武皇).
치세중 당에 최대의 번영과 영화를 가져왔다.
현종은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아들인 예종(睿宗)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던 시기에
제국의 실권은
전적으로 측천무후의 손에 있었고
예종은 명목상의 황제에 지나지 않았다.
687년에
주공(周公)으로 책봉된 현종은
그녀가 제위를 찬탈한(690) 뒤인 693년 영주공(靈州公)으로 책봉되었다.
무후의 치세 말년에
현종은 궁중의 의전(儀典)담당직에 임명되었고
이로 인해 궁중내의 금위군(禁衛軍)에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705년
측천무후의 죽음으로
궁중에 복잡한 권력승계 투쟁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현종의 아버지인 예종이
710년 황제로 재등극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현종은
공로를 인정받아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712년
예종은 현종에게 제위를 계승했으나
야심만만한 태평공주(太平公主:예종의 누이)의 권유를 받아들여
태상황(太上皇)이 되었다.
이 직위는
일종의 섭정(攝政)으로서
고관직의 임명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고관직은 태평공주의 지지자들이 모두 차지했다.
713년
현종이 태평공주와의 권력투쟁에서 이기게 되자 공주는 자결했다.
현종은 황권을 완전 장악하게 되었고 예종은 은퇴했다.
현종의 치세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는 우선 관료조직을 대폭 개혁했다.
당시의 관료조직은
명목적·형식적인 관리들의 수가 지나치게 많아
크게 팽창되어 있었고,
그중에는 인정이나 공공연한 매관매직에 의해 임명된 자리도 상당수 되었다.
현종의 치세시에
매관매직은 금지되었고
황권, 효율적인 관료제도의 운영,
국가재정 등이 크게 회복되었다.
더욱이 측천무후가 뤄양에 거처하는 동안
황폐해졌던 대운하를 개수하여 가동시켰다.
사실 수도인 장안(長安)은
이 운하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티베트족·돌궐족·거란족에 대한 원정도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721년까지 지속된 초기 재임기간에
현종은
측천무후 때 과거로 선발된 고관들의 파당,
황족, 궁중관리, 황후의 인척들 등 세력 있는 집단들 사이에
절묘한 세력균형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행정부 내에 광범위한 개혁이 시행된 것은
720년부터였다.
중앙정부 기구가 완전히 개편되어
몇몇 고관들에 권력이 집중되게 되었다.
아울러 궁중 내 귀족세력들의 영향력이 증대되는 경향이 두드러져
721~737년에는
귀족들과 과거에 의해 등용된 전문 관리들 사이에
정치적 긴장이 계속되었다.
귀족세력들은
초기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던 폭넓은 재정개혁 조치들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
호구(戶口) 조사도
효율적으로 실시되어 상당한 숫자의 납세인구가 장부상에 등재되었고
세수(稅收)가 크게 증가했다.
화폐 주조도 개선되었고
운송시설도 효율적으로 개선되어,
황제는 더이상 기근을 피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장안과 뤄양 사이를 왕래하며
거처를 옮길 필요가 없어졌다.
황실의 수입도 증가하여
황제는 백성에게 금전적 부담을 주지 않고
북쪽의 변경지역에 상비군을 설치할 수 있었고,
치세 말기에는 그 군대의 규모가 60만에 달했다.
현종의 치세 후반에는
재정전문 귀족관료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점점 커졌다.
737년 이후에는
귀족계급을 대표하는 인물인 이임보(李林甫)가
사실상의 실권자가 되었고
귀족계급은 권력기반을 확고하게 잡았다.
740년 이후
현종은 정사를 돌보지 않아
실제적 관리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행정적 효율성을 더욱 크게 하기 위해 시행되었던 개혁조치들은
점점 더 정치적 균형을 파괴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대신들은
정부의 수반으로서 전례 없는 권력과 권위를 공식적으로 획득했다.
재정전문 관료들도
궁중의 호사스런 행사나 황제의 사사로운 낭비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백성들을 더욱 착취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737년 이후에는
북쪽의 변경지역을 지키기 위해 설치된 대규모의 지역군 사령부 진(鎭)들이
군사 부문 이외의 다른 분야에서도 폭넓은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또 지역 정부의 기능을 갖게 되었다.
740년대 후반에는
일부 절도사들이 엄청난 권력을 얻게 되었고
궁중 내의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다.
이들 중에 가장 중요한 인물이
이임보의 후원을 받고 있던 안녹산(安祿山)이었는데
그는 동북지역에 18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중앙정부는 이같이 강대한 군대에 대항할 수 있는 직할 부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편 현종은
점점 더 현실세계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예술 애호가였던 그는
궁중 아악원(雅樂院)을 설치했고
시인·화가·작가들을 후원했다.
더 나아가 도교 연구에 심취하여
당 황실의 시조가 도교의 창시자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현종은 가정문제로 고통을 받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수많은 비·빈 중 2명의 비에게 미혹되어 헤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중 한 사람은 무혜비(武惠妃)로서
720년대 초반에서부터 737년 죽을 때까지
현종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이임보가 출세가도를 달리도록 후견 역할을 했고,
그녀 자신이 낳은 맏아들을 황태자로 지명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몄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결국 그녀의 소생인 다른 왕자(후의 肅宗)가 황태자가 되었으나
그는 이임보를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현종은
또 다른 애첩 양귀비(楊貴妃)에게 빠지게 되었다.
치세 말기에
현종은 그녀에게 완전히 미혹되었고
양귀비의 친인척들을 무더기로 요직에 등용시켰다.
이들 친인척 중 한 명으로 양귀비의 6촌오빠인 양국충(楊國忠)은
급부상하여 그 권세가 재상인 이임보와 겨룰 정도가 되었고,
752년 이임보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양국충과 안녹산 사이에는
이미 상당한 갈등이 형성되어 있었다.
궁중 내의 후원자였던 이임보가 죽고
또 양국충이 노골적인 적대감정을 드러내자,
안녹산은 다가올 무력대결에 대비하여
그의 지역기반과 지지세력을 다지기 시작했다.
안녹산은
마침내 755년말 기병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의 군대는
동북의 여러 성(省)들을 신속하게 침공했고
756년 여름에는 장안을 향해 진격했다.
현종은 소수의 궁중 대신 몇 명과 양귀비,
그리고 소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양국충 가문의 세력 기반인 쓰촨[四川]으로 피난을 떠났다.
현종의 피난 일행이
마외(馬嵬)에 도착하자
수행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양국충을 살해했고,
현종은 반란군의 강요에 못이겨
양귀비를 처형시켰다(안사의 난).
바로 그 직후에 장안의 서쪽인 링우[靈武]에 따로 피신했던 황태자가 황위에 등극하니
이가 바로 숙종이다.
황태자의 등극 소식을 얼마 뒤에 들은 현종은
그에 동의하고 숙종을 위해 공식적으로 양위했다.
현종은 은퇴하여 762년에 죽었다.
현종의 치세는 정치적 실패와 개인적 비극으로 끝났지만,
내부안정·선정(善政)·번영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실제적인 발전이 이루어진 시대였다.
그후 10년 동안은
현종 시대의 자부심은 사라지고
시대에 대한 반성, 공직으로부터의 사퇴,
사회와 정치에 대한 새로운 비판정신 등이 일어나게 되었다.